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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배후의 철학 이론을 알지 못하면서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는 시대가 오늘 제목으로 내세운 말 포스트트루스(post-truth)와 관련됩니다. 이때 포스트라는 말은 예를 들어서 Post-War, 전쟁이 끝난 뒤라고 시간적 의미에서 말하는 경우와는 구별됩니다. 이전에는 진리나 진실이 있었는데 이제는 진리나 진실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나 진실과 그것과 반대되는 것 사이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때로는 거짓이 진실로 오인되는 그런 현상과 관련있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고 할 때의 ‘포스트’와 비슷합니다. ‘포스트모던’이 근대를 벗어난 시대라 이야기 되지만 그럼에도 근대가 훨씬 더 강화된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근대의 틀로 포착할 수 없는 시대의 특징을 부르는 말로 사용되듯이 ‘포스트트루스’도 진리와 진실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살아 남아 있으면서도 사실은 진리/진실과 허위/거짓의 구별이 모호해 지고 때로는 거짓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통용되는 시대 상황을 일컫는다고 하겠습니다.
‘포스트트루스’(Post-truth)는 옥스포드 사전이 ‘2017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단어입니다. 옥스포드 사전은 2016년에 사용 빈도수가 가장 많은 단어를 조사했고 앞의 해에 비해 근 2,000 배나 사용회수가 늘어난 단어가 포스트트루스(post-truth)라고 발표했습니다. 2016년에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을 때였거든요. 트럼프가 대통령 될 때였어요. 그리고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빠져나오는 ‘브렉시트’(Brexit)가 있었던 해 입니다. 이 때 ‘포스트트루스’란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이지요.
옥스포드 사전은 포스트트루스를 “어떤 공공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 사실보다 오히려 감정에 대한 호소와 개인적 신념이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이 공식적인 사전적 의미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어떤 공적인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인이 가진 주관적인 신념과 감정에 따라 하는 판단이 훨씬 더 잘 받아들여지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황을 ‘포스트트루스’라는 말로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오늘 한국의 사회와 정치 상황과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 유포되고 있는 여러 의견들에 이 정의를 적용해 보면 우리도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말도 안 되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렇게 유포가 될까요? 유튜브를 통해서 또는 카카오톡을 통해서, 심지어는 논문 형식을 통해서 사실의 근거가 없는 소식과 주장들이 유통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믿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일 아무도 그걸 믿어주지 않는다면 가짜뉴스가 유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가짜 뉴스이고 가짜 주장인데도 믿게 될까요? 믿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답은 아주 뻔합니다. 그것이 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만일 조금이라도 거짓이거나 거짓이 섞여 있거나 전체가 거짓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믿지 않을 테고, 만일 믿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읽어보라고 전달하는 일은 없겠지요. 자신이 믿지 않는 가짜 뉴스를 남에게 보낼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아, 이게 참이야”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고, 받은 사람도 “아, 이게 참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에게 참에 대한 의식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참에 대한 의식만 있을 뿐 아니라 참이라면, 그리고 그 참이 혼자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나 타인에게 참을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엇이 참인줄 안다면 그것을 혼자 쥐고 있을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것이 혼자 자신의 독점적 소유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가짜뉴스도 그것을 참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뉴스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퍼지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퍼진 가짜뉴스는 하나의 여론이 되어 버리고 여론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가짜뉴스를 생산한 편에 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정당과 언론, 가짜 종교와 가짜 과학에 수없이 속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하는 자리에서 정현구 목사님이 유튜브를 통해서 떠도는 가짜뉴스를 하나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손봉호 선생님이 고정간첩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우리는 오늘 저녁 고정간첩과 식사 자리를 함께 한 셈이 되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뵌지가 46년이 넘었는데요, 선생님이 북한을 옹호하거나 공산주의 사상을 찬성하거나 그렇게 사시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북한을 공식으로 여러 인사들과 함께 방문한 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거지요. 얼마전 한기총 전광훈목사를 비판했기 때문에 나온 소리입니다. 그런데 전혀 손봉호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 이게 참인가 보다!”하고 또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영상을 보라고 전하겠지요. 그러면서 전혀 말도 안되는 것이 마치 참인 것처럼 굳어지는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말도 안되는데도 사람들이 참이라고 믿게 될까요? 이때 말하는 참이 무엇일까요? 참이 무엇이냐, 진리가 무엇인가, 무엇을 일컬어 우리가 진실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은 오래 전부터 철학이 다루어 온 물음입니다. 참에 대한 오래된 정의를 말해 보라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를 들 수 있을겁니다. ‘참’은 라틴 말로는 베리타스(veritas)입니다. 