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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상황실에서
증 언 자 : 이재의(남)
생년월일 : 1956.(당시 나이 24세)
직 업 : 대학생(현재 기자)
조사일시 : 1988. 8
개 요
5월 18일부터 금남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등지를 돌아다니며 시위에 참여했다. 친구, 후배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5월 22일 도청에서 상황실장으로 많은 일들을 해 낸다.
공수들의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되다
언제 계엄령이나 휴교령이 떨어질 지 예견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신변보호를 위해 5월 17일은 중흥동에 있는 형 집에서 잠을 자고 둘째형 집으로 갔다.
5월 18일 오전 8시쯤 전남대 정문으로 가보니 군인과 학생 몇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를 들어가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군인들과 학생들간에 약간의 대립이 있는 것을 보고 둘째형의 가게로 돌아왔다. 10시 30분쯤 밖이 소란스러워서 나와보니 시외버스 공용공용터미널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백-2백여 명의 시위대가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녹영 씨가 잡혀갔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조직적인 싸움이라기보다는 구호도 통일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박몽구 등 낯익은 얼굴이 선두에 보이기도 하였다. 나는 시위대에 합세하여 금남로로 갔다. 충장로와 광주공원까지 구호를 외치며 진출하기도 했다.
11시 30분쯤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 도로 가운데 모여든 2백여 명의 학생들은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점점 불어나 5백여 명 정도 되었고 사방에서 시민들이 모여들었으며 학생들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계속 구호를 외치면서 시민들의 참여를 촉구했지만 시민들은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시위대를 전경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빠져 나왔다. 내가 대열에서 이탈한 뒤 전투경찰이 시위대를 에워싸고 최루탄을 쏘아 댔다. 대열이 흩어졌다. 학생들은 달아났고 경찰들은 쫓아가서 곤봉으로 때리고 잡아갔다. 대열이 거의 해산되는 것을 보고 걸어서 다시 가게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 오후 2시쯤 되자 금남로에서의 시위가 한층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돌을 들고 전경들에게 공격했고 전화박스를 넘어뜨려 바리케이드로 사용하기도 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도 눈에 띄었다. 최루탄 하나가 터지지 않고 내 가까이 있는 것을 보고 발로 찼는데 최루탄이 터지는 바람에 가스를 호되게 마셨다. 나는 너무나 매워서 가게로 들어가 씻고 다시 나왔다.
오후 4시쯤 되자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주위에 공수부대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수들은 차에서 내리더니 3, 4명씩 1조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무자비한 진압이 최초로 시작된 곳이었다. 공수들은 지나가는 시내버스를 세우고 올라가서 젊은 청년들을 가차없이 두들겨패고 차에서 끌어내렸다. 일단 시위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와 어깨를 때려 쓰러뜨리고 3, 4명이 한꺼번에 달려 들어 군화발로 찼다. 시민들은 기겁을 하고 가게나 다방, 아무 곳이나 뛰어들어 갔다. 더군다나 공수들은 절대로 그냥 돌아가지 않았다. 집집마다 가택수색을 했고 끝까지 쫓아가 학생들을 질질 끌고 갔다.
나는 북동우체국 옥상으로 올라갔다. 고개만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한 학생이 수창국민학교 골목으로 도망가다 잡혀 두들겨맞고 있었다. 3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공수대원들은 골목마다 뛰어다니면서 주변에 숨어 있는 청년들을 잡아 두들겨패고 손목을 뒤로 하여 포승줄로 묶고는 차에다 던져올렸다. 차 위에서는 무전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잡혀온 사람들을 발로 차고 몽둥이로 난타했다. 차가 가득 차면 어디론가 떠나고 다시 빈 차가 왔다.
거리에는 살기가 돌고 골목마다 비명이 요란했다. 이를 바라보던 할아버지 한 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 세상에 6.25도 경험했지만 이렇게 잔인한 것은 처음 봤다. 저놈들은 백정과도 같은 놈들이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저러느냐?"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
나는 집에를 들어갈까 하다 위험할 것 같아서 자전거를 타고 중흥동 형 집으로 갔다. 이날 밤 통금시간이 8시로 당겨진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잠을 잤다.
싸움의 양상이 바뀌고, 광주시민의 분노가 치솟다
19일 아침 다시 북동우체국 옆 형 가게로 나왔다. 하룻밤 사이에 싸움의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제 하루 무방비상태로 당한 데 대한 보상심리도 있었지만 광주시민의 얼굴에는 이글거리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집에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 걱정 때문에 오전부터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순식간에 금남로를 빽빽이 메웠고 시간이 갈수록 숫자는 불어났다. 수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을 보고 있던 군과 경찰은 확성기와 군헬기를 동원하여 해산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해산하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시민들은 공중에 떠 있는 헬기를 향해 주먹질과 욕설을 퍼부었다. 이때 나는 후배들 몇명을 만나서 화염병을 만들어 싸워야겠다고 이야기했다. 형 가게로 돌아와서 화염병을 만들어 날라 주곤 하였다. 이를 본 방송국에 근무하는 선배 한 분은 수고한다며 보태어 쓰라고 오천 원 한 장을 주셨다. 이 돈으로 다시 빈 병과 석유를 마련하여 택시를 타고 외곽으로 빠진 후 화염병을 제작하여 수송해 주었다. 공수가 쫓아오면 시위대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어 싸움은 치열했다.
