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프로이트는 '꿈은 인간이 가지는 소망과 억압이 표출된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경북 예천의 선몽대는 신선이 되길 꿈꾸거나 신선을 보고자 한 선비의 욕망이 현실화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맛있는 샘이 밝게 솟는 물의 고장' 예천. 물 맑고 산이 높아 예로부터 경북에서도 은근하고 은은한 마을로 손꼽혔다. 물돌이 마을로 유명한 회룡포가 이름을 얻으면서, 길이 나고 사람의 발길이 잦아졌다. 거기에 100여 년 역사의 국내 마지막 주막인 삼강주막이 2009년에 복원되면서 경북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예천 땅에 숨은 명소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퇴계 이황의 종손, 우암 이열도(1538~1591). 그는 꿈에서 신선을 본 뒤 '필이 꽂혀' 내성천 기슭에 누각을 짓는다. 할아비 퇴계는 아름다운 누를 지은 손자도 기특했겠지만, 선몽대 정취에 매료돼 선몽대 현액 글씨를 쓰고 시 한 수를 남긴다.
정취에 반한 퇴계의 선몽대 현액 그대로
왜가리·백로 한가로이 먹이 사냥
문학과 담 쌓았어도 시심 저절로
미로 같은 금당실 마을의 길 찾는 재미 쏠쏠
진호국제양궁장 들러 '손맛' 한번 볼 만 "솔은 늙고 대는 높아서/푸른 하늘에 꽂힌 듯하고/강변에 흰 모래와 푸른 벽은/그림 그리기보다 어렵구나/내가 지금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니/전날에 가서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지 않노라."
퇴계가 '뻑 갔다'는 말을 듣고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과 벼슬아치들이 선몽대에서 놀다 갔다. 그때마다 너 나 할 것 없이 친필시를 남겼다. 이 시들이 담긴 현판이 지금 한국국학진흥원에 있다.
퇴계의 고결한 인품이나 학식이 아니더라도 선몽대에 서면 내성천의 아늑한 물줄기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붕괴 위험 탓에 보수 중인 선몽대엔 직접 못 올라간다. 대신 관광객을 위해 새로 만든 누각에 오르면 선몽대 솔숲과 내성천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 맑은 천 아래 모래가 체로 친 듯 보드랍게 깔려 있다. '선몽대 명사십리라!' 모래사장이 원근의 소실점을 그리며 낙동강 쪽으로 한없이 뻗어 있다. 한 폭 풍경화 가운데 왜가리와 백로 한 쌍이 한가로이 먹이를 찾고 있다. 굳이 문학 소녀, 청년이 아니라도 시심이 자연스럽게 동한다.
선몽대 일대(명승 제19호)는 풍수학적으로 평탄한 모래 위에 앉은 기러기가 앉은(평사낙안) 지형이다. 낙동강으로 닿은 내성천 줄기 옆을 굵은 줄기의 소나무들이 마중하듯 울창하게 서 있다. 우암이 1563년 선몽대를 지었으니, 송림의 역사는 얼추 450년을 헤아린다. 선몽대 앞에 '산하호대(山河好大)'라는 비가 있다. 산과 물이 큰 것을 좋아한다? 알고 보니 산이 좋고 개울은 크고 길다는 뜻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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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 앞 솔숲 벤치에 앉은 노부부. |
솔숲 벤치에 앉은 노부부를 만났다. 부부는 결혼 60주년을 맞아 경북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부부는 젊은 시절 이 주변에서 데이트를 했다면 추억의 한 소절을 노래처럼 들려줬다.
그늘 품 넓은 솔 아래에 잠시 앉았다. 내성천을 건너 솔 사이로 부는 강바람이 요란하지 않았다.
명사십리를 맨발로 걸었다. 햇살을 받은 따뜻한 모래 질감이 발바닥을 간지럽게 한다. 반짝이는 금모래가 예 있구나! 동심이 별건가? 물속을 휘휘 발로 저으며 첨벙첨벙 걸었다. '와' 소리가 절로 난다.
선몽대를 오가는 길도 은행, 단풍나무가 빽빽한 나무 터널 길이다. 가을엔 출사 장소로 손색이 없겠다.
928번 지방도로를 따라 용문사 방향으로 천천히 달리면 금당실 마을이 나온다. 차를 몰다가 한눈을 팔았다간 놓치기 딱 알맞겠다. 정감록은 예천을 십승지지(전란 등을 피할 수 있는 길지) 중에서도 제1승지로 점찍었다. 예천 길지의 핵심이 용문면의 금당실 마을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도 이 마을에 도읍을 정하려고 했을 정도이니 땅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는 뜻이렷다.
마을 북쪽은 약 800m의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이곳 말로 '금당실 쑤'라고 한다. 수해와 바람을 막기 위한 풍수학적 비보림이다. 1894년 동학혁명 때 마을 사람들이 노비 구출 비용을 마련하려고 송림을 함부로 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당시 법무대신인 이유인이 마을에 99칸 집을 짓고 살면서 송림을 보호해 그나마 이 정도로 유지됐다. 당시 이유인을 보려고 서울 관리와 사람들이 자주 놀러 와 마을의 다른 말인 '반서울'이 여기서 유래했다.