우리말로는 ‘진리’라고 번역해서 쓰지요. 그런데 사실 ‘진리’(眞理)는 19세기 중후반 영어의 truth를 번역하면서 ‘참된 도리’, ‘참된 이치’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말인데요, 저는 그렇게 썩 좋은 번역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성경책이다” 라고 하면 “그게 참이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진리다” 라고 하는 건 이상하죠.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라고 할 때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은 어떤 궁극적인 이치, 어떤 궁극적인 사물의 진상을 늘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우선 베리타스를 ‘진리’라고 번역하는 것은 잊어 버리고 그냥 ‘참’이라고 이해하고 말을 계속 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참에 대한 정의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Veritas est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 베리타스(veritas), 즉 “참은 레이(res), 곧 사물과 인텔렉투스(intellectus), 곧 지성의 아다이쿠아치오(adaequatio), 곧 일치이다” 라는 뜻입니다. ‘참은 사물과 지성의 일치이다.’ 이것을 현대식으로 번역하면 ‘참이라는 것은 사실과 진술의 일치이다’라고 옮겨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고전적인 방식과 현대적인 방식에는 존재에 대한 이해에서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전제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이것은 마이크다”라고 제가 말을 했다면 “이게 마이크다”라고 하는 제 진술을 참이게 만드는 것이 뭡니까? “이게 마이크”라고 하는 ‘사실’이죠. 이때 ‘팩트’, 곧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마이크”라고 하는 제 진술이 참이 되게 만들어 주는 기능을 합니다. 영어로는 ‘truth maker’, ‘참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그러죠. 버트란드 라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사실’을 정의할 때 이런 방식으로 했습니다. “나의 진술이 참이 되게 만드는 것, 즉 truth maker가 팩트, 사실 ”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참과 관련해서 ‘사실’이 무척 중요합니다. 사실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면 온갖 거짓이 만들어지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중세로 올라가면 사정이 다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참이란 “사물과 지성의 일치”라고 했지요. 여기에는 신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모든 사물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가운데는 지성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지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지성을 얻은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물을 인식할 때 인간은 하나님의 지성에 참여하게 되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지성에 참여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지성으로 만든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할 있다는 것이지요. 사물과 지성이 일치할 수 있는 근거는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지으시고 인간과 미약하게나마 공유하는 지성, 곧 로고스가 됩니다. 우리가 뭘 알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의 로고스를 물러 받았고 로고스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진술이 참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단순히 사실도 아니고 우리의 지각 능력도 아닙니다. 사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것에 부여한 인식 가능한 구조(로고스)를 바탕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지성(로고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우리는 사물을 알 수 있고 사물에 관한 참된 진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참은 단지 사실과 진술의 관계,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주관과 객관, 주관과 객관을 이어주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 진리를 깨닫게 하는 성령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과 역할이 여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 와서 진리라고 할 때는 이런 형이상학적, 신학적 배경은 밀쳐내 버리고 방금 제가 라셀을 이야기한 것처럼 나의 진술과 사실의 일치에만 관심을 두게 된 것이지요. 물론 이 정의에는 사물과 관련된 참이 단순히 나의 주관적 생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내용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결국 그것이 팩트냐 팩트가 아니냐, 곧 사실이냐 아니냐에 달려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스트트루스는 객관적 사실(objective fact)이 내가 가진 생각이나 내가 믿는 믿음의 참과 거짓을 결정하는 힘을 잃어버린 상황을 그려줍니다. 포스트트루스를 옥스포드 사전에서 어떻게 정의한다고 했습니까? 두 가지, 곧 하나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나의 개인적 신념 또는 확신에 호소해서 여론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팩트, 곧 사실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편이 그렇게 되어주기를 바라거나 원하는 바가 나의 의견이나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보증해주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사실 이런 생각이 형성된 것은 단지 최근에 와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객관적 지식이나 객관적 사실이 없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저 그리스 시대의 이른바 ‘소피스트들’이 이미 주장했던 것이니까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어떤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것은 내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나 자신이 참과 거짓의 척도가 되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런 사람들에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소피스트의 생각을 현대에 와서 아마도 가장 잘 대변하는 사람이 니체일 겁니다.
