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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충렬사(忠烈祠)
사적 제233호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
01. 연혁
남해대교 아래 노량포구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남해 충렬사(忠烈祠)는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1598. 11. 19)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남해 충렬사는 이순신의 신위를 모신 불천위(不遷位)의 사우이다. 불천위(不遷位)는 덕망이 높고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국가에서 허가한 신위(神位)를 말한다.
충렬사에는 1604년에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서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 좌의정의 직위가 내려지고, 1613년에는 영의정으로 책봉된 충무공의 구국충정의 얼이 서려 있다.
남해 충렬사는 통영 충렬사와 함께 ‘忠烈’이라는 현판을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 왔으며 조선시대 인조 임금 때 지어졌다.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의 시신은 이락사(李落祠)에 최초로 안치되었다가 그 해 이곳 남해 충렬사로 이장, 안치되었다. 시신을 충청남도 아산으로 운구하기 전에 3개월간 이곳 가묘자리에 안치했다가 군영지인 전라도 고금도를 거쳐 아산 현충사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관음포 이락사
완도 고금도(묘당도) 월송대- 공의 주검이 안치되었던 곳
충렬사 건립은 충무공의 순국을 기려 남해 사람 김여빈(金汝贇)과 고승후(高承厚)가 충무공 사당 건립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1633년(인조 10)에 한 칸짜리 초가 사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하여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충렬사의 시작이다. 남해현령 이정건(李廷楗)은 이 사당 앞에 충민공비(忠愍公碑)를 세웠고, 조정에서는 1643년에 이순신에게 ‘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충무공께서 전사하시고 45년만이다.
충민공비
충무공이 순국한지 60년이 되던 효종 9년(1658)에 조정에서 어사 민정중(閔鼎重)에게 명하여 통제사 정익(鄭榏)으로 하여금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으니 이것이 충렬사의 중건이다. 이때 충민공비는 땅속에 묻었다.
1746년 5대손 이언상이 충렬사 곁에 작은 암자 호충암(護忠庵)을 짓고, 가까운 화방사(花芳寺)의 승려 10명, 승장 1명을 두어 수직호사(守直護祠)로 임명하고 이들이 번갈아 와서 사당을 지키도록 했다. 또한 공이 죽은 후 자운이란 승려가 공을 사모하여 쌀 수백섬을 싣고 와서 공을 위해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자운은 원래 충무공의 밑에 있던 승장(僧將)이었다.
외삼문
02. 충렬사 사우(祠宇)
1663년(현종 4년) 남해 충렬사는 통영 충렬사와 함께 현종 임금이 친필로 써서 내려준 ‘忠烈祠’ 현판을 받았다. 남해 충렬사에는 ‘忠烈祠’라는 현판이 세 개가 있는데, 장군의 사당 이외에 박정희대통령 친필 현판이 내삼문에, 그리고 서예가인 추당(秋堂) 박호병(朴好秉, 1878~1942)이 쓴 현판이 외삼문에 걸려있다.
외삼문 현판 - 박호병의 글씨
내삼문 현판 - 박정희 글씨
충렬사
▲사당의 현판 글씨를 누가 썼는지 필자가 관지를 확인한 실력은 '김풍영(金豊永)'인데 혹시 틀렸으면 알려주시기 바람. 남해군청에 확인 전화를 했지만 확인이 안되었음. 서예가로 또 남해 충렬사로 검색하면 이 존함은 나타나지 않는다.
사당 우측의 충무공비
현재의 사우는 1922년에 신축한 3칸 사우이다. 사당 내부의 정면에는 위패함(位牌函)이 봉안되어 있고, 그 위에는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다. 이 영정은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화백이 1953년에 그린 충무공의 초상화인데 영의정의 관복을 입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정부에서 이 영정을 1973년에 표준 영정으로 지정하였다. 원도(原圖)는 현충사에 봉안 되어 있으며 이것은 원도의 모사품(模寫品)이다. 사우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면 왼쪽 벽에 명나라에서 준 명조팔사품(明朝八賜品)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팔사품은 명의 수군도독 진린(陳璘) 장군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명 황제에 보고하자 명의 신종(神宗)이 그 전공을 치하하여 보내준 포상물이다. 여덟 가지 품목 15점이다.
