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산스님과 사사나스님의 법문을 비교해 보았더니
각산스님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요즘 한국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수행법이 소개 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남방 테라와다불교의 위빠사나 수행법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해마다 수 많은 출가자와 재가자들이 미얀마에서 가서 수행을 하고 수행법을 국내에 보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하면 ‘미얀마’를 떠 올리게 한다. 그런데 불과 삼사년 전부터 아잔브람스님의 수행법이 회자 되고 있다. 이는 각산스님이 방송에서 ‘아잔브람’의 명상법을 소개 한 것이 인연이 되고 있다.
각산스님의 유튜브 동영상 강좌에 따르면 미얀마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눈에 띈다. 그대신 아잔브람이 태국의 아잔차스님으로부터 배워 왔기 때문에 태국불교 수행법을 소개한다.
각산스님의 동영상 강좌를 여러 차례 보았다. 지금까지 접한 미얀마식 불교, 즉 위빠사나 수행법과는 다른 것이다. 어쩌면 한국 선불교의 수행법과 매우 유사하다. 아잔브람의 수행법이라 하지만 한국선불교 수행법을 결합시켜 놓은 듯 하다. 이를 동영상 녹취하여 정리 하여 보았다.
각산스님은 동영상강좌에서 수행의 목적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해탈’과 ‘대자유’라 하였다. 왜 해탈과 열반이라 하지 않고 해탈과 대자유라 하였을까?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이라는 말이 있음에도 대자유라는 표현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 선불교에서 선사들이 대자유를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잔브람을 안 만났더라면”
각산스님은 불교방송 명상강좌 12강에서 대승경전에 대하여 부처님 말씀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승경전은 부처님 직설은 아니더라도 부처님의 근본적 사상, 부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승비불설이라 할 때 부처님 직설은 아니더라도 부처님의 근본적 사상, 부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12강) 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런 발언으로 보아서 초기불교나 테라와다가 아니라 대승불교 신봉자임을 알 수 있다.
남방에서 계를 받고 온 스님들은 빨강가사나 노랑가사를 입는다. 그러나 각산스님은 한국의 회색승복이다. 이런 승복이야말로 각산스님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간화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남방에서 초기불교 공부를 하고 남방수행법을 익혔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보조적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메인은 한국불교에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소위 미얀마식 불교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다.
각산스님은 강좌에서 “아잔브람을 안 만났더라면”라는 표현을 종종 하였다. 미얀마에서 수행을 하였음에도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까? 이는 호흡관찰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마음 관찰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 다음에 호흡관찰. 호흡관찰은 아나빠나사띠를 말한다. 호흡관찰하는 방법. 경전에는 기본적으로 정형구가 네 가지가 나옵니다. 이 네 가지는 체험을 하지 못하면 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입니다. 문구만 빠지게 됩니다. 체험한 사람만이 안다니까요. 저도 아잔브람을 안 만났더라면 이러다가 파옥의 큰스님을 폄하시키는 것은 아니고요.”
(각산스님, 불교방송 명상강좌 -제8강- 각산스님의 "호흡관찰법 실참")
강좌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그것은 마음관찰에 대한 것이다. 마음관찰을 위빠사나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순위를 보면 가장 아래단계로 되어 있다. 즉 1)마음관찰, 2)호흡관찰, 3)호흡전체보기, 4)감미로운호흡, 5)니미따(心月), 6)선정, 7)지혜, 7)해탈 순으로 되어 있다.
가장 낮은 단계가 마음관찰 즉 위빠사나이고, 가장 높은 단계는 해탈이다. 그러나 열반이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선정으로는 열반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탈 다음에 대자유는 있어도 열반이 올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입술에서 호흡을 보았더니
각산스님은 마음관찰 다음에 호흡관찰에 대하여 길게 설명하였다. 이 호흡관찰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빠리무카’이다. 동영상 강좌 여러 군데에서 설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빠리무카 사띠를 해야 한다. 굉장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이거 제대로 아무도 해석 못했습니다. 아잔브람 안 만났으면 저도 이게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죠.” (5강) 라 하였다. 그렇다면 각산스님이 말하는 빠리무카는 무엇일까? 녹취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경전을 살펴 보니까 코끝이라는 말은 절대로 없는데 윗입술과 커끝 사이에 고정점을 두고 하라는 그 말 때문에 시작 된 겁니다.
