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밥을 먹고도 출근하지 않으니 듣기 싫은 소리가 생겼다. 청소차가 울리는 음악이었다. 단잠을 깨우는 새벽도 아니었지만 나는 싫었다. 그것은 실직의 현실을 확인시켜 주는 소음이었다. 모자라는 사람에게 바보소리가 싫듯 나는 이 소리 때문에 갈 곳 없어도 아침을 먹으면 밖으로 나갔었다. 그리고 찾은 곳이 도서관의 교양강좌였고 노래 부르기였다.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한바탕 목청을 돋우어 부르고 나면 답답한 가슴이 조금은 터일 것 같아서였다.
N도서관에는 가곡이 아닌 민요를 가리키는 곳도 있었다. 민요반은 내가 도서관 다니기를 일년 넘게 하고 같은 노래하는 곳이어도 처음이었다. 여자가 대부분이고 낯이 설어 가기를 망설이었지만 오라는 사람이 있어서 갔었다. 그러나 시간이 일러 그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온돌방 같은 바닥의 옆쪽 자리에 조심스레 가 앉았다. 방은 무엇 때문인지 앞 벽면 전체가 거울이어서 뒤에서 들어오는 사람들 모습이 환히 보였다. 선생이 자리를 잡을 때 쯤 기다리던 그 사람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그 사람은 삼십여 명이 앉아있는 방에 들어서자말자 나의 뒷모습을 알아보았을까. 거울 속에서 눈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냥 지나칠까봐 돌아앉으며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은 다름없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오셨군요.”하고 받아 주었다. 그리고 벽 쪽에 쌓여 있던 방석을 내 옆에 깔고 나란히 앉았다.
민요 부르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교재가 없었다. 그저 재미있다고 오래서 빈손으로 왔었다. 그 사람은 자기 책을 펴서 내 앞에 놓아주었다. 오래 가지고 다닌 듯 덧씌운 표지가 낡아 있었다. 그리고 악보가 없는 민요집인지라 노랫말에는 구비마다 곡의 장단고저를 쇄기문자 같은 기호로 표기해 놓고 있었다. 그것이 내 앞에 있는 것이 미안하여 그 사람 앞으로 밀었더니 자기는 한번씩만 보면 된다며 더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나는 그 사람과 나란히 앉아 노래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비록 그 사람의 권유로 왔지만 그래도 남녀가 유별하니 인사를 하고는 멀찍이 떨어져 앉을 줄 알았다. 가곡반에서는 그랬다. 남녀는 여간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나란히 앉기를 거북해 한다. 남녀부동석의 관습이 남은 탓이겠지만 그 사람은 스스럼없이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노래가 바뀌면 재빨리 책장을 넘겨 찾아주었고 가끔 선생이 절을 건너뛰면 그곳을 손가락으로 꼭꼭 짚어주었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가곡반에서다. 역시 여자가 많았고 함께 노래하다가 끝나면 그냥 뿔뿔이 헤어지는 그런 모임이었다. 젊은 여자선생님은 그것이 안타까웠던지 가끔 회식을 주선했지만 그래도 자장면을 먹고 나면 곧장 헤어졌었다. 그날도 나는 회식이 끝나고 혼자 걸어오다가 빨간 신호등 앞에서 멈췄다. 그러나 신호등만 보고 있을 수 없어 뒤돌아보았더니 그 사람도 서 있었다. 나는 방금 자장면을 같이 먹었던 사람이어서 인사를 했다. 그 동안은 한두 번을 마주쳤지만 인사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길을 건너고 함께 걸으면서 회식자리에서도 못해본 말을 나누었다.
한번은 가곡반을 마치고 함께 걸어 나왔다. 그 사람은 도서관 앞 도로를 여럿이 함께 건너려다 그냥 가는 나를 보고 건너지 않았다. 나와 나란히 걸으면서 그 사람은 잘 되던 남편의 사업이 갑자기 안 되고 해서 그것을 캐보려고 역시 도서관에서 하는 역학을 배웠다고 했다. 제법 알만하니 폐강이 되어 아쉽게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남편의 잘 풀리지 않는 것이 사주에 있더라는 말에 나도 그렇다며 내 것도 한번 봐 달랬더니 사주는 아무에게나 보이지 말고 꼭 대가(大家)에게 보이라고 했다.
그 사람과 도서관 가는 길은 같았지만 만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럴 것이 내가 걷는 사십분의 거리에서 대략 삼십분쯤에 그 사람과 만나지는 갈림길이 있었다. 출발도 형편에 따라 제각각일 것이니 움직이는 두 사람이 한 지점에서 마닥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을 마닥쳐 보려고 내 출발을 달리해보았지만 맞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날아가는 총알을 맞추는 것보다 더 어렵다며 포기를 했다. 그래도 그 사람과 헤어졌던 갈림길에서는 덧니가 살짝 보이는 밝은 미소의 얼굴이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서 모퉁이를 돌때도 뒤돌아보았다.
앞산자락에 나있는 도서관 가는 길이 연산홍으로 붉게 물들어져 가던 날이었다. 나는 그 갈림길에서 옆을 보고 또 고개를 들어 언덕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저만큼의 모퉁이를 막 돌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역시 그 사람이었다. 아무렇게 쏜 화살에 과녁이 찾아와 맞았겠지만 더디어 나는 날아가는 총알을 맞추었다. 그 사람은 짧은 시간에도 이런 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몇 년 전에 중국어가 좀 생소했을 때 중급수준까지를 배웠지만 역시 포기를 했다. 그때 같이 배운 사람들은 지금 강사도 하고 있다며 그것의 포기가 제일 가슴 아프다고 했다. 말이 끝나고도 그 사람의 좁혀진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사주 때문이었을까. 그 사람은 여러 가지 시작을 하고는 번번이 이루지 못했다. 나는 비록 끈기도 없어서 이루지를 못했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나친 비약 같지만 민요를 오년 째 배우고 있다는 것이 그 끈기를 말해주었다. 무엇이 그 사람에게 중도포기를 하게 했을까. 나는 곰곰히 곰 다리를 세어보았다. 역학을 배우게 한 그것,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우울한 환경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동병상련이라 했다. 그 사람의 노래 부르기도 나와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 사람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어느 시인이 읊은 지나온 순간들이 모두 꽃봉오리였다는 것을 나도 이제 알았다. 여름날의 베짱이 같은 노래 부르기는 나 같은 사람에게 맡기고 핀 꽃이 시들기 전에 비록 사주이었다 하더라도 중단했던 그것으로 가슴의 답답함을 뚫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첫댓글 사주를 보고 난 후 우울하게 살아간다면 아니봄만 못합니다. 지나가는 총알을 맞춘 주제가 저것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