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우리가족이 모두 모이는 날.
그런데 밤새 천둥번개가 요란하고 비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렸다.
걱정이 되었다.
비가 와도 우산 쓰고 관광은 할 수 있지만
공항에서부터 캐리어 들고 본섬까지 와야하는 큰 딸이 고생할까봐.
우산을 캐리어 바깥쪽에 넣고 오라는
메시지를 보내놓고
도착 메시지를 기다리는데
하늘이 쨍하니 맑다.
밤새 천둥번개 요란한 비 내린 것 맞나?
하는 정도로 시침을 뚝 떼고 있다.
누구보다 언니를 기다린 짠딸.
우리가 날씨 운이 좋다며 기뻐한다.
영국에서도, 파리에서도 일정을 다 마칠 때 쯤 비가 흩뿌리거나
밤에 주로 비가내렸다.
아침이면 오늘처럼 시침을 뚝 떼고 쨍하니 맑은 하늘을 보여줬었다.
우리도 저 계단으로 된 다리를 2개 넘어 오느라 힘들었었지.
우릴 발견하고 저리 환하게 웃는 걸보면
짠딸 말대로 짐꾼을 만났기 때문이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더 환하게 웃었던 짠딸은
아무래도 가이드 토스하려고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호들갑스런 상봉식을 하는 우리 가족.
우선 큰 딸의 짐을 풀고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한다.
어~~ 숙소 좋은데 하며 둘러보는 큰딸.
파리 숙소에 비하면 대궐이야, 대궐!
점심은 '폰티니'라는 음식점에서 먹기로 한다.
짠딸 혼자 왔을 때 먹은 맛있는 집이라며 먹물 파스타와
발사믹 스테이크를 권한다.
둘다 맛있는 걸~~~
그런데 입가에, 입안에 꺼먹물 들은거 어찌할래.
서로 마주보고 웃는다.
자 이제 '부라노' 섬으로 가볼까나!
베니스가 처음인 우리 큰 딸
선착장가는 길도, 배 노선도 척척 찾아내며
새 가이드 능력을 발휘한다.
짠딸은 역시나 슬슬 뒤에서 걸어오며 사진 찍기 열심이다.
이젠 앵글에 잡힌 뒷모습이 세명이네.
가는 곳곳에 베니스 비엔날레를 안내하는 입간판이 서 있다.
우린 내일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들을 보러 갈 예정이다.
베니스에 처음인 두 사람
수상버스 안에서
열심히 풍광을 찍으며 즐기고
선내에서 사색에 잠겨 즐긴다.
나는 더 촌스런 표정으로 둘레둘레 고개를 쉴새없이 움직이며
와~~~
와~~~~
저것좀 봐, 여기좀 봐 한다.
영락없는 도시에 처음 나온 촌뜨기 아낙네다.
바다가 도로인 베니스.
바다에 도로표시도 되어있고
가로등도 있다.
밤에 이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면 또 신비롭게 보인다.
드디어 부라노 섬에 도착했다.
선착장에 멈추면 언제나 설레인다.
본섬이 아닌 다른 섬은 어떨까 많이 궁금했었다.
어부가 며칠만에 섬에 도착해
자기집을 찾으려니 다 비슷비슷한 건물이라
구별하기 쉽게 하려고 색을 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름다운 명소가 되었고
지금은 지정해주는 색을 칠해야한다고 한다.
자신들의 프라이버시도 포기하고
관광객을 위해 더 열심히 창에 꽃도 가꾸고
예쁜 발을 드리워놓는 정성이 보인다.
비 예보가 있어
우리 남편 우산을 열심히 들고 다녔는데
비는 커녕 햇살이 너무 강하고 화사하다.
그래서 이 원색의 집들이 더 돋보이고 아름답다.
만일 비가 왔더라면 이 화사함이 좀 덜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부라노섬은 햇살이 있어야 해.
흰색의 레이스로 창을 가린 집들이 많은데
정교하고 섬세한 레이스를 만들기 시작한 부라노의 여인들은
이 부라노섬을 유럽의 레이스산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지금은 대량생산에 밀려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값이 너무 비싸 욕심이 나도 집어들 수가 없다.