절대 정해진 것 없습니다. 정해졌기 때문에 일어난 겁니다. 그것을 아무리 벗어 날려 해도 구년 십년 훈련 받은 것을 제가 어떻게 벗어납니까? 착점이 있는데. 어떤 스님 경우 거기에다 앵카를 박아라 합니다. 포착점을 계속 뇌가 기억되도록 해라 하거든.
아잔브람 수행을 하면서 ‘호흡은 정해진 것이 없다.’라고 나옵니다. 핵심적인 정형구가 있습니다.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서 다섯 가지 오개를 내려 놓고 아나빠나사띠를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빠리무카사띵을 해라’ 라고 나옵니다. 빠리무카사띵을 제대로 설명해 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각산스님, 불교방송 명상강좌 -제6강- 각산스님의 "위빠사나명상법 질문과 답변")
각산스님은 빠리무카사띠에 대하여 매우 상세히 설명하였다. 자신이 구년 십년 코끝만 바라 보고 명상하였으나 숨을 못 쉴 정도로 하였다. 그러나 입술에서 호흡을 보았더니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빠리무카사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빠리무카라는 의미는 무어냐? 입술 또는 입술 앞 전면을 뜻하지 어떤 지정된 곳을 말하지 않습니다. 호흡을 볼 때는 보살님, 단순하게 호흡을 알기만 하면 되는데 텐션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입술 앞에서 숨을 쉰다 생각하고 관찰하면 됩니다.
입술 앞에서. 제가 관찰을 다 해 본 사람입니다. 논문을 써도 숨을 관해서는 몇 편을 쓴다. 숨이 세면 앞으로 갈 듯 해도 밑으로 퍼집니다. (가슴이) 한여름이 되도 에어컨이 되어 버립니다. 안정이 되면 숨이 안개가 흘러 내리듯이 입술을 타고 내려 옵니다. 앞으로 안 갑니다. 숨은 들어 오면서 단전까지 들었다가 저절로 나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그것을 현상적으로 보면 숨이 입술 앞에서 흘러 내리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테크닉적 실전적 수행법은 ‘입술 앞에서 숨을 쉰다’생각하면 숨은 단전(?)에 터집니다. 본인의 반복된 훈련에 의해서. 안된다 하는 순간 절대 안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믿지 말고 자기부처님을 믿으니까 하면 된다. 마음은 쓰는대로 된다. 핵심이다.”
(각산스님, 불교방송 명상강좌 -제6강- 각산스님의 "위빠사나명상법 질문과 답변")
이 법문은 어느 재가불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다. 호흡명상하는 기법에 대한 것이다. 이 호흡명상에서 거의 정형화 되어 있는 문구가 ‘빠리무캉사띵’이다.
“미얀마불교는 청정도론과 아비담마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문구에 대하여 주석서가 틀렸다는 것이다. 당연히 미얀마의 수행방법도 틀렸음을 말한다. 이는 미얀마 불교가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호흡은 정해져 있지 않은데 우리는 미얀마식 위빠사나를 하기 때문에, 미얀마식 사마타위빠사나를 하기 때문에. 사마타위빠사나는 코끝 보기를 합니다. 청정도론에도 그렇게 나왔기 때문에. 미얀마불교는 청정도론과 아비담마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8강) 라고 비판하고 있다.
빠리무캉은 대단히 중요한 술어이다. 이 짤막한 문구에 호흡명상이 무엇인지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명상으로 들어 가는 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종래 주석서와 청정도론에서는 코끝보기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의 원문을 보니 무카라는 말이 얼굴과 입인 것에 주목하여 입에서 호흡을 보았더니 한번에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하였다. 과연 각산스님 말대로 입술, 그것도 윗입술이 맞을까?
