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독교 상담 분야의 주된 훈련은 임상목회교육(CPE, Clinical Pastoral Education) 운동방침에 의해서 실시되고 있다. 많은 종합병원들은 신중하게 작성한 커리큘럼과 자격있는 교수진을 갖추고 임상목회교육의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으며, 많은 신학교에서도 졸업의 필수 학점으로 임상목회 훈련 과정을 수료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임상목회교육의 전문지로는 Journal of Pastoral Care(목양지) 또는 Journal of Pastoral Counselign(목회상담지)등이 있는데, 상담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 잡지들을 애독하고 있다. 학교나 병원에서 제공되는 임상목회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상담훈련은 상담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CPE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 상담대화록을 소개하고, 여기에 나타나는 몇가지 문제점을 제기해 보고자 한다.
1. 살아있는 인간문헌(Living Human Documents)
CPE 운동에 영향을 준 사람은 많지만 선구자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켈러(WiIliam S. Keller), 캐봇(Richard C. Cabot), 그리고 보이슨(Anton Boisen)을 들 수 있다. 켈러와 캐봇은 의사로서 그리고 평신도로서 병원과 신학교를 연결시켜 가면서 CPE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보이슨은 장로교 목사로서 우스터 주립병원의 원목으로서 이 병원의 원장이었던 브라이언과 제휴해서 CPE를 발전시켰다.
CPE를 신학교 교육으로 보편화시키는데에는 보이슨의 역할이 매우 컸다. 즉, 실제로 신학생들을 병원, 그것도 정신과 병원으로 불러서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의 의미를 통한 치유와 지지의 경험을 최초로 갖게한 사람은 보이슨이었다.
보이슨은 "Religious Education"(종교교육)이라는 기독교 잡지에 "임상을 통한 신학교육" (Theological Education Via the Clinic)이란 제목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싣고 있다.
정신과 병원의 원목으로서 나는 병원 내의 의사들이 채택하고 있는 교육방식에 늘 깊은 인상을 받곤 하였다. 수련의들이 의과 수업의 일환으로, 선배의사들의 지도 하에 의료를 배우기 위하여 병원으로 오는 것을, 나는 깊은 관심으로 지켜보곤 하였다. 수련의들과 그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낯선 실제 질환을 앞에 두고 함께 치료를 할 때, 그 교육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중요한 것인가를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확신이 내 마음 속에서 점점 굳어졌다. 신학생들이 서적과 씨름하는 시간을 좀 줄이고, 우리 병원과 같은 병원에서 '인간 문헌들'(human documents)과 더불어 지내는 시간을 좀 더 많이 가지는 것이 훨씬 좋으리라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을 돌보는 의사들에게도 임상적 경험이 그렇게도 중요한 데, 영혼을 치료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임상적 경험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일이 아닌가.
여기에서 보이슨은 '인간 문헌'이라고 하지만, 후에는 '살아있는'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살아있는 인간 문헌'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이제 보편적으로 널리 쓰이는 말이 되었다. 그럼 이 말이 뜻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1924년부터 메사츄새츠 주 우스터에 있던 주립병원에서 원목으로 일하게 된 보이슨은 1925년 여름 4명의 신학생들을 병원에서 환자들과 생활하면서 직접 그들이 임상경험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들은 하루에 병원에서 10시간씩 환자들을 돌보면서 경험을 쌓았다. 따라서 목회임상교육의 첫 출발은 1925년 여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이듬 해 1926년 보이슨은 최초로 시카고 신학교(Chicago Theological Seminary) 강단에서, 오늘날로 말하면 '목회임상교육'이란 과목을 가르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때를 보이슨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강의실에서 케봇 박사의 세미나 방식을 본따서 일종의 사례 중심의 토의 교육을 하였다. 우리는 주로 우스터 병원에서 채록된 사례 기록들을 복사하여 그것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는 미리 질문지와 참고될 사항들을 돌렸다. 필요한 자료들을 준비하는 일은 참으로 복잡한 일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홀트 교수와 사회윤리를 가르치는 세미나를 열기도 하였고, 맥기퍼트 교수의 조직신학 시간에도 공동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런 강의들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질문들을 불러 일으켰고, 새로운 리서치 분야를 열어주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보이슨이 처음으로 신학교육에서 의과대학 수업을 본따 사례를 중심으로 목회에 대한 공부를 시켰음을 볼 수 있고, 이때 사용된 텍스트가 성서나 교회사 혹은 조직신학 책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담겨진 문헌들"이었음을 보게된다. 즉 신학의 교과서에 새로운 질의 교과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물론, 신학교에서 사례를 중심으로 교육을 하거나 연구하는 것이 결코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기독교교육이나 기독교사회사업에서 사례를 통한 연구나 교육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 잘 알려진대로 법학교육이 바로 이 사례 교육을 이미 선도하였었다. 나아가 일반심리학 특히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사례를 통하여 그 이론과 실제를 적나라하게 입증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보이슨이 '살아있는 인간문헌'(living human documents)을 사례로서 신학교에서 사용하였을 때 그것은 바로 신학적 방법론 상의 함축적 의미 때문에 그 중요성을 띄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보이슨이 이때 마음 속에 두고 있었던 신학연구 방법론은 실제 사례가 한낱 기존 이론을 검증하거나 적용하기 위한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사례 자체가 신학의 텍스트요 거기로부터 새로운 신학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실천신학 방법론의 일대 변혁을 그 속에 태동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것은 크게 '임상'이라는 말과 '신학'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를 합하여 임상신학(clinical theology)의 태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목회임상: '임상'으로서