그러나 물리력을 갖춘 공수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시위대는 거의 흩어져버렸다. 분노와 허망함을 가슴에 담고 형 가게로 갔다. 형님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돌아 볼 심산으로 천변을 돌아 충장로 지하상가 공사장으로 갔다. 장사꾼으로 가장하기 위하여 자전거 뒤에는 원단(양복기지)을 실었다. 공사장 주변은 자갈밭이었다. 황금동 콜박스 부근에 자전거를 세우고 충장로로 갔다. 이미 그곳에서는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황금동 콜박스 쪽으로 도망을 갔다. 황금동 일대 술집 여자들도 이를 뿌드득 갈며 식칼을 들고 다니면서 공수들의 행위에 치을 떨었다. 그들은 콜록이는 학생들에게 치약을 갖다주기도 하고 돌도 날라다주었으며 마스크까지 가게에서 사다주었다.
오후 3시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는 5백-1천 명 정도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내 진출을 시도하려다 공수부대가 미는 바람에 로터리로 밀려났다. 공수대 중대병력이 구역 부근의 소방서를 지키고 있었다. 물러났던 시민들은 다시 로터리 가운데로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천여 명의 군중이 집결되자 겁도 났지만 한판 크게 벌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에게 선동을 하라고 하고, 나는 뒤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시민들과 함께 싸우기로 했다. 후배가 시민들 사이로 뛰어들어가 외쳤다.
"광주시민을 몰살하려고 하는 저 괴물들을 몰아내도록 합시다."
그리고 직접 앞으로 나아가 공중전화 박스와 가드레일을 부수자 시민들이 일시에 합류하여 순식간에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후문, 구역 방향으로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시민들과 나는 후배와 함께 보도블럭을 깨어 공수대에게 던졌다. 용감한 청년들 몇 사람이 넘어진 공중전화 박스 뒤에 몸을 숨기고 전화박스를 은폐물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최루탄이 날아오면 잠시 물러났다가 전진하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계엄군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갑차가 갑자기 정면으로 뛰어나와 바리케이드를 부숴버리고 길 한복판의 시민들을 양쪽으로 갈라놓았다.
캐비닛을 은신처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많이 불어났다. 그러자 광남로를 따라서 공수부대를 실은 군용 트럭 10여 대가 들이닥쳤다. 공수대는 시위대의 뒤쪽에서부터 공격을 하면서 거리를 좁혀왔다. 공수대원 쪽에서도 흩어지면 시위군중들에게 포위되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는 군중 속으로 깊숙이 추격하지는 않았고 1개 소대 혹은 중대 규모로 열을 지어 다가왔다. 그들은 시위대가 흩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갑자기 방독면을 쓰더니 최루탄을 수없이 많이 쏘아댔다. 시위대는 주변 골목으로 흩어졌다. 나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빌딩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최루가스가 점점 올라오기 시작했다. 숨을 자리를 뚫어놓고 공격을 하더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숨을 곳을 찾았다. 그곳에는 방이 3개 있었다. 그 중 한 방에 캐비닛처럼 생긴 벽장 하나가 있어서 들어가보니 그럴싸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시위대는 이미 다 흩어지고 밖은 조용했다. 옥상에서는 10여 명의 청년들이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로에는 최루탄 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었고, 공수들은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방금 전 그곳에서 붙잡힌 학생들 15명 정도가 로터리 한가운데서 머리를 땅에 처박은 채 줄지어 엎드려 있었다.
그때 그 중에서 제일 뒤에 있던 고등학생 하나가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북동 청과물공판장 골목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고 달아났다. 옥상에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공수대에게 무자비하게 두들겨맞았다. 이를 바라보던 옥상의 몇몇 사람들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보도블럭을 깨서 공수들을 향해 던졌다. 도로를 지키고 있던 공수들은 건물 옥상에서 던진 돌에 머리도 맞고 몸도 맞았다. 옥상에 있던 사람들은 더욱 신이나 계속 던졌다. 그러자 맞고 있던 10여 명의 공수들이 건물 속으로 쫓아 들어왔다.
나는 다시 도망을 가야 했다. 그래서 처음에 건물에 들어와 찾아두었던 피신처를 찾았지만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공수들이 쫓아오는데 계속 찾을 수는 없었다. 10미터 정도 되는 복도에서 뛰었더니 화장실이 나왔다.
화장실에는 작은 유리창문이 있었다. 그곳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철근 조각도 있고 삼호건물 공사판이 보였다. 나는 그곳으로 빠져나와 계속 뛰었다. 내 뒤로 도망오던 사람은 공수에게 잡혔다.
삼호건물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도망쳐 오는 나를 보고 지하실로 도망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들 중 아무에게나 망치 하나를 뺏어들고 일을 하는 척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얼마 후 공수들이 쫓아와 두리번거리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방금 도망간 청년 하나를 보지 않았소?"
