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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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금은 타타르의 왕도를 서 진의 전진기지를 겸하여 제국의 동경(東京)
으로 칭하였는데 이것은 곧 서진에 대한 대 금의 열망을 나타낸 것이나 같
다. 따라서 대 금은 요동의 현동성을 여진과 한족의 본거지로 삼았으며 산
해관에서 장성 이남의 명을 압박하는 한편으로 타타르를 점령하여 서진의
기반을 굳혔다.
3월이 되어 황야에 덮인 눈이 녹아 마른 개울을 채웠고 우리에 갇혀 있던
가축들이 풀려났으나 몽골 왕 쟈무르칸은 타타르의 왕도에 오지 않았다. 다
만 몽골 재상 바르긴에게 혈맹을 다짐하는 서신과 함께 말 200필을 보냈는
데 대 금에 대한 예우가 극진했다.
그동안 이반은 타타르를 완전히 장악하여 아르바쿠와 쿤두스를 각각 진남
왕과 평원 왕으로 봉하고 타타르 군 전체를 제국 군에 편입시켰다.
대 금의 통치 제도는 명과 여진, 거기에다 왜국의 제도까지를 혼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독특했다. 즉 황제 휘하에 6조가 있었는데 6조는 이조,
병조, 호조, 공조, 예조, 형조로 6조의 장은 판서였으며 판서는 곧 모
든 행정의 수장이다.
대 금은 영토를 5개 성으로 나누어 각 성에 왕을 두었으니 그것은 여진
왕 타이란, 요동 왕 황문기, 타타르의 진남 왕 아르바쿠와 평원 왕 쿤두
스, 거기에다 조선 북쪽의 영지에 지난 1월에 투항한 조선의 좌찬성 안재
학을 대 조선 왕으로 봉하여 평원 성에 부임토록 했다. 평원 성에서 두만강
까지는 70여 리 길이었으니 조선은 바로 발 밑이다.
그러나 5개국으로 나뉘어진 대 금의 체제였지만 군사 권은 황제에게 진압
되었다. 황제가 5개국의 모든 군사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이란, 황문기, 쿤두스, 아르바쿠 등 4개국의 왕은 대장군 직
까지 겸하고 있어서 서진이 시작되면 황제를 따라 출병을 해야 될지도 모른
다.
3월 말이 되었을 때 이반은 타타르 왕성 밖의 넓은 평원에서 열병식을 참
관하였다. 20자 높이로 세워진 단 위에는 황제가 다섯 명의 왕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앉았는데 그 규모와 위풍은 명 황제에 비교해도 손색이 가지 않았
다.
그리고 넓은 평원을 새까맣게 덮고 있는 것은 철기 군이다. 대 금의 철기
군이 탄생된 것이다. 그 위용은 명 황제가 봐도 까무러칠 정도로 장대했으
므로 신하들의 얼굴에는 득의의 표정이 가득 했다. 대금은 내부의 체제를
갖추는 한편으로 서진을 위한 철기 군의 편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열병식
을 치르는 것이다.
"폐하, 대 금은 천하를 정복할 것입니다."
감격에 벅찬 타이란이 말했으나 이반은 잠자코 머리만 끄덕였다. 여진족
인 타이란은 옛 금 왕조의 영화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타이란의 옆에 선
쿤두스와 아르바크의 얼굴도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은 몽골 인으로 징기스
칸의 후예인 것이다. 감개의 비중이 더 깊을 것이었다.
철기 군의 대열이 정연하게 단 앞을 행진해 가고 있었으므로 그쪽으로 시
선이 모여졌다. 철기 군은 모두 5개의 기마 군단으로 이루어 졌는데 1개 군
단의 전투 기마 군은 3만이다. 거기에다 병참을 담당하는 후미 기마 군이
각각 1만씩 이었으니 1개 군단의 기마 군 병력은 4만이며 말의 숫자는 5만
필이 되었다. 오늘은 각 군단의 선발대 1만씩만 열병에 참여했으나 기마 군
5만이 일으키는 소음과 분위기는 장관이었다. 징기스칸도 이 땅에서 이만한
기마 군을 일으키지는 못한 것이다.