임상(clinic)이란 단어는 침대를 가리키는 희랍어 'klinikos'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와 관련하여 라틴어의 'clinicus'는 환자가 누워있는 침대 곁에서 치료를 하는 의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우리말에서도 흔히 특수한 병원이나 의원을 '클리닉'이라 이름하듯, 그 어원 자체로도 의료적인 것이요 의학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서구의 역사를 독특한 철학적 시각으로 새롭게 읽어낸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는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서구 사회에서도 비로소 임상과 임상의학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임상이란 단순히 환자를 다루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례, 실제 환자, 실제 질환을 가지고 체계적이며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 이전의 서구 의학은 환자와 의사와의 직접적인 만남에서 개별적인 지식과 경험에서 치료하는 일만이 있었다. 따라서 목회자가 도제 형식으로 목회자 수업을 받듯이, 의사는 도제 형식으로 의사 수업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병원에서 먹고 자면서, 수련의들이 선배의사를 따라 다니면서 진료행위를 배우는 것은 르네상스 시대때부터 자주 목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이 되면서, 비로소 질병을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질병을 합리적으로 분석하면서, 그 질병을 일정한 방법으로 구조화하는 형태의 실증적인 의료행위가 시작되었고 그러면서 소위 우리가 말하는 임상의학과 진료소(clinic)가 탄생한 것이다.
이런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중요한 것은 "독특한 경험과 분석방법, 교육제도를 가지고 등장하여 인간의 몸을 보다 정교하고 일관성있게" 본다는 것, 병원의 조직과 운영이 새로운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것 등도 있지만, 우리에게 더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종류의 질병은 의학에 교훈적인 텍스트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환자들은 말하자면 의사들이 읽고 해석해야 하는 텍스트를 지니고 움직이고 있는 운반자가 되는 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텍스트는 매우 복잡하고 때로는 뒤엉켜있어 매우 해독하기 힘든 텍스트인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임상이 텍스트를 만드는 과정이요, 임상교육이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을 통하여 환자와 질환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의과 수업이 진행된다고 할 때, 우리는 이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즉 환자와 질환이 의료에서는 신학으로 말하면 지식의 대상이요 지식의 산출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임상에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나 괴로운 삶의 역정이 임상을 통해 텍스트가 되고 그것이 신학이나 목회의 텍스트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신학의 대상과 신학적 지식의 산출지는 하나님이요, 성서와 역사와 기독교 전통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환자의 인생 이야기가 신학의 텍스트요 신학적 지식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임상교육, 나아가 목회임상교육이 가지는 독특한 학문적 탐구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의료에서의 임상이란 단순히 기존의 이론을 적용하거나 실험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임상을 통하여 의학자는 기존 이론의 진위를 판명하기도 하고, 전혀 새로운 이론이나 패러다임을 발견하기도 한다. 따라서 임상은 적용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의학적 지식의 필수 부분이다. 또는 이론적으로는 옳은 의료지식이 임상을 통해서는 부작용이나 불능상태로 말미암아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음도 증명되어 그 지식을 사장시켜버리는 것이 좋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목회임상에서 임상의 의미는 단순히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적 지식'을 현장이나 교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기왕의 신학적 지식이 과연 현장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사용할 때 어떤 작용/부작용이 있는지,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실험할 뿐만 아니라, 그 실제 목회를 통하여 어떤 새로운 신학적 내용이나 지식이 필요로 되는지를 살펴보는 신학적 방법상의 혹은 신학적 과정상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생각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과거에는 이것이 목회자들의 현장 경험에서 암묵적으로 이뤄져왔지만, 이제는 이것이 강의 세팅에서 체계적으로 또한 학문적으로 이뤄진다는 데에 확실한 의미가 있었다.