"잘 모르겠소. 여기는 없소."
인부들은 자기들 할일만 계속했다. 그러자 공수들은 되돌아갔다.
나는 얼른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에는 10여 명의 청년들이 숨어 있었다. 나는 굴러다니는 스티로폴을 들고 몸을 숨겨보기도 하고 지하실 한쪽에 문이 하나 붙어 있었는데 그곳으로 끼어 있어보기도 하면서 살 수 있는 방도를 찾았다. 하지만 불안했다. 지하실 구석에는 사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틈 사이로 밖을 보니까 싸움은 다 끝나고 공수들만 있었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보일러실을 통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북동우체국 쪽으로 돌아 형님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후배와 친구 한 명이 와 있었다.
저녁 7시쯤 되자 가랑비가 내렸다. 셋이서 집에 들어가지 말고 함께 자자고 하여 8시쯤 광남로 쪽으로 올라왔다. 공수들은 중소기업은행 앞에 있고, 광남로사거리 수창국민학교 앞 육교 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공수들이 7, 8명 씩 무리를 지어 지키고 있었다. 청년들이 공수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보고 우리 일행 3명도 합세하여 돌을 던졌다.
그러자 공수들이 쫓아왔다. 나는 일고 쪽으로 도망을 갔는데 정문이 잠겨져 있어서 담을 타고 넘어가 마땅히 숨을 곳이 없어 화장실로 도망갔다.
얼마 후 화장실 문을 삐끔 열고 보니 공수는 가고 없었다. 일고에서 나와 택시를 잡으려고 밑으로 내려오는데 사람들이 유동 삼거리 쪽으로 몰려왔다. 광주고속 앞에서 한판 야무지게 벌였는지 싸움의 흔적이 보이기도 했다.
광주고속터미널 부근에서는 근방의 자동차 정비공들을 중심으로 천여 명의 시위대가 경상남도 번호를 달고 있던 8톤 트럭 한 대를 불질러버렸다. 트럭에는 각종 플래스틱 제품들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 시민들은 경상도 출신의 공수대원들이 광주시민을 학살하러 왔다는 소문에 치를 떨고 있는 터였다. 시민들은 운전수도 경상도 사람이니까 죽여버리자고 흥분했지만 누군가가 이를 말렸다.
"그 운전수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전두환이가 죽일 놈이고 공수부대가 천인공 노할 놈들이지."
그리하여 운전기사는 풀어주었다.
시민들은 트럭 위에서 플래스틱 제품을 끌어내렸다. 트럭 위에 있던 제품들(바케스, 세수대야 등등)이 우수수 땅에 쏟아졌다. 그러나 누구 하나 쏟아진 플래스틱 제품을 주워가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시민 한 사람이 플래스틱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2명이 불에 타기 시작한 트럭을 몰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을 지키는 공수부대 쪽으로 밀고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이를 바라보던 시민들은 고압선이 탄다고 건물 뒤로 숨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바라보다가 친구와 함께 택시를 잡아타고 외곽으로 빠져나와 쌍촌동에서 잠을 잤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
20일 아침 어머님이 걱정하실 것 같아 집에 들어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광천다리 입구에서 31사 소속 군인들에게 검문을 한차례 받았다. 어디 가느냐고 묻기에 친구집에서 자고 집에 들어간다고 하자 다행히 아무말 않고 보내주었다.
오전 내내 잠을 푹 자고 있었는데,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왔다. 함께 밖으로 나가자 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머리에는 헬멧을 쓰고 양동시장 쪽으로 가보았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오전에는 비가 보슬보슬 내리더니 오후가 되자 비가 갰다. 오후 3시쯤 광주역으로 갔다. 택시기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택시기사 한 사람과 사복형사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곳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광주역에서 금남로로 내려와 화니백화점 쪽으로 갔다. 시민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아마도 몇만 명이 될 듯 하였다.
동구청 쪽에서는 공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퇴근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더욱 거리를 메우고 불어나기만 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다. 학생 한 명이 지하상가 공사장 한국은행 쪽 입구의 난간으로 올라서더니 구호를 외쳤다. 시민들도 따라서 외쳤다. 시민들이 너무 많아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시민이 일어나 스피커를 준비할 수 있도록 모금운동을 벌이자고 제의했다. 후배 하나가 성금을 거두어 마이크를 하나 사왔다. 자동차용 배터리에다 소형 앰프를 달아 한 사람이 들고 후배가 몇 사람의 무등을 타고 시위대 가운데로 들어가 확성기를 통해 선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먼저 가신 님들과 같이 죽읍시다."
시위대는 사기가 한꺼번에 고양되어 투석이 치열해졌다. 시민들은 계속 불어나고 할머니에서부터 손주에 이르기까지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아리랑' 등의 노래를 불렀다.
"공수들을 뚫자" 하는 소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대열이 편성되었다. 각목과 쇠파이프 하나씩을 든 건장한 청년들이 선두에 서고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갔다. 이제 구경만 하거나 방관하는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도로 부근의 상점이나 주택가에서도 물통과 세수대야에 물을 가득 채워서 밖으로 내 놓았고 리어커와 자전거는 공사장 주변의 돌과 자갈을 실어나르는 교통수단이 되었다. 시민들은 최루가스가 터져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주머니들과 요식업소 아가씨들은 물수건과 치약을 준비하여 군중들 사이로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시민들은 얼굴과 코밑에 치약을 바르기도 했다.
