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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찬 이슬에 젖어 사그라들고 있는 가을의 수풀을 보며 새삼 생명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연꽃 바위 솔
26년간의 교사 생활을 마치고 교감으로서의 첫 부임지가 울진 죽변 중학교였다. 자택이 있는 김천에서 죽변엘 갈려면 상주, 문경, 예천, 영주, 봉화를 거쳐 불영 계곡을 넘어야 울진이다. 집에 오가는 길이 아주 먼 길이었지만 산천경개가 수려하여 철 따라 변하는 경치를 감상하는 재미가 있고 그 길목에 내가 좋아하는 돌을 주울 수 있는 수석 산지가 있어 지겨운 줄 모르고 오갈 수 있었다.
한 번은 울진으로 올라 갈 때 점촌 인근 농암 천에서 수석 감으로는 미흡하지만 듬직한 오석을 하나 주었다. 풍란을 붙여 교무실 책상 위에 두고 물을 치며 길렀으나 무언가 어색하고 돌과 풍란이 서로 어울리지가 않는 것 같았다. 석부작의 멋은 깊은 산 속 외로운 바위나 절벽의 쓸쓸한 정경을 실내에 연출함에 있는데 돌에 비해 풍란이 너무 커서 그런 멋을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드는 석부 작품을 한 번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에 풍란을 돌에서 떼어 내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자그마한 바위식생 야생 식물들을 심어 보았지만 모두 금방 죽어버리거나 너무 웃자라 그런 정경을 표현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적당한 식물을 찾지 못해 책상위에 몇 달을 그냥 두었으나 그 돌에 어울릴 만 한 놈을 찾아 붙여 깊은 산속의 외로운 바위 경치를 표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늘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집에 오갈 때 한번 씩 들리는 봉화의 태백산 야생화 농장에서 바위 솔이라는 식물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름부터가 바위에 붙어사는 식물이라는 것을 일러준다. 돌 틈새의 아주 작은 공간만 있어도 뿌리를 내리고 사는 식물로서 오래된 기와지붕이나 메마른 바위위에 잘 붙어산다고 와송, 혹은 석송이라고도 불린다. 한 눈에 나의 교무실 책상위에 있는 점촌 산 오석에 붙이기에 아주 적합한 식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산행을 할 때나 야외에 나갈 때면 바위 솔 종류를 찾아서 산과 들을 유심히 살피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흔한 식물이 아니라서 좀 체로 만나기가 어려웠다.
현충일에 선생님 두 분과 함께 평소 가보고 싶었던 두천 계곡을 끝까지 답파하고 샛재를 넘어 삼근리로 나오는 코스를 정해서 등산을 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오지이며 코스가 험하고 긴 편이었으나 혹시라도 깊은 산중 바위틈에서 바위 솔 종류를 만나지 않을 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 코스를 택하게 되었다. 두천 계곡은 다른 계곡보다 규모는 작지만 작은 데로 바위경치가 수려하고 옥색 맑은 물이 암반 위로 흘러가는 청정한 계곡이었다. 계곡바위와 절벽들을 유심히 살폈지만 바위 솔 종류는 보이지 않는다. 계곡이 끝날 때까지 끝내 바위 솔을 찾지 못했다. 오늘도 나하고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포기하고 소광리로 가기위해 샛 재를 넘는다. 산마루에 올라섰을 때 휴대폰 소리가 울려서 받아보니 일직근무 하는 처녀선생님인 김 선생님의 다소 상기된 목소리가 들린다. 내용인 즉은 죽변중학교 출신 대학생이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하다가 과로로 심장병이 악화되어 죽었다고 한다. 안타까운 부모들이 마지막으로 고향 모교를 방문하여 망혼을 달래는 의식을 치루고 학교 뒤편 바닷가에 유골을 뿌리고 싶어 한다는 것과 부모 이혼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학비와 생활비를 손수 벌어야 했던 망자가 학비로 쓸려고 벌어 놓은 돈 삼백만원을 모교 장학금으로 희사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행정실 직원을 불러 처리하라고 김 선생님에게 맡기면 그 뿐이겠으나 유골을 들고 학교를 한 바퀴 돌고 망혼을 달래는 의식도 치룬다고 하는데 처녀 선생님으로서는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김 선생님도 그런 일을 처음 당하는지라 혼자서는 겁나고 당황스러우니 교감선생님이 빨리 돌아오셔서 그 일행을 맞이하고 장학금도 받아 주십사하고 간절히 부탁한다. 유골을 실은 영구차가 경주에서 출발하여 죽변에 도착하려면 몇 시간 걸릴 것이니 서둘러 산을 내려가 삼근리에서 오후 세시 반 울진행 버스를 타면 가능할 것 같다. 