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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4 - 메흐메트 2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해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다!
1452년 루멜리 히사리 요새가 완공되자 동로마 제국에 비상이 걸렸는데....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로마 교황과 동맹을 맺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겨울에 관료와
성직자들을 비롯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민들도 탐탁지 않게 생각한 동맹이 맺어집니진다.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구원할 힘이 없었으니.... 예루살렘을 구하러 신성 로마 황제, 잉글랜드
국왕, 프랑스 국왕 등이 참가했던 3차 십자군 같은 대(對) 이슬람 동맹군의 지원이었으나,
이제 르네상스로 인해 더이상 교황에게 그런 십자군을 모을 능력이나 권위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황제를 구원한다는 영광에 자신의 한몸을 던질 허영과 야심에 차서, 원정 나갈 여유가 있는
왕은 남아있지 않았으니....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백년전쟁중이었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이슬람세력에 맞서는 레콩키스타는 마지막 진행중이었으며, 신성 로마제국은 구성국들간
전쟁으로 혼란스러웠고 헝가리와 폴란드는 이미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대패한 상태였습니다.
유럽 왕국들이 여유가 없으니 제국을 위해 나서준 곳은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국가들이었는데...
제노바가 잘 훈련된 병력 700명을 1453년 1월에 지원했으며, 베네치아도 함대를
제공하기로 했고 금각만에 정박하고 있던 베네치아의 상선들도 전투에 참가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베네치아 평의회에서 함대 파견에 대한 회의가 길어지면서 파견은 1453년 4월경에나
이루어지니 이때는 이미 전투가 시작되었고... 제노바 함대는 참가하지 못했으며,
제노바의 국외 식민지 가운데 하나인 키오스섬 영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온
용병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는 용병료만 받을수 있다면 도시를 방어할 것을 맹세합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그를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황제 다음의 권한을 부여하는데,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마지막 수단으로 메흐메트 2세에게 선물을 바치며 친선 관계를 요청했지만, 반응은
싸늘했으니 외교적 수단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제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공방전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금각만 쪽으로 접근을 막기위해, 만의 입구를 가로지르는 두꺼운 쇠사슬을
설치하니 이로써 금각만은 방어할수 있었고,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의 국고를 털어
성벽을 강화하는등 방어전을 준비하며 다른 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로 다짐합니다.
메흐메트 2세는 오스만군을 데리고 도시 서쪽에 자리 잡았으며 1453년 4월 5일에는 마지막 부대
까지 성벽 앞에 집결했는데.... 해협을 넘은 오스만군의 규모는 15만으로 추정되니 이 군대
에는 오스만 최고의 정예 보병인 예니체리 1만명과 수천명의 기독교 군대도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이 기독교 군대는 발칸의 종속국에서 온 군대로,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1,500명의
세르비아 기병대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다만 세르비아 통치자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몇달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보수에 자금을 지원하는등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뜻이 없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이니 지원군을 파견하라는 요구를 거절할수 없었습니다.
몽골이 일본을 침공하는데 속국인 고려가 몽골의 앞잡이가 되어 배와 선원에 군대를 지원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 처럼..... 술탄의 군대는 전투 병력만 15만에 달했으니, 당대에는
비전투병력을 군이 투입 가능한 인력에서 제외했기에 비전투병력을 합치면 30만에 달했습니다.
술탄의 군대는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든 War Machine, 즉 시스템화 된 군수 체계를 갖춘 군대였으니,
도로 공사, 취사, 운송을 담당하는 후방 지원부대가 따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전문 의무대
까지 갖춘 예니체리는 오스만군의 축소판이라 할만큼 체계화된 오스만군 견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따로 자잘한 업무들을 수행할 비정규군도 모집되어, 전투 병력은 본연의 전투 임무에만 충실할 수 있었는데...
이런 군대를 운용하기 위한 작업이 관료와 장교들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런 war machine 은
서유럽에서는 구스타브 아돌프의 개혁 이후에나 비로소 형태를 갖추게 되니 당시로서 혁신적인 군대였습니다.