"원은 천하를 정복했으나 지배하지는 못했다, 다만 중원 땅만 통치했을
뿐이다."
이반이 기마 군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대 금은 천하를 정복하고 통치한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다."
철기 제 2군단은 조선과 왜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총 사령은 대장군 안수홍
으로 조선인이었다. 안수홍은 무과에 급제하고 갑산 군수를 거쳐 전라도 방
어사를 지내다가 이반이 한양 성을 번개처럼 내습하고서 북상했다는 소식을
듣자 관직을 버렸다. 그리고는 노모와 처자식을 데리고 압록강을 넘어온 것
이다.
이반은 그에게 조선인과 왜인의 모병을 맡겼는데 성품이 치밀한데다 병법
에 통달해서 군사 허도행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안수홍이 제 2군단의 총 사령을 맡게 되었을 때 모두 심복했다. 그의 휘
하에 소속된 대장군 한기선과 임기춘은 조선의 무장이었으며 또 한 명의 대
장군 아카마스는 왜인이다. 그들 셋은 각각 전투 기마 군 1만기씩을 거느리
고 있었으니 얼마든지 독립 군단으로 활동할 수가 있었다.
이마청은 2000인 장으로 다시 승급이 되어 어엿한 장수 반열에 끼게 되었
는데 이반에게 직소하여 이두산처럼 이씨 성을 받았다. 그는 한기선 휘하의
선봉장이다.
"조선에서는 양반과 상놈 구별이 엄해서 상놈이 산을 날아서 넘고 강 위
를 걸어가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장수는 되지 못한다."
이마청이 수하의 100인 장 이상 무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했다.
"대 금국은 양반 상놈이 없는 곳이다, 재주가 있으면 그 가치를 너끈히
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부하들이 똑똑히 알도록 하라."
"알겠소이다."
500인 장 하나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더니 생각난 듯 물었다.
"하오나 나리, 왜 조선을 그대로 두고 있습니까? 우리 2군단의 기마군만
으로도 조선을 점령할 수 있을텐데요."
"그것은 조선인들의 피를 흘리게 하지 않으려는 폐하의 뜻이시다."
정색한 이마청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희들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대 조선 왕도 조선을 버리고 대 금에 복
속한 분이시고 우리 총 사령도 조선의 전라도 방어사로 계셨다, 뜻이 있는
자는 모두 넘어 올테니 조선은 곧 썩은 관리들만 남게 된다."
"과연."
무장들이 머리를 끄덕였을 때 전령 군관이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대장군께서 선봉장을 부르시오."
"때가 왔구나."
자리를 차고 일어선 이마청이 무장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각자 진으로 돌아가 대기하고 있도록, 영이 내려진 모양이다."
출정 준비를 마친 그들은 성 밖 벌판에서 사흘째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
다. 이마청이 대장군 막사에 들어섰을 때 한기선이 웃음 띤 얼굴로 맞았다.
막사 안에는 이미 2000인 장 이상의 장수가 모두 모여있는 데다 총 사령의
감군 얼굴까지 보였다.
"선봉장이 나선 싸움은 모두 이겼다, 그렇지 않은가?"
이마청이 자리에 앉았을 때 한기선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싸움에는 병법과 무용도 필요하지만 운이 좋아야 하는 법, 그대는 세
가지를 다 겸한 사람이야."
"아니올시다."
여럿이 모인 자리여서 어색해진 이마청의 얼굴이 붉어졌다.
"소장은 영에 따라 움직였을 뿐입니다, 과분한 칭찬이시오."
"이번에도 그대가 나서줘야겠다."
어느새 정색한 한기선이 이마청을 보았다.
"명의 사신이 금과 비단을 산처럼 싣고 몽골 왕을 만나려고 천태산 아래
까지 왔다, 호위 군사가 2000이나 되는 대규모 사신 단이다, 이것을 그대
가 쳐라."
명의 헌종은 금의 타타르 정벌에 대단한 충격을 받고는 천도까지 생각했
지만 환관 왕직의 설득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영락제는 적극적인 몽골 정
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남경 승천부에서 북경 순천부로 천도해 왔으나
상황은 반대가 되었다.
