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明山(마이클 리)
또 한 사람의 김일성
김일성의 죽음과 혜산사건으로 위축된 第6師(제6사)는 1938년 봄 다시금 출몰하기 시작했다. 새로 취임한 師長(사장)도 죽은 전임자의 이름을 계승해 김일성이 戰死(전사)한 것이 아니라 건재한 것처럼 위장했다. 그가 첫 번째 일으킨 사건이 1938년 4월26일 임강현 제3구 6道溝(도구)의 습격이었다. 500여 명의 병력이 경기관총 6정으로 시가지에 침입해 물자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다.
그 무렵 동북항일연군은 주로 물자 약탈에만 급급했다. 1939년 초 第1路軍(제1로군) 산하 제1·2군이 제1·2·3 方面軍(방면군)으로 개편됐다. 이처럼 편제가 바뀌는 과정에서 第6師將 김일성(또 다른 김일성)은 第2方面軍長(제2방면군장)으로 승진했다.
1939년 봄 第2方面軍長 김일성의 부대도 각처의 부락을 약탈하고 다녔다. 일례로 1939년 5월3일 밤 김일성 부대는 200여 명의 병력으로 장백현의 한 부락을 습격해 만주국 경찰과 4시간 교전한 뒤,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고 경관과 주민 약 40명을 살상했다. 김일성 부대도 당시 손실이 컸다. 특히 第2方面軍 ‘부녀부장’이었던 김일성의 妻(처) 金惠順(김혜순)은 부상을 입고 부대에 돌아가지 못하고, 山家에 숨어 있다가 1940년 4월6일 체포됐다(조선일보 1940년 7월5일자 보도). 金惠順과 기타 체포된 대원들의 진술에 의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어릴 때 간도 용정의 대성중학교를 다녔다. 1930년 5·30간도폭동사건 때에는 행동대장이었으며, 소련 사관학교 출신으로 당시 나이는 34세였다고 한다. 이 인물도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다.
軍警합동작전으로 1939년 10월~1941년 3월 기간 동안 동남3성(길림, 통화, 간도)에서 治安肅正工作(치안숙정공작)으로 공비섬멸 작전을 실시했는데, 당시 이 지역에서 준동하던 약 3000여 명의 항일연군 병력이 전멸됐다. 1940년 2월23일 제1로군 총사령관 楊靖宇(양정우)가 전사한 것을 비롯해 수많은 지휘관이 죽었으며 그 결과 병력이 궤멸됐다. 당시 戰果(전과) 기록을 보면 유기된 시체만 해도 1282구, 투항자 1040명, 체포 896명, 파괴된 병영이 2923개나 되었다. 그러나 第2方面軍 김일성은 살아남아 1940년 12월 말 패잔병 20여 명을 이끌고 소련원동으로 탈주하는데 성공했다. 소련으로 퇴각한 동북항일연군 중 第2·3路軍 패잔병은 하바로프스크 야영지에 수용됐다. 第1路軍 패잔병은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오케얀스카야 야영지에 수용됐다. 패잔병 총인원은 中國人과 韓人을 모두 합해 300여 명 정도였다.
김일성은 도착 후 오케얀스카야에서 얼마 후에 병사했다. 소련은 먼 안목으로 동북항일연군 패잔병들의 이용가치를 계산해 이들을 받아들인 뒤, 극동경비사령부 88정찰여단 공작대에서 각종 훈련까지 실시했다. 그들 중 韓人은 약 100명 정도였다.