영화'천사와 악마'에 추기경들이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콘클라베를 하는 장면이 꽤 길게 나오는데
빨간 수단에 내려뜨린 하얀 레이스가 너무 예뻐
자꾸만 눈길이 갔었다.
그 레이스 이 부라노섬 여인들이 한땀한땀 만든 것 아닐까?
남의 집 앞 벤치에 앉아서 햇살을 쪼이는 관광객.
아무래도 누구나 앉아 쉬어가라는 주인의 배려가 아닐까.
벽, 창, 화분, 드리운 발까지 색을 맞추어 주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 정성이 더 아름답다
유럽은 어디나 그렇지만
이 섬의 골목, 참 아름답다.
이 남자 아름다움에 반해
여기 저기 우릴 잘도 이끌어준다.
장시간 비행으로 큰 딸은 여독도 안풀렸을텐데
아름다운 곳, 멋진 풍광 앞에서는
피로도 못 느끼나보다.
저리 까불거리며 즐거워하는걸 보니.
남편은 얼굴이 밝게 나올 수 있는 곳만 골라서 포즈를 취한다.
나와 같이 사진을 찍으면
왜 자신의 얼굴만 검게 나오냐며 서운해하는 남편.
무조건 얼굴이 밝게 나와야 진정한 사진으로 인정한다.
그건 당신 엄마한테 떼 쓸일이지요.
뽀얀 나를 만난것도 잘못된 만남이구요.
신기한 것은
유리공예품을 파는 샵에 들어갔는데
12년전 유리공예 공방에서 샀던 귀걸이와 똑같은 게 있다.
"어머어머 이모델 아직도 만들어지나봐!"
"기본 아이템이라서 그럴거야"
라며 12년전에 사온 귀걸이를 기억하는 딸들도 놀란다.
갑자기 바뀌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자기야 나 이거 사줘."
9유로에 안심한 남편
얼른 지갑을 연다.
착용하고 인증샷!
아름다운 집들에 취해있다가
부라노섬을 떠나려니 자꾸 뒤돌아봐진다.
예쁜 집들 안녕!
부라노섬에서 수상버스를 탈 때는
행선지를 우리동네가 아닌 산마르코광장으로 정한다.
그리고 딸들이 망설이던 곤돌라를 타기로 한다.
내가 적극 추천했다
베니스에선 곤돌라를 타지 않으면 베니스를 제대로 본것이 아냐.
배를 빌리는데 80유로, 야간엔 100유로.
탑승 최대인원은 6명.
혼자타도, 6명이 타도 똑같은 가격인셈.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를 예감했는지 곤돌라 사공아저씨 비옷을 입으셨네
에이, 저 비옷을 입지 않아야 느낌이 나는데.
나 저 비옷이 영 거슬린다.
곤돌리에 느낌이 없잖아.
ㅎㅇ
"어! 바로 여기가 탄식의 다리야"
멀리서만 보았던 탄식의 다리 밑으로도 곤돌라가 지나간다.
거봐, 곤돌라 타길 잘했지?
감옥과 연결된 다리로
감옥으로 가는 죄수들이 밖을 내다보며
탄식을 많이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카사노바도 이 다리를 지나 감옥으로 가는 길에
아름다운 수로를 내려다보며 긴 탄식을 했겠지.
우린 두 딸들을 열심히 찍고
딸들은 엄마아빠를 열심히 찍어준다.
낮은 다리 밑을 지날 땐
요렇게 머리를 숙이며 능숙하게 곤돌라의 노를 젓는다.
곤돌리에(곤돌라사공)가 되려면
국가공인 라이센스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실제로 좁은 수로에서 방향을 틀거나
마주오는 수상택시 등을 만났을 때
아슬아슬한 순간도 우리가 편안하게 노를 저어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곤돌라를 타지 않으면
관광객이 골목골목을 둘러보기는 어렵다.
수상택시도 있지만
빠르게 휙휙 달리는 택시나 보트보다 얼마나 낭만적인가
가끔씩 보면 성악하는 사람을 고용해
'산타루치아'도 '사랑의 묘약' 등에 나오는 아리아도 들어가며
사랑을 고백하거나 맹세하는 커플들도 눈에 띄던데
이런 사랑고백이라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큰 딸한테 또 영어 앵벌이를 시킨다.