명 왕조는 남경을 수도로 하여 성립된 국가였으며 강남으로부터 흥기해
통일한 최초의 왕조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옛말
이 되었다.
영락 대제가 건문제를 쓰러뜨리고 황제위에 오른 후에 후세에 가장 큰 영
향을 미친것 중의 하나가 환관을 단속하려고 궁궐의 문에 3척 높이의 철패
를 세우고 환관은 정무에 간여할 수 없다고 새겨 조정과의 교류를 금지시켰
으나 영락제는 조정 대신보다 환관을 더 중용했다. 또한 영락제는 동창이란
비밀 조직을 만들었는데 황제 직속의 첩보, 감찰기관으로 위세가 막강했
다. 그 동창의 수장이 환관 왕직이어서 헌종은 왕직의 꼭두각시나 다름이
없게 된 것이다.
"도원수 시천은 믿을 수가 없다".
왕직이 뱉듯이 말했을 때 좌중은 조용해졌다. 북경 궁성의 바로 옆쪽에
붙어있는 천운궁은 동창의 주무소로 쓰였는데 오늘 동창의 간부회의가 열리
고 있는 것이다.
왕직은 40대 후반이었으나 수염 없는 피부가 여자 같이 고왔고 입술이 붉
었다. 그러나 흰 창이 많은 눈에 붉은 실핏줄이 많아서 보는 이를 섬뜩하게
했다. 좌우를 둘러 본 왕직이 말을 이었다.
"금 왕이 타타르의 왕도에 있다는 것은 이미 확인이 되었다, 그러나 철
기 군 20만이 진을 치고 있는 그곳에 몽골 왕이 갈 리는 없다."
"몽골 왕은 화의 조건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좌시랑 육경이 공손하게 말했다.
"이제까지 이만한 예우로 몽골 왕을 대우해준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왕직의 시선이 말석에 앉은 사내에게로 옮겨졌다.
"성탁, 네 생각을 말해보라."
"예, 대감."
지목을 받은 사내는 30대쯤으로 장대한 체격에 용모도 준수했다. 사내가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으며 말했다.
"금 왕 이반만 없애면 금 국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입니다, 따라서 몽
골과의 연합과 병행하여 이반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
머리를 끄덕인 왕직이 허리를 펴고는 정색했다.
"그래서 나는 이미 동창의 결사 단을 타타르의 왕도에 보냈다, 그리고
그 총 지휘를 감찰방장 성탁에게 맡긴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하겠는가? 모두 엎드려 승복하는 시늉을 했을 때 왕
직의 말이 이어졌다.
"각 지역의 수장은 감찰방장 성탁의 지원에 힘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
다, 지금부터 성탁은 정 명패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는 왕직이 품에서 금으로 된 둥근 패를 꺼내어 성탁에게 던졌다.
아무렇게나 던졌지만 쏜살 같이 날아간 금 패가 성탁의 이마에 닿는 순간
소리를 내며 방바닥에 떨어졌다. 성탁이 번개같이 손을 놀려 떨어뜨린 것이
다.
"만일 금 왕을 없애게 된다면 너는 동창의 부 방주가 될 것이다."
왕직이 붉은 입술 끝을 구부리며 웃어 보였지만 눈이 더 번들거렸으므로
표정만 기괴해졌다.
"수단껏 금 왕을 죽여라."
"예, 대감."
성탁이 이마를 방바닥에 대고 웅크렸다.
"대감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소이다."
"장관이다."
하소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탄성을 뱉았다. 눈앞에 끝없이 초원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 위에는 티끌 하나 묻지
않았다. 거기에다 광대한 초원 위에도 짐승 하나 보이지 않아서 마치 초록
비단을 깔아 놓은 것만 같았다.
"오늘은 초원에서 숙영을 해야할 것 같소이다, 몽골의 해장성은 앞으로
300리를 더 가야합니다."
부사이며 좌 장군인 임채가 다가와 말했으므로 하소지는 그때서야 시선을
떼었다. 그는 명의 사신 단 정사로 예부상서였으니 타국으로 보내는 사신
중에서 최고위직이었다. 그만큼 명은 이번 몽골과의 화의에 전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해도 지평선에 닿아 있으니 이곳에서 숙영 하기로 합시다."
