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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만한 미국 여성 불교지도자들과의 만남”
글/우태옥
이책은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1950년 후반에 불교에 입문, 1960년대부터 명상수행을 하고 있는 심리치료사 레노어 프리드먼 [Lenore Friedman]이 미국불교발전에 큰 역할을 한 17명의 여성 수행자겸 지도자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첫번째 인터뷰한 내용으로 1983년에 출간하였던 책을 2000년에 그동안의 새로운 소식을 첨가해서 재출간하였다. 저자가 나열한 순서대로 17명의 여성지도자의 배경과 수행, 지도방침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토니 팩커 [Toni Packer; 1927-2013]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할 무렵 유대인을 어머니로 베를린에서 출생한 토니는 어렸을때부터 신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그러나 주위의 어두운 현실은 자기가 생각한 신의 존재와는 너무도 모순으로 느껴졌고 목사님들도 이것에 대한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하였다. 나치로부터의 시달림을 피하려고 토니와 형제들은 개신교 (루터교) 세례까지 받았으나, 결국 가족은 안전한 곳을 찾아 스위스로 이주하게 되고, 거기서 토니는 미국인 학생 카일 팩커를 만나 결혼, 1951년 미국으로 오게된다. 아들을 하나 입양하였고, 버펄로 뉴욕주립대학을 졸업한뒤에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려했으나 행동주의적 접근방식에 실망, 학업을 중단한다. 이즈음 프로이드 [Freud], 융 [Jung]등과 더불어 조셉 캠벌 [Joseph Campbell] 의 “신의 가면들” [Masks of God]을 읽으면서 여성의 열등한 사회적 위치는 군사력을 가진 남자들이 만들어낸 문화적 조건화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토니는 앨런 왓츠 [Allan Watts], 스즈끼 [D.T. Suzuki]의 책들과 필립 캐플로 [Philip Kapleau]가 쓴 “선의 세기둥” [Three Pillars of Zen]을 읽은뒤 1967년 뉴욕주 로체스터에 있는 캐플로의 Zen Center 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다. 불경의 개념적인 이해를 넘어선 체험의 수준에 다다르고 싶었던 토니는 자신의 한 생각으로 다른 생각을 탐지해내는 명상의 사고과정에 매료, 정진하게 되며, 스승인 캐플로 로시 [roshi]로부터 가르치라는 권유를 받는다. 이 권유와 더불어 스승은 토니에게 꼭 자기의 방법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허락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후에 캐플로 로시도 자신의 스승인 야스타니 로시 [Yasutani-roshi]와 젠을 미국에서 활성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의견차이로 결별하게 된다. 이런 일은 몇년뒤 토니와 캐플로 로시 사이에서도 반복된다.
1970년대초 토니는 여러 대학에서 선에 대한 강의와 또 학생들 상담을 하면서 Zen Center에서의 여러 의식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가령 절은 왜하며 절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심리상태는 어때야하며, 또 좌선하는 사람을 죽비로 때리는것은 맞는 사람에게서 무엇을 유도해내자는 것인지, 때리는것은 과연 자비심의 표현인지 등등, 여러 가지 질문과 회의가 생겼다. 그러던 중“새로운 종교들”[The New Religions]이란 책에서 지두 크리쉬나무어티 [Jiddu Krishnamurti]의 가르침에 접하게 된다. “모든 체제, 모든 권위, 모든 상을 멀리하라. 마음속의 집착을 지금 즉시로 버려라. 모든 권위자를 마음에서 밀어내고 부처님이 마지막 하신 말씀처럼 너자신을 등불로 삼아라”하는 말을 듣고 토니는 그동안 자기가 가졌던 회의가 정당한것이었다는 확신을 가졌다. 1981년 스승 캐플로 로시의 안식년동안 그동안 고치고 싶어했던 여러 의식을 바꾸려고 시도했으나, 이는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사이에 불화를 초래, 토니는 그곳에서 나와 1983년 제네시 밸리 젠센터 [Genesee Valley Zen Center]를 설립하게된다.
1986년에는 뉴욕주 Springwater란 곳에 284에이커의 큰땅을 사서 이사했고 이름도 Springwater Center라고 고쳤는데 이름에서 Zen을 뺀 이유는 이 센터가 특수한 믿음이나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적합한 장소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꼭 따라야만 되는 의식이나 절차도 없어서, 가령 좌선을 할 때 꼭 어떤식으로 앉아야만 한다던가, 또는 화두를 들어야만 한다던가 하는 규칙같은것도 없다. 토니는 계급사회를 상징하는 복장이나 의식을 싫어했으며 개인 면담때도 진지하면서도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자세로 임하였다고 한다. 주로 학생들한테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가르쳤는데, 이는 물론 대답을 찾게 하려는 것 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였다. 저자가 2000년 겨울 재방문했을 당시 이 센터는 많은 학생들로 붐볐고, 또 토니와 한때 멀어졌던 스승 캐플로 로시도 이 센터를 방문, 흡족한 마음으로 인가해주었다고 한다.
2. 모린 스튜어트 [Maurine Stuart; 1922-1990]
캐나다 출신의 모린 스튜어트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음악선생, 나디야 블랑제 [Nadia Boulanger]한테서 피아노를 배우던 빠리유학 시절 “우연히” “동양사상 개론” [An Introduction to Oriental Thought]이라는 책을 접하고 불교를 인식하게된다. 그때 나이는 스물 셋. 그로부터 21년뒤, 결혼하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서 뉴욕시에 살고 있던 모린은 또 “우연히” Zen Study Society라고 씌여진 건물앞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는 곧 야스타니 로시의 수련센터에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는데 이때가 1966년, 그녀 나이 44세일 때다. 우연의 연속같지만 그녀는 자신이 전생에서도 불교신자였을 것 같다며 어렸을 때 부터 모든 것이 다 끊어진 상태에 들어가보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고 회상하였다.