“전면에서 호흡을 보십시오”
빠리무캉과 관련하여 전재성님은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고”라 번역하였다. 무카에 대하여 얼굴로 본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라고 번역하였다. 무카에 대하여 역시 얼굴로 본 것이다.
주석서에 따르면 빠리무카에 대하여 “코끝이나 윗입술의 가운데 잘 정립된 것”(Vibh.252) 이라 하였다. 각산스님이 말한 윗입술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이는 ‘틀린 것’이라 하였다. 특히 코끝이 틀린 것이라 하였다. 왜 틀린 것인가?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코끝은 윗입술쪽이 아니라 코의 뿌리로 실제로는 코의 근원이 되는 부분으로 두뇌 한 가운데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곳을 기점으로 ‘얼굴 둘레로’(=머리둘레로) 새김을 확립한다는 뜻이다.”(D22, 1713번 각주)라 하였다. 각산스님이 부정하는 코끝도 아니고, 또 각산스님이 강조하는 윗입술도 아닌 것이다. 무카라 하였을 때 이를 ‘얼굴’로 해석하여 ‘얼굴 둘레로’ 본 것이다.
전재성님은 빠리무캉에 대하여 우다나 ‘사리뿟따의 경(Ud27)’에서는 단지 “앞으로”라고만 번역하였다. 이는 종전의 “얼굴 앞으로”라고 번역한 것과 다르다. 그래서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고”라 하였다. 이렇게 번역한 것은 주석에 따른다.
우다나 주석에 따르면 빠리무캉에 대하여 “대상과 마주하여 새김을 확립하고 또는 얼굴 근처에 그것을 활성화하고”(UdA.188) 라 하였다. 문제는 주석 Vibh.252이다. 우다다 각주에 따르면 Vibh.252에서는 ‘새김이 코끝이나 혀 끝에 확립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디가니까야에서 소개된 “코끝이나 윗입술의 가운데 잘 정립된 것”(Vibh.252) 이라는 말과 또 다르다.
빠리무캉과 관련하여 또 다른 주석에서는 “빠리는 ‘두루’의 의미를 지니고 무카는 ‘존재’의 의미를 지니고, 싸띠는 ‘현재’의 의미를 지니므로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고’라는 말은 ‘두루 현존 하는 새김을 확립하고’ 라는 뜻이다.” (Pps.I.176) 라 하였다.
핵심은 무카라는 말이다. 무카(mukha)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면 ‘mouth; face; entrance; opening; front. (adj.), foremost’라 되어 있다. 입, 얼굴, 입구, 앞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빠리무카(Parimukha) ‘facing, in front’의 뜻이다.
parimukha?은 사전적 의미로 ‘in front of’의 뜻이다. ‘Parimukha? sati?’에 대한 통상적인 번역은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고”가 되지만 단지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고”로 번역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얼굴이나 코, 입술이 아니라 전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전면에서 호흡을 보십시오”라 한다.
전면에서 호흡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코끝이나 윗입술에 한정하지 않음을 말한다. 몸 전체에서 호흡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 얼굴 앞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각산스님은 ‘윗입술’이라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호흡전체보기를 할 수 있을까?
각산스님에 따르면 “입술 또는 입술 앞 전면을 뜻하지 어떤 지정된 곳을 말하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그래서 “입술 앞에서 숨을 쉰다 생각하고 관찰하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입술 앞, 즉 윗입술을 강조한 말이다. 이렇게 호흡보기를 하였을 때 아잔브람 방식대로 호흡알아차리기를 하면 된다고 하였다.
아잔브람의 호흡알아차리기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각산스님은 “긴호흡알아차리기, 짧은 호흡 알아차리기, 전체 호흡 보기, 호흡고요히 하기 이렇게 변형 시켰습니다.”(8강) 라고 말하면서 전체호흡보기를 설명하였다.
