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성산(聖山) 강화 마니산(摩尼山, 史蹟 136號)
마니산 참성단 1,2 / 행촌(杏村) 이암(李嵒) / 참성단중수비(塹星壇重修碑)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라고 하면 먼저 백두산(白頭山)을 꼽겠는데 그와 더불어 강화도(江華島)에 있는 마니산(摩尼山)은 우리나라 제2의 성산(聖山)으로 꼽히는 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대한민국 최고의 생기처(生氣處)로 알려져 있는 곳이며 개천절에는 이곳 참성단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전국체전(全國體典) 등의 성화(聖火)를 이곳에서 채화(採火)한다.
채화할 때면 강화여고(江華女高) 여학생들이 선녀 옷을 차려입고 춤을 추는 가운데 채화를 하는 모습이 감동을 준다.
예전에는 강화도(江華島) 자체가 김포에서 짠내(鹽河)를 건너와야 했던 섬이었고, 마니산과 참성단이 있는 화도면(華道面)은 지금은 강화도와 붙어있지만 옛 기록을 보면 강화도와 떨어진 별개의 섬으로 고가도(高駕島)라는 이름이었다.
고가(高駕)는 천자(天子)의 수레를 의미한다고 한다. 강화도(江華島)와 고가도(高駕島) 사이는 좁다란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는데 예전에는 수많은 배들이 오가던 뱃길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가릉포(嘉陵浦)와 선두포(船頭浦)를 막고 그 사이의 뱃길을 메워 강화도 본 섬과 연결되었는데 뱃길이었던 곳이 지금은 넓은 논과 밭으로 바뀌어 있다.
옛날에는 강화도에서 마니산의 참성단을 오려면 양도면의 도장리(道場里) 부근까지 와서 다시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했으며, 양쪽 해안의 포구에는 주막과 여각(旅閣)들이 즐비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화도면 덕포리(德浦里)는 당시 떡전거리로 유명하여 ‘떡포’라고 했다는데서 그 지명이 유래되어 덕포리(德浦里)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옛 자취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두 섬이 하나로 되면서 고가도(高駕島)는 하도(下道)로 불렸는데 ‘하늘에서 도가 내린다.’는 뜻이겠다. 이후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이곳 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이었던 야마모토(山本)가 하도(下道)를 빛날 화(華)로 바꾸어서 화도(華道)로 개칭(改稱)되었다고 한다.
덕포리와 인접한 사기리(沙器里)는 그릇을 굽는 옹기점이 있었는데 이곳 출신으로 조선 말기의 문신(陽明學의 대가)이자 안핵사(按覈使), 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던 영제(寧齊) 이건창(李建昌)이 태어난 곳이며 마을 앞에 있는 자그마하지만 뾰족한 산봉우리가 있는데 초피봉(椒皮峰, 붓끝)이라 불린다.
마니산의 옛 명칭은 ‘머리, 으뜸’을 뜻하는 마리산(麻利山) 이었다고 하는데 후일 마니산(摩尼山)으로 고친 것은 불교 영향인 듯(摩-갈 마, 尼-여승 니).... 정상 참성단(塹星壇)의 높이는 472m로 강화에서 제일 높다.
단군세기(檀君世記/李嵒/1363)에 보면 『戊午(무오) 51년(BC 2,283), 천제(天帝)께서 雲師(구름을 관장하는 신)이신 배달신(倍達神)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짓고 제천(祭天)의 단(壇)을 마리산(摩利山)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星壇)이 그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단군신화에서부터 무진원년(戊辰元年, BC 2,333)에 단군께서 백두산 신단수(神檀樹)아래 신시(神市)를 베푼 이후부터 효경12년(癸卯, AD 1,363)까지 약 3,696년의 역사 기록인 셈이다.
이 책은 이암(李嵒)이 양주(楊州)에 있는 천보산(天寶山)에 올라 태소암(太素庵)이라는 암자에서 진기한 고서(古書)를 얻었는데, 이 때 얻은 고서를 읽고 엮었다고 전해진다.
내용을 살펴보면 1세 단군(BC 2,333년)부터 47세 단군(BC 295)까지의 2,000여 년간의 실록을 기록하고 있으며, 북부여 (北扶餘) 해모수(解慕漱)의 건국(BC 239)이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책의 말미(末尾)에는 ‘고려 효경대왕(孝敬大王) 12년(1,363) 계묘(癸卯) 10월 3일 홍향촌(紅杏村)의 늙은이가 강화(江都)의 해운당(海雲堂)에서 씀’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이암(李嵒, 1297~1364)은 고려 충렬왕 때의 학자, 정승. 강화 행촌(杏村)으로 유배, 호(號)가 행촌(杏村).
말년에 강화 선원면 선행리 홍행촌(紅杏村)에 해운당(海雲堂)을 짓고 기거하다 68세를 일기로 작고 하였다.
◆ 혈구(穴口)는 강화의 옛 지명이다. 고려산(高麗山, 436m)과 마주보고 있는 산이 혈구산(穴口山, 466m)이다.
혈구(穴口)는 강화의 옛 지명(地名)으로 한자로 표기하며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하였는데 갑비(甲比)는 ‘겹치다’라는 의미로 고구려시대에는 ‘갑구지’라 하다가 갑비고차(甲比古次)가 되었다고 한다.
