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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문학>시
제목 : 좋은시, 선정 명시인展
지은이 : 고산지 외 34
페이지 : 380
출판일 : 2014.9.11.
출판사 : 한비
값 : 20,000
ISBN : 9788993214772 03810
<출판사 서평>
시는 낯선 것으로부터의 전언이 되어야 하지만, 현실의 시는 낯익은 것들이 시의 탈을 쓰고 세상을 누비고 있다. 문학의 위치가 세상의 기호품으로 전락하여 독자의 입맛에 맞춘 시,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가 좋은 시로 평가되고 있어, 시가 더 이상 시로써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대중의 문화 권력을 지향하는 시가 난무하여 시의 정체가 모호하게 되었다.
시의 유용성은 무용에 있음을 몇 백 년 걸어온 시의 시간이 가르쳐 주고 있으나 문명이 요구하는 물질과 명예를 등한시하고 시를 쓰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가 되었다.
밥벌이를 위한 시, 구호로 전락한 시, 문패를 높이 달기위한 시가 문화 권력의 우위를 점령하고 있어 옳은 시가 변방으로 밀려나는 시기에 정신의 높은 봉우리에서 시의 정신과 시인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시은 시로 묵묵히 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시인들의 시를 실었다.
시는 절대성이나 상대성으로 평가할 수 없는 무형의 것이다. 다만, 시인 스스로 정신과 양심에 어긋나지 않고, 최선을 다하였다면 좋은 시이다. 그것을 알아주는 대중이 명시의 주인공이다.
<목차>
송백정 찬가松柏井 讚歌 외-고산지
금빛골목 외_고수환
배꼽시계 외_권영주
붉은 근심 외_김미화
허풍떠는 여자 외_김옥련
처음 외_김운기
또 내일을 만들어 본다 외_김중영
수석 외_김치한
내 마음의 색깔 외_김혜정
해맑은 영혼 외_박문자
빛의 자리 외_박춘숙
따로따로 외_배송제
오구굿거리 외_배춘봉
양심고백 외_손상도
동화사를 찾아서 외_송해월
고장난 우산 외_신남춘
마음에 띄우는 엽서 외_윤오숙
옥수수 외_이금란
간절곶 외_이동조
일곱 살 외_이영주
라면 땅 10원의 빚 외_이점중
기다림 외_이종열
등 내민 관악산 외_이재창
검은 태양 외_이창원
바다의 눈썹이 하얗게 센건 외_정연국
가슴 별 외_정영란
칠월 연밭 외_조정향
소나무 외_지정란
여름 밤 외_최대락
폭설 외_최유정
산한 가슴 외_최덕제
문상 외_최재선
고향 외_하성자
양귀비의 사랑 외_한상화
구인광고 외_홍나영
<작품 소개>
-송백정 찬가(松百井 讚歌) * 1/고산지-
바람불자
나그네 가슴
흔들리네
구불구불
매끄러운 손끝
뿌리치고
연못에
떨어지는
백일홍 꽃 이파리
조각달
거룻배 삼아
용궁 구경 떠나는가
하늘 여행 떠나는가
-내 마음의 낙원/고수환-
태풍이 온다던 날에
잔뜩 찌푸린 하늘, 천둥소리만
비는 안 오고,
간간이 산들바람만 불어옵니다.
한더위엔 미풍도 태풍인 듯
내 가슴을 뻥 뚫어줍니다. 더하여
그 바람이 비까지 몰고 오니
순식간에 온몸이 젖어듭니다.
긴 가뭄엔 태풍이라도 불어라.
대지大地의 갈증 깨끗이 씻어 버리게
늦더위에 시원한 바람 불어주니
계곡 바윗돌에만 앉아도 지상낙원입니다.
지금은 개울가 낙원에서 즐거움 넘치지만
행여 더 강한 태풍의 심술로
매미의 생애처럼 끝나 버릴까
가슴이 조마조마합니다.
-배꼽시계/권영주-
내 몸 안에는 시계가 있다.
아침에는 항상 그 시간에
어김없이 나 깨우고
열두 시 반이면 배가 고프다
하품이 나서 벽시계 보면
틀림없이 밤 9시다
나무 꽃 풀
때를 알아 봄 되면 새잎 나고
꽃 피우고 가을이면 열매 맺고
단풍 들고 말라 시든다.