아잔브람의 전체호흡보기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여러분 전체호흡 보일 줄 압니까?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8강) 라 하였다. 전체호흡보기가 매우 어려운 것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호흡전체보기를 할 수 있을까? 아잔브람 명상법에 따르면 전체보기는 8단계 중에 3단계에 해당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떻게 전체호흡을 보느냐? 절대 전체호흡안보입니다. 그냥 호흡 하는 것을 알아차릴 때 이삼십분 정도 집중이 강화된 사람들은 호흡의 전체보기가 저절로 됩니다. 안된 분이 있다면 나가는 숨이 있다면 전체로 바라봅니다. 그 다음에 나온 그 자리에서 전체 들어 가는 것 까지를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호흡은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성의 문지기가 사람 오는 것만 관찰했지 그 사람이 어디를 갔는지 찾아 내지 않잖습니까? 숨만 관찰하면 됩니다. 그것이 전체 호흡을 보게 되는 배양이지요.”
(각산스님, 불교방송 명상강좌 -제8강- 각산스님의 "호흡관찰법 실참")
‘빠리무카’라는 호흡보기로 이삼십분 보았을 때 전체호흡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집중이 강화된 사람이라 한다. 그런데 전체보기가 되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자동으로 안 들어 갔을 때는 내가 한번 인위적으로 호흡의 전체보기 훈련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5강) 이라 하였다. 집중력이 개발된 자는 전체보기가 가능하지만 그래도 안될 때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전체보기를 하라는 것이다.
“요 경지만 한번 갔다 나오면”
전체보기를 하였을 때 대단한 집중력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런 전체보기에 대하여 “이 호흡의 전체 보기가 스승 없이 모든 수행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5강)이라 하였다. 전체보기 이후 단계에서는 스승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호흡을 전체로 보기가 되었을 때 이후는 자동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내가 한 만큼 저절로 감미로운 호흡을 만나게 되고. 감미로운 호흡은 허공과 내가 하나이다. 몸이 그렇게 새털같이 가볍습니다. 요 경지만 한번 갔다 나오면 여러분 어떠한 분야에든 최고의 대가가 됩니다. 그 다음단계는 스스로 인도해 갑니다.” (5강) 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빠리무카에 의한 호흡보기와 이어지는 호흡전체보기는 선정으로 들어 가는 문임을 알 수 있다.
“섹스의 쾌감보다 100배는 큰 황홀함이었어요”
각산스님은 이십여편의 동영상강좌에서 아잔브람 명상법을 소개 하고 있다. 마치 ‘이것이 최고이다.’라든가 ‘이것만이 진실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아잔브람 명상법은 선불교와 유사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니미따에 이어지는 선정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고요하게 되기 위해 절대 고요하게 안됩니다. 내 할 것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안됩니다. 존재 속에서 뭔가를 얻으라면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잔브람의 최고의 가르침이 ‘놓아라’ 방하착, 그리고 항상 ‘비해피(be happy)’ 해라.
그래서 긴호흡인지 짧은 호흡인지 아는 훈련만 하면 호흡의 전체 보기가 된다. 호흡의 전체보기가 되는 분들은 저절로 전체보기가 된다. 이 고요한 호흡에 들어 갔을 때는 감미로운 호흡이 있고 바로 선정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허공과 내가 하나라는 것, 그때 여러분 이해가 됩니다. 둘이가 아니라는 것, 불교의 모든 이야기가 이해가 됩니다. 불이사상도 알게 되고. 황홀하고.”
(각산스님, 불교방송 명상강좌 -제8강- 각산스님의 "호흡관찰법 실참")
아잔브람은 늘 “be happy(행복하세요)”라 한다. 괴로움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불교가 염세적으로 흐를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입문자에게 행복을 강조한다고 했다. 또 하나 자주 하는 말이 “놓아 버려라”라 한다. 이는 선가에서 말하는 ‘방하착’과 같은 말이다.