메흐메트 2세는 도착후 바다 쪽에서 공격을 위해 함대를 건조했으니 200~300척이었는데, 6척의
대형 갤리선과 10척의 갤리선, 15척의 소형 갤리선, 75척의 소형 보트,
20척의 말 수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함대의 운용은 갈리폴리의 그리스인들에게 맡겨졌습니다.
공성전을 위해 대형 공성포인 우르반 거포도 동원되었는데, 수송을 위해 30대의 수레와 60마리
의 소, 200명의 인원이 필요했으며, 250여명의 병사들이 투입되어 미리 도로 공사를
진행해야 했을 정도로 거대했으니 대포 길이는 8 m 에 달했으며, 무게는 19톤을 자랑했습니다.
위력도 굉장해 현대 전차포에서 쏘는 포탄 보다 더 강력했는데... 하지만 발사후 포 자체의 가열로
인해 재장전에만 3시간이 넘게 걸렸고, 하루에 7발이 한계였으며, 그 이상 쏘면
포신이 엿가락처럼 휘어질 위험이 있었는데 300 kg의 돌덩이를 1.6 km 넘게 발사할수 있었습니다.
거포는 헝가리인 우르반이 주조했는데, 처음에는 동로마에 판매될 예정이었으나 비용을 지불할수
있는 능력이 없어 계약이 무산되니..... 우르반은 메흐메트 2세에게 가서 "바빌론의
성벽도 무너뜨릴 수 있다" 라 과시하니 자금과 재료를 제공받은 우르반은 3달후 거포를 제작합니다.
금각만의 봉쇄는 실패했으니 포위만 한채 공성전을 진행할수 없는건 세르비아등 발칸 종속국들이 언제
반기를 들지 알수없는 노릇이었으니 점령이 아닌 제패 형식으로 이루어진 정복이라 맘 먹고 봉기
한다면 위협이 될수있었으니 공격이 시일을 끌면 무라트 2세가 쌓은 왕권을 무너뜨릴수도 있었습니다.
재상인 찬다를르 할릴 파샤는 공방전 도중에도 여러번 포위를 풀고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1453년
만큼 오스만의 대내외적인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시기도 없었지만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은
너무나도 큰 산이었고, 고려해야 할 변수는 많았으니 오스만군에게는 총력을 다한 공격이 최선이었습니다.
오스만은 1453년 이전에도 세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적이 있었는데, 1411년의 포위는 오스만이
내전중이니 제외하더라도 바예지트 1세 때인 1390년부터 1402년까지 느슨하게 포위했을 때는
발칸반도가 오스만의 지배하에 떨어진 상황이었고, 티무르 제국이 아나톨리아에 손을 뻗치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으며 알바니아는 오스만에 편입되어 있었고, 헝가리도 궂이 공격해 오지는 않을거라는...
1422년의 포위도 발칸 반도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티무르 제국에서는 제위 계승 문제로
산발적인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이었기에 먼 서쪽까지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지만 포위를 오래할 여건이 안 되었다는 점에서 1453년 보다는 상황이 좀 안좋긴 했습니다.
그에 반해 로마군의 병력은 7,000명에 불과했는데, 당시 징집을 위해 도시 전체를 뒤졌으나
무장할수 있는 인원은 5,000명에 불과했고, 2,000명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등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 중에 제노바인 용병부대
7백명이 훈련과 무장이 가장 훌륭했고.... 바다에서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함대가 강력했습니다.
방어군에게는 소구경 포탄이 있었으나, 성벽 위에 올려두고 쏘다가 반동 때문에 성벽이 무너지면
큰일이라 사용되지 않았으며 성내에는 난민들을 포함 5만명의 시민들이 있었고,
병사들을 제외한 시민들은 벽을 보수하고 망루에서 경계 임무를 맡았으니 식량배급
이 시작되었고, 교회에 금, 은이란 다 뜯어와서 외국인 병사 2,000명에게 줄 급료를 마련했습니다.