보이슨이 1926년 처음으로 강의시간에 텍스트로 사용한 것은 주로 임상환자들의 '인생이야기' 즉 그들의 병력과 신앙생활의 경력 그리고 실제 생활 속의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목회임상의 사례 연구에 있어서 큰 변화는 후에 러셀 딕스(Russell Dicks)가 축어록 혹은 대화록이라 이름할 수 있는 'verbatim' 즉 목회자와 환자 사이에 실제적으로 일어났던 대화들을 기록하여 그것을 또한 텍스트로 사용하면서 이루어졌다(대화록에 대한 설명과 예는 뒷부분에 포함). 그리하여 결국 생애 전반적인 면을 다루는 보이슨 식의 살아있는 인간문헌이든, 단기간의 혹은 스냅식의 목회자/환자 간의 임상대화이든, 그것이 중요한 신학적 텍스트로서 신학 수업의 일환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데에 신학적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3. 목회임상: '신학'으로서
그러면, 목회임상 속에서 환자들의 생애 이야기나, 목회자와 환자의 대화 및 상호관계가 텍스트로서 신학적 작업 속에 떠오른다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는가?
1950년 한 모임에서 보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처음 시작할 때 이 운동은 어떤 새로운 복음을 외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는 기존의 신학적 문제들을 어떤 새로운 방법을 통하여 접근하는 새로운 신학 교과목을 신설하고자 하는 의도도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교회의 가장 중심되는 사명, 즉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새롭게 주의를 기울이려고 노력하였을 따름이며, 신학의 가장 중심되는 문제, 즉 죄와 구원의 문제에 새로운 주의를 기울이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다만 새로운 것이 있다면 이제는 책만 가지고 공부하지 말고, 살아있는 인간 문헌(living human documents)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영적인 생명과 사망이라는 문제를 필사적으로 안고 씨름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이슨이 표명하고 있는 '신학'이 죄와 구원의 도리라는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보이슨이 목회임상을 통하여 '새로운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죄와 구원의 형식적 정의나 원리가 아니라, 실제적인 정의와 생활을 의미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형식적인 교리체계가 아니라 실질적인 신앙적 체험을 얼마나 교리체계가 정확히 설명하거나 이해하느냐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일례를 들어 구원이라 하였을 경우, 그것이 구체적이며 실제적으로 실생활에서 어떤 내용과 개념들을, 나아가 어떤 실질적인 힘이나 생활의 변화같은 것들을 동반하는지에 일차적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보이슨은 '새로운 주의'라고 명명하였던 것이다.
보이슨이 말하는 신학의 의미를, 1950년에 유니온 신학교 교수였던 데이빗 로버츠(David Roberts)는 '구원에 대한 정적인 견해'와 '구원에 대한 동적인 견해'라는 대비된 영어를 사용하므로서 명료화하고 있다. 즉, 정적인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앞에서의 자격(status)의 변화이고, 동적인 구원이란 실생활에서 구원받은 자로서 보여주는 실질적인 변화와 갈등 같은 것을 해결해 나가는 능력을 말한다.
실제로 이러한 보이슨의 신학적 생각은 힐트너의 목회신학이나 1980년대의 실천신학에 대한 재해석에 중요한 촉매제를 제공하는데, 예를 들면 돈 브라우닝의 수정된 상호연결방법--실존에서 질문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안에서도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방법론--도 여기에서 더욱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원을 설명하고 선포하는 것과 사람을 실제로 구원하는 것,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변화된 삶을 살게하는 것은 실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음을 실제 현장 목회자는 잘 경험한다. 구원받은 삶의 경우에는 단순히 구원의 도리만이 역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현장성과 실질적 구조가 그 못지 않게 역사하고 있음을 실제 사역자들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상목회교육은 이론에서 실천의 도식이 아니라, 실천에서 이론으로의 도식을 말하고 있다. '수술은 잘 끝났는데 환자가 죽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그렇다면 그 수술은 잘 끝낸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수술이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수술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목회임상교육은 참여로서의 신학이라 할 수 있겠다.
4. CPE에 대한 비판
CPE는 1950년대에 이미 거의 모든 개신교 신학교에서 주요 교과과정으로 등장하였다. 이것은 병원이나 요양소 같은 의료 기관을 주로 이용했고, 목회상담을 위한 훈련에서 의학, 정신병학, 정신치료적 기술에 크게 의존했다. CPE훈련은 목사와 신학생들이 그들 자신과 남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하는 수단으로서 큰 도움이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정신병원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훈련받는 신학생들은 정상적인 교구상황에서 정신질병이 없는 사람들을 돌보는 그들의 일과는 거의 관계없는, 비정상적 상황안에서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종종 비판을 받아왔지만, 학습을 위한 실험실로서, 병원, 감옥, 또는 정신병원은 짧은 시간안에 신학생들에게 많은 경험을 하게 할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되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목사들을 훈련시키는데 있어서 부정적인 요소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CPE의 심각한 문제는 목회상담을 목회적 돌봄의 우선적 과제라고 여기고 이에 몰두하는 것, 그리고 실습자들이 이 돌봄의 맥락에 대하여 충분히 사려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데 있다. CPE세팅에서, 목회에 대한 우선적인 모델은 종종 의사, 정신의, 심리전공의 사회복지사, 그리고 상담을 전공하며 제도안에서 활동하는 목사이다. CPE훈련을 받는 신학생들은 병원복도를 때로는 흰가운을 입고--실제로 외모나, 이념이나 사용하는 용어에 있어서 다른 건강 치료 전문가들과 구별되지 않는--다닌다. 그리고 신앙의 언어를 정신의학적 용어들로 대치해 버린다. 즉, 영혼의 돌봄에 대한 관심보다는 모든 문제를 심리학적 문제로 처리하는 것이다.