니체가 그런 생각을 할 이유가 전혀 없지는 않았죠. 니체의 사상을 흔히 관점주의(Perspectivism)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 항상 어떤 한 측면이나 어떤 한 관점에서 보는 건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이 테이블을 보실 때 이쪽에 앉아있는 분과 저쪽에 앉아있는 분이 사실 동일한 테이블을 보고 있다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같지가 않습니다. 이쪽에 앉은 분은 지금 이 면을 이렇게 보고 있죠. 저는 지금 이 테이블을 제가 보려고 하지만 이 테이블 다리는 보지 못하고 테이블 위쪽에 있는 이 판만 지금 보고 있습니다. 조그만 모래알을 하나를 본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래알을 제 손에 얹으면 제가 모래알 전체를 보지 못합니다. 제 쪽에서 보이는 것만 볼 수 있고 뒷면은 뒤집어 봐야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본다고 할 때 그 사물을 보는 것은 항상 이런 방식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와 사물이 놓여 있는 배경을 통해서 우리는 뭘 볼 수 있습니다. 사물 전체를 보려면 둘러서 봐야 되고 돌아서 봐야 되고 이 경우는 또 뒤집어서 봐야 됩니다. 우리의 지각은 항상 어떤 관점을 가지고 혹은 어떤 한 입장에 서서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 발생합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죠. 우리는 늘 어떤 관점, 어떤 퍼스펙티브를 가지고 사물과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체를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돌려서 보고, 둘러 보는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장소도 필요합니다. 시간과 공간안에서 이렇게 우리 앞에 주어진 것들을 종합하는 작용이 우리의 의식 활동입니다. 칸트 같은 사람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수용하는 것들을 전체로 종합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그는 라이니츠가 사용했던 용어를 빌려 통각(apperception)이라 불렀습니다. ‘자기의식’이라고도 부릅니다. 칸트는 우리가 주어진 것들을 볼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배후에, 곧 우리에게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배후에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소위 ‘사물 자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우리가 볼 때 두 가지 조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이 주어질 수 있도록 뒤에서 배경을 형성해 주고, 사물이 우리에게 주어지도록하는 ‘사물 자체’라는 것이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어진 것들을 단순히 그냥 단편적으로 또는 파편적인 방식으로만 놔두지 않고 그것을 종합하는 우리 ‘통각의 종합활동’이죠. 그런데 니체는 이 둘을 모두 배제했습니다. 사물 자체도 없고 통각의 작용도 없고 그냥 남아있는 것은 파편화된 나의 지각활동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 중요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해석에 영향 주는 것이 ‘힘을 향한 의지’라고 니체는 보았습니다.
칸트를 현대 관점주의의 선구자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칸트를 엄밀하게 읽으면 그를 관점주의자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주어지는 것’이 있고 그것을 종합하는 ‘통각’(자기의식)이라는게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을 제거해버리고 나면 결국 니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관점주의로 진행될 수 밖에 없습니다.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와 같은 현대철학자들이 니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만일 이런 방식을 가지고 온다면 우리가 뭘 보고, 말하고, 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은 결국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에 불과하게 되겠죠. 과거에 지식을 권력과 연관해서 본 사람으로는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었습니다. 그는 “앎은 곧 힘”이라고 했죠. ‘스킨엔치아 에스트 포텐치아’(Scientia est potentia), 우리말로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앎이 곧 권력이라는 말입니다. 미쉘 푸코는 우리의 앎의 추구가 사물에 대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오히려 사물을 통제하고 관리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의지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현실을 접근한다면 ‘진리’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 실재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정치와 언론과 삶을 본다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결국에는 진정한 ‘참’과 진정한 ‘옳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포스트트루스가 만들어질 수 있는 상황은 이런 방식으로 이미 만들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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