불교입문 이후 약 15년간 에이도 [Eido], 야스타니, 소엔 나까가와 [Soen Nakagawa] 로시들과 정진한 모린은 여성들을 차별한다는 불만을 품고 에이도 로시와는 결별하나, 엄하면서도 인자하고 따뜻한 소엔 나까가와 로시로 부터 1982년 로시 임명을 받게 된다. 아마도 이 로시 임명절차가 상당히 비공식적이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모린은 자신의 입적시 계승자를 지적하지 않았는데, 본인이 원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할 수 없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1970년 보스턴으로 이주, 1979년 케임브리지 불교신도회 [Cambridge Buddhist Association]의 회장직을 맡아서 불교 교육에 전념했으며, 특히 1980년대 이혼한 뒤에는 더욱 더 열성을 기울였다.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사람들 위해서 부엌에서 요리도 많이 하고, 때로는 대중들에게 열정적인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뱃속 아주 깊은 곳에서 울어나오는듯한 우렁찬 모린의 목소리는 가히 사자를 연상케할 정도로 인상적이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가장 깊히 남은 그녀의 모습은 그녀의 스승 소엔이 보여준 것 같은 진정한 따뜻함과 자애로움이었다. 이는 순간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린자이종 [Rinzai; 임제종] 의 전통적 수행방법 (예를 들어 無자 화두를 든다든가)에다가 여성 특유의 모성애 어린 터치가 가미된 “강렬하면서도 일관성있는” 수행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또 “평상심이 도”이니,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경계를 수행의 스승으로 삼도록 강조하였다.
3. 페마 쵸드런 [Pema Chodron; 1936 - ]
1982년 저자 프리드먼으로 하여금 꼭 불교의 여성지도자들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페마 쵸드런은 뉴욕시의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낳다. 뉴저지의 농장에서 즐겁고 무난한 어린시절을 보낸뒤 21세에 결혼하였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곳의 개방적인 분위기가 페마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어도, 후에 자신을 구도의 길로 이끈 특별한 어린시절의 경험은 없었다고 한다. 첫 결혼에서 아이 둘을 낳은뒤 이혼, 두번째 결혼에도 실패했던 30대 중반, 페마는 생전 처음으로 감당키 어려운 분노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남편한테 매달려서 정체성을 잃고 살았는지를 절감하고 고립감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럴 즈음 “부정적인 생각이 반드시 나쁜것은 아니고 거기엔 지혜의 씨가 담겨 있다”는 쵸감 트룽파 린포체 [Chogyam Trungpa Rinpoche]가 쓴 글을 읽게 된다. 그리고 며칠 뒤 불란서 알프스산맥에서 열리는 수피교 [Sufi] 캠프에 가던길에 “우연히” 들른 옛친구를 따라서 그곳에 갔다가 라마 치메 린포체 [Lama Chime Rinpoche]를 만나 스승으로 삼고, 그후 몇 년간 그가 거주하던 영국과 미국사이를 왕래하며 공부에 정진한다. 1972년 쵸감 트룽파 린포체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기위해 페마는 강도높은 수행을 감당해낸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뒤 1977년 드디어 홍콩에서 수계식을 마치고 1984년 카나다에 위치한 미대륙 최초의 티베트불교 수도원, 감포 애비 [Gampo Abbey]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페마는 남편에게 의존했던 상태에서 서서이 벗어나서 자신의 까르마와 자신특유의 스타일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까지 도달하는 여정이 무척이나 외로운것이었다고 한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자기 혼자만의 외로운 길을 걸어야 하며 이는 아무리 아껴주는 스승도 같이 가줄수 없는 길이다. 남에게 의존하는 것의 정반대인데, 흔히 생각하는것처럼 “무심”해지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갖추는 것이다. 자기자신의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알아야하며 허공 같이 열려진 마음, 누구에게나 베푸는 자비심을 매일 매일의 일상 생활에서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페마가 1990년대 유명한 저자로서 수없는 인터뷰를 비롯한 눈코뜰새없는 공식일정에 시달리며 건강문제로 고생하고 있을 때 더욱더 절실하게 느낀 교훈이다.
이책에서 소개된 여러명의 여성지도자들과는 대조적으로 페마는 티베트불교의 금강승에서 중요시 하는 위계구조나 형식들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공성 [空性; shunyata]의 이해 - 의존하고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에 입각한 헌신적 위계구조는 우리를 지혜에 연결해주는 타임 캡슐 같은것이며, 따라서 형식은 지혜를 얻는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미국 원주민들은 금강승의 불자들과 비슷하다고 페마는 말한다.
페마는 감사하는 마음, 겸손, 그리고 유머를 영적 진화에 필요한 조건으로 보는데 근본적으로는 이 우주안에 우리의 자리는 어디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페마 자신은 티베트식의 수도원이 서양에 자리잡기를 희망하지만 불교가 세속적 요소를 가진 방향으로 성장하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4. 샬롯 조코 벡 [Charlotte Joko Beck; 1917-2011]
오벌린 음악원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13년간의 결혼생활에서 네자녀를 둔 조코 벡은 샌디에고로 이사한뒤, 교직생활도 하고 쌘디에고의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오랜 동안 비서로 일하며 자녀들을 길렀다. 사십대 후반에 “우연히” 유니테리언 교회에 갔다가 아주 차분한 인상을 주는 승려한테서 젠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는데, 이 승려는 다름아닌 LA 젠센터의 마에즈미 로시 [Maezumi Roshi] 였다. 그뒤로 일본에서 온 야스타니 로시와 소엔 로시밑에서도 수행하였는데, 이들은 점진적 수행위주의 소토젠 [Soto Zen; 조동종]전통을 대표하는 스승들이었다. 1978년 마에즈미 로시의 세번째 계승자로 지명되었고 1983년에는 샌디에고 젠센터를 맡았으며, 1995년에는 “평상심 선종” [Ordinary Mind Zen School]을 설립, 80세 이후에도 수없는 개인 면담을 비롯, 여러 명의 제자를 육성하여 젠을 미국은 물론 호주까지 전파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권위의식이라고는 전혀없어서 선원에서 수행지도 할때도 평상복을 입고, 자기에게 절하는것도 금지하고, 또 제자들이 투표로 자기를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꾼 조코는 풍부한 상식과 통찰력, 그리고 소탈한 성격때문에 많은 신도, 제자들이 따랐다. 그녀의 성격, 생활태도, 수행자세와 철학 모두 “평상심” 그 자체였던것 같다.
