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과 석척놀이에 참가한 세 아들
"양녕대군이 젊은 시절 덕망을 잃어 폐세자가 되어 태종께서 외방에 방치하였다. 그로부터 20년, 종친의 어른으로 나이가 연로하고 행실도 바르게 변했으니 서울집에 돌아와 살게 하고자 하노라!"
세종의 교지는 단호했다. 빗발치는 상소에도 형을 위한 우애는 꺾지 않았다. 1418년 6월 3일, 경기도 광주에 유배된 후 이천 등지에서 20년간 유배생활을 한 양녕대군은 1438년 정월에야 도성으로 돌아온 것이다. 비록 서북면 등을 주유하며 편안한 유배생활을 했다고는 하지만 왕이 될 수도 있었던 양녕대군은 20년간의 유배생활이 풀리자 회환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대소신료들의 400여 건이 넘는 탄핵상소로 인한 치욕적인 유배생활을 겪은 양녕대군은 해배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두 아들의 유배라는 아픔에 직면한다.
옛날부터 한양과 송도에는 단오절 전통민속놀이로 석척전이 행해졌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놀이가 격렬해지기 시작하여 부상자는 물론 사망자까지 생겨나게 돼 조선태종때 석척전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그러나 세종 때에 이르러 부활하기 시작했다.
1438년 5월 5일 단오절. 돈의문 밖, 모화관 북쪽 반송정(盤松亭)에서 석척놀이가 벌어졌다. 풍류를 즐기는 양녕대군은 석척놀이의 구경꾼으로 반송정에 들렀다. 석척전에는 양녕대군의 세 아들과 태종의 서자 익녕군 이치까지 합세하여 단오절을 즐겼다. 하지만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 누가 알았으랴!
"석전은 일찍이 의금부로 하여금 금지시킨 것입옵니다. 오늘에 이르러 다시 이 놀이를 반송정에서 벌였사옵니다. 양녕대군 이제와 익녕군 이치, 순성군 개, 서산군 혜, 원윤 이녹생, 정윤 겸 및 이무생 등이 구경을 하고 혜와 겸 등은 김춘자 등 20여 명이 돌 던지는 데 능하다 하여 이들을 좌우대로 나누어 각기 이에 통속시켜 싸우게 하고는 친히 말을 달려 독전(督戰)하는가 하면, 다시 작대기를 잡고 몸소 나가 서로 쫓으며 대전(大戰)을 벌여 자못 많은 부상자를 내었으며, 혹은 사망한 자도 있었사옵니다"
"양녕대군은 금하시는 일에 자제를 인솔하고 가서 관람했으니, 이는 전혀 근신하는 의사가 없는 것이요, 또 혜와 겸이 무뢰한들을 불러 놓고 지휘 독전했을 뿐 아니라, 혹은 작대기를 잡고 추격해 사람을 상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대군이 보고 금하지 않았으니, 그의 광망스런 행동은 전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다시 그 복종을 거두시와 방자함을 징계하옵소서"
사헌부에서는 양녕대군이 금지된 석척놀이를 구경 갔다는 사실에 쾌재를 불렀다. 양녕대군을 탄핵할 기회만 노리던 대간들은 탄핵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세종은 어쩔 수 없이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양녕대군은 단순히 석척놀이를 구경 온 것 뿐 이었다. 세종은 석척놀이에 참가했던 종친들을 모두 의금부에 하옥시키라고 명했다. 세종은 그들을 의금부에 며칠 가두었다가 방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사건은 확대되어 갔다. 석척 금지를 맡은 의금부와 종친 비위 조사를 맡은 종부시의 관원들까지 탄핵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세종은 사헌부의 상소를 받아들여 의금부와 종부시의 관원 대부분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대간들의 화살은 다시 양녕대군을 비롯한 종친들에게 날아들었다. 결국 태종의 서자 익녕군 이치는 원평(原平), 양녕대군의 아들 이혜는 진천(鎭川), 이겸은 문화(文化)로 추방되었다. 순성군 이개는 양녕대군의 맏아들이라 방면되었다.
단오절 석척놀이를 구경하다가 젊은 혈기에 참가한 이들은 양녕대군을 탄핵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유배라는 가혹한 형벌을 받아든 것이었다. 양녕대군은 대간들의 가혹함에 치를 떨며 훗날을 기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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