한참 노래를 부르는데 청년 한 사람이 "내가 공수들을 뚫어버리겠소." 하고 외치며 당당하게 걸어나오는 것이었다. 갑자기 오토바이를 타고 불과 1백 미터를 사이에 두고 공수들이 있는 곳으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금남로의 전시민들은 불안함과 의아심으로 가슴을 조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공수들의 불과 몇 미터 앞에서 갑자기 오토바이를 꺾더니 골목으로 휭하니 들어가 버렸다. 시민들은 이 광경을 보고 폭소와 함께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민주기사들이 드디어 봉기했다
7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유동 쪽에서 수많은 차량이 일제히 헤드라이드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돌진해 오고 있었다. 맨 앞에 택시 몇 대가 오더니 짐을 가득 실은 대한통운 소속 12톤 대형 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가 따르고, 그뒤로는 영업용 택시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뒤를 따랐다. 트럭 위에는 청년들이 올라서서 대형 태극기를 여러 개 흔들면서 밀고 들어왔다.
이를 보고 있던 시위대 중 누군가가 "민주기사들이 드디어 봉기했다"면서 공수들을 밀어버리자고 소리쳤다. 나는 이 광경을 바라보다 '민중의 힘이 바로 이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나서 앞장서 나아가자고 소리치기도 했다.
갑자기 돌변한 사태에 놀란 계엄군은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쏘아댔고 페퍼포그차를 동원하여 가스를 뿜어댔다. 경찰이 쏘아대는 독한 가스탄이 진격하는 차량의 유리문을 부수며 차 안에 떨어졌다.
차를 멈춘 운전기사들은 방향감각을 잃고 연기 속에서 사방을 헤맸다. 이들은 눈물을 흘리고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면서 비틀거렸다. 이 틈을 타고 계엄군이 앞으로 다가오더니 곤봉으로 패고 군화발로 짓밟고 나서 연행해 갔다. 차량 주위에 서 있던 시민들은 계엄군들의 만행을 보면서 돌을 던졌고, 계엄군은 잡히는 대로 연행해 갔고, 금남로에서는 비명과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아마도 이곳에서는 상당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이곳에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광주우체국 앞으로 도망을 갔다. 우체국 에는 1백여 명의 시민과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저녁 9시쯤 1백여 명의 시민, 학생은 대열을 지어 스크럼을 강고하게 짜고 앞에서는 선동을 하고 충장로 전일빌딩 있는 곳으로 뛰어나왔다. 이때까지도 시위대열이 금남로 쪽에서 내려올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도로에는 우리 밖에 없었다.
전일빌딩 쪽으로 나가자마자 공수들이 기다리기라도 한 듯 두들겨패고 발길질을 해왔다. 워낙 스크럼이 강고하게 짜져서 도망을 갈 수가 없어 처음에는 모두들 고개숙여 두들겨맞고 상당수 잡혀갔다. 공수들에 의해 스크럼이 풀어지자 나는 가톨릭센터 앞을 지나서 농협지부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도망갔다. 그런데 그곳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공수 한 놈이 끝까지 쫓아온 것이다. 피할 수 없이 1대 1의 상황에서 위기라는 것도 없었다. 싸움에서 지면 죽는 것이다 생각하고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공수 한 놈은 곤봉을 들긴 했으나 무장을 하고 있어서 행동이 굉장히 둔했다. 나는 공수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벽 쪽에 서 있었다. 나를 잡는 순간 나는 공수를 밀치고 나올 수 있었다. 동아극장 골목으로 뛰어가는데 앞에서는 사람들이 넘어지고 뒤에서는 공수들에게 잡혀가고 있었다. 나는 겨우 이곳을 빠져나왔다. 숨도 차고 도저히 기력이 나지 않아 화장실에 가서 숨을 돌리고 걸어서 금남로로 내려갔다.
수창국민학교 앞에서는 1백-2백여 명의 농민들이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고 곡괭이, 낫 등을 들고 드럼통을 굴리면서 왔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에서는 많은 차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미 불이 붙어 시작되었구나' 생각하면서 전남방직 쪽으로 가다가 마침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과 함께 시내 쪽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둘러보았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용호라는 친구를 또 만났다. 이 친구와 음료수를 한 병 먹기 위해 가게로 들어갔다.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던 중 "지금 전단을 만들려고 하는데" 하면서 친구가 말문을 열었다. 함께 하자는 제의를 해왔고 이미 몇 명이 더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마침 장소를 하나 봐두었다고 하여 그곳을 가보니까 일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광천동 집에서 나와 광천동 능선을 타고 구경을 하는데,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도청 쪽에서는 불이 났고 시내가 온통 새까맣게 보였다. 다만 전투기 3, 4대가 송정리 비행장에서 뜨는 것을 보았다. 12시쯤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21일 오전에 집에서 나오면서 고향 친구 한 명을 만났다. 그 친구와 함께 걸어가면서 전날의 비밀 이야기를 해주면서 창고를 봐둔 곳으로 함께 가자고 하여 가보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내 녹두서점에 가니까 6명 정도가 모여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오전 10-11시쯤 차와 마이크를 구해서 대열을 정비해 차를 타고 마이크 방송으로 시민들에게 알리도록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당장 마이크를 구해야 했다. 마이크를 구하기 위해서 친구들 몇 명과 금남로로 나와 내려가는 도중 앞에는 전경이 있고, 뒤에는 공수들이 축 퍼져서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내가 이들에게 다가가 방패를 뺏었더니 "봐주세요"하며 울상이 되었다. 나는 불쌍한 생각도 들어 방패는 돌려주고 한 대만 때려주었다.