아잔브람 명상에서 ‘감미로운 호흡(beautiful breath)’ 이 있다. 이 감미로운 호흡은 어느 정도일까? 아잔브람에 따르면 “ 불교 명상의 즐거움이 대학 시절 여자친구와 나눈 섹스의 쾌감보다 100배는 큰 황홀함이었어요. 그러니 어찌 출가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한겨레신문, 2015-10-17) 라 하였다.
각산스님에 따르면 아잔브람 명상법의 마지막 단계는 해탈이라 하였다. 그래서 허공과 하나 되는 것이라 하여 불이사상이라 하였고 황홀이라는 말로 표현 하였다.
사사나 스님의 유튜브동영상 법문을 접하고
또 하나의 유튜브 동영상 법문을 보았다. 한국테라와다 불교의 사사나 스님 법문이다. 각산스님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낮은 조회수이다. 그럼에도 각산스님이 소개하는 아잔브람명상법과 모든 면에서 대조가 된다.
사사나 스님은 한국인이다. 교직에 몸담고 있었던 재가자 출신이라 한다. 자신의 나이 45세 때 미얀마로 건너 간 것이 불교와 인연을 맺은 최초의 사건이라 하였다. 이전에는 불교의 ‘불(佛)’자도 몰랐다고 하였다. 자신에게 닥친 문제로 인하여 죽고 싶지 않아서, 살고 싶어서 택한 것이 미얀마행 비행기를 탄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마음 보는 수행으로 유명한 ‘쉐우민센터’와 인연 맺은지 15년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사사나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의 힘은 대단합니다. 수행을 해서 얻은 이익과 힘을 제가 충분히 이해하는데 이를 여러분들에게 법문을 안 해 줄 수 없죠. 이런 수행을 안 가르쳐 줄 수 없죠. 저는 스승님으로부터 14년 배웠습니다. 스승님으로부터 지도를 받은지가 1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7년 정도는 스승님께 늘 인터뷰 하며 수행했습니다. 저는 한스승님, 한 사야도 밑에서만 공부 했습니다.”
(사사나스님, 2015년 3월 20일 한국테라와다불교 집중수행 사사나 스님 입제법문)
사사나 스님이 쉐우님센터에서 지도를 받은 스님은 ‘우 떼자니야’ 사야도라 하였다. 그렇다고 떼자니야 사야도를 아잔브람 식으로 추앙하지는 않는다. 이런 가르침을 접하게 된 것에 대하여 부처님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한다,
“그래 그게 그거야, 이게 인터뷰야”
불교에 대하여 전혀 몰랐던 재가자가 어떻게 해서 오늘날 빨강가사를 입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초창기 신비한 체험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준다.
“어느 날 이삼개월 지나서 어떻게 체험이 들어와요. 이거 인터뷰한번 해보자. 사실 그때 까지만 해도 인터뷰 노이로제 걸렸어요. 그 인터뷰를 하기 시작하면서 옆에 있는 어느 한국스님이 그러더라구요 “그래 그게 그거야, 이게 인터뷰야, 이런 것들이 인터뷰꺼리야”라고. 저는 그래서 책에 있는 거, 누구한테 말 들어 본 거 이런거 해본적 없습니다. 그때 그것이 한번 터지더니 계속 체험으로 인터뷰했어요. 제가 체험을 했어도 제가 체험이 무엇이지 몰라요. 어떤 법인가를 몰라요. 법에대한 이해하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그러나 인터뷰 고민, 인터뷰 노이로제에서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재미있다는 것, 그 체험이 어려운 고비를 넘겨 주었습니다.”
(사사나스님, 2015년 3월 20일 한국테라와다불교 집중수행 사사나 스님 입제법문)
죽을려면 수행이나 하다 죽자는 심정으로 간 곳이 미얀마라 하였다. 두 번째 갔었을 때 체험이 왔다고 했다. 교리에 대하여 전혀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스승에게 물어 보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국스님이 “그래 그게 그거야”라며 그것이 인터뷰 꺼리라 했다고 한다.