마을 남·동쪽으론 대하다방, 금당제유소, 대동철공소, 대동상회, 남일식당 등 각종 슬레이트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간판이나 건물, 골목 모양이 마치 1960, 70년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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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이 낮아 더 정겨운 고샅길. |
마을 중앙과 서쪽은 2006년부터 고택을 정비하고, 그 사이를 고샅길로 꾸몄다. 금당길, 배나무길, 구장터길, 나무지게길, 은행나무길, 동촌길, 고택길, 방송재길, 고인돌길 등 말 그대로 '길 천지'다. 아담한 길 옆으로 덕용재, 진사당, 금곡초당, 호미당, 광서당 등 한옥미와 조경미가 돋보이는 고택이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집집 담벼락엔 두릅, 파, 보리, 엄나무를 정감 있게 심어놓았다. 담 높이도 낮아 안 마당이 훤히 보인다. 도시 아파트에 으레 있는 CCTV나 철제잠금 장치도 보이지 않는다. 층간 소음 걱정할 일도 없겠다. '사람 사는 집은 이래야 하는데'라는 탄식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고샅길과 고택 안내판이 잘 설치돼 있지만 길이 미로처럼 이리저리 나 있다. 헷갈리긴 하지만 길을 헤맨다는 불안감보다는 오히려 길 찾는 재미가 더 크다. 곳곳이 포토존이라 아이들이나 연인끼리 와도 깔깔댈 만한 즐길 거리가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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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 위에 선 초간정. |
금당실 마을에서 차로 5~10분쯤 거리에 초간정과 병암정이 있다. 초간정은 우리나라의 최초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저술한 초간 권문해가 살던 집이다. 암벽 위에 선 정자 아래로 실개천이 휘돌아나간다. 개천 위로 지나는 출렁다리에 초간정을 바라보면 '저런 집에서 하루만 잤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팔작기와집인 병암정은 2006년 드라마 '황진이'에서 황진이(하지원 분)가 첫사랑 김은호(장근석 분)를 만나는 장면을 찍은 장소다. 정자 아래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쉬기에 알맞다. 연꽃 피는 계절에 와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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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황진이' 촬영지인 병암정. |
예천은 '원조신궁' 여궁사 김진호(현 한국체대 교수)를 배출한 활의 고장이다. 그의 이름을 딴 진호국제양궁장에 가면 활을 공짜로 쏠 수 있다. 군에서 총깨나 쓴 남자들도 3~4㎏가량의 활을 들고 5초 이상 서 있으면 다리가 후들거리기 일쑤. 활을 쏜 소감? 일단 쏘면 안다. 활쏘기 강사 권혁용 씨는 "활 쏘는 사람은 '군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란 말이 있다"며 "활을 쏘면 근육·척추 이완, 위장병 예방은 물론 집중력 강화와 스트레스 해소에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손이 즐거운 여행'으로 여정을 마무리하고 싶다면 꼭 활을 쏘아 보길…. 글·사진=전대식 기자 pro@busan.com
TIP
■교통
·자동차: 중앙고속도로~서안동IC~34번 국도~소산2교~괴정삼거리 호명 방면 좌회전~풍산태사로 6.2㎞~홍구동삼거리 예천·선몽대 방면 우회전~봉호로 2.2㎞ 이동~오천1교 앞 좌회전~선몽대길 600m 진행~선몽대.
·대중교통: 부산동부버스터미널(1688-9966)∼예천시외버스터미널(054-654-3798) 버스가 매일 1차례(17:00) 있다. 4시간 30분 소요. 예천터미널에서는 오천·한어 방면의 시내버스를 탄다. 오전 6시 20분부터 7대가 운행하며 소요시간은 45분가량.
부산동부버스터미널에서 북대구시외버스터미널(1666-1851)로 가서 예천시외버스터미널로 옮겨가는 방법도 있다. 부산동부버스터미널∼북대구시외버스터미널 간 버스는 14:50, 17:00 두 차례 있고 1시간 40분 걸린다. 북대구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오전 7시 20분부터 예천시외버스터미널 행 버스가 매일 9대 다니고 있다.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가량. 버스 편이 여의치 않다면 부산역에서 무궁화호 열차(06:35, 16:15, 18:35, 4시간 10분 소요)를 타고 예천역으로 이동해도 좋다.
■연락처 및 이용 안내
·예천군 문화관광과(054-650-6395).
·금당실마을(054-654-2222).
·진호국제양궁장(054-650-6411). 활쏘기 체험은 하루 전 예약. 무료.
■음식
·예천읍 남본리의 산호냉면식당(054-654-2277)은 3대째 이어지는 60년 전통의 맛집이다. 예천참우 사골육수에 생강을 넣어 육수 맛이 독특하다. 100% 메밀가루와 고구마 전분만을 사용한 면발도 감칠맛 난다. 물냉면(6천 원)에 소고기 수육 소짜(1만 5천 원) 하나면 천하에 부러울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