해신 게시판에서 퍼옵니다.
KBS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천추태후와 거란황제의 비밀회동, 검술시합, 의남매 맺기 등은 다소 황당하게 느껴졌습니다.
- '제국의 아침' 이후 광종은 서기 975년에 죽었다. 그는 계속적으로 개혁을 추구하면서 고려를 명실상부한 황제국과 문벌귀족(신라계)의 제국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북방호족(고구려계)의 씨를 말려 놓았다. 그 피의 숙청과 공포정치의 와중에도 살아남은 황주의 황보씨 가문은 대목황후와 신정태후 황보씨의 비호 아래 용케도 살아남았었다.
- 광종이 죽자 태자 주가 경종으로 즉위했다. 애당초 황보씨 가문을 외가로 두고 있던 그의 시대가 오자 황보씨는 광종 때의 정적들을 처단하고자 하는 압력을 넣었다. 즉위 초반 힘이 없던 경종은 이를 허락했으나 워낙 호족들의 씨가 말라버린 탓에 일시적인 분풀이로 일단락되고 신라계의 뿌리를 뒤흔들지는 못했다.
- 황보씨 세력과 신라계가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던 경종시대. 당시 내명부를 장악하고 있던 신정황태후와 대목태후는 경종에게 새로운 황후를 맞아들이도록 강요한다. 이미 황후가 2명이나 있던 경종은 이를 반대했으나, 강대한 외척세력인 황보씨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 황보씨 가문에서는 드디어 16세의 어린 규수를 뽑아 경종의 세번째 황후로 입궐시키니 그녀가 바로 헌애황후, 즉 나중의 천추태후가 되는 인물이다. 원래부터 미모에 맞지 않게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헌애황후는 여성적인 배우자를 원했던 경종의 총애를 받지는 못하였고, 따라서 경종의 유일한 아들을 낳아도 언제나 외로움속에 지내야만 했다.
- 권력구도에 민감했던 신라계는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신성황태후의 아들이자 대목황후의 오라버니였던 대종 욱의 아들인 왕치에게 접근했다. 왕치는 어려서부터 신라계의 거두인 최지몽과 최승로를 어버이처럼 따르던 인물이었다. 황보씨 가문에서는 이를 탐탁치않게 여겼고 왕치는 바로 헌애황후 자신의 오빠이기도 했던 것이다.
- 경종은 아버지 광종의 공포정치를 직접 겪었기 때문에 화합의 정치를 소신껏 펴보고자 노력했으나, 당시 황보계와 신라계로 양분된 조정에서 그가 뜻을 펼 여지는 없었다. 좌절한 그는 점차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고,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 지아비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헌애황후는 장차 황제가 될 아들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나아가 그녀는 가문의 뜻을 이어받아 장차 대제국 고려의 구상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였다.
- 이 와중에 경종이 갑자기 급사한다. 워낙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여러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그 와중에 후계자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황보씨와 신라계의 힘겨루기가 본격화되었다. 경종의 유일한 아들인 헌애황후 소생의 왕송은 당시 겨우 2살이었다. 왕치가 비록 헌애황후 자신의 친오빠였지만 헌애황후를 비롯한 황보씨 가문에서는 그를 별로 탐탁치않게 여겼다. 그러나 명분상 신라계에 밀려 결국 그가 즉위하니 바로 고려 성종이다.
- 헌애황후는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이제 자신의 아들 송이 황제가 될 가망은 거의 없어보였다. 게다가 이제 황궁마저 떠나 사저로 돌아가야만 했다. 게다가 황보씨의 기둥이었던 신성황태후마저 대목황태후에 이어 유명을 달리하자 황보씨 가문 자체가 몰락의 위기에 처했다. 결국 헌애황후는 아들 송의 손을 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황궁을 떠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돌아오리라...돌아오리라...돌아와 대제국 고려를 내손으로 이룩하리라. 이제 황보씨 가문, 나아가 고구려의 뜻을 이어받은 고려의 기상을 일으킬 임무는 그녀의 양 어깨에 달려있던 것이었다.