나무 꽃 풀도 시계를 가지고 있다
나처럼 배꼽시계가 있다
-바다를 걷다/김미화
내 그리움은
참으로 가난합니다
천 번을 불러도
허기진 부름은 채워지지 않고
천 길을 걸어도
연약한 발은 부르트지 않습니다
천지를 돌고 돌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끝끝내 지루한 그리움은
뿌리만 자꾸 내리고
영 싹을 돋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가난하여서 허망한
가난하여서 축복인
내 그리움은
뿌리만 가득한 열대우림입니다.
-우리는/김옥련-
우리 마음이 서로 바라볼 때
껍질의 경계가 사라지고
고요한 세상에 우리만 남았습니다
걸음을 멈추었던 강물
온몸을 돌고 돌아 숨 가빠도
출렁이는 소리가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분홍의 강물로 돌고 돌아
포근하게 나를 안아 올리는 사랑에
언제까지나 하나로 있고 싶습니다
당신의 거친 숨결마저도
더 많이 붙잡고 싶은 욕망으로
오래도록 꼭 끌어안겠습니다
-한낮, 개심사에서/김운기
바람이 솔숲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풍경 끝에 달린 물고기 꼬리를 보았지요
구름이 몇 번인가
모였다 흩어집니다
노스님 오수에 든 시간
세심연洗心淵의 수련도 졸고 있습니다
툇마루 밑
적막에 섞인 누렁이가
귀찮은 듯 꼬리를 몇 번 흔들 뿐
새물내 나는 빨래처럼 펄럭이는
법어法語를 찾아
일백여덟 계단을 걸어온 숨소리만
북소리보다 더 크게 울립니다
-또 내일을 만들어 본다/김중영-
님을
님이라 말 못하고
그대를
그대라 부르지 못하여도
바라봄이
삶의 기쁨이기에
만나지 않아도
보이는 미소
기다림으로
또 내일을 만들어 본다
강물 바위에도
하얀 포말
빈자리로 달빛 모으니
잠 못 이루는 기억의 꼬리
강가에 남겨두고
기다리다 지친 어둠
그리움에 밀려
오늘도 나무 위에 오른다
-수석/김치한-
냇가에서 수상한
돌 하나를 주워들었다
날마다 몇 줄씩 적어 넣어
물소리 가득한 돌
매달린 사랑도
쓰라린 아픔도
촉촉한 물소리로 씻어낸 돌
보면 볼수록 어려운 돌 하나
떠나온 모암이 그리워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아
웃음보다 그리움이 가득한 돌
찰방찰방 건너간 물의 언어가
곳곳에 옹이로 남아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난 돌
-내 마음의 색깔/김혜정-
당신을 그리는
내 마음의 색깔은
노랑입니다.
누군가 왜냐고 묻는다면
노랑을 좋아하는 당신이
내 마음에도 노랗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해맑은 영혼/박문자-
세월 등에 업고
황혼에 젖는다
고향 푸른 하늘빛
가슴에 머문 영혼
살아있는 오늘이
얼마나름다운지
봄은 내 마음 훔쳐가지 못한다
해맑은 영혼
아침 이슬에 주저 앉아
맛있는 시를 쓴다
오월의 꽃들이
마음에 피어나고
초록 잎새가 그림을 그린다
아무도 모르게 내 젊음 실어가도
해맑은 영혼은
오늘도 산 넘어
해지는 소리를 듣는다
-빛의 자리/박춘숙-
푸른 새벽을 등에 업고
바람이 분다
예사롭지 않은 눈길
스치지 않고
가만히 주위의 것들을 흔든다.
바람의 손길
들리지 않고 안기는 것은
너와 나눈 마음의 길처럼
내어준 공터를 배회하는
그리움.
바람이 분다.
그립다는 말이
입속에서 웅웅거린다.
-따로따로/배송제-
같이 가자 함께 가자 하면서도
바람 따로 구름 따로 가려 하네
마음 주고 정도 주고 다했건만
무심하게 따로따로 가려 하네
깊이 맺은 다짐 약속 모두 잊고
남남 되어 따로따로 가고 있네
돌아선 채, 따로따로 가고 있네
모르는 척, 따로따로 가고 있네.
-산딸기, 망개/배춘봉-
내 고향 두메산골
흐트러진 산딸기
"춘자야, 딸기 따러가자"
두마이 산에
주전자 소복 담은 산딸기 복분자
산골 처녀 앵두 입술 그리 고울까
내 고향 두메산골
흐트러진 빨간 망개
"봉근아, 망개 따러가자"
두마이 산에
방울같이 달린 망개 꺾어 볼수록
단발머리 소녀 입술 그리 이쁠까
-양심고백/손상도-
어쩌다
디딘 곳이
천국인 줄
알았는데
당신의 눈빛에
가슴은 두근두근
켕기는 나의 속내
당신은 모르리
-동화사를 찾으며/송해월-
작은 손 야위어 지고
연꽃 담은 항아리 정들이다
작은 걸음 재촉하며
어디로 가시렵니까?