AAPC(American Association of Pastoral Counselor)와 APCE(Association for Clinical Pastoral Education) 회원의 대다수는 제도적 활동을 하는 상담 전문가이고, 윤리와 신학과 예배학에 대한 학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반감적인 태도를 보인다. 임상 프로그램을 실제적인 임상 세팅안에서 이끄는 CPE 감독자들은 목회적 돌봄의 전통적 훈련보다는, 목회의 효율성에 대한 세속적 기준, 상담기술, 정신요법적 훈련, 그리고 적절히 인정된 자격증에 대한 예민한 관심을 보인다. 물론 신학과 심리학의 관계에 대해 신중한 고려를 하는 돈 브라우닝, 씨워드 힐트너, 토마스 오든, 그리고 알버트 아웃틀러 등이 있지만, 많은 CPE감독자들은 이들의 글을 읽지 않는 것 같다. 따라서 CPE에서는 이제까지 심리학이 주로 말하는 일방적인 대화가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어반 홈즈의 주장을 소개해본다. 그에 따르면, CPE운동은: 1) 일대 일 상담 상황에 대한 선호, 예언자적 민감성의 결핍, 그리고 집단구조의 긍정적 효과에 대한 인식의 결여로 인하여 인간 인격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인식을 상실하고 있다. 2) 느낌과 감정에 대한 강조에서, 그리고 폭넓은 실제적 차원에서의 경험의 축척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이론적 구조에 대한 반감에서, 이것은 함축적으로 반지성적이라 할 수있다. 3) 그 정체성을 신학에 두기 보다는 심리학에 더 관계시킨다. 4) 목회상담을 목회의 주요기능으로 함으로 다른 기본적인 목회적 과제들을 소홀히 한다.
힐트너 역시 CPE는 기독교 상담 훈련의 근거가 되는 성경보다 오히려 개인적 경험에 주된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토마스 오든은 이러한 임상목회교육 운동의 치명적인 취약성을 지적함으로써 문제 의식을 일깨워주고 있다.
임상목회교육에서 핵심이 되는 요소는 개인적인 경험이지 신학적 지식은 아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미국의 목양운동은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실용주의적 경건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강조가 되는 것은 목자가 양떼들을 돌보는 것처럼 문제가 생기면 먼저 적절한 처리를 하고 그로 인한 관련사항들을 경험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 타당한 신학적 결론을 유도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상담 사역에서 문제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 상담을 하고 문제를 분석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체계적인 신학적 이해없이 수행되는 이러한 상담 방법이 최선책이 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히 재고해 보아야 한다.
CPE가 목회를 준비하는데 큰 공헌을 하여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교육의 도구로서 이것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사실, 목회적 돌봄에 대한 CPE 접근방법은 많은 미국 개신교의 반지성적, 경험적, 실용주의적, 개인주의적 성격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운동은 목회의 정의에 대한 심한 변동 그리고 현대신학의 심한 변화에 매력을 잃고 싫증난 많은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의 관심과 상상력을 잡는데 성공적이었다. 또한 이것은 목회를, 빠른 인격적 성장을 위한 기술과 개인적 경험에 강조를 두는 현대의 매우 전문화된 기술주의의 논리에 적절하도록 만들고, 또한 세속사회로 부터 전문직으로서 존경을 받게 만들기도 하였다(말씀을 전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목회자로서가 아니라, 상담 전문가로서 그렇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목회자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목사를 상담자로서 훈련시키는데 큰 강조를 두는 이 접근 방법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면서, 적절한 목회의 맥락안에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5. 대화록(Verbatim)의 의미와 작성법
CPE프로그램을 택하고 훈련을 받는 사람들은 매주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참가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연구생들은 환자방문, 일반세미나, 대화록 반성시간, 인간관계훈련, 감독자와의 면담 등에 참가하면서 배우고 훈련을 쌓으며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면서 자기 성장을 모색해야 한다. 이 모든 프로그램 중에서도 대화록 반성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연구생들은 감독자와 그룹동료들과 함께 둘러 앉아서 대화록을 자세히 검토하고 분석하면서 상담사례를 깊이 연구하므로 목회적 돌봄의 자세와 상담원리와 기술들을 심도있게 연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대화록의 의미와 유래
Verbatim이라는 영어 단어는 원래 라틴어 Verbum에서 온 말인데 그 뜻은 '낱말'(a word), '한 마디 한 마디'(word for word)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본래적인 뜻을 어기지 않고 전하는 꼭 같은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오늘날 CPE과정에서 사용하는 Verbatim은 상담자가 최대한도의 기억력을 동원하여 본래적인 상담 분위기와 대화에서 별로 어긋남이 없는, 아니 거의 꼭같은 상담대화와 상담 분위기 전체를 축어적으로 기록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래는 딕스(Russel Dicks)로부터 나왔다. 캐롤 와이즈 밑에서 CPE교육을 마친 딕스가 1933년 보스톤에 있는 매사츄세츠 종합병원의 원목으로 발탁되어 사역하며 첫 번째 여름을 마쳤을 때의 일이었다. CPE의 개척자요 공로자인 캐봇이 어느날 그 병원 사회사업과 과장인 캐논 여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여기 우리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과 나눈 대화와 기도문을 글로 옮겨 쓰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내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일이지요. 우리는 그가 이 병원에서 더 머물러 일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요. 아마 그에게서 배울 점이 있을 것 같아요.
