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왕후 시해사건의 진실
이 시해사건은 일본의 명백한 "국가범죄로"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하며 특히 여성분들은 잊지 마십시요, 이 ㅣ욕을. ...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앞으로도 볼 수 없을 듯-일본 낭인들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인'을미사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록한 일본의 문서에 대해 알게되었습니다.
솔직히 내용을보고 소름이 끼쳤습니다.
당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낭인들 중 '에조' 라는 일본인이 쓴보고서형식의 문서인데...
일명'에조보고서'라고도 불리워집니다.
아래는 그'에조보고서'의 전문입니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 20여명에게 당한 강간묘사 보고서 공개
일본에서 "에조 보고서"라는, 편지 형식으로 된 정식 보고서가 있는데 에조라는 사람이 명성황후의 시해 장면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해놓았습니다.
먼저 낭인들이 20명 정도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무릎 꿇게 만들고 이를 말리는 세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 버리고 발로 짓밟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 쪽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의 아랫도리를 벗겼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20명이 강간을 했습니다... 살아있을 때도 하고 한 6명 째에 죽어있었는데도 계속 했습니다... 강간을 시체에 하는게 '시간' 이고, 살아있는 사람에 하는게 '윤간'인데 명성황후는 시간과 윤간을 다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 말리는 충신의 사지를 다 잘라버렸습니다.
어떤 놈들이 한 나라의 황후를 그렇게 대하는가? 이 경우는 고대에도 근대에도 절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 후 너덜너덜해진 명성황후의 시체에 얼굴부터 발 끝까지 차례대로 한 명씩 칼로 쑤셨습니다. 죽은 후에도..(에조도 함)
그리고 여자로써 가슴도 도려내는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그것을 길거리 서민들이 다 보고있는데서 시행했습니다.
그 다음에 명성황후 시체에 기름 붓고 불로 활활 태웠습니다.
일본 사학자가 이 문서를 발견하고 수치스러워서 공개를 안 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공개를 2002년 FIFA 한일월드컵 폴란드전때 했는데 당시 조중동 어디에도 기사를 실지 않았습니다.
사건에 가담한 범인들중 상당수가 지식인들이었고 그 중에 여섯명은 유학파였습니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사실을 안 러시아 공사관이 곧 바로 일본 정부에 알리고 일본 낭인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러고는 시해사건의 죄를 사건에 참여한조선인들에게 덮어 버린후일본 낭인들은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딩시 궁궐(광화문) 수비대장인 우범선을 일본 군부와 내통하여, 자객(낭인)20명을 궁궐로 안내한 사건이 밝혀지자, 일본으로 도망처서 일본 여인과 결혼 아들을 얻었으나, 조선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생활고로 아들을 고아원에 보냈다가 다시 찾아와서 어머니의 노력으로 농학 박사가 되었다, 건국정부의 초청으로 처음 씨 없는 수박을 일본에서 도입, 경주에서 성공한 우장춘
박사가 그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