- 성종이 즉위하자 조정은 신라계가 완전히 장악했다. 특히 원로 최지몽의 진두지휘 아래 최승로 등이 '시무 28조' 등을 올려 고려의 유교화, 즉 '중국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미 광종대에 자주적인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어 이제 고려는 고구려보다는 중국에 아부하던 신라의 복사판으로 가는 듯 했다. 이에 부응하여 성종은 스스로 황제로 군림하기를 거부했으며 고려의 위상은 추락하고 백성들과 지사들은 이를 분개했다.
- 비록 이제 야인이었지만 헌애황후도 이를 매우 분개했다. 여걸이던 그녀의 주변에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인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중에 김치양이란 인물도 있었다. 이미 생과부였던 헌애황후는 젊고 매력적인 그의 지략과 지혜에 반하여 점차 연인관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헌애황후는 아직도 20대의 몸이었고 당시에는 재혼이 자연스러운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 이제 헌애황후는 자신의 거처인 고향 황주의 천추궁을 중심으로 단군의 제사를 지내며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할 것을 맹세한다. 천추궁은 고려의 기상을 꿈꾸던 이들의 새로운 반조정세력의 중심으로 급속히 부상했다.
- 비록 친누이였지만 성종의 귀에 들리는 이러한 소문들은 황제 자신으로서는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더우기 아직도 후사 소식이 들리지 않는 성종 자신으로서는 헌애황후의 그늘에서 자라고 있는 왕송의 존재가 늘 걸리는 것이었다. 이윽고 헌애황후는 마침 김치양과의 재혼문제로 오빠인 성종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오는 오빠의 대답은 차가웠다.
" 누이여 그대는 나를 왜 이리 힘들게 하는가? 이제 고려는 유학의 나라니라.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할 그대가 스스로의 정숙함을 포기하면 이 나라의 기강이 어찌 되겠는가? 절대로 윤허할 수 없노라."
" 오라버니 고려가 어떻게 세워진 나라오이까?"
" 삼한을 통일하고 태조께서 정의롭게 세우신 나라가 아니냐?"
"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이옵니다. 중국의 아이가 아니란 말이옵니다. 고려에는 고려의 풍습이 있고 그것은 배달겨레의 전통이옵니다. 이는 태조께서도 강조하신 바가 아니옵니까?"
"..."
이 사건으로 헌애황후와 성종은 혈육임에도 피차 양보할 수 없는 정적관계로 돌변하고 만다.
- 이 때 또 하나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졌다. 황실 종친이던 안종 욱이 같은 황실의 처녀를 범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필 헌애황후 자신의 동생이었던 것이다. 불같이 노한 헌애황후는 신라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던 안종의 처벌을 요구했다. 이를 기화로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신라계에 대한 대반격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헌애황후의 장자방이자 애인이었던 김치양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황한 신라계는 안종의 귀양으로 가까스로 사태를 마무리지었고 사생아는 성종의 손에서 양육되기에 이르니 그가 바로 대량원군이다. 일단 헌애황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 한편, 고려의 노골적인 중국화는 스스로 국제적인 화를 자초하고 있었다. 고려의 친중국정책에 불만을 품고 거란제국이 대대적으로 고려를 침략한 것이었다. 바로 고려와 거란의 1차 전쟁이었다. 그러나 발해황족 출신인 대도수의 선방으로 별다른 소득이 없자 서희의 변설로 명목상 체면을 차리고 일단 물러갔다. 이 와중에도 썩어빠진 신라계는 땅을 떼어주자는 망언을 일삼았다.
