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통 루이14세(Louis XIV, 1638.9.5~1715.9.1) 하면 장엄한 것을 좋아했고 화려했으며 패션의 선두주자이자 그 거대하고도 훌륭한 건축물인 베르사이유 궁전을 만들어 태양왕(太陽王)이란 별칭까지 붙은 프랑스의 국왕이라는 상식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이 국왕의 화려함 덕택에 프랑스어는 유럽의 상류언어로 자리잡기까지 하였다.
잘 알려진 이 엄청난 수식어를 갖는 루이14세 정작 자신은 그다지 즐거운 삶의 연속은 아니었다. 루이14세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이상한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태어났다.
루이14세의 부친은 루이13세(Louis XIII, 1601.9.27~1643.5.14)로 양주의 한 종류인 루이13세의 실질적 모델이기도 하다.
루이13세는 이웃 스페인 왕 펠리페3세의 딸이었던 안나(1601~1666)와 결혼했으나 이상하게도 23년 동안이나 자식을 못 두다가 1638년 루이14세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 장남의 탄생을 두고 왕은 엄청 고뇌하고 의심을 한 모양이다.
즉 루이13세는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그러다가 왕비가 결혼 23년만에 아들을 낳자 의심하는 건 인간으로서 남자로서 당연지사였다.
그러다가 1640년 왕비가 다시 차남인 필립(Philippe, 1640~1701)을 낳자 비로소 루이13세는 엄청 기뻐했는데 장남이 태어난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한다. 아마 의심이 풀린 모양이다.
이 루이13세 가족을 놓고 알렉상드르 뒤마란 작가는 유명한 '삼총사'랑 '철가면'인가 하는 사상이 심히 의심스러운 작품들을 남겼는데 아마도 후대의 프랑스인들은 이 루이13세 가족에 대해 약간의 의문(?)이 품고 있었지 않은가 생각된다. '아니 땐 굴뚝에 왠 연기'란 식으로...
하여간 루이14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태어났고 부친이 5살 때 사망함에 따라 이어서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왕들이 행했던 연례적 행사처럼 이웃 스페인의 왕 펠리페4세의 딸이었던 마리 테레즈(Marie-Therese, 1638~1683)와 1160년 결혼한다. 펠리페4세는 외숙부인데 모친과는 배다른 형제로 루이14세는 사촌이랑 결혼한 것이다. 이 2대에 걸친 스페인 공주와의 결혼은 훗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불씨가 된다.
루이14세는 여느 군주처럼 사회분위기에 따라 정부(情婦)를 엄청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생활에서도 여전히 왕비인 마리 테레즈를 대단히 아꼈던 모양이다. 왕비는 상상외로 그다지 남편의 정부에 대해 심한 질투나 투기 등의 일반적 여자 히스테리를 표출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루이14세는 항상 왕비를 존경한다고 말했다는데 아마 남편의 바람벽을 초월한 대단한 부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왕비가 1683년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루이14세는 혼돈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도 사랑했던 부인인데 죽어버리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루이14세는 왕비 마리 테레즈와 6명의 자녀(3남3녀)를 두지만 모두 요절하고 장남이자 후계자인 루이(Louis, 1661~1711)만이 생존하는데 2번의 결혼을 통해 세 아들을 두고 부친 루이14세 보다 먼저 사망하고 만다.
이 세 손자 중 장손인 루이(Louis, 1682~1712, Duke of Burgundy)는 부친이 죽은 다음해에 어린 아들 한 명 달랑 남겨놓고 죽고 둘째 손자 펠리페는 스페인왕위계승전쟁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과 피 터지게 싸워 겨우 스페인 왕으로 앉혀서 마드리드로 보낸다. 막내손자인 베리 공작인 샤를은 1714년 후사 없이 사망함으로서 늙어가는 루이14세에게는 후계자란 달랑 증손자인 루이 훗날의 루이15세(Louis XV, 1710.2.15~1774.5.10) 뿐 아무도 없게 된 처지에 놓인다.