조코는 모든 것을 차단해버리고 한곳에 집중해서 얻어지는 삼매는 정신적 통일감을 주기 때문에 유혹적일 수 있으나, 자신의 헛점이나 조건화된 성향들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가 어려울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반해서 우리의 가장 근본문제인 집착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마음의 문이 열리는 상태의 삼매는 우리를 집착의 뿌리로 이끌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녀는 또한 공안을 마스터하면 받는 졸업장도 의미가 없다는 의견이다. 극소수의 특수한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철저한 준비단계를 거치지 않고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공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 도움이 되지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수행은 첫째도, 둘째도, 또 셋째도 우리의 몸에서 느끼는 모든 감각에 주목, 집중하여, 우리의 경험을 인지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경험할 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코는 불교내의 여러 전통들뿐 아니라 불교밖의 분야들, 특히 심리학과 정신의학분야에 관심이 많았는데, 수행 지도과정에서 각 개인의 집착을 인식하도록 도와주려면 자아의 강화 (심리치료의 목표)과 자아의 해체 (선의 목표)의 연결점을 이해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우리 자아의 기본구조는 우리가 자아를 보존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수단 방법들로 만들어진 까닭에 우리의 생활을 계속 같은 방향으로만 밀고 나가는데, 위에서 말한대로 우리는 몸으로 느끼는 감각을 자세히 지켜봄으로써만이 우리의 자아구조를 알 수 있고, 그것의 횡포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5. 루스 데니슨 [Ruth Denison; 1922- 2015]
1922년 러시아 북경 가까이에 위치한 동 프러시아에서 출생한 루스 데니슨은 1940년대에 두번이나 러시아 노동 수용소에 죄수로 갇힌 경험이 있다. 1956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LA에서 교편을 잡았고, 힌두교의 승려 수계를 받은 미국인과 결혼, 앨런 왓츠, 로라 헉슬리 [Laura Huxley], 지두 크리쉬나무어티같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남편과 같이 버마에 가서 그곳의 저명한 비파사나 지도자 우바킨 [U Ba Khin]아래서 공부, 괄목할만한 속도로 정진한 결과 1969년 우바킨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는 4명의 서양인중 하나가 된다 (여자는 루스 한명뿐). 그리고 2년동안 일본에서 소엔, 야마다 [Yamada], 야스타니 로시들과 젠수행한뒤에 LA에서 마에즈미 로시와 공안 수행을 하였다. 어느 때인지 확실치 않지만 남편과 이혼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치매에 걸린 남편을 타계할때까지 보살펴준다. 루스의 사생활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데 이는 루스가 원하던 바였다.
루스는 뜨거운 캘리포니아 사막에 위치한 쟈수와 트리 [Joshua Tree]라는 곳에 좌선 시설을 만들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비파사나에 능통했던 루스는 상좌부 불교전통에 대한 존경심을 가진 젠의 대가들도 마음챙김 [mindfulness]을 소홀이 가르친다고 느꼈다. 그녀는 명상을 이끄는 동안 학생들을 세밀이 관찰, 학생들이 신체의 감각을 최대로 생생하게 느끼도록 하려면 어떤 동작을 시켜야하는지를 즉흥적으로 알아내서 - 가령 방안을 걸어다니며 손으로 “공기를 만지게” 한다던가 - 좋은 효과를 끌어내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저자 프리드먼은 루스를 다채로운 색깔을 가진 혁신적이고 정열적 인물이라고 묘사했고, 학생들도 루스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명상중에 무슨 일을 시킬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어떤땐 궁중의 여왕같고 또 어떤땐 거리의 천사같기도 하고…. 어쨋던 언제나 강열한 인상을 남겼다. 어떤 학생은 자기가 3년 반동안의 노력끝에 획기적인 돌파구를 찾아낸 순간 루스가 너무도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던 사실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어쩌면 루스가 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뭏든 루스는 많은 여성 지도자를 길러낸 정열적인 스승이었다.
6. 바비 로우즈 [Bobby Rhodes; 성향선사; 1948 - ]
바비 로우즈는 한국의 숭산선사가 오랫동안 활동하던 미국 로드 아일런드주의 푸로비던스에서 성공회 교인을 부모로 태어났다. 군인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다니며 수없이 전학을 했던 어린시절에 그녀는 이미 “무상”을 경험하였다. 부모간의 불화로 가정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게다가 어머니가 심한 천식을 앓았기 때문에 바비는 어머니를 돌보는 “해결사” 역할을 맡게되었다. 어쩌면 본인 말대로 “간호사의 업”을 타고 낳는지 간호대학에 진학, 인생의 苦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평화봉사단에 지원했으나 대기명단에 올라가자 캘리포니아로 가서 멕시코농부들을 위한 무료진료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는데 그때 당시 흔하던 향정신제 (向精神製)를 써보고 인간 의식의 광대함을 절감하게 된다.