- 거란의 침략은 고려인들의 자성을 일깨웠고 나아가 신라계의 세력을 크게 위축시켰다. 바야흐로 헌애황후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때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김치양은 이때 헌애황후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비록 친오빠이지만 종사의 안녕을 위해선 제거할 수밖에 없다고...그녀는 오랜 고뇌끝에 독을 탄 꿀을 성종에게 보내고 이를 먹은 성종은 갑자기 병에 걸려 후사도 결정짓지 못한채 숨을 거둔다. 이 소식을 들은 헌애황후는 남모를 눈물을 흘린다.
- 이때에 맞춰 발해계와 북방세력들을 결집시킨 헌애황후는 직접 갑주를 입고 말에 올라 황도 개경으로 향한다. 그리고 순식간에 조정을 장악하고 자신의 아들 왕송을 다음 황제로 즉위시키니 이가 바로 목종이다. 바야흐로 헌애황후, 즉 고려시대 최고의 여걸 천추태후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 목종이 즉위하자 헌애황후는 황주의 천추궁을 황도 개경으로 옮겨와 '천추전'이라 칭하며 사실상의 여황제가 되었다. 그녀가 바로 천추태후로 새로 태어난 것이었다. 이미 그녀는 아들 목종이 황제감이 아니라는 점은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야망을 펼치기 위해 아들마저도 이용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 이어 신라계는 된서리를 맞았다. 조정의 주류를 이루었던 그들은 천추태후의 시퍼런 서슬아래 반항하는 자들은 목이 떨어져 나갔고, 항복한 이들은 가차없이 관직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도망쳤다. 살아남은 이들은 자연 그들의 정신적 고향인 경주 일대로 도망가 불만세력으로 다시 때를 기다린다. 신라계가 물러간 조정은 일찌기 천추태후를 보필했던 북방계 인물들로 채워지고 이어지는 여러 개혁 조치로 고려는 황제국의 위상을 회복한다.
-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항상 국제관계를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천추태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중국에의 명목상의 조공마저도 폐기한다. 황제국이 황제국에 조공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이어 중국의 항의가 들어왔으나 강대한 고려국의 기세앞에 단지 허풍에 불과할 뿐이었다.
- 다음에는 거란과의 관계가 문제였다. 당시 거란제국의 성종황제는 이같은 천추태후의 반중국정책에 적지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애당초 고려를 침략한 이유도 친중국화때문이었는데 이 30대의 고려여인이 실권자가 되더니 이전과는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란황제는 천추태후에게 역사상 기록에서 완전히 지워진 비밀회동을 제의했다.
- 천추태후는 이를 쾌히 승낙했고 양국의 정상은 국경에서 만났다. 거란황제는 위풍당당한 고려의 여황제 앞에 놀라움과 동시에 증가된 호기심을 표출하기에 주저치 않았다. 천추태후를 시험에 볼 요량으로 직접 천추태후와의 검술시합을 제의했고 일찌기 무예에 능통했던 천추태후도 이를 쾌히 승낙했다. 시종했던 김치양이 이를 반대했으나 거란황제는 천추태후의 출중한 무예에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는 무승부였으나 성종은 감탄하며 그녀에게 말하기를
" 그대가 과연 고려의 여황제요. 그대가 있는 고려를 어찌 감히 짐이 도모하기를 바라겠소...!"
이들 제국의 통치자들은 과거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논하며 서로간의 공통점을 확인하며 공동으로 장차 때가 오면 중국을 도모하기로 뜻을 모은다. 이후 이들은 의남매를 맺었고 천추태후가 권좌에 있는 동안 역사에도 보이듯이 거란의 침략은 없었다.
- 어느 정도 정세가 안정되자 천추태후는 김치양에게 이제 정식으로 혼인하여 부부로 살자고 권했다. 그러나 김치양은 이는 호시탐탐 반격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신라계에게 빌미를 줄 수 있다며 거절했다. 천하를 주무르기 전에 한 여인으로 돌아와있던 천추태후는 일찍 혼인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도 김치양의 뜻에 따랐다.