하소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마치 초록 바다 속에 떠 있는 것 같구려."
"공주께서 여독에 시달리는 모양이시니 대감께서 가보시지요."
"몸이 약하신 데다 마음 고생이 심하실 테니 걱정이군."
입맛을 다신 하소지가 몸을 돌렸을 때 환관 유도성이 서둘러 다가왔다.
그는 사신 단의 부사 직임을 받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감독관이나 다름없다.
"대감, 더 나아가지 않으십니까?"
"날도 저물어가니 이곳에서 숙영 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공주께서도 지
치신 것 같으니."
임채가 대신 대답하자 유도성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이러다가는 카라코룸에 도착하려면 앞으로 엿새는 더 걸리겠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도성도 더 이상 이의를 달지 않았다. 공주가 병이
라도 나면 큰일인 것이다. 하소지가 공주의 수레로 다가갔을 때 시녀들은
분주히 약을 다리는 중이었다.
"공주께 내가 뵙겠다고 전해라."
하소지가 수레 안의 공주가 듣도록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곳에서 숙영할 테니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그때 수레의 장막이 걷혀지더니 시녀 하나가 나왔다.
"공주께서 안으로 듭시라고 하십니다."
하소지는 수레의 단을 올라 장막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12필의 말이
끄는 수레는 길이가 25자에 폭이 10자가 되어서 작은 배만큼 컸는데 안에는
탁자에 의자까지 놓여졌고 비단 휘장의 뒤쪽은 침실이다. 침실 뒤쪽 문을
열면 소세장과 옥으로 된 변기까지 갖추어져 있어서 공주는 바깥으로 나가
지 않아도 되었다.
"어서 오세요."
공주 아정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하소지를 맞았지만 안색이 창백했다. 그
러나 맑은 눈과 오똑 선 콧날, 거기에다 붉고 도톰한 입술은 가히 천하의
절색이라고 불릴만 했다. 아정은 귀비 장향이 낳은 헌종의 딸인 것이다.
"길이 험하여 공주께서 옥체를 상하시지 않았나 송구스럽습니다."
하소지가 정중하게 말했을 때 아정이 보조개를 만들며 웃었다.
"대감께선 열사흘동안 이 시각에 똑같은 말만 하셨습니다, 알고 계시는
지요."
"아 아, 저런."
쓴웃음을 지은 하소지가 앞쪽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보다도 몽골의 왕자가 어떤 성품이고 어떤 용모인지나 말씀해 주세요."
"아 아, 그것은."
당황한 하소지가 시선을 돌렸다. 아정은 쟈무르칸의 아들 아구르에게 보
내는 인질이나 같은 것이다. 겉으로는 왕자와의 혼인이라고 했지만 쟈무르
칸은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었다.
"저도 뵌 적이 없어서 말씀 올릴 수가 없습니다."
겨우 하소지가 그렇게 말했을 때 아정이 희미하게 웃었다.
"난폭해서 앞을 지나는 백성을 칼로 베어 죽이기도 했다면서요."
"듣지 못했습니다."
"여색을 좋아해서 반반한 여자를 보면 가만두지 않는다고도 들었습니다."
"공주마마, 그것은."
정색한 하소지가 아정을 보았다. 그것은 사실인 것이다. 몽골 왕자 아구
르는 용장이었지만 난폭한데다 여색을 밝혀서 국경 밖까지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그런 야만인한테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겠어요."
아정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으나 하소지는 실색했다.
"공주마마,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하소지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공주마마께서는 황제 폐하의 대리인이나 같습니다, 부디 가볍게 처신하
지 마옵소서."
"대 명이 야만인에게 공주를 인질로 보낼 만큼 약해졌나요?"
"공주마마, 그것은."
그때 희미하게 땅이 울리는 느낌이 왔으므로 하소지는 말을 그쳤다. 우레
소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울림은 더 커졌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하소지가 휘장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을 때 부사 임채가 허둥지둥 이쪽으로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대감! 기마 군이옵니다!"