곧, 이곳 강화가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 예성강(禮成江) 세 강이 만나는 곳으로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인데 세 강이 만나는 지형이 흡사 사람의 목구멍 모양이라고 하여 혈구(穴:구명 혈, 口:입구)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삼랑성(三郞城)은 전등사 둘레에 단군의 세 아들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가 쌓았다는 성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 성 모양이 솥발<鼎足>을 세워 놓은 듯 하다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수산집 동사(修山集 東史, 1803)의 기록을 살펴보면 『제천단(祭天壇)은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에 있으니 단군(檀君)이 혈구(穴口)의 바다와 마니산 언덕에 성(城)을 돌리어 쌓고 단을 만들어서 제천단(祭天壇)이라 이름 하였다. 단(壇)은 높이가 17척(尺)인데 돌로 쌓아 위는 네모나고(方) 아래는 둥글다.(圓)
위의 네모는 각 변이 6자(尺) 6치(寸)요, 아래는 둘레가 60자(尺)이다. 혹자(或者)에 의하면 마니(摩尼)는 강과 바다의 모퉁이라 땅이 따로 동떨어지고 깨끗하며 고요하여 신명(神明)의 집이 된다.
그러므로 제(祭)터를 닦아 한얼님께 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고 땅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므로 제단(祭壇)은 반드시 수중산(水中山)에 만드는 것이요, 위가 네모나고 아래가 둥근 것은 하늘과 땅의 뜻을 세운 것이다.』 로 기록되어 있다.
◆ 이종휘(李種徽, 1731~1797)는 조선 영·종조(英·正朝)의 학자로 공주판관(公州判官) 역임. 호(號)가 수산(修山)
아들 이동직(李東稷)이 부친의 유고를 수집, 편찬하여 1799년 중엽에 문집(修山集)을 간행하였다.
마니산기(摩尼山記)의 기록에 의하면 『在摩尼山絶頂이라 壇高 十七尺이오 以石累之하여 上方下圓이오 四方이 各七尺六寸이오 下各十五尺而圍之하고 東面層階는 二十一級이니 檀君大皇祖의 祭天壇으로 距今四千二百七十餘年前所築이라.』
<마니산 정상에 있는데 단의 높이는 17자(약 5m)요, 돌로 쌓았는데 위는 사각형이고 사방이 각 7자 6치(약 2m 30cm)이고 아래는 각 15자(약 4m 50cm)로 둘러싸였는데 동쪽 층계는 21단이니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단(壇)으로 지금으로부터 4,270여 년 전에 쌓으신 것이다.>
◆ 마니산기(摩尼山記)는 내가 화도(華道)초등학교 교감으로 근무할 당시 고문서를 뒤적이다 발견한 기록물(記錄物)로 3~4인이 기록한 것인데 이곳 화도초 교장(校長)들이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1946년의 기록이 마지막이다.
마니산기는 위와같이 한자와 한글로 병기(倂記)하였는데 화도면의 역사와 지리 등을 세세히 기록한 귀중한 기록물로 방대(厖大)한 양이어서 내가 현대 언어로 번역하느라 여러날 고생을 했다.
참성단 실측(實測)은 내가 화도초에 근무할 당시 직접 줄자를 들고 올라가 실측(實測)한 내용이다.
참성단은 마니산 세 개의 봉우리 중 가장 높은(472m) 봉우리 정상에 있으며, 위의 사각형은 정사각형으로 한 변이 6.46m, 아래 원형은 내지름이 8.7m로 작은 성벽(城壁)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양으로 둘레 전체의 길이는 약 60m이다. 동·서·남(東·西·南) 방향에 작은 문이 있으나 남(南), 서(西) 쪽은 절벽으로 되어있다.
동쪽의 문으로 출입할 수 있는데 입구의 계단은 8계단이다. 원형 바닥에서 사각의 뒷단까지 17계단이며, 성곽(城郭) 높이는 1m, 성곽 위의 폭이 1.68m, 문의 폭이 1.25m이고 단(壇)의 높이는 1.87m이며 성곽 내에는 향로(香爐) 1개, 비석(碑石) 1개, 빈 우물 1개소가 있다.
제단의 전체 모양과 의미는 아래쪽 원형(圓)은 하늘(天), 위쪽 사각형(方)은 땅(地)을 나타냄(上方下圓)
참성단 중수비(重修碑/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3호)
마니산 참성단 조금 아래 바위벽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중수비(重修碑)는 바위를 손질하여 가로 1m, 세로 4.25m의 석판을 만들고 거기에 참성단의 내력, 수축(修築)한 사실, 제천단(祭天壇)에 대한 선인(先人)들의 뜻을 기록하였다.
조선숙종 43년(朝鮮肅宗, 1717), 당시 강화유수(江華留守) 최석항(崔錫恒)은 관내를 순찰하다가 마리산에 올라 참성단이 훼손된 것을 보고 선두포(船頭浦) 별장(別將) 김덕하(金德夏)와 전등사(傳燈寺) 총업(總攝) 신묵(愼黙)에게 명하여 보수(補修)한 사실(事實)을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