이렇게 환각제로 유도해낸“명상 수행”에 곧 싫증이 난 바비는“때마침”누군가에게서 받은 스즈끼 [D. T. Suzuki] 의 젠 설명서를 읽은뒤 스승을 찾아 나서는데, 스승이 될 숭산스님을 뜻밖에도 금방 만나게 된다. 바비가 살 아파트를 찾고 있는데 마침 그 아파트의 아랫층에 살면서 세탁기를 고치고 있는 스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숭산스님이 일본말로 주말법문을 하면 그것을 누군가가 영어로 번역해 들려주는 것외에 스님은 특별히 숨쉬는 법이나 어떤 테크닉도 가르치지 않았다. 별다른 화두도 없었으나 바비는 “오직 모를뿐”같은 어귀를 수없이 듣자니 어떻게 명상을 해야할지 감이 잡혔다고 한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이뭣고”로 돌아온다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바비는 1978년 숭산스님으로부터 대법사의 자격을 인가받은 최초의 두사람중 하나였고 1983년 프리드먼의 첫번째 인터뷰당시에도 여섯명중의 한명이었으며, 유일의 여성 대법사였다. 숭산스님의 수행방식대로 프로비던스 젠센터에서도 좌선보다는 보살행이 중요시 되었다. 바비도 몸을 아끼지 않고 빨래, 요리, 청소 등등을 비롯한 많은 노동을 했으며, 심한 좌절감을 경험하는 상황을 모두 인욕수행으로 여겼다. 가령 숭산스님이 한국식으로 바비를 종업원처럼 다룬다던가 또는 한국인들이 박사학위가 있는 바비의 남편을 바비보다 훨씬 존경스럽게 대할 때 기분이 언짢았지만 이들을 인내심을 기르는 기회로 삼았다. 언제나 남을 도와주는 역할만 해온 바비는 1999년 뇌졸증과 선천성 심장병 때문에 받은 수술에서 회복하는 과
정에서 남의 도움을 받는 수행도 하게 되었다. 숭산스님이 세운 프로비던스선센터에서 대 지도법사로 활동중이다.
7. 지유 케넷 [Jiyu (慈友=자비로운 벗) Kennett; 1924-1996]
지유 케넷은 여성이 참정권을 얻은지 얼마 안된 1924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등록금 비싼 기숙사 학교에 다녔는데 거기에는 참정권을 얻는 투쟁에 가담하였던 과격한 여선생들이 많았다. 지유는 이들로부터 자신이 여자란 이유만으로 열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받고 자신감을 가졌지만 학교 졸업후에 계속 부딛쳤던 현실은 너무도 냉혹했다.
결혼해서 자녀를 기르거나 직장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구도의 길에 들어선 다른 여성 지도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지유는 네살 때 길에서 성직자를 본뒤에 자기도 자라서 꼭 성직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국 국교회 (성공회) 에 지유가 들어갈 자리는 물론 없었다. 교회에서 몇 년동안 오르간을 연주하며, 영적 수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찾다가 드디어 남자를 채용할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교회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거기서 십년간이나 박봉으로 열심히 일했건만 자리를 원하는 남자가 하나 나타나자 그녀를 대뜸 해고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지유가 영국 성공회에 파고 들어갈 생각을 포기하고 불교로 입문하는 계기가 된다. 그녀는 런던불자협회에서 일하게 되었고 도쿄 소지사의 코호 선사 [Koho Zenji]를 영국으로 초청하는 일에 가담하게 되는데 이것이 훗날 그녀가 일본행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유는 불경에서 강조하는 “일체의 평등성”에 매료되었지만 일본에서의 현실은 기막히게 달랐다. 지유는 마침내 밖으로부터 인정받는것에 속박되지 말고, 여성 자신의 마음속에서 통합이 이루어 져야만 평등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수행한 소토 전통에서는 여자는 잠시 마음속에서 남자가 되어야하고 마찬가지로 남자는 여자가 될수 있어야 하며, 두개의 성을 짜맞춘뒤 초월해야만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전통에서는 속세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수도원생활을 하는 것이 필수조건인데, 지유자신의 일본수도원에서의 수행은 대단히 고달펐다.
첫번째 수계를 말레이지아에서 받은 지유는 1970년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 몇명의 도움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6시간 떨어진 곳에 샤스타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에는 도서관, 법당, 선방, 요사체를 비롯하여 염소목장과 묘지까지 구비되어 있다. 그녀는 일본에서 수행할때 부터 여러가지 건강문제로 평생 많은 고생을 하는데, 그녀가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 극적으로 깨달음의 윗단계에 도달하는 장면들을 묘사한 색유리창 같은 예술품도 이 수도원을 장식하고 있다. 그녀는 수도원생들이 입는 예복을 직접 디자인했을 뿐 아니라, 고전음악에 대한 자신의 전문지식을 이용하여 (대학에서 음악전공) 불경귀절에 그레고리오 성가풍의 음을 달아서 수도승들이 아름다운 노래도 부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수도원의 핵심적인 수행방법은 바로 매일 매일의 빈틈없는 고된 일상생활이다. 일상생활을 스승으로 삼아 하루의 일과 하나 하나를 모두 명상의 표현으로 여기는 수도생들은 빵과 치즈를 만들어 먹고 또 고급 빵제품도 만들어 팔아서 수도원 운영자금을 충당한다. 속세에서 살던 방식을 모두 버리고 수도원 생활에 적응하는 처음 몇 년은 정말로 어렵다고 한다. 수도생들은 외로움, 실망, 짜증, 모든 괴로움에서 도망가려 하지말고 철저히 느끼고 내려놓는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선배 수도승들의 지도와 자비로운 격려, 불경공부와 명상으로 힘을 입어 정진한다고 한다.
8. 카루나 달마 [Karuna (=자비) Dharma; 1940-2014]
속명은 조이스 아델 페팅길 [Joyce Adele Pettingill]로 위스컨신주의 침례교 신자 집안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웠지만 아버지는 “대단히 영국적인” 사람이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늘 서먹서먹하였다. 그러다가 어머니 돌아가신 다음 해인 1975년 아버지가 재혼을 하겠다면서 카루나의 “허가”를 요청했을 때 부녀 사이의 오랜 벽이 무너지게 된다. 1980년 카루나가 그토록 경애하던 스승 틱티엔-안 [Thich Thien-An]이 입적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위태로운 건강상태에도불구하고 카루나의 곁으로 달려와 위로해 준다.