캐봇의 이 말은 오늘날 CPE에서 사용하는 대화록의 기원이 바로 딕스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사실, 딕스도 우스터 병원에서 CPE연구생의 한 사람으로 사례연구방법(Case Study Method)을 모색해 본적이 있었다. CPE연구생들은 그들의 훈련기간 내내 꼭같은 환자들을 돌보아 주면서 그 환자에게서 발생하는 심리적인 현상과 변화의 과정을 연구하는 혜택이 주어졌었다. 그 무렵, 살아있는 인간문헌들을 통해 사례연구방법을 심도있게 추진해 오던 보이슨은 이 분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것들을 CPE원생들로 하여금 연구케 하였었다: 1) 가족 배경에 대하여, 2) 초기 어린이 시절의 발달과정에 대하여, 3)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의 적응성에 관하여, 4) 질병의 원인에 대하여, 5) 일상생활에서 환자의 종교적인 활동에 대하여.
그러나 딕스는 이 심층적인 사례연구방법이 정신병원에서 처럼 장기 입원환자들의 경우가 아니고, 일반 병원에서 입원환자들이 단기적으로 자주 바뀌는 곳에서는 유용치 못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딕스는 임상 훈련생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학습의 도구로써 목회적 대화의 대화록을 창안했던 것이다. 그 당시 딕스는 그가 창안한 대화록을 'Note-Writing'(기록작성)이라고 호칭하며 다음과 같이 그 의미와 내용과 효능을 기술하였다.
기록작성은 면담이 끝난 후 상담자가 환자와 더불어 대화한 일체를 종이에 옮겨쓰는 것이다. 우리가 잠시동안의 접촉이나 면담이나 상담관계를 글로 재현할 때 그것을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 생각하며 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와같은 일은 환자 앞에서가 아니라, 면담이 끝나자 마자 하는 일이다... 따라서 기록작성은 상담자의 일을 점검하는 것이요, 분명히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이며, 글쓰는 이의 정서적 긴장을 이완시키는 일이요, 상담자의 작업을 기록으로 보전하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룩한 일의 단점을 드러내는 새로운 적용이며, 우리가 보고 들은 뜻을 찾아내려는 시도이다....과연 이것은 자기비판이요, 자기노출이며, 자기발전과 자기개선을 위한 준비이다.
우리는 기술작성에 대한 딕스의 이 설명을 통해 그가 창안한 대화록의 의미와 내용과 효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제 대화록을 작성 요령에 대해 살펴 본다.
2) 상담대화록 작성요령
대 화 록
면담일: 199 년 월 일 대화록 일련번호_________ 호
상담자: _______________ 면담시간 _____________분
환자 : _______________ (남, 녀)_____세 감독교수 __________
병명 : _______________ 입원기간 ____________ 종교________
① 사실파악과 준비(Facts and Preparation)
상담자가 병원에서 환자를 방문하게 되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원목실의 부탁에 의해서 특정한 환자를 방문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그 병동 수간호사의 제안에 따라 특정한 환자를 방문하는 일이며, 셋째는 상담자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서 방문하게 되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 세 번째 경우도 다시 두 경로가 있다. 하나는 상담자가 이미 방문한 적이 있는 환자를 다시 방문(장기 상담)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상담자가 병원 복도를 이리 저리 거닐다가 열려져 있는 병실문을 통해 병실 안의 상황을 보고 방문 대상을 마음 속으로 선정하여 접근하는 일이다. 바로 이 경우에도 상대방(환자)의 상황에 따라서 병실 안에서도 즉흥적으로 상담 대상이 달라질 수가 있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환자방문(면담)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상담대상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나 준비도 없이 면담이 이루어지는 고로 경험많은 능숙한 상담자가 아니라면 상담의 고전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원목실이나 수간호사의 부탁이나 제안에 따라서 특정한 환자를 방문하는 경우에는 방문대상에 대한 사전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가 있어서 비교적 짜임새 있는 상담과 효율적인 상담의 확률이 높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초보 상담자들은 상담대상들을 미리 예견하거나 확인해 놓고,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미리 확보하고 상담 원리에 입각한 마음의 준비를 착실히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본란에는 상담자가 환자를 방문하기 전에 그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은 것들은 무엇이고, 이 면담을 위해 상담자가 사전에 준비한 것들은 무엇이며, 그 과정에서 상담자 자신의 심정은 어떠하였는지를 기록하는 것이다. 환자에 대한 정보는 원목실이나, 병동의 수간호사나 간호사실 게시판의 기록들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② 관찰(Observation)
관찰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상담자의 관찰 내용은 그 상담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담자는 병실 안에 들어설 때 환자를 포함하여 병실 안의 전체 분위기를 신속하게 파악하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병실의 상황은? 즉 침대수는? 병실 안의 분위기는 어두운가? 밝은가? 꽃과 TV와 성경이 있는가? 물건들이 잘 정돈되어 있는가? 보호자가 있는가? 그의 얼굴 표정은? 환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병실 안에 있는 다른 환자들의 모습도 관찰하고 병실 전체의 분위기와 그 인상을 기록하는 것이다.
