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원의 산방주변 정원 스케치맵(2020년 봄)
농원 아래쪽 정원 스케치맵(2020년 봄)
2022년 새해입니다. 그리고 오늘이 어느새 1월의 여섯째 날, 어제 5일은 겨울 중 가장 추운 시기인 소한(小寒)의 절기가 시작된 날입니다. 소한 날의 추위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지만, 소한에 들기 전에는 영하 20℃에 가까운 강추위가 연거푸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겨울이 깊어졌습니다.
이번 겨울에 들어 새로 쓰기 시작한 스케치북을 펼쳤습니다. 이 스케치북은 농원 일기장과 함께 농원을 가꾸는 데 참고가 되는 메모를 하기도 하고 새롭게 가꿀 정원 또는 텃밭의 모습을 스케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무슨 씨앗을 언제 뿌리고, 또 모종을 심었는지, 그 공간을 어떻게 머릿속에 그리고 실제로 가꾸었는지 따위를 기록하는 곳입니다. 어떤 새로운 들꽃이나 나무가 어디에 몇 포기, 몇 그루 심어졌는지가 표시된 정원의 스케치맵이 그려지는가 하면, 각각의 작물이 심어진 날짜와 작목의 이름 따위가 구획되어 빈틈없이 들어찬 텃밭의 평면도가 그려지기도 합니다.
새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농원 일기장도 떠들쳐 봅니다. 농원 일기장에는 끊임없이 변화되는 농원의 모습과 느낌, 농원에서의 주요 활동과 그때그때 새롭게 느끼고 생각했던 것과 같은 것들이 주간 단위 별로 두서없이 적혀 있습니다. 내년에는 이걸 꼭 심어봐야지, 그리고 이것은 재배 면적을 좀 더 넓혀야지 하는 따위의 메모가 들어 있기도 합니다. 여기저기에서 가져다 두었던 꽃과 나무, 작물 종자 따위의 카탈로그도 살펴봅니다.
사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있는 한겨울 지금의 시간에는 정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급한 마음은 두어 달 뒤면 맞이할 새봄에 대한 기대에 마음이 부풀며 올해 새롭게 가꾸게 될 정원과 텃밭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화가가 마치 밑그림을 그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각각의 공간을 머릿속에 떠올려 새롭게 가꾸게 될 모습을 그려 봅니다 그리고는 이내 생각을 고쳐 그렸던 그림을 지워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려 보고는 합니다. 여러 다른 생각들이 쉴 새 없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새로 심거나 씨앗을 뿌릴 것들, 옮겨오고 옮겨갈 것들, 솎아낼 것들, 통째로 파내버리거나 베어버릴 것들, 온전히 새롭게 꾸며보고 싶은 공간들...
산골의 농원은 하나의 커다란 캔버스입니다. 다만 사각의 단정한 캔버스가 아니라, 굽이진 농원의 오르막 안길을 따라 길은 구부러지고 땅뙈기는 들쑥날쑥 경사가 지기도 한 부정형의 캔버스입니다. 또 그것은 아무런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비인 공간의 새로운 캔버스가 아니라, 이미 거푸 가득하게 색이 칠해진 그림이 그려진 해묵은 캔버스입니다. 정원의 공간은 곳곳이 해를 거듭하며 여러 새로운 것들이 심어 져서 이미 많은 것들이 자리를 다투며 자라고 있습니다.
농원의 캔버스는 크고 작은 여러 조각의 화폭으로 모자이크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캔버스는 크게 두 종류의 조각난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공간의 캔버스는 여러 가지 풀꽃과 나무를 한데 심어 가꾸는 곳입니다. 정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 공간에는 이미 한 틈의 여백도 없이 수많은 것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마른 풀대의 그루터기를 만든 것들도 있지만, 그 잔해마저 사그라져서 그 모습은 간데없고 땅속의 뿌리만이 남겨져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곳곳에 나무가 자라고 있기도 합니다. 이 공간은 해가 바뀌어도 사실 크게 손을 댈 곳은 별로 없습니다. 심지 않아도 무섭게 자라나는 잡초를 뽑아주는 일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하지만 벼르고 별러서 마음 밖에 난 것을 파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심어 줄 곳이 없지는 않습니다. 또 때로는 각자가 자라고 있는 서로의 자리를 바꿔줬으면 하는 공간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농원에는 이와는 다른 모습의 캔버스가 있습니다. 모종밭, 텃밭과 같이 해마다 온전히 새롭게 가꿔야만 하는 공간입니다. 매년 되풀이해서 땅을 갈고 퇴비를 넣어서 새롭게 작물을 심어 가꾸는 밭입니다. 같은 작물이라 하더라도 같은 공간에 되 심어 가꾸기보다는 다른 작물과 자리를 바꿔서 심어 가꿈으로써 그들이 더 잘 자라게 하는 것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이 밭에는 가을에 심어서 그해 겨울을 나는 것도 있지만, 그 대개의 공간은 비어 있어서 봄이면 다시 씨앗을 뿌리고 심을 것들을 새로 정해야 합니다. 이맘때면 지난해의 기록과 기억을 더듬어 새로 심어 가꿀 여러 가지의 것들을 머리에 그리며 그들 각자의 공간 계획을 스케치북에 옮겨 그려봅니다.