해안 쪽 4분의 1은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동로마에 망명해 있던 오스만의 왕족 오르한 첼레비
에게 맡겨졌으니 그가 이끄는 오스만인은 600명으로, 이들은 전투가 끝날 때
까지 제자리를 지켰으며..... 해안 방면의 성벽은 금각만이 점령당할 때까지는
안전했으므로 군사를 아끼기 위해 보초병을 배치한다는 느낌으로 듬성듬성하게 배치합니다.
금각만 방면에서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함대가 베네치아인 가브리엘레 트레비사노의 지휘 아래
배치되었으니, 4월 5일에 술탄의 군대가 도착하자 방어자들은 자리를 잡게
되는데 방어벽 전체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은 무리였고 외벽에만 병력을 집중시키기로 합니다.
콘스탄티노스 11세와 군대는 중앙부 메소티히온에 배치되었는데, 방어벽 중에 가장 약한 부분으로
적의 공격이 집중될 터였고.... 주스티니아니는 황제의 북쪽 방면 카리시우스 문
(Charisian Gate) 에 배치되었으며 남쪽에는 제노바인 카테네오가 방어를 맡았고,
황금 문 (Golden Gate) 과 페게 문 (Pegae Gate) 은 베네치아인 필리포 콘타리니에게 맡겨졌습니다.
이는 1597년 정유재란에서 남우너성에 고니시 유키나가와 우키다 및 시미즈씨등 일본군 5만 6천이
포위하자 총병 양원의 지휘로 3천명의 명군은 동문에 중군 이신방, 남문에 천총 장표,
서문에 천총 생승선이 지키고 전라병사 이복남등 조선군 1천명이 북문 한곳을 맡았던 것과 유사합니다.
왜군 14만 중에 12만이 북상할 때 조선군은 황석산성에 5백과 남원성에 1천을 제외하고는 권율등
모두 숨거나 달아났으며 명군도 양원의 3천이 남원성을 지킨 것을 빼고는 전주의 진우충
명군 2천과 충주 오유방 명군 4천은 도주했으며, 모리와 구로다 왜군 4만이 천안으로
북상하자 조선군이 모두 달아난 가운데 명군 해생 2천과 파새 2천 기병이 저지에 나선것을 떠올립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에서 잘 방어된 도시라 오스만이 대군일지라도 함락하기는 어려웠으니,
최대한 막으면서 증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강력한 방어전략이었는데 비정규부대
아잡, 시파히를 뒤이어 정규군의 파상공세와 최후의 예니체리의 공격은 오스만 군의 장기였습니다.
4월 5일 메흐메트는 정예병들에 동로마 성채를 공격시키니 마르마라해 스투디우스의 성들은 함락되었고,
보스포루스해협 테라피아 요새도 무너졌으며 마르마라해 섬은 쉴레이만 발타오울루의 오스만 함대
가 점령했고, 우르반 거포가 성벽을 두들겼으나 낮은 정확도에 긴 장전시간으로 동로마는 바로 보수합니다.
금각만 입구에 쳐놓은 방어용 사슬 때문에 배들이 만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4월 20일 원군인
4척 선박이 치열한 싸움 끝에 봉쇄망을 뚫고 만으로 진입했으니 세 척은 교황이 지원한 제노바
함선이었고, 한척은 동로마 제국 함선이니 이들의 무사귀환으로 방어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메흐메트는 금각만이 열려있는한 공성의 성공이 어렵다고 보고 기발한 묘안을 내니, 금각만 북쪽
갈라타 산쪽에 기름칠한 통나무들을 놓아 그 위로 배가 지나갈 수 있는 지상통로를 만드니
이 통로를 통해서 갈라타의 산과 언덕 너머로 함선을 옮겨 금각만에 진입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4월 22일에 함대가 산을 넘어서 금각만으로 진입하는데.... 중립인 제노바인 식민지 페라에서 오는 보급을
위협할수 있었고, 방어군 사이 불안감이 퍼지자 28일 방어군은 오스만 함대를 화공선으로 공격하려
하지만 제노바인의 밀통으로 인해 오스만 군은 예상했고, 방어군은 오히려 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합니다.