친구들은 중앙교회에 마이크를 떼러가고 나는 시내상황을 보려고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한참동안을 서 있는데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제작된 군용 지프차가 한 대 왔다. 나는 차에 얼른 올라탔다. 군용 지프차는 기사 맘대로 송정리로, 우산동으로, 광주역으로 갔다. 시민들은 밥과 음료수, 과자, 빵 등을 차에 실어주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모두들 한결같이 중, 고등학생과 룬은이들이 차에 올라탔고 몽둥이로 차체를 두드리며 '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찢어죽이자 전두환' 등의 구호를 외치며 외곽지대의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모이게 하고는 차에 실어서 금남로로 수송했다. 차에 탄 젊은이들은 대개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가 다시 녹두서점으로 갔다. 사학과 교수와 2명의 선배들이 있었다.
오후 1시쯤 대책을 세워보자고 하여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밖에서 갑자기 '타당' '드르륵' 소리가 났다. 혼비백산하여 밖으로 뛰어나갔다. 노동청 부근에서 수십 명의 시민들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공수들은 모여든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난사하기 시작했다. 총성이 멈추면 3, 4명이 쓰러진 사람을 끌고 오고 모두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민들은 계속 쓰러져갔다. 그 중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도 많았다.
노동청 부근 청산학원 앞에서는 청년 하나가 군용 트럭을 몰고 와서 주변의 시민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공수들을 쳐부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합시다.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울 사람은 무장을 하도록 합시다. 이 곳으로 모이십시오. 서방 쪽 주유소에 가서 휘발유 드럼통을 몽땅 실어다가 불을 붙여 도청으로 몰아붙여버립시다. 나는 직접 차를 끌고 도청으로 돌진해 들어갈 것입니다. 죽을 수 있는 자만이 오십시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청년은 모여든 시민들이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주유소를 향해 출발했다.
이 광경을 보면서 친구를 또 만났다. 친구들 셋이서 전남여고 쪽으로 가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를 찾아보도록 하자!"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오는데 중앙국민학교 부근에 오자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앙국민학교 육교 위에서는 군용 헬기가 나타나더니 시민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빨리 뛰어 골목으로 숨었다. 시내에서는 이렇듯 인간의 목숨이 개죽음을 당하고 있다고 분노하면서 셋이서 논란을 벌였다.
"총을 구입해서 싸우자."
"사람들을 모아서 조직적으로 싸우자."
시민관으로 가보았다. 한 사람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어디서 오십니까?"
"전라북도에서 걸어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 사태는 시시각각 변해 가고 있습니다. 매우 위험하니 우리와 함께 가도록 합시다."
대인시장 부근으로 들어가 국밥집에서 공짜로 밥을 먹고 있는데, 할아버지 몇 분이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보고 물었다.
"왜 싸우지 않고 오는 건가? 총을 들고 싸워야지."
"밥먹고 싸우겠습니다."
국밥집에서 나와 우리도 총을 들고 싸우기로 의견을 모으고 차와 총을 구하기 위해서 계림파출소 앞으로 갔다. 계림파출서 앞에는 카빈 총으로 무장한 시민들이 차에 타 있었다. 우리들이 물었다.
"총은 어디에서 줍니까?"
"법원 앞으로 가면 총을 주니까 그곳으로 가시오."
셋이서 흩어지지 말고 함께 행동하기도 하고 대인동 쪽으로 올라갔다. 지프차 한 대가 왔다. 이들은 총 두자루를 들고 있었다. 총을 구하러 가자고 하자 차에 태워주었다. 산장 입구에서 공무원 아파트 쪽 철로부근을 가다가 후배를 만나 함께 갔다.
