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21-11-19 03:00
바다에서 만든 소중한 인연[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55〉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승선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Y 기관장님이다. 2년간 동승했다. 당시 나는 2등 항해사로 26세. 나를 괜찮은 후배라고 생각하신 기관장님이 휴가를 가시면서 휴가 오면 연락하라고 했다. 기관장님께 연락을 했다. 몇 천 원어치 감을 샀다. 사모님께서도 반겨 주셨다. 사윗감이 사온 감이라고 따님 방을 향해 말씀하셨다. 항해과 출신은 도선사를 할 수 있어서 좋다면서 따님과 선을 보라고 제안하셨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터라 당황했다. 미혼의 형이 있다고 답하고는 집을 나왔다. 다시 바다로 나가면서 전화드린 것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당사자들이 먼저 만나 사귀게 하였으면 성사되기가 더 좋았을 터인데….
1982년이었다. 첫 배에서 K 통신장을 만난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선박은 하나의 통신기지로 인정받았다. 선박과 육상 소식은 통신실의 통신장비를 이용해야 했다. 통신장님은 단파를 이용한 우리나라 방송 그리고 영어 방송도 소개해 주셨다. 사우디 제다에 상륙해 단파 라디오를 하나 사왔다. 그리고 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다음 배에는 카세트를 겸비한 단파 라디오를 사서 녹음까지 시키며 영어 방송 청취에 열을 올렸다. VOA 방송으로 미국의 역사, 정치, 교육, 세계 동향을 배웠다. 그게 8년 승선 기간 내내 이어지면서 나의 지적 수평선이 크게 넓어졌다.
테드 형은 포틀랜드 항구에서 선박대리점을 했다. 우리 배가 정기적으로 기항하니 친구처럼 되었다. 한번은 자기가 사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6명의 남녀 미혼들이 같은 집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이들은 EFI라는 공동체 정신을 가진 전국적 모임에 속했다. 그 모임의 본부에 갔더니 100여 명이 단체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유교문화에 대한 나의 얘기를 흥미롭게 들어 주어서 내가 놀랐다. 테드 형은 우리나라를 너무 좋아해서 2년간 한국에서 고등학교 영어교사를 지냈다. 지금은 미국 동부에서 산다.
포트 앤절러스에서 보잉사를 은퇴한 덜쿠프 씨를 만났다. 1985∼1990년에 만남이 지속되었다. 부부는 며느리가 시험관 아기의 대리모가 되어 수입을 얻는다고 걱정했다. 한번은 공원에 같이 놀러갔다. 불판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된 부인은 뒤로 돌아서서 묵묵히 서 있었다. 남편은 잊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미국 부부의 싸움하는 모습이 이렇게 점잖나 싶었다. 꼭 부부가 편지를 각각 적어서 보내주었다. 2004년 미국 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된 나는 아이들과 같이 남부 텍사스에서 시애틀로 찾아가 그들을 다시 만났다. 기뻐하면서 우리 가족을 맞이해 주었다. 몇 년 뒤 큰아들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부부가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출항과 기항을 하면서 덜쿠프 씨 부부와 편지를 주고받는 즐거움은 바다에서 가졌던 큰 행복이었다. 20여 통의 편지글과 선물로 받은 1945년 발간 타임지는 영원히 소장하면서 부부의 따뜻한 마음을 기릴 것이다.
*(나는산티아고신부다.인영균끌레멘스 p176-178)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2016년 순례 중 산토도밍고데라칼사다를 지날 때였다. 마침 그날이 11월 1일 모든 성인대축일이어서 큰 길가에 보이는 시토회 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하였다. 미사가 끝날 무렵 허기가 밀려왔다. 카미노를 시작한 뒤로 점심은 길에서 빵으로 간단히 해결하고 저녁은 어디든 비스름한 순례자 메뉴를 사 먹었는데, 오늘만은 밥다운 밥을 먹고 싶었다.
성당에서 나오다가 마주친 노부부와 눈인사를 하다가 카미노 이야기로 이어졌다. 노부부가 차 한잔하자고 초대하기에 기꺼이 하였다. 그들과 함께 바에 들어가서 커피를 시켰는데, 순간 진열장 안에 있는 온갖 종류의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너무나 허기져서 창피한 것도 잊어버리고 “제가, 저 케이크도 하나 시켜도 될까요?” 노부부는 기꺼이 케이크도 사주었다. 배고픈 동양인 나그네에게 그 노부부는 먹을 것을 베풀어 준 천사였다. 게다가 이곳 공립 알베르게가 최근에 리모델링을 해서 시설이 매우 좋다고 이 마을에서 묵고 가라고 조언까지 해 주었다. 그간 묵었던 열악했던 숙소들이 떠오르면서 잠시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갈 길이 머니 한 마을 더 가야 한다는 어떤 끌림에, 노부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그라뇽으로 옮겼다.
그라뇽에서 무엇이 기다릴지 아무것도 몰랐다. 공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알베르게가 어디 있는지 물으니 한 꼬마 천사가 바로 앞까지 직접 안내해 주었다. 알베르게가 정말 오래된 성당 안에 있어서 혼자 왔으면 못 찾을 뻔했다. 성당 한쪽 작은 입구로 좁고 컴컴한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자원봉사자가 나와 침방을 보여주는데 침대가 없는 그냥 널따란 방이 아닌가. 정말 망한 기분이었다. 방 한쪽에 쌓여 있는 매트리스를 바드 깔고 자야만 하였다. 시설이 정말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노부부 말대로 할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봉사자는 지긋한 나이에 사람 좋게 생긴 이탈리아 사람으로 클라우디오라고 하였다. 그때까지는 클라우디오가 날개 없는 천사인지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저녁 식사로 순례자 메뉴나 사 먹을 요량으로 클라우디오에게 마을에 괜찮은 식당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자기를 가리키며 “저녁은 내가 준비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아침 식사도 내가 차립니다”라고 웃으며 말하였다. 먼지로 더러워진 몸을 씻고 잠시 쉬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위층 식당으로 올라가 보니, 눈앞에는 정말 상상도 못했던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클라우디오가 이탈리아식으로 스파게티, 샐러드, 빵, 그리고 포도주까지 풍성하게 차려 놓았다.
먹어본 이탈리아 파스타 중에서 최고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에 그토록 원하던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됐으니, 기적이 내 눈앞에서 현실이 되었다. 식사 후에는 순례자와 돌아가며 기타를 치고 함께 노래하였다. 나도 흥이 나서 기타를 잡고 '아침 이슬'을 신나게 불렀다. 그날 열댓 명 남짓한 우리 순례자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라뇽 본당 신부와 오스페달레로 클라우디오가 마련해 준 ‘사랑’을 배불리 먹고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니 식사가 준비된 테이블에 기부함이 있었다. 지갑에서 100유로를 꺼내 기부함에 기꺼이 넣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의 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봉헌한 기부금으로 다음에 오는 순례자들도 사랑을 더 크게 받을 거로 생각하니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라뇽에서 만난 날개 없는 천사의 사랑과 격려에 힘을 얻어 기쁜 마음으로 순례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