일행을 재촉하여 허겁지겁 삼근리에 도착하였으나 버스는 이미 떠나고 난 뒤였다. 낭패를 느끼고 난감해하고 있는데 김 선생님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버스를 놓칠 것을 염려하여 울진에 거주하는 선생님에게 부탁하여 승용차를 보냈다고 한다. 김 선생님의 용의주도함이 대견하기도 하거니와 얼마나 걱정이 되면 그리했을까 하는 생각에 고되고 힘들었지만 산에서 서둘러 바삐 내려오길 정말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로 돌아오니 김 선생님은 안도의 숨을 내 쉬면서 “교감 선생님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영구차가 30분정도 지나면 도착할 예정이란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서둘러 사택으로 갔다. 더운 물로 샤워를 하니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그리고 불현듯 삼년 전 이처럼 꽃다운 나이에 죽은 아들놈이 생각나서 이 일이 도무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가슴이 답답하고 한 숨이 절로 나온다. 그 부모님들은 또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으며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돌멩이와 같이 삭이지 못하는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 갈 것인가?
아들놈은 인물 좋고 마음이 곱다고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던 놈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에 갑자기 발병하더니 4년 동안의 고생스런 투병생활도, 어미 애비의 정성어린 병간호도 허사로 만들어 버리고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하늘나라로 홀연히 가버린 야속한 놈이었다. 22년간 창창했던 한 인간의 인생과 가족의 희망과 사랑이 한꺼번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그 날은 그 해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나와 내 아내의 고통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문상 온 천주교 교우들은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귀하게 쓰시려고 일찍 데려 갔으니 슬퍼하지 말고 기쁘게 생각하란다.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나와 내 아내 그리고 여동생, 우리 가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이 그렇게 옹졸하고 자기사업만을 위하여 사람의 고통을 하찮게 여기는 그런 존재란 말인가? 믿음이 없어서인지 위로가 되질 않고 기쁘기는커녕 왜 나만 이런 슬픔을 당해야하는지 나의 박복함에 대한 원망으로 더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자책감이 들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이놈을 잘못 키운 것은 아닌가? 식습관을 잘못 들여 그런 몹쓸 병에 걸린 것은 아닌가? 아니면 운동을 제대로 시키지 못해 건강이 나빠진 것은 아닌가? 나의 잘못으로 그 놈이 그런 일을 당한 듯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무척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삼년이 지난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듯 착각이 들고 어디에선가 그 놈이 환하게 웃으며 나타날 것 만 같은데 그 부모들은 오죽하겠는가?
등산복을 정장으로 갈아입고 넥타이까지 점잖은 색깔로 골라 맸다. 그렇게라도 해서 맞이하는 것이 이 세상을 하직하는 젊은 영혼에게 모교의 교감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예의인 것 같다. 마침내 영구차가 교문 앞에 도착했다. 고용인이 교문을 열어주자 망자의 친구로 보이는 두 명의 청년들이 영정과 유골함을 차례로 들고 그 뒤에 부모 친지들 네다섯 명이 뒤따르며 운동장과 교사 주위를 한 바퀴 돈다. 이윽고 현관에 도착하여 상을 차려 영정과 유골을 모셔놓고 술을 따르고 절을 하며 망자에 대한 마지막 예를 올린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망자가 벌어 놓은 삼백만원이 적은 돈이 아닐 진데 그 돈을 선뜻 장학금으로 내 놓겠다는 것을 보면 이혼을 했지만 부모 양쪽 모두가 살아가기에는 별 지장이 없는 부유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망자의 아버지는 꾀죄죄한 행색에 술로 중독이 된 듯한 얼굴로 초라하기 이를 데가 없고 어머니되는 사람도 병색이 완연하여 얼굴이 창백하고 가난에 찌든 차림새였다.