- 오랫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신라계는 비밀리에 한창 성장하고 있던 대량원군에게 접근해 몰래 안종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천추태후에 원한을 품고 있던 안종은 대량원군에게 그녀는 이모가 아니라 원수라는 점을 각인시키고 반드시 황제가 되어 복수해야 한다고 각인시켰다. 그러나 이 사실은 김치양에 의해 발각되고 안종은 암살당한다. 천추태후는 비록 대량원군의 이모였지만 신라계에 뿌리를 두고 있던 그는 우환거리라며 머리를 깎아 지방의 사찰로 쫓아낸다.
-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천추태후 자신의 아들은 황제 목종이었다. 마치 아버지 경종의 전철을 똑같이 밟아나가듯이 자라나면서 천추태후에게 반항적이더니 이윽고 유행간이라는 인물과 동성애를 즐기게 되는 것이었다. 강한 철의 여인 천추태후는 이같은 아들의 타락에 가슴아파했으나 고려의 장래를 위해서는 이같은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그녀는 측근인 발해인 유충정을 목종에게 붙여 감시케하는 한편, 자신과 김치양 사이에서 난 아들을 다음의 후사로 올리고자 하였다.
- 그때 천추태후가 집무를 보던 천추전에서 대형 화재가 났으나 천추태후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조사 결과 대량원군을 보위에 올리려는 역모 사건이었다. 대노한 천추태후는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동시에 화근인 대량원군을 제거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는 골육상쟁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었기에 비밀리에 자객을 보내 없애고자 했다. 그러나 여러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돌아가자 천추태후는 하늘의 뜻이 다른 곳에 있는게 아닌가하고 우러러 탄식한다. 대량원군은 이후 비밀리에 신라계에 의해 경주로 옮겨진다.
- 위기의식을 느낀 신라계는 최후의 비상수단을 동원한다. 북방의 경계를 맡고 있던 강조 장군을 움직인 것이었다. 그들은 강조에게 비밀리에 서신을 보내 목종이 승하했으니 속히 군사를 일으켜 황도로 와 질서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름대로 권력에 욕심이 있었던 강조는 대군을 몰아 황도로 향했으나 중간에 목종이 건재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반역을 한 것임을 깨달았다.
- 그러나 무시무시한 천추태후에게 처참한 죽음을 당하느니 이참에 고려를 뒤엎겠다는 결정을 내려 이판사판으로 개경을 향해 돌진한다. 그에게 다행스럽게도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더불어 황도 인근의 사찰로 휴양을 나가 있었다. 강조군의 기습에 황도는 어처구니없이 떨어지고 목종은 포로로 잡힌다. 급보를 받은 천추태후는 속히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려 했으나 황보 일가의 배신으로 이마저도 실패하고 역시 강조의 포로가 된다. 같은 시각, 신라계는 대량원군을 필두로 빠르게 황도를 향하여 올라오고 있었다.
- 피의 살육은 다시 반복된다. 강조는 천추태후가 등용했던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고, 목종과 천추태후는 경주로 압송된다. 천추태후에 대해 피맺힌 한이 있던 대량원군은 현종으로 즉위하자마자 천추태후를 죽이고자 하나 그도 거물인 천추태후를 마음대로 죽일수는 없었다. 대신 그의 아들 폐주 목종이 먼저 강조의 수하에게 죽고, 이어 평생의 연인 김치양마저 천추태후의 눈앞에서 주살된다.