후배가 산수동오거리는 공수들이 무장하고 있다고 하여 다시 수창국민학교 뒤쪽으로 빠져가다가 고등학교 불어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이런 제자들을 두었군. 자네들이 열심히 싸워야지" 하면서 격려해 주셨다. 아세아극장 앞에서 총을 나눠준다는 말씀도 덧붙여 하셨다. 유동 삼거리는 차량이 총집결해 있었다. 10살 정도 먹은 어린 꼬마가 총을 들고 있기에 어린아이는 위험하니까 나에게 주라고 하자 절대로 주지 않고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수십 대의 차량들이 멋대로 돌아다니며 혼란을 빚었고 중년의 사내가 순찰차량에 달린 마이크로 "차량은 모두 아세아극장 앞으로 모이라"고 방송하면서 유동 삼거리 쪽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도청 부근 금남로에서는 총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차에 탄 시민들은 손에는 총을 들고 양쪽 웃도리 호주머니 앞에는 수류탄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이었다. 지휘자는 모인 사람들을 정렬시키고 나서 모두에게 무기를 분배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무장한 시민군은 1백여 명 정도 되었다. 이들은 10-20 명씩 1조가 되어 각각 방어할 지역으로 이동할 준비를 갖추었다. 지휘자가 말했다.
"여러분, 지금이라도 죽음이 두려운 사람은 이곳을 떠나십시오. 우리는 오늘밤 저 잔혹한 공수부대와 목숨을 걸고 싸워 이겨야 합니다. 최후까지 싸울 것이므로 한 사람이라도 도망을 가선 안 됩니다. 오늘밤 상무대 병력이 돌고개 부근을 향해 진입할 가능성이 많다고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또 31사단 병력이 오치를 거쳐 서방으로 공격해 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준비되어 있는 아군의 병력 중 LMG와 기관총 3정은 아세아극장 옥상에 1정, 그 밑 도로변 양옆에 화분대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각 1정씩 배치하십시오. 그리고 어두워지면 시민 여러분은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집으로 들어가 식사를 하시고 집안의 불을 꺼버리십시오."
조에 편성된 시민군은 대부분이 교련복 차림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으며, 나머지는 40대 정도 되는 회사원, 상인, 점원들이었다. 거의 배치가 완료된 듯했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 집 주위 능선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았지만 총격전은 벌어지지 않았고, 다만 시민군들이 쏘는 총소리만 '탕! 탕! 탕!'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도청을 사수하라
22일 아침 일찍 시내로 나가보았다. 금남로로 향하는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공수들은 이미 철수하고 도청은 시민들에 의해 사수되었다. 아는 얼굴이 몇 명 눈에 띄었다. 시민들은 폐허가 된 도시를 말끔히 청소하였다. 지도부가 없어서 도청 안이 매우 복잡하고 무질서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에는 들어갈 수 없었으나 00교수의 이름을 이야기했더니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었다. 나는 1층 서무과 작전상황실로 들어가보았다. 도청 안은 체계가 잡히지 않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수류탄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철모, 판초 우의, 방탄복 등이 혼잡 속에 뒤섞여 있었다.
차츰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일의 순서와 윤곽이 잡혀가는 중이었다. 함께 들어왔던 친구들 둘은 가고 안길정과 나는 서류를 정리하면서 전화가 오면 받기도 하였다. 나는 도청 안에 무질서하게 굴러다니는 수류탄, 소총, 방탄복 등을 모아다가 캐비닛 안에 정리하고 계엄군들이 미처 가지고 가지 못했던 무전기는 조작하여 사용하기로 했다.
군복무 시절에 통신병이었다는 한 예비군에게 책임을 지워서 계엄군의 퇴각상황과 작전전개 내용을 수시로 청취, 점검하게 하고 외곽지역과의 무전연락을 담당토록 했다. 또한 방송실에 있는 여고생에게는 시민들로부터 들어오는 사망자 명단을 적어서 넣어줄 테니 계속 이를 밖으로 알리는 활동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창길을 중심으로 한 수습대책위원회는 나름대로 일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질서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도청 상황실은 차츰 드나드는 사람들이 늘어나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고, 계엄군측의 정보요원이나 공작원이 끼어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따라서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특히 '조사반장'을 담당했던 40대의 남자 두 사람은 스포츠형의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로 보아 형사 같은 인상을 짙게 풍겼다. 이들은 거동이 수상하고 시민군에게 잡혀온 사람들을 자기들 멋대로 처리하는 등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정보요원을 쫓아내자... 증명서가 발급되고
결국 친구와 나는 이들 둘을 쫓아낼 계획을 세웠다.
나는 한 손에는 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다른 손에는 수류탄을 쳐들어보이며 책상 위로 올라가 큰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계엄군이 언제 반격해 올지 모르는 조건에서 지금 이 상황실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광주시민의 안전을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내부에 믿을 수 없는 자들이 끼어들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상황실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할 테니 이곳에 업무가 있는 사람들은 저희들이 발행하는 증명서를 소지하여 출입하고 나머지는 일절 출입을 불허합니다. 만약 이 사항이 지켜지지 않으면 우리 모두의 목숨은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통제에 정확하게 따라 주십시오. 만약 저의 지시를 따르지 않겠다는 사람은 나오시오. 우리는 모두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모두 나가고 필요한 사람들만 저희들이 불러들일 터이니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면 다른 사항들은 보고형식으로 해주십시오."
그러자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만 역시 조사를 담당했던 자가 못마땅한 듯 버티고 앉아 있었다.
나는 수류탄을 그의턱 밑에 들이댔다.
"그럼 여기서 당신과 내가 자폭해 버릴 자신이 있소?"
다그치자 어쩔 수 없는 지 사내는 상황실 밖으로 나갔다.
