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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목사는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만들고 있다”
에 대한 반론
- 예장(합신) 총회 신학위원회 보고서(2015년)에 대한 반론 -
< 필자: 카이로스 >
2024. 9. 20
예장(합신) 교단의 총회에서 김성수 목사의 신학에 대한 이단성을 검토하기 위해 신학위원회를 편성하였고 그 결과로 2015년도 총회에 그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그에 대해 반론(해명)을 제시한다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 되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공연히 그들을 부끄럽게 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편협된 신학 사상 때문에 김성수 목사가 쌓아 올린 웅장한 신학의 신세계가 진토 속에 묻혀버리는 것도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되어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고, 기존의 신학이 보지 못하고 잘못 가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도 지적해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필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굳이 공학박사에다 비전공자이자 비신학도이고, 장로로서 내세울 만한 경력도 되지 못하는 사람을 통해 이러한 반론을 내놓게 하시는 일이라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뜻에 순응하지 않는 것도 순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동 보고서가 총회 차원에서 이단성 평가 전문가들을 선발해서 연구시킨 결과로 나온 산물인 만큼 상기 보고서는 그 교단에 소속된 여타 목사들보다 심도 있게 김성수 목사의 신학적 이단성을 검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그 결론이 통일교나 신천지, ‘여호와의 증인’같이 명백한 이단적 요소를 검증하기가 쉽지 않아서 “강론을 읽거나 듣거나 추종을 금지”한다는 궁색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그나마 스스로 그런 주제가 되지 못함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다행스럽다.
상기 신학위원회의 보고서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총회에서 연구하라고 명령을 하니 어쩔 수 없이 연구를 하기는 했는데 김성수 목사의 신학을 제대로 온전히 이해하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보고서를 내야 하니 쓰긴 썼는데 뭔가 뚜렷하게 초점이 잡히지도 않고, 이단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려고 하니 그의 신학이 제대로 이해도 되지 않는데, 무언가 이단성이 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도 찾기가 어려워서 내놓은 결론이 그의 “강론을 읽거나 듣거나 추종을 금지”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귀착된 것 같다.
이 말을 조금 달리 새겨들으면 우리와 같이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를 업으로 하는 목사, 신학박사, 신학 교수들도 그의 설교를 조금 들어보니 뭔가 색다르긴 한데, 그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연구하려면 갈 길이 멀고, 우리 같은 목사 신학박사도 긴가민가, 아리까리한 내용인데 우리가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짧으니 우리도 잘 판단이 서지 않는 김성수 목사의 신학에 대해 일단 일반 평신도들이 그의 “강론을 읽거나 듣거나 추종을 하지 못하게” 금지시켜 놓고 보자는 것이 그들이 쫓겨서 내린 결론일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놓은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김성수 목사의 신학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김성수 목사의 신학을 폄론하는 모양새이고, 진리의 보물섬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커다란 차단막을 세워놓은 꼴이다.