앞마당 대추나무
비바람에 흔들릴 제
아이야, 비우라며 어린 손 잡더니
어이타 가시려 하십니까?
한 송이 연꽃을 키우고 모시옵는
하나는 외롭다며 채송화 수놓던 꽃밭
놀다 있다 가라시며
떠나려 하시옵니까?
아장대며 걷는 아이
노닐게 가꾼 연밭
바라다보며 걷는 기나긴 여정 두고
어디로 가시렵니까?
멀어지는 메아리
별빛도 가물거리는 데
알 수 없는 길을 따라 이슬 맞으며
어디로 가시렵니까?
-고장 난 우산/신남춘-
따가운 햇볕이 몸 안으로 기어들었습니다.
지나던 바람이 멈춰서 살랑살랑 거립니다.
찢겨진 살 들썩거리며 이리저리 뒤척입니다.
다행히도 상처가 깊지 않아 아픔을 모릅니다.
나 같은 것은 누구 하나 쳐다보지도 않고
길모퉁이 버려진 채 먼지만 쌓이고 있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모두 다 잃어버린 듯
장애의 몸으로 초췌해진 초라한 모습이라서
고물장수의 눈에도 밟히지 않는 병든 몸
쌩쌩 달리는 자동차 바퀴들이 밟고 또 밟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난 아침이 되어서야
내 몸뚱이는 미화원 손에 들려졌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덜컹덜컹 거리는 트럭에 실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하루 여행을 떠납니다.
내 주인님이 그립고 친구가 그리운 순간들로
비가 올 때면 함께 외출하던 아름다운 풍경이
찢어지는 듯 아픔으로 솟구쳐 눈물이 납니다.
이제는 일어설 수 없는 병든 몸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자신을 알아차렸기에 더욱 모두가 그립습니다.
빗방울을 맞으면서도 즐겁기만 했던 그 시절
폭우 속에서도 잘 버티고 견딘 시절이 있었기로
죽음 앞에서도 난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먼길을 떠날 뿐입니다.
-마음에 띄우는 엽서/윤오숙-
속에 숨어 몸을 주재하니
그 능력 하늘만 하구나
흔적 없고 형체 없어 비집고 들어가
날 조정하는 것이냐
천지는 마음이 없으면서도 조화를 이룬다더라만
해아래 수고와 슬픔뿐이거늘
설령 어려운 일 당하더라도
수만 갈래 생각이 네 속에서 요동치지 못하게 하고
병 얻지 않도록 유념하거라
오장은 약 써서 보양할 수 있으나
너는 산삼으로도 다스릴 수 없나니
나도 사사로운 욕심 버리고
항상 편하고 밝게 빛나도록 도우리라
너 없으면 나 또한 안되리니,
-옥수수/이금란-
치마 속 깊숙이
겹겹이 감추어 둔 속살
지새운 밤마다
노오랗게 물들어 간다
수줍은 얼굴
긴 머리로 가리며
그대를 보았다
애절한 그리움 안은
단성화(單性花)!
알알이
통통 영글어 가며
절정으로 치닫다
설렁대는 가을바람에
수수깡이 된 가슴
울부짖는 소리 슬프다
속으로 속으로
자색 피멍든 자욱들
아! 어쩌나, 움푹 파인 가슴
구슬픈
하모니카 소리 하늘에 흩어진다
-간절곶/이동조-
파도는 얼마나 더 때려야
화가 풀리겠나.
바람은 또 얼마나 나무라야
용서하겠나.
조금 더 다가선 죄밖에 없는데
조금 더 발돋움한 죄밖에 없는데
아침 해 맞으러 밤새
졸린 눈 깜빡이다
해가 뜨면 나는
깊은 잠에 빠진다.
일 년에 하루
광란의 마지막 밤이 지나면
산고의 선혈을 바다에다 풀고서
옥동자 둥근 얼굴
가장 먼저 안는다.
좋은 해 맞으려
간절히 빌어보는 간절곶에서
오늘 하루를 위해
일 년을 산다.
*간절곶은 울산 울주군에 소재하며 한반도에서 가장 해가 빨리 뜨는 곳으로 새해 해맞이 명소로 유명하다.