해방 후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할 때 韓人들을 60~70명을 데리고 왔는데, 이들 중에는 崔庸健(최용건), 金策(김책), 崔賢(최현) 등 동북항일연군 출신들과 함께 소련태생 2세인 許哥而(허가이), 朴昌玉(박창옥), 奇石福(기석복), 南日(남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평양에 도착한 후 동북항일연군 출신, 소련에서 자란 韓人 2세들, 화북에서 돌아온 연안파 계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은 북한 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앞에 내세울 민족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들은 소련 원동지방(지금의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김일성 장군이나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연군의 김일성이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소련에서 데리고 온 33세의 金聖柱(김성주, 1912년생)에게 ‘김일성 장군’이란 이름과 호칭을 주고 1945년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지금의 모란봉경기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 놀랐고, 그를 김일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군중들은 김일성 장군을 ‘김좌진 장군과 비슷한 나이로 60세에 가까운 初老(초로)의 씩씩한 군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주둔 소련군은 치스챠코프(Chischakov) 대장이 지휘하는 제25군단이었으나 모든 정치공작은 로마넨코 평양주재 소련군 민정부사령관이 담당했다.
청년 김성주에게 김일성 장군의 탈을 씌워 로마넨코 정치사령부에 추천한 사람은 연해주지구 경비사령관 스티코프(Stykov)였다. 스티코프는 김성주가 오케얀스카야 野營(야영)에서 4년 반 이상 생활할 때 이미 그를 지켜봤다. 한인들 중에서 비교적 지도력이 있으며 외모가 가장 준수한 사람을 선택한 것이 바로 김성주였다. 스티코프는 소련군정 시기 평양에 있었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집행을 위한 美蘇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 대표로 있었다. 그는 美蘇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남북한 분단이 불가피하게 되자 평양주재 초대 소련대사로 눌러앉아 가짜 김일성 중심의 북한정권 수립을 위한 후견인 역할을 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누구인가
북한의 김일성은 과연 누구인가. 그의 본명은 金聖柱(김성주)이며, 1912년 4월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그것도 조작이라는 설이 있다. 그의 증조부 金膺禹(김응우)와 조부 金輔鉉(김보현)은 가난하고 무식한 농부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 金亨稷(김형직, 1894년생)은 신식교육을 받아 평양에서 숭실중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金亨稷은 집안이 어려워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 지방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1918년 평안북도 중강진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중강진에서 3·1운동을 맞았다.
1919년 5월 다시 만주 臨江縣(임강현) 帽兒山(모아산)으로 이주, 한의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다가 후에 다시금 장백현 八道溝(팔도구)로 이주해 한의원을 개업하고, 고향 외가에 맡겼던 아들 성주를 데려다 팔도구소학교에 넣었다. 金亨稷은 1923년 무슨 연유인지 아들을 다시 고향에 보내 외가 마을에 있는 彰德學校(창덕학교)를 다니게 했다. 그리고 1925년 봄 성주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당시 金亨稷은 장백 일대에서 유력한 자산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장백현 서쪽에 있는 撫松(무송)으로 이사를 했고, 여기서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白山武士團(백산무사단)에 가입, 독립 운동가들이 병나면 열심히 한약을 지어 주곤 했다.
1926년 성주는 무송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樺甸縣(화전현)에 있는 화전의숙에 입학했는데, 부친 金亨稷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학업을 다시금 중단했다. 金亨稷은 민족주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됐다. 당시 金亨稷의 妻(처) 康盤石(강반석)은 세 아들 聖柱(성주), 哲柱(철주), 英柱(영주)를 데리고 무송에서 한동안을 지냈다. 그러다 성주는 그 무렵 무송 일대를 횡행하던 馬骨團(마골단)이란 공산폭력배의 무리에 끼게 되었다.
이 마골단은 십대 韓人 깡패조직이었다. 당시는 공산주의 열풍이 그 지역을 휩쓸 때였는데 마골단은 혁명을 한답시고 닥치는 대로 부유한 집을 털면서 협조하지 않으면 반동분자라고 때려눕혔다. 당시 韓人자치기관이었던 正義府(정의부)에서는 李鍾洛(이종락) 소대를 보내 마골단을 와해하고 소년 성주를 붙잡았다. 정의부는 김성주가 정의부 소속 백산무사단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金亨稷의 아들인 것을 알고 이종락으로 하여금 그를 훈육하도록 했다. 1927년 봄 이종락은 성주를 奉天(봉천)에 있는 平旦(평단)중학교에 입학시켰다.