오스만군 함대는 금각만 안에 주둔하게 되고, 방어군은 선원 가운데 일부를 성벽에 올리는등 금각만에
면한 성벽에도 병사들을 주둔시켜야 했으며, 5월 3일 동로마 내부의 물자들이 바닥을 보이니
소형 선박 하나가 야음을 틈타 방어선을 피해서 베네치아 함대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빠져나갑니다.
지상에서의 공격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막혔으니 예니체리 공세는 번번히 실패했으며 계속되는
포격은 성벽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모르토르로 가득찬 성벽은 좁은 틈새만
허용했을 뿐이라 병력들이 누차 투입되었으나, 성벽의 방어 체계 앞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5월 6일 성 로마누스문 방면이 포격으로 붕괴했는데.... 이쪽 성벽이 리쿠스강이 흘러드는 지역이라,
성벽을 보수하는 것은 버거웠고, 리쿠스 강이 만들어낸 골짜기로 인해 해자를 형성하기도
어려운 이곳은 공격도 쉽지는 않았으니 주스티니아니는 뒤쪽에 새 성벽을 쌓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5월 7일 메소티히온에 25,000명의 오스만군이 투입되었지만, 10분의 1 수준인 방어군에 의해 3시간의
격전 끝에 격퇴되지만, 공세로 지상군의 부담이 커지고 금각만 방면의 해군에서 또 다시 일부
병력을 빼와야 했고 12일 다시금 공세가 재개되었으니 오스만이 새 병력들이 공세에 투입됩니다.
성벽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병력들이 투입되니.... 황제의 근위대까지 동원되어 입구를 틀어막았으며
방어에 성공했고, 5월 18일 공성탑을 동원하여 해자를 넘어 외벽에 적은 피해로 접근하는데
성공했지만 수비대가 공성탑을 불살라 버렸으며 동로마는 그새에 다시 성벽을 보수하는데 성공합니다.
오스만군은 갱도 건설을 하니 5월 중순부터 공사가 시작되었고, 세르비아의 광산 노보 브르도
에서 파견한 지원군에 끌려온 광부들이 자아노스 파샤의 지휘 아래 공사를 진행하나,
스코틀랜드인 기술자 요하네스 그랜트가 반대 땅굴을 팠고 동로마 병사들이 인부들을 공격합니다.
방어군은 5월 16일, 오스만군이 판 갱도를 차단하고, 21일, 23일, 25일에 다른 갱도들을 차단하는데
성공하니 “그리스의 불” 투입과 전투 끝에 땅굴들은 파괴되었으며 방어군은 5월 23일 2명의
오스만 장교들을 사로잡았고.... 고문끝에 모든 갱도의 위치를 발설하니 모든 갱도들이 파괴됩니다.
오스만군 지휘부도 애가 타니 메흐메트 2세가 공성군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걸어보기도 하고, 공성기로 성벽
을 공략하기도 해봤으나 무용지물! 날짜가 바뀔수록 성벽 공격의 주력인 예니체리 부대의 손실은
점점 커져가니 오스만에게는 적이 많았고, 나중을 생각하면 예니체리 부대는 매우 중요한 자산 입니다.