한 스승밑에서 십년을
사사나스님은 인터뷰에 대한 노이로제가 있었다고 하였다. 아마 인터뷰 할 내용이 없어서 일 것이다. 그런데 체험을 하고 나서 부터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게 재미 붙이다 보니 우 떼자이야 사야도 밑에서 10년을 지도 받았다고 한다. 이는 각산스님과 비교 된다.
각산스님 동영상을 보면 각산스님도 쉐우민센터에서도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각산스님에 따라면 우스개 소리로 ‘역마살’이 있다고 하면서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스승을 찾아 이곳 저곳 다녔다고 하였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아잔브람 스님을 만나서 종지부를 찍었다고 하였다. 반면 사사나스님은 오로지 한분의 스님을 모시고 10년 수행했다고 한다.
“보는 마음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사사나스님이 법문한 것은 위빠사나에 대한 것이다. 사념처 중에 심념처로서 마음 보는 수행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이를 빠라맛타(paramattha)로 설명한다. 빠라마따에 대하여 ‘실제’라 하였다. 실제는 어떻게 보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할미새가 날아 갑니다. 보는 순간 ‘예쁘다’ ‘밉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쁘다’는 번뇌입니다. 빤냐띠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빠라마따를 보아야 합니다. 빠라마따는 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를 보는 마음에 있습니다. 보는 마음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사사나스님, 2015년 3월 20일 한국테라와다불교 집중수행 사사나 스님 입제법문)
핵심은 “보는 마음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라는 말이다. 새를 볼 때 사람들은 빤냐띠(개념)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가 “예쁘다” “밉다”라는 것이다. 새 대신 여자를 대입할 수 있다.
빤냐띠(개념)로 보지 않고 빠라맛타(실제)로 보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 하였다. 새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여자에 대하여 “예쁘다”거나 “섹시하다”등으로 보지 않고 오온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 더 있다. 보는 그 마음을 또 보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노팅(noting)’하는 것에 대하여 ‘왓칭(watching)’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능력을 계발하면 엄청난 정신적 힘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여러분은 정말 복 받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사나스님은 인터뷰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에만 인터뷰가 있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티쳐(teacher)가 인터뷰 해 가면서 가르쳐 줍니다. 혼자는 수행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 아마 99.9%가 다른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라 하였다. 스승의 지도가 없는 수행은 대부분 엉뚱한 길로 빠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예로서 태국에서의 경험담을 다음과 같이 들려 주고 있다.
“태국가서 열흘 정도 있었는데 태국의 치앙마이 수행센터들, 사원의 수행센터들을 들러 보았습니다. 숲속에 있는 수행처, 말하자면 아잔차스님 제자 수행처이었습니다. 근데 보니까 그 티쳐(teacher)가 수행자들한테 법문이 있다고 해서 내려갔더라구요. 숲속에 이십명 정도 모였어요. 티쳐는 앉아서 ‘티칭(teaching)법문’하더라구요. 일대일 또는 그룹인터뷰는 아니고 법문형식으로 티칭하더라구요.
한국에서 여러분들 위빠사나 하면 전부다 인터뷰해주죠? 이거에 대한 복! 여러분들은 안 봐서 모릅니다. 처음엔 깜짝놀랬어요. 제가 미얀마에서 수행했다는 복이 대단하단 생각을 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인터뷰해주잖아요. 저도 10년 가까이 저의 스승님한테 수행지도 받을 때 전부 인터뷰를 받았거든요. 그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안 것은 (태국 숲속의 수행처를) 들러 보고 알았어요.”
(사사나스님, 2015년 3월 20일 한국테라와다불교 집중수행 사사나 스님 입제법문)
사사나 스님은 미얀마에서만 10년 수행하였는데 인접 국가 태국에 갈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숲속의 수행센터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인터뷰가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하였다. 그것도 아잔차 스님의 제자가 스승으로 있는 숲속사원에서라 한다. 이를 보고 자신은 매우 복받았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접한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정말 복 받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라 하였다.