지난해도 정원에 많은 것들을 새로 심었습니다. 봄이 늦게 오는 두메산골의 정원 땅이 풀리기 무섭게 심기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꽃망울이 부풀기 시작하는 옥매와 겹홍매화 각 1그루씩을 심었습니다. 산림조합 묘목장에 옥매화(玉梅花)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 매화는 흰 꽃을 피우는 옥매(玉梅)가 아니라 짙은 분홍색 꽃을 피우는 홍매(紅梅)의 한 종류였습니다. 어깨만 한 높이의 이 나무는 어느 만큼의 키로 자랄지 궁금합니다. 다음에는 빨간 열매가 보기 좋은 산사나무를 심었습니다. 농원 안길을 따라 좌우로 3년생쯤의 작은 묘목 5그루를 심었는데 열매를 맺기까지는 몇 해가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 집 앞 도랑 가 정원에는 그 키가 2자쯤(약 60cm)인 산목련 1그루와 ‘스타버스트 쉬폰(Starburst Chiffon)’이라는 이름의 그와 비슷한 키의 무궁화 1그루를 심기도 했습니다.
위쪽 도랑 가 둑에는 적자색 예쁜 열매가 달리는 홍자단(紅紫檀)이라는 키 작은 덩굴성 떨기나무를 심었습니다. 아래쪽 도랑둑에는 미선나무 덤불 아래 스스로 난 아주 작은 묘목을 여남은 떨기 옮겨 심었습니다. 2그루의 과실수 체리를 심기도 했습니다. 적힌 이름이 없이 파랑과 하얀색 표찰이 붙어있는 체리였는데 화원의 카탈로그를 뒤져보니 각각 붉은색과 노란색 열매가 달리는 ‘레이니어’와 ‘월산금’이라는 품종의 과수로 보였습니다. 보통은 추위에 약한 이들 체리 묘목이 이번 겨울 추위를 잘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올해는 무슨 나무를 새로 심을까? 지난해 심은 체리가 뿌리를 잘 내렸다면 2~3그루 이 왜성 체리 나무를 그 옆으로 더 심었으면 싶습니다. 늙은 자두나무를 베내고 그 자리에는 적자색 열매가 예쁜 마가목(馬牙木)을 2~3그루 더 심고 싶기도 합니다. 농원 안길을 따라서는 지난해 개나리를 심었던 길가에 연이어서 꽃이 예쁜 떨기나무인 줄댕강나무와 예쁜 열매를 다는 서너 종류의 또 다른 떨기나무 한두 그루씩을 새로 심을까 합니다. 붉거나 주황의 열매가 예쁜 나무로는 덜꿩나무, 가막살나무, 참빗살나무, 매발톱나무, 회나무 등이 있습니다. 매자나무는 노란 꽃과 붉은 열매가 모두 예쁩니다. 매자나무는 Berberis koreana라는 학명이 붙어있는 우리의 특산 식물로 그 모습도 예쁜데 사람들이 왜 이를 즐겨 심지 않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도시의 길가에 심기도 하는 홍자색 열매가 달리는 낙상홍과 하양 열매가 이채로운 흰말채나무 따위도 생각 중입니다.
그리고 올해는 너무 오래된 일부의 과수나무를 잘라내야만 합니다. 이들이 이제는 나이를 먹고 키를 키워서 열매를 맺기보다는 햇빛을 막는 장애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아한 품새로 크게 자란 매실나무는 곳곳으로 내뻗는 곁가지를 과감하게 다듬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는 달리 그 기능을 다 한 자두나무는 눈물을 머금고 베어내야만 합니다. 밭둑에서 너무도 많이 커버린 벚나무, 산벚나무, 은행나무 역시 몇 그루만을 남겨두고는 베어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솎아내는 개념이어서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무엇인가를 새로 심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나무가 심어지지 않은 정원 공간의 대부분에는 여러해살이 숙근성식물(宿根性植物)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처녀치마, 노랑너도바람꽃, 앵초, 제비꽃, 돌단풍, 할미꽃, 은방울꽃, 족도리풀, 맥문동, 무릇, 벌개미취, 개미취, 구절초, 참취, 참나리, 하늘나리, 원추리, 상사화, 함박꽃 작약과 모란꽃 목단, 붓꽃, 노랑꽃창포, 범부채, 뻐꾹나리, 꽃범의꼬리, 접시꽃, 참취와 곰취 비비추, 부처꽃, 삼잎국화, 옥잠화, 풀협죽도, 영아자, 마거리트, 루드베키아... 공들여 심지 않아도 저절로 나는 한해살이, 두해살이, 여러해살이 풀꽃들도 적지 않습니다. 양지꽃, 산괴불주머니, 괭이밥, 꽃다지, 냉이, 봄맞이, 달래, 구슬봉이, 무릇, 머위, 솜방망이, 민들레와 질경이, 애기똥풀, 미나리냉이, 광대수염, 우산나물, 개망초, 쥐오줌풀, 노루오줌, 익모초, 물봉선, 장구채, 패랭이, 영아자, 쥐손이풀, 고추나물, 박주가리, 메꽃, 꽈리, 마타리, 꽃향유, 개미취, 산국, 쑥부쟁이, 용담, 인동초, 억새와 갈대...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이 이 공간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이 자라는 곳은 일일이 공들여 심어 가꾸는 공간인 곳이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각자가 스스로 자리를 잡아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공간이 더 많습니다. 5,000㎡ 정도의 면적 중 절반쯤은 이렇게 풀꽃과 나무들이 스스로 자리를 잡아 자라고 있는 정원의 공간입니다. 그리고 이 공간 절반쯤의 가꿔진 정원에는 나름 심어 가꾼 것들이, 다른 절반의 공간에는 저절로 난 것들이 자라는 그야말로 야생의 정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이 알뜰하게 가꾸어진 곳과 가꾸어지지 않은 곳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공간이 있는가 하면, 그 뚜렷한 경계가 없이 서로 섞여 있기도 하고, 심어진 것과 스스로 난 것들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 있기도 합니다. (...계속) (2022.1.6.)