팔사품 그림
03. 이충무공 가묘(假墓)
사우 뒤편에는 가묘가 있는 데,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우에서 가묘로 가는 문을 내어 통행하게 했다. 이곳이 장군의 유해를 처음으로 안치했던 장소이다. 흔히 초빈(草殯) 했다고 하는데, 초빈(草殯)은 집 바깥의 초야에 빈소를 마련했다는 뜻이다. 집안에 빈소를 차리는 것을 가빈(家殯)이라 한다. 이곳에서 3일정도 머물렀다고 하는데, 이때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당시 전쟁 상황을 고려하여 몇 일간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후에 고금도로 이운(移運)하여 그곳에서 83일간 머물렀다가 충남 아산으로 운구 되어 1599년 2월11일 금성산 자락에 장사했다. 전남 고금도 유적지에 대해서는 기 포스팅한 바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장례기간을 살펴보면 임금은 5개월, 정3품 이상 사대부는 3개월, 이하 당하관은 1개월, 일반가정은 3일장, 5일장, 7일장 9일장 11일장 등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순신 장군은 순국당시 당상관의 품계에 있었으므로 3개월 장을 치른 것이다.
사당 뒤 가묘
04. 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
현재 사당 앞에 있는 이 비각의 비문에는 ‘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建立(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증시중무이공묘비건립)’으로 되었는데 1660년에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1663년에 통제사 박경지(朴敬祉) 등이 세운 것이다.
비각에는 ‘補天浴日’이라는 액자 현판을 박정희 글씨로 달았다. 보천욕일(補天浴日)은 아래에서 따온 것이다.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 "천지(天地)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는 분." 1598년 7월 명나라 장수 진린( 陳璘)이 충무공과 함께 조ㆍ명 연합함대를 지휘하면서 충무공의 탁월한 전술능력과 리더십에 감복(感服)하여 선조에게 충무공을 찬양하여 이른 어구 .[출 처 : 충무공행록(忠武公行錄)] ☞보천욕일(補天浴日) : ‘하늘을 메우고 해를 목욕시키다’ 말이다. ‘여왜가 하늘을 메우다(女媧補天)’와 ‘희화가 해를 목욕시키다(羲和浴日)’에서 유래한 성어로, 위대한 공훈을 세운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중국의 전설 속 이야기다.
05. 청해루(靑海樓)
1760년 삼도수군통제자로 부임한 충무공의 5대손이 되는 이태상(李泰祥)이 재실공간으로 청해루(靑海樓)를 지었고, 1769년 6대손 이한응(李漢膺)이 비각을 중수하고 사우를 단청하는 등 후손들이 충렬사의 중건에 많은 힘을 쏟았다. ▲ '露梁書院(淸海樓)懸板"에 崇禎紀元后三壬戌三月 星山後人 李萬龜 謹識'
1721년에는 부속시설로 서원을 건립하여 1722년 개원하였는데, ‘노량서원露梁書院’이라 이름하고 150년간 사림을 대상으로 한 유생교육과 사우관리를 위해 존속하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은 철거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 향사 윤기섭과 고준홍 등이 모여 조직한 ‘보존회’의 기금으로 사우를 건립했다. 이들이 사재를 털어 모은 자금으로 사당을 새로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1949년에 ‘보존회’는 해체되고 남해 충렬사 모충회가 조직되어 현재까지 충렬사를 관리하고 있다.
06. 한글 충렬사비
1948년에 남해군민과 경상남도 초등학생들이 모은 성금으로 한글로 충렬사비(忠烈祠碑)를 청해루 앞에 세웠는데 글은 정인보(鄭寅普)가 짓고,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07. 충렬사의 관리
남해 충렬사는 홍살문과 외삼문, 내삼문, 충렬사중건비, 이충무공묘비와 비각, 장군의 위패를 모신 본당, 충무공비, 충민공비, 가묘 그리고 삼문 밖에 이충무공비와 청해루가 배치되어 있다. 충렬사는 중건이후 1925년까지 약 200여 년간 장군의 후손들인 5세손부터 11세손까지 7대가 참여하여 사재를 털어가며 사우와 부속건물을 정성스럽게 보수 또는 신축 관리하였다고 한다. 후손들이 모두 무신들이었는데, 삼도수군통제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 정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 무려 55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문신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무인의 피를 이은 것도 있겠지만 나라에서 충무공의 덕을 기려 대대로 그 공을 가문에 인정해 준 것일 것이다. 충렬사 경내에 있는 후손 이태상의 비 [출처] 남해 가볼만한 곳 충무공 이순신 최초의 사당 충렬사|작성자 낭만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