인터넷 세상이 되어 있는 현세에서 그러한 차단막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진리에 갈급한 성도들은 오늘도 그가 전달해 주는 생수를 마시고 목을 축이고 있다는 것이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항간에는 평생 교회에 다녔지만 매 주일 듣는 설교라는 것이 그게 그것이고, 맨날 맹탕이고 물에 물 탄 것 같은 설교를 듣다가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들으니 귀가 번쩍 뜨이고, 듣고 들어도 날로 새로운 내용으로 다가오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이전에 듣던 세상적 설교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다, 인본(人本)에 갇혀 있는 목사들의 설교는 이제 도저히 못 듣겠다” 고백하는 성도들의 수가 만만치 않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정도로 반론(해명)에 대한 서론을 마무리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보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내용 중에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만들고 있다”는 부분을 먼저 논점으로 검토해 보자. 이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말할 필요가 없는 말이기도 하다. 천지 창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이루어진 사건인 만큼 피조물이 “왜 우리를 그렇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어요?”하고 불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김성수 목사가 ‘하나님이 죄의 원인자’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말의 속뜻은 하나님은 죄를 짓게 하는 분이 아니시며 (이 주장은 일부 신학도들의 주관적 가설에 불과하다. 어떤 때는 거짓말도 하라고 시키고, 가나안 원주민을 몰살시키게 하는 하나님은 죄의 원인자가 아닌가?), 죄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데 김성수 목사는 그것을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 교리적 배경에는 하나님이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무흠한 상태로 창조하셨는데 어느날 사탄의 꾀임에 넘어 가면서부터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성경적 근거가 있다.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러한 해석은 원래 인간은 죄 없는 모습으로 지어졌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의지가 있었는데 사탄에게 굴복하여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죄를 짓게 되었다. 따라서 죄의 책임은 사탄의 말을 들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것이 전통적 원죄론에서 가르치는 교리이다. 흠잡을 데 없는 매우 완벽한 교리처럼 보인다. 지금도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성도들이 이러한 원죄론을 긍정하거나 그 교리에 함몰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의 바탕에는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인간이 인간 행동의 주체가 되어 있고 인간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있는 사탄의 저주가 깔려 있다.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같이 되어버렸다. 선악 판단의 주체가 인간이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선악 판단이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하나님이 되어 있다. 선악과 사건 이전에는 인간 행동이 하나님의 창조 규범(질서) 속에서 일어났으나 선악과 사건 이후에는 인간이 그 허락된 범위를 벗어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것이 인간의 책임인가 하나님의 책임인가 하는 명제가 등장하는데 합신의 신학위원회는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될 수 없다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김성수 목사의 가르침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될 수 없는가? 하고 질문을 던지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죄의 정의부터 김성수 목사의 것과 기존 신학의 그것이 다른 부분이 있다. 김성수 목사의 죄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이 아닌 모든 피조물은 그 존재 자체가 죄라고까지 확장 정의한다. 단순히 ‘하마르티아’라는 정의에서 더 확장된 개념이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 모든 사물을,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소위 인본주의(人本主義)라는 것이고 선악과 사건으로 모든 인간은 자동적으로 이 인본주의의 틀에 갇혀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인간 행동의 주체는 인간이고, 죄를 짓는 것도 인간이 주체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로 받아들여진다.
예장(합신) 총회의 신학위원회에 소속되어 보고서를 작성했던 위원들도 한 분의 예외 없이 모두 이 인본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에 김성수 목사가 설명하는 죄론(원죄론)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성수 목사 신학의 근본은 철저한 신본주의(神本主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은 티끌이고 nothing이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의 창조의 주체이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창조의 계획, 규범, 섭리 속에 다 들어 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도 이미 창조의 계획 속에 다 들어 있었고,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죄를 지을 수 있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신 신학위원회가 “김성수 목사는 ‘하나님이 죄의 원인자’라고 가르친다”라고 규정하는 것 같다.)
‘神本이냐 人本이냐’가 죄의 원인자가 누구인가를 극명하게 분별하는 요인이 된다. 신본에서는 죄의 원인자가 하나님이라고 보기 때문에 죄에 따른 책임도 하나님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인자로 오셨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인본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주체도 인간이고 그래서 죄의 책임도 인간이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세속 교회에서는 끝없는 죄에 대한 회개를 가르치고 요구한다. 인본에서는 피조물이자 유한자인 인간이 그 죄에 대한 책임의 주체라고 주장하지만 스스로(자력으로) 그 죄를 없이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또 다른 한계를 인식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대속의 메커니즘을 인정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신본이나 인본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대속의 메커니즘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작동한다.