결국 메흐메트 2세는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한하니, 모든 거주민과 황제 재산의 보호,
황제가 가진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대한 권리 보장 및 통치 위임, 도시에 남을 이들의 안전
보장 등을 골자로 한 내용으로 도시 공략에 애를 먹는 술탄으로서는 진심으로 한 제안이었을 것 입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술탄의 호의에 경의를 표했으며, 아나톨리아 및 술탄의 모든 점령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만 항복 권유는 거절하니.... "미안하오만, 도시를 넘겨주는 일은 짐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할수 없는 일이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사에 따라 죽기로 결정했고,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메흐메트 2세는 휘하 장수들을 모아 앞으로의 공성에 대해 참모회의를 여니 재상 할릴 파샤(Halil Paşa)
는 이미 오스만군의 피해가 막심하며, 공격은 무의미하다며 공성을 포기할 것을 주장했고 부재상
자아노스 파샤(Zağanos Paşa)는 술탄의 위엄에 타격을 입을 것을 들어 계속 공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5월 24일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는데, 달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상징으로 때마침 그 날 개기월식
이 있었으니 콘스탄티노폴리스 측에서는 도시가 패망할 흉조라고 여겼고 또 로마
제국은 첫 황제의 이름과 같은 사람의 치세에 멸망한다는 전설도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었는데,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초대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같은 이름입니다.
1,000여년전 서로마 제국이 로마 건국자였던 로물루스 및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이름이 같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 때 멸망한 전례가 있으니.... 며칠간 도시엔 엄청난 뇌우가 퍼부었고 짙은 안개
가 자욱했으니 이 모든 것이 도시가 패망할 불길한 징조로 여겨져서 방어군 측의 사기가 땅에 떨어집니다.
5월 26일 오스만군은 총공세 준비에 들어갔으며 27일은 5월 3일에 포위망을 빠져나갔던 베네치아 함선
특공대 12명이 귀환했으며, 해역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더이상의 서방 지원군은 없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으며 오스만군 쪽 첩자가 공세 일시를 알려주었지만 방어군 입장에서 할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5월 28일 이슬람 의식이 행해지고, 이맘들은 투입될 병사들을 독려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는 황제가 주선하는 예배가 열렸으니 황제는 가톨릭
과 정교회 양측을 대표했으며, 같은 날 황제는 수비군과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습니다.
“죽음을 감수할 만한 명분에는 네가지가 있다. 신앙, 고향, 가족, 조국이 그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적들이 우리를 위협하는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짐이 본의 아니게 그대들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면, 사죄하는 바이오. 이 순간부터, 라틴인과 로마인은 같은 신앙으로
뭉쳐진 한 백성들이오.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면, 우리는 이 도시를 지켜낼수 있을 것이오.”
5월 29일 1,000여년 동안 제국의 심장을 지켜주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드디어 무너지니....
자정에 1차 공격대로 오스만군측 기독교 병사들이 선봉으로 성벽을 향해 돌격했고,
뒤를 이어 비정규 아나톨리아 지역 튀르크 궁수들인 아잡(Azap) 의 공격이 뒤를 이었습니다.
블라혜르네 방면은 11세기에 지어진 곳으로 약하다고 판명되었고, 포격으로 거의 무너져가고 있었으니
1차 공격대는 벽 틈새로 비집고 들어갔으나, 수비군이 빠르게 재배치되어 적들을 몰아내었고 여명이
밝아져 올때까지 격전이 이어져 아잡으로 대표되는 비정규군과 기독교 군대의 전투는 성과가 없었습니다.
오스만군측 정규군인 아나톨리아 군단으로 구성된 2차 공격대의 공격이 이어졌으니도시의
북서쪽 방면에 집중된 파상공세에 동로마 병사들은 결사항전하며 막아냈지만, 자정
부터 이어진 공격에 지쳐가고 있었으니, 오스만 정규군은 앞서온 1차 공격대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싸움을 이어갔고, 방어군은 파상 공세에 점차 힘이 딸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방어선은 무너지지 않았으니, 오스만군은 제3차 공격대로 준비되어있던 예니체리 부대를 전부
투입했는데.... 날은 밝아오고 있었고,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방어군은 겨우 버텨내고 있었으나 계속
된 전투로 피로에 찌든 방어군에게 쉬지 않고 계속해 몰아붙이는 오스만군은 막을수 없는 적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수비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가 복부에 심한 중상을 입고 후송되자, 직속 부대인 제노바
군대도 뒤로 물러났는데... 그의 지휘아래 지옥 같은 공성전을 버텨내던 방어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으며, 제노바 군대가 철수한 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근위대와 함께 싸움을 이어가던
와중에 시민들의 출입구로 이용되던 비밀 쪽문인 케르카포르타 (Kerkaporta) 가 열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성벽 안으로 진입할 절호의 기회를 노리던 예니체리 군단은 문으로 돌진하니 아비규환 속에 문은 제대로
닫히지 못하고, 오스만군은 문을 통과해 방어탑을 점령하고 성문엔 오스만 군기가 세워집니다.