오래 지체되어 슬픔과 애통함도 지쳤는지 울음소리도 나지 않는다. 차례로 절을 하고 난 뒤에 고모라는 사람이 그제야 나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서둘러 현금 삼백만원이 든 돈 봉투를 받아 달라고 내민다.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의식이 다 끝나지 않은 상태이니 먼저 학교 뒤편 바닷가에 가서 유골을 뿌려 망자의 영혼을 달래주고 난 뒤에 돌아와서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장학금을 수령하겠다고 설명하면서 돈 봉투를 받지 않았다.
학교 뒤 솔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바닷가로 갔다. 죽변 중학교는 교사 바로 뒤편 울타리가 소나무 밭이다. 그 소나무 밭을 지나면 자그마한 공동묘지가 바다를 바라보고 위치해 있다. 공동묘지가 끝나는 곳은 절벽이고 그 아래가 바다다. 절벽 아래에는 야간 침투 간첩을 막기 위한 철책이 쳐져 있어 철책 중앙에 난 문을 통해 바닷가로 들어갔다. 바닷가는 모래사장과 바위들이 적절히 안배되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모래사장에 뿌리를 내리고 서서 거친 해풍과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바다는 푸른 몸을 검은 바위에 부딪치며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소리치고 있었다. 많은 바위들이 여러 가지 형상들을 하고 있었지만 바위 하나가 우뚝 서있어 가장 눈에 띄었다. 사람의 몸통처럼 생긴 입석 위에 머리 부분이 절묘하게 붙어 있는 형상이다. 죽변 사람들은 그 바위를 사람바위라고 부른다고 김선생님이 귀 뜸 해준다. 사람 바위는 성난 파도와 해풍을 한 몸으로 받아내며 해변의 파수꾼처럼 그 바닷가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영원을 바라보며 구도의 길을 가고 있는 어떤 구도자의 성스러운 모습을 느끼게 했다. 굳이 이곳에 망자의 유골을 뿌리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훠이 훠이 잘 가거라. 저 생에서는 부모 잘 만나서 이생처럼 고생스럽게 살지 말고 하고 싶은 공부도 많이 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잘 살거라.” 고모의 한 서린 넋두리와 함께 밀가루 같은 유골 가루는 연기처럼 바람에 날려 사람바위 주위로 사라진다.
살고 죽는 게 무엇인지, 그렇게 창창하던 한 젊은 생명이 한줌 가루로 허공에 흩어지다니 이토록 허무하단 말인가? 이게 끝인가? 아닐 거야. 사람모습은 사라져도 무언가 사라지지 않는 게 있어 또 다른 생명으로 다시 이어 갈 거야. 나뭇잎 하나 떨어져도 그곳에서 온갖 생명들이 생겨나지 않는가? 우리가 다만 모르고 있을 뿐이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진행되는 생명의 역사에 어떤 형태로든지 다시 동참 할 거야. 아니 그런 염원을 담아 나도 한 줌의 유골가루를 바람에 날려 보냈다.
교무실로 돌아와서 장학금에 대한 처리를 놓고 상의하면서 고모라는 사람이 남동생의 신세가 안타까운 듯이 넋두리를 다시 이어 간다. “자식이 많기라도 하나, 자식이라고는 마치 이 놈 하난데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를 돌보지 못한 죄를 어찌할 것인고? 죽어서 조상은 또 어떻게 볼라 하는고?”
부모들은 판사 앞에 끌려온 죄인들 인양 아무 말 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고모라는 사람이 모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하자는 주장을 했다. 망자의 어머니 되는 사람은 바람을 피워 가정을 파괴한 원인을 먼저 제공했으니 이 돈 받을 자격이 아예 없고 아버지는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돌아온 아내를 용서하고 가정을 깨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생활과 이기심으로 자식까지 내 팽개쳤으니 그 또한 그 돈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자기도 역시 망자를 가까이에 데리고 있어 어려운 생활을 잘 알고 있었으나 안스런 마음만 있었지 변변한 도움도 주지 못했기에 그 돈을 받을 자격이 없고 또 받을 생각도 없다는 것이었다.