카루나의 부모는 신심이 돈독한 사람들이었는데 특히 아버지는 마을에 조그만 교회를 세울 정도였다. 카루나도 그 교회의 일요학교에서 가르쳤지만 교회에서는 자신의“큰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 18살부터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고 그후 10년간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위스컨신 대학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하여 LA로 이주,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딸을 기르며 이혼을 하게 된 20대 후반, 대학학점을 추가이수하면 교사연봉이 인상된다고 해서, UCLA에서 수강신청을 하게 된다. 이때 카루나가 선택한 과목은“불교와 젠”이었고 그녀의 스승 틱티엔-안과의 숙명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어쩌면 카루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승과의 만남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20대에 귀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수술전 작성하는 서류에 카루나는 자신의 종교를 불교라고 기록하였다. 왜그런지 자신이 불자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UCLA에서 스승을 만난이후 12년간을 매일 그와 만나며 공부했는데 스승이 첫날 남긴 인상 -인간 세계에서 인간으로 살면서 인간세계에 전혀 물들지 않은- 이 그녀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1970년 학생들의 설득으로 틱티엔-안은 LA에“국제불교명상 센터 (IBMC)”를 설립, 1980년 입적할 때까지 지도자 역할을 하였고, 그이후 카루나가 2012년 은퇴할 때까지 맡게 된다.
카루나는 1974년 삭발하고 (그녀의 스승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함) 1976년 250가지의 계율을 지켜야하는 제일 높은 단계의 수계를 받는다. 상좌부 불교의 전통에 기초를 둔 베트남 불교의 수계조건은 상당히 까다로워서 독신생활과 더불어 남자의 경우 250가지, 여자의 경우 348가지의 계율을 지킬것이 요구되나 진보적인 그녀의 스승은 법사들에게는 25계율을, 비구와 비구니에게는 모두 250계율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런 진보적 사고방식와 세계종교적 안목은 틱낫한 [Thich Nhat Hanh]과 같은 베트남 출신의 승려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카루나로서는 여자들에게 더 많은 계율이 요구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왜 그것이 필요한가에 대한 여러가지 학설이 과연 정확한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어쨋던 그녀의 스승은 직관적 통찰력과 자애로운 마음이 잘 발달되어 있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깨달음을 얻기가 더 쉽다고 믿었다.
카루나는 54세의 젊은 나이에 (1994년) 뇌졸증으로 왼쪽 몸을 쓰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따라서 제자들에게 의존해서 생활해야하는 교훈도 배워야 했다. 이런 중에서도 감옥소의 죄수들, 노숙자들, 학대받는 아동들 등을 위한 센터의 봉사활동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런 대승불교적 보살행은 이미 1970년대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에 밀려 들어온 난민들의 정착을 위해서 보인 카루나의 헌신적 노력에서도 역역하였다. 카루나는 많은 사람들이 승려생활이 평화롭고 목가적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실제의 생활은 정신없이 바쁘고 골치 아픈 일을 끈임없이 다뤄야 하는 힘든 생활이라고 한다.
카루나의 승려생활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은 1994년 센터에서 주최한 대규모 수계식이었다. 불교의 여러 전통을 대표하는 대법사들을 초청하고 수계식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동등한 역할이 주어졌다. 역사상 최초로 여자승려인 카루나가 여자 수도승과 남자 수도승 37명이 제일 끝에 하는 선서를 주관하였다. 1997년 열린 두번째 수계식에서는 8명의 서양여성이 티베트 전통의 수계를, 그리고 베트남, 스리 랑카, 네팔 출신의 세 여성이 상좌부 전통의 수계를 받았는데 이는 그들의 모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9. 샤론 셀즈버그 [Sharon Salzberg; 1952 - ]
세계적으로 알려진 메사추세쓰 주의 명상센터, Insight Meditation Society (IMS), 를 창립한 3인 중의 하나인 샤론 셀즈버그의 어린시절은 평탄지 못하였다. 뉴욕에서 출생, 아버지는샤론이 네살 반때 가정을 버렸고 아홉살때는 엄마까지 사망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에게 인생의 고苦란 먼 개념이 아니었다. 버펄로의 뉴욕주립 대학 일학년이던 17세에 쵸감 트룽파의 책들을 읽고 불교를 발견한다. 일련의 “예상치 않았던” 일들이 대학 삼학년이던 1970년 그녀를 인도로 “이끌었고,” 또 그곳에서 여러 번의 “우연한” 일들이 그녀를 뉴 델리의 명상대가인 고엔카 [Goenka]에게로 인도하였다. 샤론의 확고한 구도의 열정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고엔카의 수련센터에서 샤론은 훗날 IMS의 창립파트너가 될 조셉 골드슈틴 [Joseph Goldstein]을 만났고 그와 함께 “아주 놀라운 聖人” 디파 마 [Dipa Ma]를 만나러 간다. 디파 마를 만나는 순간 샤론은 그녀에게서 “강렬한 빛을 발하는 空”을 체험한다. 샤론은 훗날 여러 좋은 스승에게서 많은걸 배웠으나, 자신의 몸으로 샤론에게“공空”을 보여준 디파 마를 제일 영향력있는 스승으로 꼽는다. 디파 마는 또 훗날 샤론에게 고요하고 깊은 집중의 상태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또하나의 큰 스승 고엔카는 샤론에게 순수한 사랑을 보여준 사람이다. 샤론에게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던 고엔카의 티없는 순수한 사랑은 훗날 그녀가 IMS를 운영하는데 모델이 되었고 이 명상센터가 스캔들 없이 오랫동안 명성을 유지하는 이유다.