- 비운의 여황제 천추태후...강조의 반란으로 순식간에 그녀의 천하는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할 그녀는 아니었다. 최후의 대반전이 다시 그녀를 향해 다가오기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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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성종은 크게 노하며 즉각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쳐들어왔다. 이미 강조의 군대가 국경지대를 비운 상태여서 거란군은 파죽지세로 순식간에 황도 개경에 육박하고 있었다. 즉위하자마자 봉변을 당한 현종과 신라계는 다시 남쪽으로 도망치기에 바빴고, 거란군은 강조군과 교전하여 강조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 그러나 성종은 천추태후를 인질로 협상을 제의해오는 고려측과 강화조약을 맺을 수밖에는 없었다. 강화조건은 천추태후를 고향인 황주로 보내고 차후 그녀의 신변을 위협하는 행위가 발생할 시 거란의 문책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신라계와 현종은 천추태후를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 분통을 터뜨렸으나, 어쩔수 없이 천추태후를 황보씨의 근거지인 황주로 보낼수밖에 없었다.
- 천신만고 끝에 황주로 돌아온 천추태후는 철천지 원수인 현종과 신라계를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황주에 다시 천추전을 재건하고 급속히 황보씨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 이 때 다시 거란에서 황제의 밀서가 도착했다. 만약 천추태후가 거란으로 망명하거나 군사를 일으킨다면 거란이 총력을 기울여 돕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추태후는 고려의 일에 외세의 간섭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서면으로 자신을 구해준 성종에 대해 감사를 표했으나 이 일만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 대신 천추태후는 당시 거란의 침입으로 어수선한 무장들의 분위기를 이용했다. 무신들은 신라계의 무능으로 두번이나 거란에게 국토가 유린되자 현종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천추태후는 자신만이 대안이라고 장군들을 설득해 이윽고 상장군 김훈과 최질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원조 무신정권이었다.
- 그러나 막상 정권을 쥔 김훈과 최질은 천추태후를 모셔오기로 한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권세만을 강조해 순식간에 무장들의 인심을 잃었다. 이 틈을 노려 폐위위기에 직면했던 현종은 반격에 나서 이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기화로 신라계는 모든 무신 고위직을 자신들의 파벌로 바꿔 근본적으로 군부 쿠데타의 재발을 방지했다.
- 또 다시 기회를 잃은 천추태후는 황주를 완전히 자신의 왕국으로 만드는 데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곳은 고려의 관리가 마음대로 들어올수도 없었고, 고려 조정은 거란의 눈치를 살피느라 감히 이를 막지도 못했다. 그러나 더 이상 내부를 이용해 정권을 뒤엎을 가망이 안보이자 천추태후는 결국 거란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역사의 겉으로 나타나는 거란의 침략의도는 고려와의 국경충돌이었지만 기실은 천추태후가 그 배후에 있었던 것이었다.
- 이윽고 제 3차 고려-거란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강감찬 장군의 활약으로 거란군은 그만 궤멸되고 만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현종은 아예 황주를 도모해 천추태후의 목을 베어버리겠노라고 장담한다. 그러나 의외로 강감찬을 비롯한 많은 신료들이 이를 반대한다. 천추태후를 자극해 또다시 화를 자초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현종은 한동안 다시 황주의 천추태후를 내버려둘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10년 세월이 흘러갔다.
- 천추태후는 목종과 김치양의 사당을 짓고 매일 그 앞에서 복수를 다짐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천운은 다하고 있었다. 더 이상 불구대천의 원수들을 상대할 여력은 없어보였고 그녀의 추종자들 중에서도 이탈자와 배신자들이 속출했다. 마지막으로 66세의 그녀는 거란으로 망명해 성종의 도움을 받아 원수들을 토멸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조정에서는 은밀히 독약을 그녀의 탕약에 넣어 결국 죽이는데에 성공했다. 그녀가 죽자 황주 세력들도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고려의 내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현종은 천추태후가 죽은 지 2년 뒤에 죽는다.
- 천추태후. 이렇게 고려의 자존심과 배달겨레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 그녀였지만 결국 역사의 패자가 되어 이후 유학자들이 쓴 역사책에서는 김치양 등과 더불어 희대의 악인으로 남게 된다. 또한 그녀의 이름은 역사의 중대한 고비에서 철저하게 지워졌다. 반면 현종의 자손들은 계속 고려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게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