-전화/이영주- 당신 떠난 지 몇 년 후 어느 날 해질 녘 전화가 왔습니다. 낯선 음성 친구라며 바꿔달라 하네요 더듬더듬 울먹이니 왜냐며 다그치길래 머얼리 떠났다 했습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너무 슬프기에 그냥 기다리는 마음으로 -다시 너에게/이점중- 잘 견뎌야 한다 -기다림/이종열- 봄이 내려앉은 강변에
그림자랑 쪼그리고 앉아 잔잔한 강물 위에 꽃배 띄워놓고 당신이 주고 간사랑 무겁도록 실었습니다. 높이 돛을 올리고 시나브로 노를 저어가면 언젠가는 당신 곁에 닿을 겁니다. 행여 오래오래 걸리더라도 달아나지 마시고 목선이 지나가는 강변 어디에서 기다려 주세요, 사이사이에 또 하나의 사랑도 실었습니다.
깨어진 바람의 칼날에 달빛이 베이고
태양의 혓바닥이 대지를 태우며 핥아도
모두 견디는 것처럼 나도
잘 견뎌내야 한다
태양 아래 녹아내리는 대지에 비하면,
시린 바람에 베인 달빛에 비하면
내 마음 하나의 시련쯤 클 것도 없는 일,
강물이 넘쳐 빈 몸뚱이로 남는 들판을
끌어안고 꺼이꺼이 울지 않아도 되고
겨우내 얼어 터진 알몸으로
나비의 날갯짓 기다리는 나무 아닌 이상
이별의 아픔이야 대수겠는가
독기를 숨긴 채 너를 뒤돌아선 내가 찾는 건
다시 또 너일 줄은 알지 못했다.
-등 내민 관악산/이재창-
어머니 등에 업히면
단잠이 말려오듯
내 등에 가슴 대고
새록새록 쉬어 가게나
-서리꽃 잔상(殘像)/이창원-
계절 끝자락에
그리움 하나 남기고
하얀 서리꽃 잔상(殘像)
순백(純白) 의 넋이 되었네
가슴 시린 그리움은
한 줄 시(詩)로 남아
계절의 문턱에서
움츠리고 있네요
-바다의 눈썹이 하얗게 센 건/정연국-
바다의 눈썹이 하얗게 센 건
아라뱃길 때문만은 아니다
비바리의 눈물로 고은
보리순간재미애국만도
걸어다니는 섬다리로
섬의 숨이 끊긴 까닭만도 아니다
뭍이 서릿발 세우는 그믐밤
갈꽃은 미리내 찬별에 베이고
칼바람은 무시로
바다의 눈썹을 대구 후리는데
꿈마다 무지개 타고 하늘바달 나는
날 어느 섬에 부려야 할까
-빈 메모지/정영란-
비어 있는 메모지입니다
새기어 쓸 수 없어 비워 두었습니다
새길 수 없는 것과
들려 줄 수 없는 아픔
꿀 머금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모두가
-그대들이 떠나가는 길목에서-
-유월 비/조정향-
안개비 풀잎 위로
꼽꼽한 유월 한낮
침묵의 찻잔만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창 넘어 능선 저 멀리 그리움을 재운다.
초여름 긴 하루는
실실이 적셔가고
구구구 산비둘기
푸른 적막 깨우는데
다 못한 간절한 얘기 흘림체로 뿌린다.
-그 길가/지정란
까만 그림자 드리운 채
마음을 달래러 간다
그 길가
푸르른 창공을 날아서
꽃을 하나 심어 놓고 온다
그 길가
나만 가지고 있는
그 길가
-여름 밤/최대락-
이제 막 시작하는 여름인데도
무더운 햇빛은 怒氣노기로 만들고
바람에 떨리는 잎새 사이로
가득 채운 맞바람은
이 작은 공간에서도 조차 차마 붙들지 못한다.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요즘
모두를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가로수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햇빛은 갈고리에 걸려 검게 그을린
한여름 밤은 테마를 갈망한다.
-폭설/최유정
사방에서
너는 눈빛이고
눈 냄새이고
눈꽃이어라
그리움 안의 그대
내게 폭설이다
살찐 고양이의
저 도도한 몸짓처럼
시린 폭설이여
그대 정녕 도도하여라
그대가 가진 거리만큼
폭설은 더 쌓이고 자라니
내가 가진 거리는
폭설에 가려 실종이고 부재라네
아! 이 무심한 그리움이여
실종된 거리만큼
강요된 부재만큼
아! 이 쓸쓸한 폭설이여.