③ 면담(Interview)
본 란에는 면담 중에 주고 받은 대화를 최대한도의 기억력을 동원하여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상담도중에 일일이 기록할 수가 없기 때문에 상담이 끝난후 기도실이나 기타 조용한 곳에서 면담의 내용들을 대충 기록해 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대화록은 시간이 많이 경과하기 전에 작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과장의 유혹을 물리치고 솔직하고 정직하게 쓸 때 본인의 성장이 증폭된다.
대화록 작성시 오른쪽 1/3 정도의 공간을 감독 교수(Supervisor)의 논평란으로 남겨놓고, 나머지 2/3의 공간을 활용하여 기록한다. 상담자는 Counselor의 약자인 C로 써서 C1, C2 순으로 표현하고, 환자는 Patient의 약자인 P로 써서 P1, P2로 표현하며, 보호자등 제 삼자가 개입되면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시한다.(즉, 부인이면 W1, W2로, 남편이면 H1, H2로, 어머니이면 M1, M2로, 언니면 S1, S2등으로 표시한다).
환자나 보호자가 주고받은 언어적인 표현은 물론이고, 비언어적인 표현(non-verbal expression) 즉, 침묵, 한숨, 몸짓, 얼굴표정, 눈물, 그리고 상담자나 내담자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일어났던 일 가운데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도 괄호안에 언급한다. 이처럼 본 란에는 상담과정에서 일어났던 모든 대화와 느낌과 현장의 분위기를 최대한도로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④ 분석(Analysis)
본 란에서는 우선 상담자 자신의 모습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1) 상담자의 영향력이 환자와 보호자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
2) 상담자로서 잘 한 것은 무엇이고, 개선해야 할 부분들은 어떤 것인가?
3) 본인이 의도했던 상담 목표와 실제 상담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대화록을 검토해 보면서 왜 대화가 이런 형태로 전개되었는지 분석해 본다. 자주 반복된 단어들과 상담 스타일은 무엇이며, 조각 조각으로 이루어진 말과 느낌과 생각들을 연결시켜 어떤 큰 흐름과 주제가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⑤ 신학적인 의미(Theological Meaning)
본 란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담자 자신의 느낌과 생각과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것이다.
1) 이번 상담 경험을 통하여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무엇을 느끼고 배웠으며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겠는가?
2) 이 상담 경험에 대해서 어떤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또한 어떤 신학적인 해답을 줄 수 있겠는가?
3) 지금까지 상담자 자신이 갖고 있던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면에서 도전받고, 격려를 받았는가?
⑥ 앞으로의 계획과 전망(Further Plans and Opportunities)
본 란에서는 상담자가 이 환자(내담자)를 앞으로 다시 만나볼 것을 전제로 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고려해 볼 것이다.
1) 언제 다시 만날 것인가?
2) 이 환자를 만날 때 나의 상담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3) 그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4) 이 환자를 돕는 데 필요한 자원들은 무엇일까?