첫댓글 순우친구의 오늘 글은 장엄한 한편의 서사시를 보는 것 같네요.이 '스케치맵'은 아이디어도 좋구,솜씨도 좋은 하나의 창조물이네요.
대한민국에 이런 농부들만 있다면,농업대국이 될 것 같네요.그야말로 꿈과 희망이 가득찬 스케치북이네요. 성급한 마음으로 새봄을
기다리는 그 마음을 이해할 것 같네요.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요 작가의 심정이군요.제가 홍매화 50여그루를 우리 꿈의동산에
심고, 11년이상을 가꿔본 바로는 홍매화는 추위에 상당히 약하므로 겨울에는 짚으로 반드시 싸줘야할 것 같네요.
참 부지런하게 열정적으로 농원을 가꾸시는 순우친구에게 힘찬 응원의 박수 보냅니다.장편의 글,감사해요.
대단합니다. 이처럼 매사에 꼼꼼하고 빈틈없으니 마치 미켈란젤로의 밑그림을 보는듯 합니다. 위대한 대작가에 버금가는 현대판 최고의 영농인을 대하니 너무 반갑습니다. 종종 보도에 의하면 수년간에 걸쳐 나무를 심고 가꾸어 유명한 관광명소를 이룬 곳이 소개되던데 그 이상으로 주변을 넓히고 많은 품종을 들여와 최고의 힐링 장소로 만들어 가시길 바랍니다! 처음 들어보는 식물 이름에는 매양 주눅이 드네요!
꿈과 할일이 많은 순우는 역시 대단합니다.
참다운 자유인이란 대자연과 하나
가되어 서로 속삭임이 아닌가 생
각됩니다.
산간지역에 날씨도 추울텐데
항상 건강관리 잘 하세요.
셈세한 서사시에 찬사를 보냅니
다.
순우, 대단하십니다. 농림부장관이나 국토부 장관님으로 모셔야겠네요. 일년 아니 몇년을 내다보고 설계하고 조정하고 ㅡ 이런 세심함과 치밀함이 ㅡ 감탄하여 마지 않습니다. 그저 하루를 어찌 지낼까 하며 산에나 가고 당구장에나 들락거라는 나를 뒤돌아 보네요. ㅡㅡㅡ 하기야 사는 모습이 천차만별이고 스스로 거기에 만족하고 합리화하며 사는 게 인생이긴 하지만요.
15년 전 귀촌하여 농사를 짓고 있지요. 연구년을 할 때 농사일기를 일 년동안 쓴 적이 있는데, 그것이 매년 농사를 지을 때 큰 참고가 되지요. 요즘 처음에 전문가의 도움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종종 하지요. 뒤늦게 계곡방향 벚나무를 베어내고 각종 유실수를 심으면서 후회한 적이 있고, 조경을 위해 처음 설치했던 솟대, 물레방아, 원두막이 수명을 다해 다시 개비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체력도 딸려 꼭 필요한 작물만 심고, 곤드래 눈개승마 명이나물 부지깽이 어수리 등 다년생 식물을 많이 심어 노동력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돈이 들더라도 자연분해되는 종이비닐을 사용하여 노동력을 줄여볼 예정입니다.
백년대계를 꿈꾸시는 분 같군요. 넓지 않은 농토에 그림을 그리듯 하는 모습이 대단하십니다. 몇 년 후에 그 가치가 드러날 것 같습니다. 흙과 땅과 하늘과 함께 사는 진정한 자연인이십니다. 게다가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재주를 가졌으니 후대에 길이 남을 명작이군요. 꿈을 가지고 있음은 아직도 젊었다는 증거이지요. 아름다운 삶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