샤론은 즉각적 욕구충만을 원하는 현재의 미국사회에서 깨달음으로 이르는 길은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하는게 힘들다고 한다. 불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이 겪어야했던 어려움을 학생들한테서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하는걸 볼때는 걱정스럽다고 한다. 혼동, 망상, 이런 모든것들이 거쳐지나가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또 깨달음을 원하면서 어떻게 깨달음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나, 집착을 깨달았을 때 일어나는 자기책망, 이런 모든 문제들은 “지금 이순간 여기에” 몰두하고 “내려놓는” 방법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1984년 버마의 우 판디타 [U Pandita]가 IMS에 방문했을 때 샤론은 그가 요구한 “순간 순간의 마음 챙김”을 실행하느라고 명상실에서 그녀 방까지 걸어가는데 한시간이 걸렸던 사실을 회상하였다. 우 판디타는 그녀보고 “왜그리 빨리걷느냐”고 농담을 던졌다. 샤론은 그뒤에 버마에 있는 우 판디타의 수도원에서 몇 달간 수행하였는데 그 결과 학생들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많이 주는 방향으로 지도방식이 바뀌었다고 한다.
1989년 샤론은 골드스틴과 함께 IMS의 자매센터 Barre Center for Buddhist Studies를 설립하고, 1998년에는 이 두 센터 중간에 위치한 숲에 수행처를 세우는 프로젝트에 착수하였다. 자비 [metta]가 어떻게 행복의 열쇠가 되는지에 대한 책을 비롯하여 작가로서도 바쁜 생활을 하고, 또 통신강좌용으로 명상훈련 지도테잎도 제작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10. 겟신 프라바사 달마 [Gesshin (月震)Prabhasa (=光明) Dharma; 1931-1999]
기셀라 미드붸어 [Gesela Midwer]로 어수선한 시기에 독일에서 태어난 겟신은 어려서부터 자신의주변을 꽉 채우고 있는 전쟁의 잿빛으로부터 탈피하고픈 마음뿐이었다. 천성적으로 예술가의 기질을 가진 겟신은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눈앞의 어두운 현실을 흥미있는 새로운 세계로 바꾸곤 했는데 어쩌면 그녀는 아주 어려서부터 독특한 명상훈련을 했다고 볼수도 있다. “별처럼 빛나고” 싶었고 둔하고 어설푼 몸을 벗어버리고 “날라다니고 싶은” 마음에 발레를 하고 싶었으나 워낙 작은 체구를 가진 그녀의 건강을 염려한 아버지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겟신에게는 또 침착하고 현명하게 위기에 대처하는 지혜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이 연합군의 통치하에 있던 그녀 나이 14살 되던해, 그녀는 껌을 권하면서 혼자 있는 그녀에게 다가온 두명의 미국군인들로부터 재치있게 도망쳐 그당시 흔하게 일어났던 강간을 모면하게 된다. 겟신은 누구나 이런 지혜를 가졌고, 자신에 대한 신념을 가지면 지혜를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이 지혜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을 찾아서 젠을 택하게 된것이라고 회상하였다.
겟신이 정확히 언제 미국에 이주하게 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1964년, 33세에 캘리포니아의 맬리부 해변 근처에서 그림을 그리며 미국인 남편과 살고 있던 그녀에게 어느날 갑자기 자기가 여행중 길을 잃고 우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뒤로 남편과 이혼, 혼자서 그림그리는 것에 몰두하고 있을 때 친구가 준 당나라 승려 황벽대사의 “전심傳心 [Transmission of the Mind]”이라는 책에서 젠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36살쯤 친구의 권고로 조슈 교잔 사사끼 로시 [Joshu Kyozan Sasaki-roshi]를 만나게 되는데 첫 만남에서 겟신은 어렸을때부터 자주 경험했던 확장된 의식상태를 다시 경험하게 되며, 그 다음부터 5년간 매일 사사끼 로시와 린자이 전통의 수행에 정진한다.
그 당시 사사끼 로시의 젠센터는 LA로 이사를 왔기 때문에 (Cimarron Center라는 이름으로), 할일이 그야말로 태산같았다. 많은 일을 하면서도 화두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보람있고 고달픈 날들의 연속이었다. 스승한테 아주 아프게 매를 맞은 적도 있었고 (물론 감사의 뜻으로 스승께 절했다), 또 힘들게 회식 준비를 한뒤에 제대로 못했다는 타박도 받는 등, 어려운 5년의 수행이었다. 1972년 법사로 계를 받고 1년 반 동안 일본에 가서 히라타 로시 [Hirata-roshi]밑에서 수행하며 일본어와 붓글씨를 배우는 기회를 즐겼으나, 일본에 머무는 동안 LA의 사사끼 로시를 비롯한 도반들과는 관계가 소원하게 되었고 그런 긴장된 분위기는 그녀가 LA에 돌아와 Cimarron Center의 주지가 되었을때도 풀리지 않았다.
1983년 겟신은 사사끼 로시의 법맥에서 이탈하여 제일 처음 LA에, 그리고 네덜랜드를 비롯한 유럽 여러곳에 International Zen Institute (IZI)를 세웠는데, 2000년 두번째 인터뷰 당시 미국내에 6개 유럽에 4개의 센터가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따뜻하며 간단명료한 말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조주종심 (778-897)을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데는 전통적인 방법이 필요할지 몰라도 누구나 다 그녀와 같은 혹독한 수행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녀의 입장이다. 그녀의 젠센터에서는 보통 20-25분의 좌선에다 빠르거나 느린 행선, 또 어떤 때는 요가나 스트레칭도 그때 그때 흐름에 적합하게 섞는다. 겟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수행을 시키는 것 보다 각자의 성향이나 생활방식에 따른 맞춤식의 젠을 권장한다. 이런 면에서 여성지도자들의 본능적인 공감력이 큰 자산이 된다고 한다.
저자 프리드먼은 위에서 소개한 10명의 여성 선구자들외에도 7명의 주목할 만한 지도자들의 활동을 기술하였는데, 이중 몇 명은 개인정보가 상세히 보고되지 않아서 생년월일이나 현황이 비어있는 점을 밝혀둔다. (필자의 인터넷 탐색도 미진한 점을 다 해결해주지는 못하였다.)