"비가 안 오니까, 사공아저씨 자켓좀 벗으라고 하면 안될까?"
응????(당황하는 식구들)
망설이던 큰 딸
"Sir," 로 시작하는 정중한 말투로 자켓을 벗어주실 수 있냐고하니
"sure" 로 시작하는 대답을 시원스레 하면서
웃는 얼굴로 비옷을 얼른 벗어준다.
"봐~~ 느낌 살잖아"
'에구 못말리는 우리엄마'
했겠지 우리딸들.
'에구구, 이런 와이프와 살고있다. 이 아빠는 '
했겠지 우리남편.
좁은 수로를 빠져나와 대수로로 다시 나왔다
좋은 시간을 즐겼냐는 사공아저씨의 멘트에
약속한듯 명랑한 웃음으로 합창한다.
"Yes"
내릴 때 손 잡아주는 아저씨한테 다시한번
"그라찌에"
난 대운하가 보이는 이 해변이 너무 좋다.
오늘도 이 곳에 잠시 앉았다 가는 걸로.
노을이 번지기 시작하는 베니스는 또 얼마나 멋진가.
이 장소엔 어제도 해질녘에 왔었는데
오늘도 그 시간이네.
큰 딸, 산마르코광장에 들어서서는
광장에 취하여 즐거워한다.
비둘기가 너무 많다나?
엄마의 옛사진을 보여줄까?
12년 전엔 사람보다 비둘기가 훨씬 더 많은 듯 보인다.
발에 밟힐것만 같아서 처음엔 조심스러웠었다.
휴가철이라서 관광객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데도 비둘기숫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 많던 비둘기는 다 누가 먹었을까' 하면 너무 야만적이지?
'그 많던 비둘기는 누가 다 날려보냈을까' 로 고쳐보지.
이 남자 갑자기 하트뿅뿅을 날리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들른 이 광장과 사랑에 빠졌다는 거지?
그런데 얼굴은 없고 하트만 선명하네
남편이 극도로 싫어할 사진이군.
이상인 숨은그림 찾기 사진이라고 해둘까?
우린 딸들이 미리 검색해놓은 맛집에서 저녁을 먹고
더 어두워진 광장에 나와 와인을 한잔씩 하기로 한다.
12년전엔 시간이 없어
사진만 찍고 떠났던 광장의 카페에서.
오늘도 여전히 연주를 하고 있는 악사들
그 때의 그분들은 아니겠지?
난 이 빨간 의자가 놓인 이 카페 말고
노란의자가 놓인 카페로 갈거야.
옛사진 속의 그 집으로.
아하,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밖이 요란하다.
천둥번개로 시작한 빗줄기가 마치 퍼 붓는듯하다.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스콜처럼 갑자기 무섭게 쏟아진다.
우리가 앉아있는 식당 창으로 보이는 골목엔
마치 시냇물처럼 물이 흘러간다.
어! 우산으로도 못 막을 비야.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으로 시작하는 '짱가' 노래가 생각날 만큼
어디선가 나타나 우비를 한아름씩 안고 팔러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저 우비를 사서 입고 가야하나?
내 단화는 물에 다 잠겨버릴텐데 아예 벗어들고 갈까?
갈등하면서 디저트를 시켜먹고 있는 사이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하늘이 시침을 뚝 떼고 있다.
골목의 물도 다 어디론가 스며들고 오히려 골목이 더 깨끗해졌다.
다행이다를 외치며 광장으로 다시 나가보니
아뿔싸!
연주하던 악사들도 모두 사라지고
야외테이블 세팅도 모두 철수했다.
비도 그쳤는데 다시 나와주심 안돼요?
물에 젖은 광장이 더 아름다움데요.
그래, 내일이 또 있잖아.
오늘은 우리집에서 어제 준비해놓은 벨리니로
파티하자.
우리가족이 베니스라는 멋진 곳에 모두 모인 기념 파티다.
아름다운 베니스여!
아름다운 밤이여!
오래오래 기억할게.
첫댓글 12년전 산마르코사진 암만봐도 엄마 합성같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