1000년 동안 단 한번 밖에 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던 철벽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어이없게도
방어군의 실수로 인해 적의 침입을 허용한 것인데.... 이미 성벽의 다른 지역도 압도적인
병력에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고, 마침내 깃발까지 올라가자, 방어군은 패닉에 빠지게 됩니다.
한편 남쪽 성벽에서도 울루바틀르 하산(Ulubatlı Hasan) 이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오스만의
깃발을 꽂았는데.... 그는 직후에 전사하였으나 오스만의 깃발이 꽂힌 것을 본
수비군은 패배를 직감했고, 오스만군은 동료의 시신을 넘어 성벽 전체를 제압하기에 이릅니다.
동로마 병사들은 성벽을 포기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고, 베네치아인
들은 그들의 배를 찾아 항구로 모여들었으며...... 나머지 병사들은
항복하거나, 성벽 아래로 투신하는 것으로 각자의 공방전을 마감하기 시작합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아비규환 속에서, 다가오는 오스만군에게 단신으로 기마 돌격해 거리에서 싸우는
병사들과 함께 죽었다고 전해지니 과연 문명 국가의 황제다운 최후인데, 고종 임금이 말을 타고
일본 군대로 돌격해 죽었더라면.... 하기사 조선의 왕들은 문약해 말을 탈줄 모르니 그건 어렵겠습니다?
도시로 진입한 오스만 병사들은 약탈을 위해 사방으로 흩어지니 메흐메트 2세는 거룩한 사도
성당을 원했기 때문에 아야 소피아성당으로 근위대를 보내 약탈을 막도록 명령
했으니 메흐메트가 중요 건물로 지정한 건물외 나머지 지역은 모두 약탈 대상이 되었습니다.
몇몇 운 좋은 시민들은 탈출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니... 베네치아인들이 탈출하려
시도했을 때는 금각만 쪽 성벽이 점령당한 시점이었지만, 병사들은 약탈에만
관심이 있었지 살육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은 덕분에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베네치아 지휘관들은 금각만 쪽 문을 부수고 나왔고, 난민들과 병사들을 싣고 금각만에 정박한
배들이 탈출하기 시작했는데..... 그 흐름에 황제의 휘하에 있던 배들도 항구를 빠져
나갔으니 오후에 오스만 해군이 금각만을 통제할 즈음에는 모든 배가 빠져나간 이후였습니다.
시민들은 하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대피하였으며 병사들은 그 앞 광장에 모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시민들은 병사들과 하기아 소피아의 청동 문이 그들을 보호해
주리라 믿었지만, 청동문은 결국 오스만군의 손에 열리게 되고 이들은 모두 노예로 팔리게 됩니다.
2,206년간 역사를 이어온 로마는 한 혈기왕성한 젊은 술탄에 멸망햇는데, 도시가 함락된후 오스만군의
약탈에 대해 베네치아 의사 니콜로 바르바로는 “도시에 흐르는 피가 마치 갑작스런 소나기 후의
도랑 속 물길 같았다. 튀르크인과 기독교인들의 시체는 바다 위에 마치 운하 속 과일들 처럼 떠다녔다.”