이때부터 책상서랍을 열어 제일 큰 도장을 찍은 증명서가 발급되었고, 상황실에는 증명서 소지자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시민군 중에서 뭐든지 시켜주면 충실히 하겠다는 사람이 있어 상황실 통제경비를 담당시켰다. 그 보초와 도청 정문 보초 역시 이 약속에 충실히 따랐다. 나중에 조사반장을 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정 그렇다면 나는 가겠소. 그런데 예비군들을 빨리 조직하시오."
"당신이 직접 하면 될 것이 아니오?"
"내가 정보만 주는 거요."
그러느냐는 나의 말에 그는 도청을 나가고, 다른 한 사람은 남아서 우리의 통제에 따랐다.
오후 3시쯤에 '월 스트리트 저널'지의 외신기자 2명이 상황실에 들어와 피해상황들을 조사해 갔고, 상황실 책임자였던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4시쯤에는 광주일고 재경동창회에서 방문하여 자기들이 할일이 있으면 돕겠다며 무엇이 필요하느냐고 물어왔다. 그들은 곧 병원에 있는 사망자 파악에 들어갔다. 이로부터 2시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사망자수가 80-1백여 명 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질서도 중요하였지만 외곽지대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빨리 연락망을 구성하여 경계를 갖추는 일이 시급했다. 조선대생 한 명에게 지프차와 함께 '연락병' 증을 발급하여 주고 전외곽지대를 순회하면서 연락망을 구성하고 도청으로 확인 전화를 하도록 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외곽지대 7군데 중 5군데(지원동, 화정동 등)에서 연락이 왔다.
공수부대 1명을 시민군들이 잡아왔다. 이 공수는 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전라도 사람은 아니었다.
한쪽에서는 "죽이자", 다른 한쪽에서는 "죽이지 말자"고 하여 나는 공수를 죽이지 말고 포로교환 때 이용하자고 조사부로 넘겼다.
전화벨이 울렸다. 전라북도 도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상황이 어떤지 묻길래 공수는 모두 물러가고 학생들이 도청을 수습하고 있다고 전하자 잘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무등산 기지에서도, 내무부 상황본부에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그럴 때면 우리는 전화수화기에 대고 사정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광주시내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도 너희들을 서울까지 쫓아가서 죽여버리겠다."
한번 죽는 것 의롭게 죽자
오후로 접어들면서 상황실은 오전처럼 많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증명서가 있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만큼 혼잡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배들은 도청을 다 빠져나가고 얼굴만 살짝 내밀고는 모두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었다. "나도 가버리겠소. 차라리 밖에 나가 총 들고 싸우겠소" 하면서 총을 한 자루 들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밖으로 나왔다. 도청 주위에서는 대학생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송기숙 교수, 명노근 교수 등 50-1백여 명 정도 모여서 토론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송교수에게 더 이상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도저히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지원자도 없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차라리 밖에서 총들고 싸우겠습니다."
그러자 송교수는 나를 호되게 나무랐다.
"그렇다면 사람을 조금 보내 주십시오."
나는 안면이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 4명 정도를 뽑아서 도청으로 다시 들어갔다. 손남승에게는 상황실장을 맡겼다. 걸려오는 전화를 다 받도록 하고 절대로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고 지시하고 나와 안길정은 대민선전활동을 하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일에는 황금선을 뽑아서 지시했다.
삼수생이라는 학생(김원갑) 하나가 아주 야무지게 일을 잘하고 있어서 불렀다.
"자네 좀 이리 와보게. 무엇을 했는가?"
"차량을 모두 조직화했습니다."
"어떻게 조직화했는가?"
"흰 페인트로 칠해서 번호를 썼는데 기사들 얼굴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수습대책위원회는 지금 아무런 일도 못 하고 있으니 싸울 부대를 한번 조직화해 보세."
우리는 1층에서 회의를 했다.
그리하여 '전투하는 시민들에게', '계엄군들에게', '대정부에게 보내는 글' 등 각각 하나씩을 맡아서 내일 아침 신문사 인쇄소에 가서 프린트하고, 정 안되면 대자보로 붙이자고 했다. 또한 내일은 궐기대회를 개최하자고 입을 모았다.
사실 도청 안에는 복사기가 있었다. 그러나 복사기는 고장이 났는지 아무리 가동을 시켜보아도 복사가 되지 않았다. 복사기를 한번도 사용해 보지 않는 까닭도 있긴 했다.
나는 자기 전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나, 지금 도청에 있다. 너도 와라."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너는 이제 죽었다."
"죽더라도 같이 죽자."
뒤에 이 친구가 우리 집으로 연락을 해서 동네에 소문이 나기도 했다 내가 맡은 부분에 대해 글을 쓰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도청 안에 있는데 만약에 계엄군이 도청을 쳐들어오면 나는 죽겠구나. 두 번 죽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죽는 것 의롭게 죽자.' 어느 사이엔가 잠이 들었다.
23일 아침 누군가 나를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보니 아주머니들이 죽을 쑤어왔다고 갖다주었다. 죽을 먹고 식당 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50구 정도의 시체가 있었다. 관에는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가족들은 눈물을 흘렸다. 냄새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못 견디고 식당 부근에서 나왔다.