대화록의 실례
일 시: 1998년 11월 10일 일련번호: 1
상담자: 김 00 면담시간: 20분
의뢰자: 윤 00 (여, 9세) 지도교수: 박노권
문 제: 학급에서 교우관계 종교: 기독교
1. 사실 파악과 준비
1학기 중간 쯤 같은 조의 남학생인 유KJ라는 아이의 횡포에 못이겨 엄마인 나에게 딸이 하소연해 왔다. 딸에게 네가 상대를 안하면 괜찮을 거라고 다독거리며 학교에 보내곤 했었다. 그래도 너무 힘들어 하길래 내가 학교 급식 당번인 날 그 남자 아이를 교실 복도로 불러내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 뒤 그 아이는 우리 딸에게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런데 2학기 들어서 다시 그 아이와 그 조의 다른 남자 아이들 두명이 모두 심하게 장난치고 욕도 많이 하고, 그 조의 학습 태도면헤서도 선생님의 지적을 많이 당해, 그 조가 벌로 청소하는 날이 많아졌다. 딸은 그 조의 반장이기 때문에 그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하루 종일 신경이 날카로운 모양이다. 점점 학교 가기를 싫어해서 어느 날인가부터 아침마다 등교하기 전에 하는 축복기도에서, 잘 참아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오늘 마침 시간을 내서 얘기를 하자고 하니 딸이 무척 좋아했다. 딸은 엄마와 얘기하는 시간을 좋아하는데, 내가 너무 바빠 저녁 식사시간에 가끔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보는 정도로 대화시간이 짧으니 좋아할 수 밖에. 오늘은 그 마음을 위로하고 진지하게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세를 갖도록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자 마음 먹었다.
2. 관찰
오늘 엄마하고 상담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하는 요청에 딸은 뛸 듯이 기뻐했다. 컴퓨터와 책으로 가득찬 방에서 하기로 하고, 앉은뱅이 책상에 90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니 딸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깨에 힘이 빠지는 듯하더니 마침내 말문이 터졌다.
3. 면담
C1: (조심스럽게 딸의 표정을 살피며) 00아, 요즘 학교생활 어때?
P1: 학교가기 싫어요. 유KJ만 그런게 아니라, 우HJ하고 권HS까지 욕하고 때려요. 다른 조 남자 아이들은 별로 안 그러는데 우리 조 남자아이들은 세 명 다 나빠요. 엄마, 나 너무 힘들어 요.
C2: 1학기때는 한 아이만 그런 것 같더니, 이제 세명 모두 그러니, 얼마나 속이 상할까? 참 힘들 겠다.
P2: 쉬는 시간에도 소리지르고 까불고 복도에서도 뛰어 다녀서 그 날 반장한테나 선생님께 지적 받고 X표를 많이 받아 우리 조가 청소하는 날이 너무 많단 말이에요. (00이네 학급은 6조로 나누어 각 조마다 반장이 있고 일주일에 하루씩 반장이 돌아가며, 그 날 반장이 아이들의 학 교생활 태도를 칠판에 조별로 표시하게 되어 있다. 태도가 가장 안 좋은 조가 벌로 청소를 하게 되어있다.)
C3: 니네 조반장 노릇하려면 정말 힘들겠구나.
P3: 반장 노릇을 안할 수도 없어요. 수업시간에도 하도 장난을 많이 해서 장난하지 말라고 말리 다 보면 뭘 배웠는지도 모르고 그 시간이 다 끝나 버리는 때도 있어요. (거의 울 듯이 하소 연한다) 엄마, 나 다른 학교로 전학시켜 줘요.
C4: 00아, 너 1학년때도 너 괴롭히는 남자아이 때문에 속상해 하던 일 기억나니? 그때 마침 우 리가 이사를 해서 이 아파트로 오면서 전학했잖아. 근데 이 학교에 와서도 너를 괴롭히는 아이가 있었잖아. 그때 어떻게 했지?
P4: 1학년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지요.
C5: 그런데 또 그런 아이가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P5: 그럼.... 걔네들을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든가 경찰서로 보내버려요.
C6: 글쎄, 경찰 아저씨가 잡아갈 것 같지 않은데. 그냥 학교에서 서로 사이 좋게 지내라고 하실 거야.
P6: 다른 조 반장이랑 나랑 바꿨으면 좋겠어요. 순하고 얌전한 아이들만 있는 조로 보내 주셔요.
C7: 선생님께 직접 얘기해봤니?
P7: 얘기하려다 말았어요.
C8: 왜?
P8: 말해봤자 소용없을 거에요.
C9: 엄마가 아침마다 기도해 준 뒤로 어땠니? (얼마 전부터 아침 등교 전에 해주던 기도의 제목 을 그 문제로 삼고 아침마다 기도해 오고 있었다.)
P9: 남자애들이 그럴 때마다 화가 났지만 엄마 얼굴이 떠오르고 기도해주신 것이 생각나요. 그 래서 참게 돼요. 하지만 참는게 너무 힘들어요. 가슴에 뭔가 꽉 눌리는 것 같아요. 막 소 리 지르고 싶어요. (거의 울면서 말한다) 엄마, 막 소리지르면 안되나요?
C10: 가슴이 너무 답답하면 소리가 지르고 싶을 거야.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자꾸나. 잘 참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정말 잘 참게 해주셨네. 잠깐, 너 이런 얘기 아니? 온실 속의 화초는 바깥에 내놓으면 비바람이 불 때 꺾어지고 살아남지 못하지. 하지만 비바람이 부는 곳에서 자란 화초는 비바람이 불 때마다 힘겹긴 하지만 어느 정도 자란 뒤에는 어떤 곳으로 옮겨 심어도 잘 자랄 수 있단다. 그만큼 강해진거지.