함락된 후에도 오스만군이 한동안 학살을 계속했으니 오스만군은 수비군이 완전히 와해되었다는 걸 알지
못하고 두달간 우리를 쩔쩔매게 한 적군이 남아있는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동로마인이나
서유럽인들을 학살하고 다녔던 것이지만, 상황을 파악하자 학살 보다는 노예로 잡아 파는 데 주력 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비규환이었는데 도시를 오스만의 새로운 수도로 삼기로 마음먹은 술탄은 완전히
폐허가 되는건 원치 않았기에 건물에 호위병을 보내 지키게 했지만... 헬게이트는 술탄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으니 오스만 군대는 메흐메트 2세가 허락한 사흘간 살육, 약탈과 강간 등을 저질렀습니다.
도시엔 4만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살해당한 사람은 4천명 정도이고 나머지 시민들 중 3만명이
노예로 팔려나가거나 도시를 탈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 기록에는 이를 본 메흐메트 2세가
충격에 빠져 하루만에 약탈을 금지했다지만 많은 중세 로마 제국의 문화유산들이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그 어떤 것도 이 끔찍한 상황에 비견될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집에서 나갔고, 그후 오스만군의 칼에 죽어나갔다. 누군가는 그들이 숨으려던 집과
성당에서 죽어나갔다. 분노한 오스만군은 자비가 없었다. 그들은 집을 털고, 죽이고, 겁탈했다.
훨씬 많은 이들이 남녀노소와 성직자를 가리지 않고 노예로 팔리기 위해 잡혀갔다. 백발의
노인들은 저항도 못하고 머리채를 잡힌채 끌려나왔고, 갓난아기들은 어머니 품에서
낚아채어졌다. 여자아이들은 강제결혼의 대상자들로 끌려갔다. 성당들은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성물들은 바닥에 내팽개쳐졌고, 십자가들은 뜯겨졌으며 성소들은 더럽혀졌다.
메흐메트 2세는 이 폐허들을 보고는 큰 슬픔을 느끼고, 파괴와 약탈에 사죄했다. 눈물이 그에
눈에서 흘러나왔고, 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우리가 이 모든 파괴를 저질렀단 말인가!" 그 의 영혼은 비탄에 가득 찼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도시의 혼란이 진정된후,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약탈을 중지시키고 군대를 벽 밖으로 내보냈다. 동로마
역사학자 요르요스 스프란지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의 상황과 술탄의 행적을 묘사했다.
"정복 3일째 술탄은 승리를 축하하며 포고령을 내렸다. 도시를 탈출하려고 애쓰는 시민들에 대한
적발을 중지했고 숨어있는 곳에서 나오게 했다. 자유민으로 남을 것이라 했으며,
무엇을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도시의 버려진 집과 재산들의 복구를 선언했다. 공성 전에
도시를 떠난 이들 것도 마찬가지였다. 떠난이들이 돌아왔을때, 신분과 종교를 보장받을 것이다. "
정복한 도시를 오스만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고, 제국의 대성전이자 랜드마크인 하기아 소피아는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지만 다른 그리스 정교회 성당들은 보존되었고, 새 콘스탄티노
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는 그리스인이며 동서교회 일치 반대파인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가 임명되었으니 새 주인 오스만 제국을 470년 동안 섬기게 될 운명이 온 것이다.
수비군 지휘관 조반니 주스티니아니는 부하들이 탈출선에 태웠으나 부상이 심해 1453년 6월 초에 사망해
시신은 히오스섬 산토 도미니코 성당에 안치했으나 1881년 지진으로 성당이 파괴되면서
유실되었다. 베네치아인 지롤라모 미노토는 함락 당시 오스만 군대에게 포로로 잡혔고 다음날 처형당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으로 오스만의 아나톨리아 영토와 발칸 반도(에디르네) 영토가 하나로
합쳐졌으며 이후 배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고 술탄이 주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를 정복함으로써 권위가 수직상승하여, 황제를 칭할수 있게 되었으며 재상
할릴 파샤를 처형하고 데브시르메인 자아노스 파샤를 재상으로 임명해 전제군주정을 확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