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금광평(江陵 鶴山 金光坪)
1. 금광평(金光坪)의 풍광(風光)
선상지(扇狀地) 금광평(金光坪) / 금광리 앞산 망덕봉(望德峰) / 대관령(大關嶺)
내가 살던 강릉 학산(鶴山)의 금광평(金光坪) 마을은 6.25 사변 전까지는 허허벌판의 황무지였던 곳이다. 글자 그대로 제법 넓은 들판(坪)이었는데 주변에 비하면 조금 높은 구릉(丘陵)지대로 사람이 살지 않는, 소나무와 쓸데없는 잡목들이 들어차 있던 곳이었다.
금광평은 빙 둘러가며 태백준령(太白峻嶺)이 막아선 형국인데 북서쪽으로는 대관령이 아득히 멀리 보이고 서쪽으로 대관령 줄기가 흘러내려 칠성산(七星山)으로 우뚝 솟았다가 남서쪽으로 휘돌아 망덕봉(望德峰)이라는 제법 까마득히 쳐다보이는 산봉우리로 솟은 후 산줄기는 계속 흘러내려 안인(安仁) 지경의 해변으로 이어진다.
우리 마을은 일 년 내내 대관령을 넘어오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우리 마을은 금광평(金光坪)이라는 멋진 이름에도 불구하고 거름기 없는 시뻘건 진흙땅으로 돌멩이투성이 벌판인데 수리시설이 없어 하늘만 쳐다보며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보니 땅은 항상 메말라 있어 심는 곡식마다 배배 꼬이며 제대로 자라지도 않았고 가을이 되어도 여무는 이삭은 반도 못되었다. 가난도 가난이려니와 바람받이 마을이다 보니 항상 시뻘건 황토색 흙먼지가 휘날려서 코를 막고 다녀야 했다.
이곳 금광평은 구릉지대(丘陵地帶)다 보니 주변 지역보다 조금 높은 지역으로 허허벌판이어서 그런지 일 년 내내 바람이 많이 불었던 모양이다. 대관령을 넘어오는 북서풍으로 봄에는 뽀얀 흙먼지가 항상 자욱하였고, 겨울이면 사나운 눈보라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겨울에는 찬 바람을 막을 언덕이나 숲도 제대로 없어서 북쪽 문은 모두 싸 발라 봉창(封窓)을 했는데도 방으로 스며드는 냉기(冷氣)를 막기가 어려웠다. 어린 시절 추억으로는 겨울이면 대관령을 넘어온 차가운 바람이 문풍지를 울리던 춥디추운 겨울밤이 떠오르고는 한다.
눈도 많이 내렸는데 어떤 날은 밤에 자다 들으면 빠지직~ 설낭목(雪落木) 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머리맡에 두었던 물그릇이 꽁꽁 얼어 얼음이 부풀어 올라있고는 했다.
또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 조금 밀고 문틈으로 보니 눈이 쌓여 문을 막고 있다.
강릉지방은 워낙 눈이 많이 오다 보니 뜨럭이 상당히 높아서 마당에서 뜨럭까지 거의 1m나 되어 섬돌을 놓고 올라오곤 했는데 그 마당에 눈이 꽉 차고 문턱까지 차올랐으니 적어도 1m 50cm는 내렸던 것 같다. 도저히 치울 수가 없어서 어머니가 솥에다 물을 한가득 끓여서 동이에 담아 바가지로 눈 위에 뿌리며 녹이던 기억도 난다. 눈이 워낙 많다 보니 겨우 화장실 가는 길만 쳐내는데 눈을 치우는 아버지가 토굴 속을 들어가는 듯, 쌓인 눈이 키 한 길도 넘었다.
날씨가 너무나 추우니 눈이 얼어서 눈 위로 뜀박질을 하여도 눈이 꺼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형님이 몇 시간을 고생해서 100m쯤 되는 우물까지 눈을 퍼내어 길을 뚫었는데 눈 위에 썰매를 타며 뛰놀다 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삽으로 눈을 잘라 길 바깥으로 내 던지는 눈덩이만 보였다. 길을 다 만든 후 누나가 우물에서 물을 기어오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물동이 윗부분만 힐끗힐끗 보이는데 물동이 위에 물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엎어놓은 바가지가 부딪치며 동동동.... 6.25사변 후 금광리(金光里) 쪽의 동막골(東幕谷)과 보리암(菩提庵:현 三德寺)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막아 저수지를 만드는 수리공사(水利工事)가 시작되었는데 제2공구(工區)라고 했다.
또 얼마 후 어단리(於丹里) 칠성암(七星庵:현 法王寺) 쪽 물길을 막아 저수지를 만드는 제3공구(工區) 수리조합 공사도 시작됐는데 지금의 ‘칠성지(七星池)’가 생겼다.
내가 어렸을 때는 칠성암(七星庵)을 ‘칠쌈절’이라고 했는데 나중 법왕사(法王寺)가 되었다.
법왕사(法王寺/七星庵) / 삼덕사(三德寺/菩提庵) / 장현저수지 / 칠성산(七星山)
마을 위쪽의 큰골 법왕사(法王寺) 골짜기에서 발원한 학산천(鶴山川:於丹川)은 금광평의 북쪽을 싸고돌아 학산 본동(本洞)을 지나 담산리에서 장현저수지의 물과 만나 섬석천(剡<蟾>石川)이 되었다가 남항진(南港津)에서 강릉 남대천(南大川)과 만난다.
또 법왕사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와 어단리(於丹里) 쪽 어단천(於丹川)과 삼덕사(三德寺) 골짜기에서 발원한 금광천(金光川)은 동막(東幕)골을 지나 금광평의 남쪽을 싸고돌며 금광리(金光里)와 덕현리(德峴里)를 거쳐 박월동(博月洞)에서 섬석천(蟾石川)과 만나게 된다. 이 두 개의 개천이 에워싼 가운데 분지(盆地)가 제법 넓은 벌판인 금광평(金光坪)이다.
그러니 금광평은 학산(鶴山) 본동(本洞), 어단리(於丹里), 금광리(金光里)로 둘러싸인 중간지점인데 결국 학산리로 편입되었다.
그런데 거리로 보면 어단리(於丹里)나 금광리(金光里) 쪽이 훨씬 더 가까웠는데 어단리는 1, 2리가 있는 곳으로, 1리는 집들도 몇 채 되지 않는 산골짜기 부근의 조그만 동네였지만 금광리는 일제(日帝)시기, 이곳에서 금광(金鑛)이 발견되어 제법 흥청거리던 곳이었다고 한다. 또 금광리는 거의 초창기에 천주교 성당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였는데 지금도 천주교 금광리 공소(公所)의 작은 건물이 있다.
당시 현재의 법왕사(法王寺)는 칠성암(七星庵), 그리고 삼덕사(三德寺)는 보리암(菩提庵)이라는 작은 암자였다. 이 금광리와 어단리를 경계로 하여 제법 넓은 분지(分地)의 가운데로 작은 실개천이 흘렀는데 그 주변으로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10여 호 있었던 곳이 학산3리가 되었다.
6.25 사변 후 이 황무지가 개간되고 마을이 커지면서 학산 3리가 되었는데 지금은 남강릉(南江陵) IC도 들어섰고, 광명(光明) 마을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바뀌면서 제법 부촌(富村)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강릉 읍내까지 10리(里)쯤 떨어진 곳으로, 고모네와 우리 집은 가까운 이웃집이었는데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와서 자리를 잡았던 고모네는 제법 넓은 과수원도 있었고 논밭도 많아 상당히 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