나는 원갑이에게 "우리가 차량통제를 아주 완벽하게 해버리자"고 하여 도청 사무실 앞에서 모든 차량은 등록을 하도록 지시했다. 차량기사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증'을 발급해 줄테니 '증'을 소지한 자만 차를 탈 수 있다고 공고했다. 차량번호를 매기고 등록을 하지 않는 차는 모두 수거를 했다. 모든 것이 거의 자발적으로 이루어졌고 좋은 차는 아주 단단히 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지도부의 부재 속에서 상황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는데 도청 안을 통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도청에서 나와 녹두서점으로 가보았다. 그곳에서는 팀을 구성하여 '시민궐기대회' 준비를 하느라고 부산했다. 이곳에는 박효선, 오재일, 윤강옥, 윤상원 등이 있었다. 나는 다시 도청 안으로 들어와 마이크를 설치하고 이들에게 상황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나 도청 안의 지도부 청년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분위기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날 오전부터 1층 상황실의 맞은편 사무실에서는 조사부라는 쪽지를 붙여놓고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시민군들이 잡아온 수상한 자, 총기를 들고 시민들을 이유없이 위협하는 자, 물건을 훔치는 자 따위를 심문한다고 했다.
우리는 싸워 이겨야 한다
조사부 요원들은 어제도 운동권 학생들과 마찰을 일으켰는데 분위기는 자못 살벌했다. 조사부는 오후가 되면서 점차 세력이 강화되어 갔고 저녁 무렵쯤에는 상황실의 주요업무까지 관리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단국대 다니던 학생 하나가 개인적으로 광주에 내려와 도청에 들어와서 일을 했는데, (내가 이 학생을 상황실에 배치함) 내가 잠시 밖에 나갔다 온 사이에 이 단국대 학생이 조사부에 잡혀가 두들겨맞았다고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일단 밖으로 나가라고 이야기해두고 즉시 조사부로 갔다. "도대체 조사부는 착실하게 일 잘하는 사람을 잡아다 두들겨패는 곳입니까? 믿을 수가 없군요" 하고 나왔다. 저녁쯤 되자 나도 도청 출입이 힘들어졌다.
전일방송을 정상 가동하기 위해 총을 들고 전일빌딩으로 갔다. 전일방송 직원들이 입구에서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협박까지 하면서 방송가동을 촉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들어가서 해보겠다 했지만 방송 역시도 전문가가 아니면 다룰 수 없는 분야였기에 포기하고 녹두서점으로 돌아왔다. 외지에서 돌아온 몇몇 학생들(정상용 등)과 본격적으로 조직적 편성을 하여 싸워보자고 의논했다.
나는 너무나 피곤하여 YWCA로 가서 현재의 상황만을 설명해 주었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의 시점에서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광주시내가 적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현재의 상태에서는 빠른 시간 내에 내부의 질서가 잡히고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추지 않는 한, 계엄군의 공격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길 수도 있다. 타지역의 운동이 뒷받침 해 준다면 우리는 끝까지 싸워 승리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문제가 되는 것은 광주시내에 식량이 없다. 고립되어 있어서 오래 버틸 수 없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첫째 식량확보 문제이다. 둘째 기동성 있는 차량이 필요하다. 시내에 휘발유가 떨어져 간다. 철저한 통제가 필요하다. 셋째 무장력이 떨어지는 데다 확보하고 있는 실탄이 별로 없다. 실탄을 아껴야 한다. 네째 다이너마이트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주고 나는 바로 나와서 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 차 한 대에 태워달라고 부탁하여 어머님을 뵈러 갔다. 아버님 제사날이었는데도 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잠을 잤다. 내가 자는 사이에 나를 제외한 가족들이 회의를 했다.
"혼자 놔두면 죽을 것이 뻔하다. 절대 광주에 두면 안 되겠다. 시골로 보내자."
24일 아침에 누님과 형님이 가방 하나를 주면서 말했다.
"너 이제 할 만큼 했으니까 시골로 가거라."
"전 오늘 약속이 있어요.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가야 합니다."
막무가내로 서방까지 형님에게 끌려갔다.
일단 나는 녹두서점으로 전화를 했다. 나는 생각했다. '어머님이 보고 싶어서 왔지만 다시는 이런 상황에서는 집을 찾아오면 안 되겠구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비겁하게 도망을 가다니…….'
두암동 부근에서는 시민들이 관을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산을 넘어 내려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계엄군이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경계를 서고 있었다.(조사.정리 안은정) [5.18연구소]
첫댓글 내일이 6.25입니다.
동족 간의 잔익한 살상 전쟁이엇습니다.
그럼 5.18은 무엇입니까.
6.25보다 더 잔익한 살육이겠죠.
자료 감사합니다.
즐거운 점심식사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보느 여위를 가지세요.
그곳에는 사랑이 그리움이 잇습니다.
이재의샘의 증언 반가운 마음으로 발견합니다. 기록자로만 큰 역할 하신다 했는데, 직접 증언도 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