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에게 "화살 한 자루는 쉽게 부러지지만, 세 자루가 모이면 부러지지 않는다"라며 형제간의 우애와 단결을 강조한 일화로 매우 유명합니다. 이 가르침 덕분에 세 아들(모리 타카모토,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은 분열 없이 가문을 단단히 지탱했다. 이를 세 자루의 화살 (삼자훈, 三子教訓状)이라 한다.
"전(前) 스오·나가토 국(防州)의 태수이자, 사후 일품(一品)에 증직되신 일인동태대거사(모리 모토나리)의 초상화에 붙임." 모토나리가 숨을 거둔 해인 '융경 신미(隆慶 辛未, 1571년) 6월 14일'을 명시하며 그의 서거를 추모하고 있다. (※ 융경은 당시 명나라의 연호)
이 찬문은 단순한 종교적 추도문이 아니라, "융경 신미년(1571년)에 세상을 떠난 주고쿠의 영웅 모리 모토나리가 나라를 구하고 가문을 일으킨 백전노장의 영걸이었음을 천하에 알리며, 1591년 여름에 그의 초상 위에 이 기록을 남긴다"는 내용이다. 소영주에서 시작해 대다이묘의 반열에 오른 모토나리의 영광스러운 일생과 사후 가문의 번창을 한문 미문(美文)으로 극찬한 귀중한 16세기 말의 1차 사료이다.
텐쇼(天正) 19년(1591년)에 쓰인 찬문(초상화 상단의 글귀)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토나리가 사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모토나리가 66세 때 장남인 모리 타카모토(毛利隆元)가 그리게 했던 모토나리 초상화(야마구치시 도요사카 신사 소장)와도 이목구비의 특징이 매우 닮아 있어, 모토나리의 실제 풍모를 오늘날에 전해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첫댓글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는 일본 센고쿠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략가이다.
초상은 독특한 문양(일문삼성 문양, 一文字三星)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다.
아키 국(현재의 히로시마현)의 작은 소영주로 출발했으나, 탁월한 외교술과 전술, 가문 연합 체제를 활용해 당시 거대 세력이었던 오우치 가문과 아마고 가문을 무너뜨리고 일본 서부(주고쿠 지방) 10개 국을 지배하는 거대 다이묘로 성장했다.
자식들에게 "화살 한 자루는 쉽게 부러지지만, 세 자루가 모이면 부러지지 않는다"라며 형제간의 우애와 단결을 강조한 일화로 매우 유명합니다. 이 가르침 덕분에 세 아들(모리 타카모토,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은 분열 없이 가문을 단단히 지탱했다.
이를 세 자루의 화살 (삼자훈, 三子教訓状)이라 한다.
이 초상화 상단에는 승려 기슌 료키(熙春龍喜)가 쓴 찬문이 있어 제작 연대(1591년)를 명확히 알 수 있으며, 센고쿠 시대 대다이묘의 위엄과 실제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釋文
前防州太守日禋洞泰大居士肖像
仲夏月上澣二日 旹 隆慶辛未 六月十四日
共惟
贊曰 大公之德 涵大業 天下竹帛 不足載...
南國彈指 旹禪師住之 岬以精 大居士有像 於乎 融泉寺山下...
祖老大聖一精舍 号 洞春寺...
... 公唯然 於是 乃事 卒能守能産 是亦久 爝資為 禋福 茲 占天下 憤慨也 抱眞 憂世...
隆慶辛未 百战 洪 惟 守太守 州杰 亦 割巨 於 髫省 允 吾公 舉義 旗以乘玄 卒大軍 赴海西 戰精 兵下関 在祖聖
天正十九 辛卯 仲夏
前防州 贈一品 守日禋洞泰大居士肖像
찬문은 모리 모토나리의 법명인 '일인동태대거사(日禋洞泰大居士)'를 모시며 그의 일생과 가문의 영광을 찬양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전(前) 스오·나가토 국(防州)의 태수이자, 사후 일품(一品)에 증직되신 일인동태대거사(모리 모토나리)의 초상화에 붙임."
모토나리가 숨을 거둔 해인 '융경 신미(隆慶 辛未, 1571년) 6월 14일'을 명시하며 그의 서거를 추모하고 있다. (※ 융경은 당시 명나라의 연호)
"삼가 생각건대, 대공(모리 모토나리)의 덕은 거대한 대업을 머금었으니, 천하의 역사책(竹帛)으로도 그 공적을 다 기록하기 부족하다. 남쪽 국토를 평정하고 지략을 펼치시니..."
모토나리의 위패를 모신 보리사인 '동춘사(洞春寺, 도슌지)' 및 융천사(融泉寺) 계열 사찰의 유래를 언급하며, 장남 타카모토 등 자손들이 대를 이어 영지를 지키고 가업을 성산(能産)한 것을 기리고 있다.
"백 번의 전투를 치르며 고향과 주고쿠(中国) 땅을 지켜낸 영걸이셨다. 의로운 깃발을 높이 들고 대군을 거느려 해서(바다 서쪽)로 부임하였으며, 시모노세키(下関) 등지에서 정예 병사를 이끌고 싸우셨다."
글의 마지막에는 '텐쇼 19년 신묘년(天正十九年 辛卯, 1591년) 한여름(仲夏)'에 이 찬문을 완성하여 바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찬문은 단순한 종교적 추도문이 아니라, "융경 신미년(1571년)에 세상을 떠난 주고쿠의 영웅 모리 모토나리가 나라를 구하고 가문을 일으킨 백전노장의 영걸이었음을 천하에 알리며, 1591년 여름에 그의 초상 위에 이 기록을 남긴다"는 내용이다.
소영주에서 시작해 대다이묘의 반열에 오른 모토나리의 영광스러운 일생과 사후 가문의 번창을 한문 미문(美文)으로 극찬한 귀중한 16세기 말의 1차 사료이다.
안내문
모리 모토나리 초상화 (복제본) 1폭
희춘용희(기슌 료키) 찬문 / 모모야마 시대 (16세기)
지본채색 · 원본은 중요문화재
모리 가문을 주고쿠(中国) 지방 제일의 대다이묘(大名)로 도약시킨 모리 모토나리(1497~1571)의 초상화이다.
텐쇼(天正) 19년(1591년)에 쓰인 찬문(초상화 상단의 글귀)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토나리가 사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모토나리가 66세 때 장남인 모리 타카모토(毛利隆元)가 그리게 했던 모토나리 초상화(야마구치시 도요사카 신사 소장)와도 이목구비의 특징이 매우 닮아 있어, 모토나리의 실제 풍모를 오늘날에 전해주는 귀중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