망자가 중학교 시절을 무척 그리워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돈이 망자가 땀 흘려 번 학비라는 것을 강조하며 모교에 장학금으로 내 놓아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가난에 몹시 시달리고 있는 듯한 초라한 부모들의 행색을 보고서는 도저히 그 장학금을 받을 수가 없었다. 가난한 모교 후배들을 도와주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지금 투병 중인 어머님의 약값으로 이 돈이 사용되어 지는 것이 망자가 진정으로 바라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장시간의 설득 끝에 부모들에게 그 돈을 돌려줄 수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개학일이다. 며칠간 무척 덥더니만 다행히도 개학날엔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덥지 않아 다행이었으나 비가 오면 늘상 그렇듯이 눅눅한 습기와 함께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에 스민다. 삼 개월 전 학교를 한 바퀴 돌고 뒤편 바닷가에서 물결 따라 저승으로 떠났던 그 젊은이와 삼년 전에 죽은 아들놈 생각에 나도 모르게 학교 뒤편 절벽 위에 올라서서 거센 해풍을 맞으며 바다를 바라본다. 실비 내리는 바다는 잿빛 하늘이 바다 위까지 내려와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분간 할 수가 없다. 거센 바람은 검은 물결위에 흰 물꽃을 피우고 성난 파도는 바위기슭에 부딪치며 흰 물보라를 높이 튕긴다. 그 정경이 마치 바다가 육지를 보고 삿대질하는 것 같았다. 바다는 무엇이 그토록 억울한지 온몸으로 부딪치며 절규하고 있었다.
울적한 마음이 들 때면 곧잘 절벽위에서 바다를 바라보곤 한다. 바다는 그저 바라다본다고 바다라 하고 산은 그 속에서 산다고 산이라 명명했다는 말이 새삼 생각난다. 바다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위대한 힘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바다 앞에 서면 누구나 원초적이고 본연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존재에서 오는 삶과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본연적이고도 철학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혼자만의 이기적인 슬픔은 그런 생각만으로도 다소 위안을 받는다.
문득 전에 보았던 절벽 밑 바닷가가 궁금했다. 꽃다운 청춘의 유골이 한 줌 재로 흩뿌려진 현장과 거센 파도에도 굳건히 버티며 서있던 사람바위를 다시 보고 싶었다. 아래로 내려가 보니 바닷가로 나가는 철책 문이 굳게 잠겨 있다. 하는 수없이 철책을 따라 으르렁거리는 파도를 옆에 두고 걸었다. 삶과 죽음 특히 꽃다운 청춘의 죽음 그리고 운명에 대한 풀리지 않는 서글픈 생각에 젖어 얼마를 걸었을까? 걷다 말고 고개를 들어 무심코 바위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이게 무엇인가?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바위 솔이 바위 절벽위에 붙어 있지 않는가? 풀리지 않는 그 서글픈 생각에 대한 해답을 제시 하는 것인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눈을 부비고 다시금 쳐다보았다. 분명 바위 솔 종류이며 생긴 모양이 연꽃처럼 생겼으니 야생화 도감에서 본 연꽃 바위 솔이 분명했다. 그렇게 찾으려고 먼 계곡을 뒤지고 다녀도 눈에 보이지 않더니만 어찌해서 여기 이렇게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두세길 높이의 절벽을 기어올라 가보니 분명 바위 솔이었다. 연꽃처럼 생긴 바위 솔이 흙이라고 거의 없는 바위 위에 여기저기 넓게 퍼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누군가가 씨를 흩뿌려 놓은 것 같았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금년 봄에 아들놈 유골가루를 뿌렸던 천주교 공동묘지를 찾았을 때가 생각난다. 그렇게 성당엘 열심히 다녔고 신부가 되겠다고 해서 내 마음을 힘들게 했던 아들놈이라 천주교 공원묘지 산마루에다 유골을 뿌렸었다. 화장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놈의 체온처럼 아직 따뜻함이 남아 있는 유골가루를 가슴에 안고 한 줌 한 줌 눈물과 함께 날려 보냈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 데 벌써 삼년이 지났다. 그 놈 보고 싶을 때면 몇 차례 그 곳을 찾아가 울적한 마음을 달래곤 했었는데 올봄에 찾았을 때는 여태 보지 못했던 하얀 제비꽃이 유골가루를 뿌린 곳에 무더기로 피지 않았던가? 보라색 제비꽃을 흔하게 보아온 나의 눈엔 유골가루 색과 같은 그 하얀 제비꽃이 무척 신기했고 어떤 특별한 의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까지도 보지 못했던 꽃이라 그런 느낌이 더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아들놈 보고 싶은 나의 마음을 달래 주려고 누군가가 그렇게 피운 것인지 아니면 죽은 아들놈이 흰 제비꽃으로 환생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아들놈 유골가루와 그 하얀 제비꽃이 분명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다소의 위로를 받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 올 수 있었고 그 이후로는 그곳을 찾지 않았지만 하얀 제비꽃만 생각해도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이 연꽃 바위 솔도 분명 그 청년의 유골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연꽃 바위 솔 두포기를 캐서 병아리 안듯이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돌아와 교무실 책상위의 점촌 산 오석에 심었다. 햇볕을 좋아하는 자생지의 습성을 감안하여 창가로 돌을 옮기고 바닷가 습기를 생각하여 가끔 씩 분무기로 공중에 물을 뿌렸다.