그 때는 하소지도 그것이 기마 군의 발굽 소리인지를 알았다. 하소지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밖으로 나오자 주위는 소란해졌다. 사신 단의
경호 군은 기마 군 1000이었으니 상당한 전력인데다 정예군이다. 임채가 소
리쳐 기마 군을 정렬 시켰을 때 북쪽 지평선을 뒤덮은 기마 군의 무리가 드
러났다. 아직 해는 떨어지지 않아서 지평선 위의 기마 군은 선명하게 보였
다.
"몽골 군이 마중을 나오는가?"
하소지가 물었으나 임채는 부하가 끌고 온 말에 오르면서 대답하지 않았
다.
"몽골 군이 틀림없소."
어느 새인지 옆으로 다가와 있던 환관 유도성이 말했다.
"전령을 받고 마중을 나온 모양이오."
그때는 기마 군의 대형이 바짝 다가와 있었는데 아직 깃발의 글자는 분간
되지 않았다.
"벌려 서라!"
임채가 버럭 소리치며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고 명 군은 수비대형을 이루
었다. 그때였다. 달려오는 기마 군이 함성을 질렀으므로 하소지는 눈을 부
릅 떴다. 저것은 공격의 함성인 것이다.
"아, 아니."
그것을 알아차린 유도성이 몸을 돌려 수레 쪽으로 다가갔다가 멈춰 서서
두리번 거렸다. 숨을 곳을 찾는 것이다. 기마 군은 이제 100여 보 앞으로
다가왔고 하소지는 그들이 빼 든 칼과 창날이 석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막아라! 공주마마를 지켜라!"
임채가 악을 쓰듯 소리쳤지만 하소지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쪽 기마 군
의 등판만 보였지만 사기가 뚝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와 앗!"
다시 함성이 올랐고 기마 군은 이삼십 보 앞으로 다가왔다.
"아 아, 분하다!"
하소지는 이를 악물었다. 적은 대군이었다. 어림잡아 2000, 3000은 될
것이었다. 그 순간 쌍방의 기마 군이 부딪치면서 칼날 마주치는 소리와 함
께 이쪽 수비대형이 허물어졌다. 단숨에 수비 대형을 무너뜨린 것이다. 임
채는 난군 중에 보이지도 않았고 유도성도 사라졌다.
단숨에 명 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기마 군은 반 식경도 되지 않아서 대오
를 정비하고 초원에 정렬했다.
대 금의 기마군이다. 명의 사신 하소지는 포로로 잡혔으며 부사 임채는
전장에서 죽었다. 역시 부사 유도성은 도망치다가 등에 화살을 맞고 끌려
왔는데 아직 화살도 뽑지 못한 채 사경을 오락가락 하는 중이다.
"포로로 잡힌 군사와 사신 일행이 600이 넘습니다."
이마청의 부장 이두산이 아직 칼을 빼어 든 채로 보고했다. 칼날에는 붉
은 피가 엉겨 붙었고 갑옷과 얼굴에도 적의 피가 튀어 끔찍한 형상이다.
"장군, 어찌 할까요?"
"우선 저기 수레에 있는 년을 끌어내."
이마청이 턱으로 수레를 가리켰다.
"조심해서 다루어라, 명의 공주란다."
"어허, 그것, 적장을 베라고 하시는 것 보다 어렵겠소."
이맛살을 찌푸린 이두산이 투덜거렸지만 눈에는 생기가 차 있었다. 전투
에서 마음껏 칼을 휘둘러 승리를 했을 때의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
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이두산이 반쯤 농으로 지껄였던 말이 현실이 되었다.
수레의 장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서던 이두산이 공주가 던진 찻잔에 코를
얻어맞아 코피가 터진 것이다. 싸움에서 십여 명의 명 군을 베었어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던 이두산이 찻잔에 맞아 피를 흘리게 되었다. 분기가 머리
꼭지까지 차 오른 이두산이 두 팔을 벌리고 덤벼들었다가 공주가 단도를 뽑
아 자신의 목에 대며 자진을 하려는 바람에 질색을 하고 물러났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