-선한 가슴/최덕제-
티없이 맑은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가슴에 담으며 산다
먼저 일어난 풀잎들이
일제히 제 몸 적시어
뜨락 가득 햇살 뿌려놓을 때쯤
멀리 밥 짓는 내음새
길게 난 숲을 따라
한 발짝씩 내딛으면
걸음걸음 하늘거리는
조그마한 새악시 입술들
개울가 씻기운
청량 바람에 실려
올망졸망 파고드는
풀벌레 소리 산새 소리
손베개
어둠이 내린 평상에
손 베개로 누우면
품에 안길 듯 누비진
안개꽃 정원
티 없이 맑은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닮아
늘 선한 가슴을 갖고 산다
-문상/최재선-
석양에 불타는 만경강 뒤로하고 한양 향해 거슬려 흐른다 하여 포승줄에 묶여 유배자처럼 흐르는 금강 표절한 금강장례식장 가는 길, 소천하신 남석이 형님 어머니 뵈러 가는 길 하늘엔 별꽃 무리지어 무지무지 피었네. 현관에 이합 집산한 신발들 생사의 주변에서 각자 살아 온 삶만큼 빛나거나 뒤틀리고 늘어선 화환에 길게 목멘 리본 속 이름들 열 지어 고목처럼 서 있네.
문상객들 하나같이 검은 나비처럼 날아와 아흔다섯은 호상이라고 사실만큼 사셨으니 덜 서운하시겠다고 천수를 누리셨으니 이제 가실 때가 되었다고 안색 낮춰 말 건네네. 술잔에 웃음 띄워 산 자들 안부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허리 잘린 국화 밭에 미리 하얗게 묻혀 말을 삼키고 계신 망자 외롭지 않게 웃고 계시네.
편지통 같은 부의함에 하얀 이별고하고 길 나설 때 군산 앞바다에서 머리 풀고 문상 온 갯바람 날 붙잡고 읍소했네. 이 세상 뜨고 싶은 사람 어디 있것냐고 세상 뜬 사람한테 호상이 어디 있것냐고 다 산 사람들이 지어낸 부질없는 말이라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고향/하성자-
해 이삭 주워 부신 강마을 들녘엔
흙내 나는 사람들 갈 빛 얘기가
산수유 물든 강물 따라 내리고
홍시 볼 아이들 동동 웃음소리는
억새 바람 언덕길 타고 오른다
물 익은 제산구릉 붉은 지평이
어스름 하늘 능선 달구는 저녁
국당골 형산 마루 초이레 찬 달이
먼길 나선 잔 노을 머물라 붙들고
거둘 이 없어 농해버린 산수유 한 그루
허물어진 담장 기대어 고치로 말라갈 때
사금파리 소꿉 놀던 가시나 찾는 가시나
-천형(天刑)/한상화
그런 세월이 있었다
진달래 꽃 한창일 때면
소록도의 설음도 서서히 피어났다
같은 배를 타지 않은 천형의 사람들은
다리 밑 유랑의 방랑객이 되어
봄보리 푸른 너울 속에 삶을 감추어야 했지
기나긴 봄날의 맑은 햇살은
또 하나의 천적이 되었고
그립고 그립던 동산의 옛사랑은
기억조차 하기 싫다며
물러터진 내 얼굴에 모래를 뿌리며 달아났었지
허기진 배를 채우려
동산의 모퉁이를 돌아
사람 내음을 맡으려면
어느덧 마을엔 한바탕 소란 속에
쭈그러진 밥통 속에 눈물만 가득했지
제발
천형이란 이름만은 지워달라고
천형이란 이름만은 부르지 말라던
황토 마당 밀집 멍석의 보리밥이 그리웠던
그 세월이 있었지
-열정/홍나영-
코발트 블루 핑크
꽃 계절 소녀의 웃음
가버린 그리움 돌아오려나
바람이 이끄는
허공 저 끝 눈시울 붉히는
정념 기다림
오지 않을 신기루 사랑
긴 독백
더 긴 외로움
아득한 허공
생의 얼레 쟁여 잡고
꿈을 띄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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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라성 같은 님들의 조용한 詩 편들이 아련 합니다 한비문학 35인의 좋은시 명시인전 출간을 축하 합니다--
김영태 회장님 고생 하셨습니다.
한비 파이팅
참여하신 시인님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옥같은 시 읽고 배우겠습니다.
책 잘 받았습니다. 김영태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좋은 시, 선정 명시인전> 책 잘 받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재선 드림
작가님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가을 행복 만끽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