알아차림에 대하여
사사나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모든 면에 있어서 각산스님과 비교 된다. 각산스님이 선정을 강조한 것에 비하여 사사나 스님은 위빠사나를 강조한다. 특히 번뇌의 소멸에 대해서는 위빠사나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번뇌를 한방에 해체해 버립니다.”라 하였다. 번뇌가 일아나도 알아차리면 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사나 스님은 알아차림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이때 알아차린다는 것이 사띠가 아니라 지혜로 쓰입니다. 지혜만이 번뇌를 없앱니다. 없앤다는 것도 이해거든요. 책에서는 제거 한다 없앤다 하지만 이해가 없애는 것입니다.”
(사사나스님, 2015년 3월 20일 한국테라와다불교 집중수행 사사나 스님 입제법문)
알아차림에 대하여 사띠라기 보다 ‘지혜(빤냐)’라 하였다. 지혜가 있기 때문에 번뇌가 한방에 사라짐을 말한다. 이는 대상에 대하여 빠라마따, 즉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를 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런데 지혜는 ‘이해’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빠라마따를 이해해야 아주 힘이 세집니다.”라 하였다.
“깨어 있음이야말로 고요입니다”
사사나스님은 ‘고요’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였다. 일반적으로 고요라 하면 ‘선정’을 생각하기 쉽다. 각산스님은 아잔브람명상을 소개 할 때 선정단계에 대하여 “이 고요한 호흡에 들어 갔을 때는 감미로운 호흡이 있고 바로 선정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허공과 내가 하나라는 것, 그때 여러분 이해가 됩니다. 둘이가 아니라는 것”라 하였다. 선정삼매가 고요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사나스님은 고요에 대하여 전혀 다르게 말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진짜 고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정입니까? 우리 한국사람들 선정좋아하시죠. 진짜 고요한 것은 이해입니다. 마음에서 안 일어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해. 이런 것은 좌복에 앉아서만이 아니라 행주좌와어묵동정, 아무곳에서나. 딱 한방이면 그칩니다. 그게 위빠사나 힘입니다.”
(사사나스님, 2015년 3월 20일 한국테라와다불교 집중수행 사사나 스님 입제법문)
사사나 스님이 말하는 고요는 선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번뇌가 일어 났을 때 알아차리는 것에 대하여 ‘이해’라 하였다. 그런 이해는 좌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라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아무 곳에서나 가능하다고 하였다.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확인작업하는 거에요”
사사나 스님이 강조한 것은 수행의 힘이다. 그래서 수행을 해야만 번뇌, 망상, 아만 등에서 ‘벗어나는’ 힘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것이 위빠사나 지혜이고 사띠라 하였다. 그리고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 하셨어요. 이 수행을 하면 위빠사나지혜가 나고 도과를 얻어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확인작업하는 거에요. 아, 틀림 없구나. 자주 하는 말이 뭐 있죠? 와서 보라! 에히빠시꼬(ehipasiko). 그게 바로 부처님표 보증수표에요. 믿을 수밖에 없어요. 수행을 안하고는 못견뎌요. 늘 알아차림을 속에서, 늘 알아차림 가지고서. 대단한 겁니다. 그것이 뭐이냐? 늘 깨어 있는 겁니다. 그런 깨어 있음이야말로 바로 고요입니다.”
(사사나스님, 2015년 3월 20일 한국테라와다불교 집중수행 사사나 스님 입제법문)
인상적인 말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확인작업하는 거에요”라는 말이다. 그것은 “이 수행을 하면 위빠사나지혜가 나고 도과를 얻어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확인 하는 작업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으니 ‘본래불’이 연상된다.