한 달 반쯤 지나니 연꽃 같은 잎 중앙이 부풀어 오르더니만 꽃대가 되어 한 10센티미터 정도 기린 목처럼 길게 올라간다.
숨이 턱턱 막히던 태양의 열기가 깻단 터는 할머니의 등이 따끔거릴 정도로 약해지던 가을 어느 날 탑처럼 생긴 꽃대가 눈부신 하얀 꽃으로 뒤 덮여 피어난다. 이 세상에서 활짝 피어 보지 못하고 죽은 청년의 한을 담았는지 탑처럼 생긴 꽃대 주위로 촘촘히 박힌 수 십 개의 자그마한 흰 꽃들이 활짝 피어난다. 지나가는 나비와 벌도 찾아오고 보는 사람들마다 척박한 돌 위에서 꽃을 피웠다고 탄성을 자아낸다. 그렇게 가을이 깊어가고 연꽃 바위 솔은 유골가루 색깔과 같은 자그마한 흰 꽃들을 활짝 피우고 마침내 사그라졌다.
이듬해 봄 그 연꽃 바위 솔이 사그라진 자리 옆에서 빨간 좁쌀알만한 바위 솔 싹이 맺힐 때 쯤 낯이 익은 듯한 남자가 교무실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알고 보니 지난해 6월에 죽었던 그 청년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었다. 여기까지 왔다 가면서 교감선생님에게 인사라도 드리고 가는 것이 도리일 것 같은 생각에 학교에 들어왔단다. 무슨 일로 죽변까지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아들이 죽고 교무실에서 교감 선생님으로부터 아들이 모아 놓은 돈 삼백만원을 받게 되었을 때 아들을 잃은 슬픔도 슬픔이려니와 너무 염치가 없었고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리고 느낀 게 있어 신변을 정리하고 혼자 병들어 살고 있었던 청년의 어머니와 재결합을 해서 10개월간 속죄하는 심정으로 지극 정성으로 병간호를 했단다. 하지만 청년의 어머니는 워낙 병이 깊어 정성어린 남편의 병간호도 보람 없이 끝내 유명을 달리해서 오늘 학교 뒤 공동묘지에 묻고 돌아가는 길이란다. 죽은 아들한테는 면목 없는 생활을 살았지만 나중에 만날 수 있는 염치라도 갖추기 위해 전처와 재결합하여 병상을 지켰다고 한다. 잠시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한 참이 지난 후 돌아 서려는 그 사람에게 물었다. “어머니도 화장해서 사람바위 근처에 뿌리지 않고 왜 묻었습니까?” “아들 만나볼 염치가 없다고 처음에는 아예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다 묻어 달라고 하데요. 그러더니 죽기 사흘 전에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도 멀리서 가끔은 바라다볼 수 있도록 사람바위가 잘 보이는 절벽 위 공동묘지에 묻어 달라.”고 했단다.
아! 태어나고 죽는 일에 누구의 탓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태어나고 죽는 것이 한조각 구름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바위 솔처럼 가을이 되면 시들어 사그라지고 새 봄이 되면 다시 태어나듯이 자연스러운 것이 태어남과 죽음이 아니던가? 그냥 운명인 것을 그렇게 애통해 할 필요도 없고 누구의 죽음에 자책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꽃다운 젊음이 채 피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다. 그래서 꽃다운 청춘이 죽으면 땅위 어디에선가 들꽃 하나가 탐스럽게 피어나는지도 모를 일이다. 운동장을 걸어가는 그 남자 어깨 위로 지는 노을이 오늘따라 유달리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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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슬픈 사연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오늘에사 읽었네....자녀는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데, 그간 정교장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 지네....졸업한지도 어언 40년 가까이 되어,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가슴에서 울어나오는 심심한 위로를 보내네....님은 갔지만, 님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가슴 따뜻한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친구의 마음을 울리는 구려....잘 지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