11. 쏘냐 마길레스 (Sonja Marguiles; 1931-2013), 이봔 랜드 (Yvonne Rand; ? - )
쏘냐는 저자 프리드먼이 머리 속에 그리던 있었던 현대식 “엄마”같은 이미지-전통을 따르지 않고,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자기집 거실에서 수계식 하고, 꽃꽃이나 야채를 썰면서 법을 드러내보이는-에 상당히 잘 맞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실제로 쌘프란시스코의 자기집 거실을 선방으로 사용하였고 거기서 제자 세 명의 수계식도 거행하였다.
미네소타주의 루터계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쏘냐는 대학에서는 역사를 전공하였고 “유대인 불가지론자”와 결혼, 슬하에 두 아이를 두었다. 196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인본주의 심리학의 거장인 에이브러햄 매슬로우 (Abraham Maslow)한테서 종교심리학을 배우고, 超개인적 심리학회에서 발행하는 Journal of Transpersonal Psychology의 편집에 40년 이상 헌신하는데, 이를 계기로 동양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 1968년부터 젠수행을 시작, 코분 치노 [Kobun Chino]를 스승으로 모시고 1975년 계를 받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타 크르즈로 이사한뒤에도 쏘냐는 어떤 기관이나 단체에 속하지 않고 계속 자기 집 거실을 선방으로 사용하며 제자들을 지도하였는데, 그녀는 이런 형태의 젠수행이 오는날의 미국불교에서는 상당히 흔하다고 믿는다. 스즈끼 로시는 이를 “중도 아니고 속한도 아닌 길”이라고 말한적이 있는데, 쏘냐는 전통적 수행 방식은 독신의 남자승려들이 남자수행승들을 위해 만든것이며, 중요한것은 불교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어떤 분이었는가, 또 “비어있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아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쏘냐에게서 계를 받은 한 남자 심리학자는 쏘냐와의 관계를 통해서 대인관계에서의 “횡적인 가치관”을 계발하게 된것에 큰 감사를 표한다고 하였다.
이봔 랜드는 1966년 순료 스즈끼 로시 [Shunryo Suzuki-roshi]를 만난뒤 4개월 후에 그의 샌프란시스코 젠센터의 비서로 시작, 20년동안 센터의 거의 모든 행정직을 맡았었다. 단도직입적이고, 명확한 의사표현에 능하며, 소탈한 성격의 이봔은 젠, 비파사나, 티베트 불교를 모두 자신의 수행과 지도에 포함시킨다. 틱낫한이 가르친 “부처님 걸음”을 걷고 “부처님 미소”를 짓는 것을 특히 좋아하는 이봔은 전통적인 젠수행에서 많이 일어나는 권위의 남용, 의존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수행자 모두가 서로에게 피드백을 줄 수있도록 조직형태를 바꿔야한다고 주장한다.
2000년 저자와의 두번째 인터뷰에서 이봔은 소토 전통의 젠에 상좌부 불교, 원시불교, 그리고 히말라야 불교등을 첨가해서 정진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또 1985에 달라이 라마와 인도 보드 가야에 있는 티베트 수도원장 타라 툴쿠 [Tara Tulku] 밑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는데 타라 린포체는 그녀에게 남녀가 가진 속성들을 모두 구비한 사람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12. 재클린 맨델 [Jacqueline Mandell; 1948년경 - ], 콜린 슈미쯔 [Colleen Schmitz; 1950년경 - ?], 아야 케마 [Ayya Khema; 1923-1997]
재클린 맨델은 20대에 8년간 고엔카와 버마의 마하시 큰스님 [Mahasi Sayadaw]밑에서 비파사나수행, 32세에 버마의 랑군에서 3개월의 여승생활을 하는 계를 받고, 2년후 캘리포니아의 타웅풀루 큰스님 [Taungpulu Sayadaw] 한테서 수계한뒤 스님의 수도원에서 일년동안 지도자로 일하도록 초청을 받았는데 이런 영광은 서양여성으로는 처음이었다.
1977년부터 International Meditation Society (IMS) 에서 풀타임으로 가르치며 여러 훌륭한 스승들과 공부할 기회가 있었으나, 여성승려를 차별대우하는 상좌부 불교전통을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1983년 사임한다. 재클린 자신은 스승들로 부터 차별 당하지 않았고, 또 상좌부 전통에서는 여자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나,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여자승려들의 권한이 너무 보잘 것 없는 현실이었다. 재클린은 또 남자 스승들과 여자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남용, 그것이 초래하는 부적절한 관계 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여성들도 자기를 돌이켜보고 강해져야 하며 이 과정에서 여성지도자들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1983년부터 어떤 기관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자적 지도자로 활약해온 재클린은 2000년 당시 저자와의 두 번째 인터뷰에서 티벳불교의 금강승 (金剛乘) 전통을 따라 수행하고 있다고 밝히며 1987년 낳은 쌍둥이 딸들이 자신의 가장 큰 스승들이라고 하였다.
뉴질랜드 출신 콜린 슈미츠는 23세가 되던해 “무언가”를 찾아서 인도로 갔고 거기서 그녀가 경애하는 비파사나의 대가 고엔카를 만난다. 미국인과 결혼, 남편과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비파사나 수행법을 가르치는데, 고엔카의 전통을 있는 그대로 따라야된다고 고집하는 순수파이다. 그녀는 또 도덕성 없이도 정신집중은 가능하지만, 지혜는 도덕성없이는 얻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2000년 인터뷰에서 콜린은 요세미티 국립공원 근처로 센터를 옮겼고 1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수련장을 만들었다며, 모든 경비는 보시금으로 충당하고, 지도자나 스태프는 무보상으로 일한다고 전했다.
저자 프리드먼이“절대적 신념을 엔진으로 박력있게 움직이는, 새콤달콤한 산딸기 같은 여자”라고 묘사한 아야 케마는 유대인으로 독일에서 출생, 14살 때 나치를 피해 스코트랜드로 도피, 중국에서 부모와 재상봉, 상해에서 대학을 다녔다. 두번 결혼, 슬하에 두 아이를 두었으며, 일일이 나열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많은 나라에서 살면서 여러 나라 -호주 (1978), 스리랑카 (1982, 1984), 독일 (1989) 등- 에 수도원을 세웠다.