P10: 엄마, 그럼 내가 가는 어떤 곳에도 그런 남자아이들이 항상 있을까요?
C11: 아마도 그럴거야. 참기만 하는 건 정말 너무 힘들거야. 이겨내야지.
P11: 그럼 엄마, 나 태권도 도장에 보내 주세요.
C12: 태권도 배워서 뭐하게?
P12: 힘을 길러야 남자아이들이 나를 우습게 안 볼 것 아니예요?
C13: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가 운동을 하는 목적은 건강한 정신을 기르려고 하는 거지, 남에게 힘 자랑하려고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 우리 00이가 그런 남자아이들 속에서 이겨내려면 팔의 힘보다 마음의 힘을 기르면 어떨까?
P13: 마음의 힘이 뭐에요?
C14: 마음이 넓어져서 웬만해도 화가 나지 않는거야. 화가 나지 않으면 참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가슴이 답답할리도 없겠지.
P14: 참 그거 좋겠네요. 마음이 넓어지도록 예수님께 매일 기도해야겠어요.
C15: 잘 참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도 들어주셨으니까, 마음이 넓어지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면 예수 님도 더 좋아하실거야. 원수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P15: 엄마, 빨리 기도해 주세요.
C16: (딸과 나는 두 손을 같이 붙잡고 기도했다.)
예수님, 우리 00이네 반에서 제일 짖궂은 아이들을 같은 조로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아이들이 어서 더 자라서 장난도 덜 치고 여자아이들도 덜 괴롭히게 도와주세요. 또, 그 때까지 우리 00이가 더 넓은 마음을 가져서 화를 안내고 대할 수 있도록 마음의 참 평화를 내려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던 중 딸의 아픔이 전해져서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다.)
P16: 근데 엄마, 왜 울었어요?
C17: 00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하고 생각하며 기도하니까, 저절로 눈물이 나오더라.
(이때 딸의 아래턱이 흔들리며 눈물이 고였다. 아주 고통이 깊었던 것 같다.)
P17: 엄마, 고마워요.
C18: 참, 00이 대단하구나. 잘 이겨낼 수 있을거야. 우리 또 얘기하는 시간을 갖자꾸나.
4. 분석
1) 초등학교 2학년 아동의 심리를 읽어주려고 애는 쓰는 데 아이는 크게 공감하는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끝에 기도한 뒤로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 주는 엄마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2)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전개방법이 어쩐지 결론을 향해 유도 질문을 하는 것 같게도 보인다. 아이가 자연스럽게 문제의 해결점에 이르도록 하는 기술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3)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도피하고 싶어하는 아이의 심정이 상식 이상의 해결방법에 드러나고 있다(P5 경찰서). 아이의 상식 선에서의 해결방법이 눈에 띄기도 한다(P11 태권도). 이때 아이의 시각을 조정하는 C의 대화방법이 너무 교훈적이고 상식적이어서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4) 시각을 조정하기 위해서 쓴 예화(C10 화초)가 논리적으로 너무 성급하게 들어가 아이가 그 예화를 얘기하는 엄마의 의도를 잘못 인식한 것 같다. 그러니 태권도 시켜 달라고 한 것 같다. 아이의 연령 수준에 맞지 않는 예화였나 하는 생각도 든다.
5) P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에 대한 적당한 해결점에 도달한 것이 아니어서 섭섭하지만, 마음의 힘을 길러서 이겨내야겠다는 C의 대안 제기에 흔쾌히 공감하는 P의 반응을 보고 다소 안심이 되었다.
6) 인간적인 여러 방법들이 별로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의지하고자 하는 결론에 다다른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7) P에게 엄마로써 자꾸 가르치려는 생각을 버리고 아이가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아가도록 하는 상담 기술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5. 신학적인 의미
이 상담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가장 높은 수준의 방법이 무엇인가하는 사고과정을 짚어보았다. 역시 인간적인 어떤 방법보다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상담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있긴 해도, 결국 C나 P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최고의 공감대를 이루고, 하나님을 신뢰하는데서 이미 마음의 평화가 임한 것 같다. 상담하는 동안 언제 그렇게 우울했었느냐는 듯이 그렇게 기뻐 보일 수가 없었다. 상담 후에 아이가 적극적으로 자기가 할 일을 찾아서 해나가는 것을 볼 때, 문제가 해결된 건 없지만 믿고 기도한 것은 이미 이룬 줄로 알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6. 앞으로의 계획과 전망
매일 아침마다 그 문제를 놓고 아이와 함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어떤 상담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전적인 의지라는 것을 상담자로서 먼저 인식해야겠다. 내담자에게 강요나 억지로 설득하지 않고, 또 적절한 예화를 들 수 있도록 하려면 성경적인 지식과 성경 속의 예화들을 경우에 따라 정리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