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자야 !
錦山 李洛基 / 서되반
군대 가면, 미처 겪어보지 못한 어려움을 잊어보려고도, 집생각을 떨쳐버리려고도 담배에 손을 대게 된다. 군대에서는 주기적으로 일정량의 담배가 지급된다. 나는 군입대할때 담배를 피우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게 지급된 담배를 동료 사병들에게 줘버렸다. 담배가 모자라 쩔쩔매는 동료 사병들은 나의 담배선물이 그리 좋은지 담배지급일만 되면 내게 알랑거리는 이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 나는 담배 줄 사람을 정해버렸다. 아내와 어린 자식이 있는 가장으로 뒤늦게 입대한 나이든 이 이었다. 나이 들었댔자 20대 중반이다. 그는 가진 것 없는 사람으로 막 결혼하고는 신혼생활 중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입대하였다. 그는 거의 문맹이었다. 그는 아내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갓난아이가 보고 싶어 안달을 했다. 사랑하는 아내의 안부가 걱정돼 편지를 써야했다. 그러나 글쓰기가 어려운 그인지라 어느 날 내게 물어왔다. ‘선상님, 편지 좀 써줄랑기요.’ 선임병(先任兵)인데도 그는 나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때는 3년 복무의 일반 사병과는 달리 대학생과 학교교사에게는 단기복무 특례제도가 있었다. 나는 단기복무병으로 입대했다. 단기복무병은 짧은 군복무기간에 집중훈련을 시켜야 한다며, 후방 부대나 편한 일에 배속하지 않았다. 그런 사정으로 인해 나와 나의 동기들은 최전방에 배치됐다. 정기훈련때가 아니면 자고 나면 곡괭이나 삽자루를 들고 멀쩡한 참호보수나 민둥산에 몇 그루 남지 않은 나무 베러 다니는 게 일과였다.
그런 사정인 이등병에 불과한 내게 바라지도 않았던 행운이 닥쳤다. 영하 30도의 추운 겨울 어느 날, 한 잠자는 밤중에 하늘같이 높은 대대장-소령이었음-이 찝차를 몰고 와서 나를 찾았다. 부대 내에서는 야단이 났다. 저 친구 백이 대단한가봐 대대장이 직접 찾아 불러가니!
그날부터 대대인사계에서 서류정리 사무를 보게 되었다. 비공식 차출이었다. 거긴 난방도 잘되어 있었고 식사도 다른 사병들이 타다 주어 실내에서 먹으니 그런 호사가 없었다. 어쭙잖게도 나의 펜글솜씨가 인정되었던 모양이었다. -저 이등병새끼 손가락 덕분에 호강하고 다녀, 눈시러워 못 보것어! ―하긴 지 재주 덕인데 누가 말려!― 나에게 쏠린 시선은 질시반 부러움 반이었다. 가끔씩 대대본부에 불려가 그런 호사를 받는 나는 중대 내에서 글씨솜씨로 이름이 나버렸고 편지를 부탁하러 온 그 선임병은 그래서 나를 ‘선상님’ 이라 부르게 된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글씨 예쁘게 쓴다고 문장도 잘 쓰라는 법 없는데, 이 양반이 왜 이럴까’ 싶으면서도 내심 싫지가 않았다.
그는 편지부탁으로 나를 찾아오면서 손에 무언가 들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사병들에게 지급되는 건빵이었다. 편지를 부탁하면서 보답할 것이 없으니 이거라도 드시라(?)면서 먹고 싶은 배를 참으며 꿍쳐두었다가 내게 가져왔다. 나는 그의 제의에 있는 정성을 다해 편지를 썼다. 나는 그가 안 먹고 아껴서 주는 건방을 거절 않고 받았다. 거절하면 편지 써주기가 마득잖은 인상을 줄까봐서였다. 편지 쓰는 시간 그와 함께 먹는데, 먹는 양은 그가 더 많았다.
때로는 앞뒤로 빼곡히 넉 장 다섯 장도 넘게 썼다. 한편의 단편이었다. 편지 내용을 전해들은 그는 희색이 만면하였다. 한 달에 몇 번이고 편지 써 줄 테니 망설이지 말고 오라고 했다. 그는 아내의 답장도 가져와 같이 읽었다.
나는 당시 미혼이었지만 그들 신혼부부의 애틋한 사연을 써주고- 읽으면서, 한없는 희열에 잠기기도 했다. 사랑에는 높은 학력도 많은 재산이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없이 사는 사람, 조금만 있으면 행복으로 여기는 그런 순하고 착한 이들의 사랑이 더 애틋하다고 느꼈다. 편지대필할때면 마치 -있지도 않은- 내 아내에게 편지쓰는 기분에 젖곤 했다. 그 각박한 군 생활에서 봉사의 흐뭇함도 있었지만, 내가 써주고 봐도 참 재미있었다. 글씨솜씨도 남달랐고 내용 또한 괜찮아보였다.
그는 나보다 먼저 입대했으나 제대는 나보다 늦은 이였다. 부러운지 조기제대에 대해 가끔 말하곤 했다. 그로서는 하루빨리 나가 가정을 돌봐야하는 처지인데도 긴 세월을 거기서 보내야하니 기가 찰 사정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국가차원에서 배려를 해주었어야 하는데도 당시의 국가 상황이 그러지를 못했다.
그는 나보다 선임병이고 나이가 많았어도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나는 당시 일주일에 두세 번씩 교회 간다며 공식적으로 외출을 했다. 교회에서 찬송가 반주로 풍금도 연주해 주었으니 교회에서도 나를 찾곤 했다.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라기보다는 그 기회에 나가서 실컷 사먹을 수 있어 좋았다. 먹성대로 먹고는 빵이랑 과자 등을 그 선임병친구에게 남몰래 쥐어주곤 했다. 그는 집에 돈을 부쳐달라할 형편이 못돼 빵 한 봉지도 사먹지 못했다. 그래저래 나는 그에게 담배로, 편지대필로, 군것질거리로 그를 도왔다. 비록 짧은 군 생활이었지만 그와 함께 한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흐뭇해진다.
나는 잘나가다가 그만 제대말년에 군 당국의 행정착오로 제대누락이 되어 입대동기생들과 같은 날 나가지 못했다. 깊은 시름에 젖은 나를 그는 무엇으로 위로할까 자신의 일처럼 안달했다. 위로차 찾은 그에게 나는 ‘김일병님! 나 담배 좀 피워보면 안될까’ 물었다. 그날부터 그는 의기양양해하면서 내게 담배를 가르쳐주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며 미안해하던 그는 비록 담배피우기라도 가르쳐주게 되다니 내심 기뻤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대로 가족 걱정에, 나는 나대로 당시 처한 난감한 입장에 둘이서 담배연기를 길게 뿜었다.
다행히도 나는 원래 예정보다 한 달 후에 제대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내게 진심으로 축하를 보내는 그가 못내 안쓰러웠다. ‘편지를 어떻하지요’ 했더니 저 요즈음 공민학교 다니는데 조금씩 쓸 수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자야]에게 편지 쓸게요. 그는 아내를 [자야]라 불렀다. 아내의 이름에 익숙해져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로 시작되는 편지에 그는 무척이나 신나했다. ‘저도 선상님이 써주시는데로 [나의 사랑하는 자야!]라고 쓸게요’ 했다.
그가 보고 싶다.
-사랑하는 자야님-과 그때 그 갓난 아들 따라 서울 와 살까?
지금 만난다면 그에게 담배 한대 권하면서 주고받을 말이 많은데…….
주) 나의 군입대는 1961년이었고 이듬해 제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