젊은 시절 상좌부 불교의 실용주의에 매력을 느껴 버마, 타일랜드, 스리랑카에서 수행하였는데, 특히 스리랑카의 나나라마 마하테라 [Nannarama Maha Thera]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독일 뮨헨근처에 세운 붓다하우스에서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禪定 [dhyana]을 “정신이 멍한 상태”나 “최면걸린 상태”라고 보는 그릇된 견해를 시정하고자 노력하였다. “깨달음을 얻는 유일한 길은 자기안에 아무도 없다, 집안이 텅비었다, 라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케마는 개인의 심리상태를 중시하는 미국불교의 성향을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했고, 따라서 개인 면담시 학생들의 심리적 문제보다는 어떻게 명상수행을 하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췄다. “행복과 평화는 우리의 生得權이 아니고 끈임없이 노력하는 자만이 얻는것이다” 라는 라마나 마하리쉬 [Ramana Maharshi]의 말은 케마자신의 생각을 잘 나타내는 표현이다.
13. 처링 에버레스트 [Tsering Everest; 1954년 경 - ], 조애나 메이시 [Joanna Macy; 1929 - ]
처링은 서부 몬태나주에서 태어나 19살에 결혼, 아들을 낳고 24세에 이혼한 뒤 캘리포니아를 거쳐 오리곤주에 정착하게 된다. 천성적으로 신심이 강하여 어렸을때 부터 막연하지만 절대적 진리가 어디엔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던 중 두죰 린포체 [Dudjom Rinpoche]성하의 제자가 하는 법문을 듣고, 25세에 티벳 불교에 입문, 성하로부터 처링이란 법명을 받는다. 그리고 성하에게 자기가 사는 동네근처에 티벳승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성하는 그녀의 입문식에 참석했던 챠그두두 린포체 [Chagdud Rinpoche]를 그녀가 사는 곳으로 파견한다.
챠그두두 린포체는 영어가 대단히 짧았고, 처링은 티베트말을 전혀 몰랐다. 그녀는 스승이 일본의 전통적 短詩인 하이쿠 같은 법문을 할때 그의 표정, 어조, 손짓 등이 어떤가를 자세히 관찰, 서로 마음으로 대화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스승이 법문을 할 때는 즉석에서 대화의 형식으로 법문을 이끌어가는 대화식 통역자 역할을 1981년부터 10년간 환희에 가득찬 마음으로 계속하였다. (1982년 결혼한 남편 에버레스트氏도 법사이다.) 1994년 캘리포니아로 옮긴 수행처에서 그녀의 스승이 수련회에 오는 도중 홍수로 길이 막히자 처링이 스승을 대신해서 수련회를 이끌어 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마침” 이 수련회에는 브라질 상파올로에서 온 변호사가 있었는데 처링한테 큰 감동을 받고 그녀를 브라질로 초청하였다. 그녀의 스승은 그녀가 타라多羅보살 (Tara)의 화현 (化現)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1995년 수계하였다. 2000년 당시 그녀는 세 곳의 센터 (브라질에 두곳, 오리곤주에 하나)를 티벳불교의 금강승 전통에 따라 이끌고 있다.
조애나 메이시는 LA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자랐다. 웰슬리 (Wellesley)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녀의 정치적 이념은 급진적 좌익계통으로 기울게 된다. 결혼하여 세아이를 가졌고, 평화봉사단에 직책을 얻은 남편을 따라 인도에 가서 살던 2년동안 마침 중국의 티벳트 점령으로 인도에 피신한 달라이 라마를 접견하게 된다. 그때 그녀 나이는 35세. 티베트 난민들을 도우며 깊은 우정을 쌓았고 그들의 생활속 깊이 스며있는 자비로움에 많은 감동을 받지만, 그녀는 비파사나를 기본 수행방식으로 삼고 있다.
1978년 초기 상좌부 불교경전의 인과론을 주제로 종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조애나는 고대문헌에서 기술한 마음과 몸사이의 상호인과설과 현대 서양철학의 시스템이론사이의 유사점을 간파하였다. 대체적으로 조애나의 인생에서는 언제나 영적인 문제와 사회 정치적 문제들이 병행했는데, 그녀는 불교수행에서 얻어지는 통찰력이 현대의 불자들이 느끼는 분노와 슬픔을 사회문제 해결로 연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이책에 소개된 여러 지도자들처럼 조애나도 불교수행방법들을 약간씩 개조하여 기독교나 유대교 신자들에게 가르치는데, 쵸갈 린포체 [Chogyal Rinpoche]에게 그래도 괜찮으냐고 묻자, 린포체는“조애나, 부처님은 불교신도가 아니셨다네” 하시며 인자한 미소를 띄우셨다고 한다.
책의 끝맺는 말에서 저자는 1990년 부터 2000년 사이의 미국불교계의 근황을 요약하고 있는데 젠, 비파사나, 티베트 불교 모두 여성참여의 차원에서 건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 기간 동안 서양의 불교가 동양의 불교와 다른 모습을 보인 점을 세 가지로 요약하는데, 이러한 차이가 여성들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많은 여성들이 두들어진 활동을 보인 기간에 나타난 현상들이다. 첫 째로는 불교내의 여러 전통들 사이는 물론이고 불교와 다른종교 (기독교, 유대교)간의 교합, 둘 째는 미국내의 많은 불교기관에서 보이는 민주화의 풍토 (여성화라고 불러도 되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내적 수행의 결과를 밖으로 표현하는 사회참여정신의 고양 (高揚)이다.
글: 우태옥 (서울대학 심리학과 졸업, 퍼듀대학 사회심리학 박사, 펜실베니아의 밀러스빌 주립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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