루이14세는 당시의 유아 사망률의 높은 확률에 따라 자신의 직계가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1714년 베리 공작의 사망 당시 루이15세는 단지 4살이었고 단 하나 남은 손자 펠리페는 스페인왕관을 차지해서 결코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갖지 못하도록 국제규약을 해 놓은 터라 아차하면 자신의 대가 단절될 판이었다. 그러자 루이14세는 귀천상혼(貴賤相婚)의 규칙을 깨뜨려야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귀천상혼(貴賤相婚)이란 신분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이 결혼하면 그 자손들은 높은 신분을 상속받지 못하는 일종의 관습법을 말하는데 이 법 때문에 신분 낮은 여자의 자손들은 아버지의 고귀함을 물려받지 못한다.
루이14세는 왕비와의 자손이 거의 남지 않게 되자 자신의 수많은 정부들이 낳아준 자손들에게 왕위계승권리를 손에 쥐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 당시의 귀천상혼 전통에 위반되는 사항이었다.
루이14세에게 자식을 낳아준 정부(情婦)는 대략 7명 정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총애한 여성이 바로 Athenais de Rochechouart란 여성으로 Gabriel de Rochechouart란 자의 딸로 왕이 몽마르뜨 공작(Duc de Mortemart)에 봉해주었다. 그녀는 왕의 사생아(私生兒)로 8명을 낳았는데 왕은 살아남은 자식 중 큰아들인 루이 오귀스트(Louis Auguste, 1670~1736)를 총애하여 멘과 오말의 공작(Duc de Maine et d'Aumale)으로 봉해서 숨겨진 후계자로 염두에 두게 된다.
즉 증손자 루이15세가 유아로 사망할 경우 친동생인 필립과 그의 자손들인 오를레앙 공작들에게 왕관이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사생아에게 왕관이 돌아가도록 조정하는 것이었다.
결국 루이14세는 안심이 되지 않자 이 정부(情婦)와 비밀리 결혼도 하여 주교들에게 이 결혼사실에 관한 기록까지 남겨 두도록 하는데 이 정부는 아무리 왕이 노력해도 왕족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귀천상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루이14세의 후계권에 대해 당시의 도에도 지나친 처신을 하게 되자 주변은 곧 국왕파와 오를레앙공파로 나뉘어 질 수 밖에 없었다. 즉 순리대로라면 루이15세 이후 단절되면 바로 오를레앙공 가문이 차지하게 되는 것을 왕이 무리하게 관습법인 귀천상혼을 무시하면서 사생아출신의 멘 공작에게 넘기려 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외면적으로 찬란하고도 화려했던 루이14세는 가정사적으로 너무 오래 살아서 부인과 손자들까지 모두 저 세상으로 보낸 후 달랑 남은 증손자 하나 때문에 문제가 나타나 나라 전체가 혼란해 지는 것이었다.
루이14세는 자신의 많은 서자와 서녀들을 계승권을 가지는 지체 높은 왕족들과 강제로 결혼시키는 등의 일련의 사전준비를 통해, 혹시나 모를 경우를 대비해 가공할 만한 단절되는 불행을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결혼풍습상 아무리 국왕의 사생아라도 계승권을 갖는 왕족과는 결혼하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태양왕은 그것을 깨고 선례를 남긴 것이다.
루이14세에게 생모와 알려진 사생아는 대략 17명인데 그 중 12명은 어른이 되었지만 자손을 남긴 사람은 6명이었다. 적서(嫡庶)를 모두 합한 23명의 자녀 중 후손이 남은 자손은 8명이란 결론이다.
1715년 루이14세가 사망할 당시 왕비가 남긴 직계가족은 스페인 왕이 된 손자 펠리페5세 가족을 제외하고는 루이15세 뿐이었다고 한다.
루이14세의 며느리인 마리 아나 크리스티나(Mary Anne Christine of Bavaria, 1660~1690)와 손자며느리인 마리 아델레이드(Marie Adelaide de Savoie, 1685~1712)조차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려서 이른바 루이15세는 천애의 고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77세로 생을 마감한 루이14세는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그 화려하고도 장엄했으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갔을 것 같아 보이지만, 왕의 생전은 가족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고 남겨진 상속자는 5세의 어린 고아인 증손자 뿐이었으며 왕위계승권을 두고 다투는 조정의 귀족들과 관료들 그리고 스페인계승전쟁을 통해 쌓여진 주변국들의 프랑스에 대한 적대적 눈초리와 불신에 시달려야하는 삼중고를 안고 있었던 태양왕의 불행과 그에 따른 고뇌는 대단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