평단중학교에서도 김성주는 마골단의 기질 때문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퇴학을 당했다. 김성주는 무송으로 돌아갔고, 그의 가족은 安圖(안도)로 이사했다. 안도에서는 안도현 경찰대장(중국인)의 도움으로 1928년 봄 길림의 중국인학교인 毓文(육문)중학교에 들어갔다.
길림에는 많은 韓人들이 살고 있었는데 소년들은 ‘조선인길림소년회’에 가입하도록 되어 있었고, 김성주도 가입을 하고 얼마 후 소년회 회장이 됐다. 그 무렵 공산주의자들은 활발하게 조직 확장운동을 벌이고 있었으며 주로 농민과 청년학생에게 접근했다. 1929년 17세가 된 김성주에게도 그 손이 뻗쳐 그 해 5월 초 어느 韓人 집에서 모이는 ‘고려공산청년회’에 참석하고 그 모임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일본의 길림 총영사관 경찰대에 의해 가담자 대부분이 검거되고, 김성주는 길림을 빠져나가 과거 자신을 돌봐주던 이종락을 찾아갔다. 그때 이종락은 마골단을 토벌하던 정의부나 국민부 소속의 민족진영이 아니었다. 그는 변절해 공산주의 활동에 깊숙이 빠져 있었고, 김성주를 자기 부대의 대원으로 삼았다.
당시 이종락은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대에 吉黑農民同盟(길흑농민동맹)이란 것을 조직해 인근의 韓人 농촌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1929년 가을부터는 五家子(오가자) 지방까지 손을 뻗쳤다. 이종락 부대의 약 50명의 대원들은 권총을 차고 다니면서 농촌에 들어가 소득의 10분의 1을 길흑농민동맹에 바치라고 횡포를 부렸다. 김성주도 오가자에 파견되어 세금징수와 반동분자 색출에 설치고 다녔다.
이 때부터 김성주는 당시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던 김일성 장군(본명 金光瑞, 별호 金擎天)의 이름을 따서 김일성이란 별호를 쓰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훗날 이 김일성(본명 金聖柱)을 동북항일연군 第6師長을 지낸 김일성 또는 第2方面軍長을 지낸 김일성과 또는 진짜 애국투사이었던 시베리아의 김일성(본명 金光瑞)과 혼동하게 되는 것이다.
1930년 말 길흑농민동맹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었고 이종락이 체포된 후 김성주는 오가자를 떠났다. 당시 그는 봉천의 평단중학교 시절 중국인 친구였던 張亞靑(장아청)과 같이 張의 고향인 무송으로 갔다. 1931~1932년경 김성주와 장아청은 또래의 젊은이들을 규합하고 공산혁명을 위한 군자금이란 명목 하에 돈 있는 중국 사람들 집을 털었다. 이 때문에 무송에서는 “조선 놈 김일성 일당의 약탈 때문에 못 살겠다”는 비난의 소리가 비등했다.
1931년 9월18일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는 日軍에 저항하기 위한 두 개의 韓人 민족주의 무장부대가 있었다. 하나는 북만주의 한국독립군이고 하나는 남만주의 조선혁명군이었다. 위의 소식을 들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梁世奉(양세봉)은 예하부대의 高東雷(고동뢰) 소대장과 대원 9명을 무송에 파송, 김성주 일당을 퇴치하도록 지시했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김성주 일당은 무송에 도착해 피곤하게 잠든 高東雷 소대장 일행을 덮쳐 전원 사살한 뒤, 그들의 권총을 탈취해 사라졌다. 그 무렵 안도현에 살고 있던 김성주의 모친 강반석이 1932년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33년 6월 김성주는 汪淸縣(왕청현)에 있는 중국인 항일부대 중 하나인 吳義成(오의성) 부대에 나타나, 그의 당번병으로 시작해 부대의 대원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