법문을 비교해 보았더니
한국불교 선사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것이다.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자신이 부처인 것을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수행’이라 하였다. 그런데 사사나 스님은 위빠사나 지혜로서 도와 과를 확인 하는 것이 수행이라 하였다. 대상이 다르다. 선불교에서는 대상이 ‘본래불’이지만 테라와다에서는 ‘도과(道果)’이다. 이런 차이는 각산스님의 동영상 강좌에서도 확인 된다.
각산스님은 아잔브람 명상법을 소개하면서 최종적으로 합일의 경지와 해탈과 대자유를 성취할 것이라 하였다. 특히 빠리무카를 설명하면서 “부처님을 믿지 말고 자기부처님을 믿으니까 하면 된다.”(6강)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본래불, 분래면목, 불성을 말한다. 호흡명상 하는 목적이 ‘내가 본래 부처’인 것을 확인 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없다.
각산스님과 사사나스님의 법문을 비교해 보았다. 차이가 나도 매우 차이가 난다. 각산스님의 명상법은 아잔브람과 한국 선불교의 화두선을 합쳐 놓은 것 같다. 이는 각산스님이 “신광불매라 우리 마음밭에 빛나는 것 본래면목 이게 선불교의 아주 뛰어난 초기불교도 훌륭하죠 베이스니까 초기불교 보다 뛰어났던 사상들이 첨가 됩니다.” (12강)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반면 사사나 스님의 명상법은 미얀마 위빠사나 명상법이다.
차이는 많이 있다. 입고 있는 가사에서도 차이가 난다. 각산스님은 ‘회색승복’이고,사사나스님은 ‘빨강가사’이다. 법명도 차이가 난다. 한편은 한문이고 다른 한편은 빠알리어 법명이다.
각산스님은 수 많은 스승을 찾아 다녔고 수 많은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배웠다고 했다. 그 중에는 미얀마도 있다. 하지만 각산스님이 생각하는 미얀마불교는 부정적이다. 또한 위빠사나만을 강조하는 불교에 대하여 완전하지 않다고 한다. 더구나 청정도론과 아비담마논장에 크게 의존하는 불교라고 비판하고 있다. 더구나 선정에 결여된 불교로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각산스님은 최종적으로 아잔브람을 만났다. 아잔브람이 태국 아잔차 스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일까 태국불교를 미얀마불교 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특히 태국 숲속의 사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전히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본다. 그래서인지 “아잔 우타이라는 분은 올해 76되시고 넘버 투로 실질적 고승인데 보암스님이 저하고 인연이 되어서 미얀마 시작해 가지고 태국에 무동수행이라고 숲속에 수행을 하고 왔는데 스님 아라한 많습니다. 저는 믿음이 가죠.”(5강) 이라 하였다. 태국 숲속의 사원에는 아라한이 많다는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두 스님의 법문을 여러 날 걸려 녹취하였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비교가 된다. 가장 인상적인 말은 확인작업이라는 말이다. 선불교에서는 본래불을 확인하는 것이 수행이라 하지만 사사나 스님은 “부처님이 말씀 하셨어요. 이 수행을 하면 위빠사나지혜가 나고 도과를 얻어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런데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이를) 확인작업하는 거에요.”라 하였다. 수행의 대상이 다른 것이다. 한편은 본래불이고 또 한편은 도와 과의 성취이다. 아마 이것이 가장 큰 차이 일 것이다.
2015-11-1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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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흙속의연꽃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
첫댓글 금일 광주에서 수행하러 온 한 수행자분이 이런 글이 있다고 알려주기에
찾느라 시간이 한참 걸렸지만, 위와 같이 글이 쓰여져 있군요.
이미 오래전인 2015. 11.17일에 게재된 글을 오늘(2016.2.12)에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요즘 인터넷 시대라서 그런지 글 쓰는 이들의 다양함을 엿볼 수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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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우민 스승이신 나눗따라 스님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저 에게 각산스님 법문과 수행법도 소개해 주셔서~~`
마웃 드래그 금지 시켜놓으셨군요. 그러셔도 못 할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