다만 신본에서는 죄의 원인자가 하나님이시니 인간에게는 죄에 대한 책임이 없고, 모든 인간이 저지르는 죄는 하나님 탓으로 돌리면 되고, 그 죄값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면 된다는 조금 이상한 논리가 나올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나는 막살아도 되겠네’ 하는 방종에 빠질 수 있다. 여기에 대해 김성수 목사는 ‘씨를 가진자, 아들이 된 자, 진리를 알게 된 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印과 지팡이로) 방종하지 않게 되고 ‘죄에서 자유한 자’가 된다고 설명한다. 뒤집어 말하면 씨를 갖지 못한 자는 어차피 가라지이고 바깥에 던져져 불태워질 대상이므로 막살든, 선행을 베풀든, 의롭게 살든 하나님의 교육 보조 재료로 사용되는 소모품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사탄이 하와를 꾀어서 선악과를 따먹게 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원래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지어져 있었는데, 사탄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탄은 하나님이 하지 못하게 해놓은 행위도 할 수 있게 만드는 초능력자가 된다. 사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규범을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의 하나인 사탄에게 걸맞지 않은 능력이다.
김성수 목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래적 본성으로 에피두미아(탐심, 욕심, 두 마음)를 심어두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게 만드셨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은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신 말씀에 더 부합되는 설명이다. 인본에서 얘기하듯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는 인간이 무죄한 상태였다가 (사실은 언제든지 죄를 범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 실제로 죄를 짓는 행위만 저지르지 않았을 뿐이다. 성경은 마음속에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한 자’라고 한다.) 따먹은 시점부터 (즉, 죄의 행위가 일어난 시점부터) 영영토록 죄의 종이 되었다고 하는 교리는 인간을 완전히 죄의 굴레에 집어넣어서 율법의 노예가 되게 하고, 선행을 베풀고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 행위를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수단으로써 ‘종교적 행위’에 빠져들게 하는 작용을 한다.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전통적 원죄론(인본주의 원죄론)은 사탄만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도 죄에서 자유한 존재로 살 수 있을 텐데 하고 사탄에게 그 책임과 원망을 돌리며 살아가게 한다. 그러나 신본주의에 기반한 죄론은 인간은 애초부터 ‘에피두미아’를 타고난 속성으로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은 탐심과 욕심에 이끌려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지 못하게 하는 행위를 언제든지 저지를 수 있고 그래서 인간은 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에피두미아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섭리와 계획에 순응하여 의롭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과 시시때때로 갈등을 일으키고, 욕심과 탐심이 더 앞서거나 더 강하게 작용하는 시점에서 인간은 죄를 저지르게 된다. 사탄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유혹한 것은 인간의 탐심과 욕심이 엄청 강렬하게 일어나도록 만드는 트리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언제든지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안고 세상에 던져지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평생 ‘에피두미아’와 씨름하면서 시시때때로 죄를 짓고 살아가게 된다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면(받아들이면) 우리는 살면서 죄책감에서 상당한 부분 해방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함부로 죄를 지으면서 ‘막 살아도 되는구나’ 하는 해방(방종)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창조의 질서에 순응하게 되어 있는, 즉 의롭게 살려고 하는 기본적 본성이 더 강력하게 우리를 장악하고 있어서 함부로 죄짓고 살아가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다. 에피두미아가 우리의 의롭게 살고자 하는 본성과 충돌하면서 우리는 갈등과 불안과 의심과 두려움, 초조함에 빠져서 평안(에이레네, 화평)을 잃어버리게 된다.
신본과 인본이 설명하는 죄론은 신학의 근간을 흔드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신본주의적 성경해석은 기독교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만큼 김성수 목사의 신학체계는 새롭고 웅장한 신본주의라는 신학의 산맥을 개척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기본이 이렇게 다르니 그에 따른 구원론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필자는 예전에 세상 교회에서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세상적 설교에 나태하게 빠져 있다가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접하고 옷깃을 여미고 겸손하게 그 가르침을 탐구하고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하게 되었다. 세상적으로는 대학교 동문이고 내게 한참 후배가 되는 목사이지만 어떻게 이런 심오한 경지를 열어 제치고 깊은 진리의 경지에 다다랐을까 하는 경외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