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종손 류상붕(柳相鵬) 씨30여년 객지생활 접고 환향… 사랑채 권위 되찾기에 분주하회 입향 22대 종손… 문중간 화합 위해 노력
2007년 5월, 안동 하회마을 풍산 류씨들은 전국적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된 축제의 장을 펼쳤다. 어느 문중이나 상대(上代)로 올라가면 이름난 조상을 모시고 있지만, 풍산 류씨들은 누구나 쉽게 기념할 수 없는 큰일을 해냈다.
‘서애선생서세사백주년추모제전’이라는 주제로 서애 류성룡 선생이 세상을 떠난 400주기를 맞이해 그의 훌륭한 업적을 재조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마련한 것. 이 행사는 서울과 안동에서 10여 일간 성대하게 펼쳐졌다.
5월 12일, 그 행사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한 고유제 행사를 마친 뒤 대종택 안 입암고택(立巖古宅, 겸암 부친의 아호에서 따옴) 사랑 대청에서 귀빈들을 위한 조촐한 오찬이 마련되었고, 이들이 퇴장한 뒤 일을 도왔던 문중의 연소한 이들이 점심상에 모여 있었다.
이때 풍채 좋은 어른이 대청을 둘러보다 이들이 서애 선생의 종손 맏집과 둘째집 손자들이라고 소개받자 그들을 반갑게 맞으며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을 보았다.
맏집 손자는 군복무 중에 휴가를 얻어 왔는데, 서애 선생의 16대 종손이 될 젊은이다. 대종손과 항렬이 같다. 그리고 둘째집 맏이는 고려대 법대에 수시 합격해 1학년에 재학 중인 재원이다.
그런데 서애 선생 종가의 손자들이 큰집의 대종손을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았던 것. 하회 종가의 젊은이들조차 대종손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현실이다.
하회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입향조로부터 22대 동안 서로 떠나지 않고 모둠살이를 해오고 있기 때문에 혈연 간의 유대가 유달리 끈끈함에도 그러했다.
그날 풍채가 좋았던 어른이 하회 입향조으로부터 22대, 겸암 류운룡 선생으로부터는 16대 종손인 류상붕(柳相鵬, 1951년생) 씨다. 체구가 크고 호남형이며 그리고 언변에 막힘이 없다.
여러 해 전에 겸암 선생의 부친인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 제사에 모여 의식 전에 약식으로 문회(門會)를 할 때 사안을 놓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폈던 이다.
하지만 그때 종손의 주장은 문중 원로들의 주장에 묻혀버린 느낌을 받았다. 종손이 하회마을에 살면서 종가를 지키지 못한 데서 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회마을 풍산 류씨 대종택은 600여 년에 걸쳐 22대나 내려온 유서 깊은 집이다. 단순히 유구한 대수 때문만이 아니라 입암과 겸암 선생 두 분의 불천위를 모신 명문 종택이다.
입암의 둘째아들이 서애 선생이며 분가해 오늘날의 충효당(忠孝堂) 종가가 되었고 불천위로 제향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한 집에서 세 분의 불천위가 난 것이다. 유래를 찾기 힘든 가문의 명예이다.
그러함에도 입암이니 겸암이니 하는 호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생소하다. 이는 문중 내에서조차 연소한 자제들이 대종손의 존재를 몰랐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전통의 단절과 문중 교육의 부재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다.
지금 하회마을의 대종택을 찾으면 보물로 지정된 이 집 안내표지판에 양진당(養眞堂)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내방객은 대개 양진당이 어떤 의미인가 의아해한다.
양진당은 ‘자신의 본성을 잘 기른다’는 의미로 겸암 선생의 6대손으로 휘자를 영(泳)으로 쓰는 이의 당호다. 그것으로 하회 풍산 류씨 대종택의 당호로 써오고 있다.
“겸암 류운룡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아직까지 영남 지방에서는 겸암이라고 하면 휘자나 그 밖의 설명을 듣지 않고도 누구인지는 알고 있지만, 영남을 벗어나면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부연 설명이 가해지는데, 거개가 ‘서애 류성룡의 형님’이라는 식이다. 이는 겸암파 후손들의 불만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이번 서애선생서세사백주년추모제전에서 모두 세 차례의 학술대회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덕일 씨가 쓴 <유성룡>이라는 제목의 평전까지 나왔다.
이러한 점에 대해 형님댁인 겸암 종가와 후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즐겁게 동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형제에 대한 포괄적 연구와 위상에 대한 조명이 아쉬웠을 것이다.
형제 간의 지극한 우애와 목민관으로서의 위상, 그리고 이인(異人)으로 평가되는 탁월했던 능력과 아우를 위한 제반 배려들이 궁극적으로는 임진왜란 때 서애 선생이 거양했던 ‘공의 절반이 겸암 류운룡 선생에게 있다’는 후손들의 자부심에 대한 조명 말이다.
종손 류상붕 씨는 빈한한 종가 살림으로 인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는 못했다. 안동사범 부속초등학교에 입학해 다니다 3학년 때 상주 중모초등학교로 전학했고 4학년 2학기 때 다시 안동사범 부속초등학교로 돌아와 졸업했다.
상주로 가서 잠시 수학한 것은 큰누님이 안동사범을 나와 그곳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아우를 잘 지도하기 위해 잠시 데려간 때문이었다. 안동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해 선린상고를 마쳤다.
이후 하회로 내려와 있다 현역으로 군 복무를 끝낸 뒤 1976년에 성남의 유신기계에 입사했고, 77년 8월부터 (주)풍산에 들어가 2006년 6월 까지 30여 년간 근무했다. 고향을 떠나 객지인 경주와 울산에서 생활하며 하회로 내왕한, 분주했지만 항상 부족하고 아쉬웠던 세월이었다.
종손에게 22대를 지켜온 세계(世系)에 대해 물었을 때 족보를 펴가며 아주 자세하게 설명했다. 대종택에 문헌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말했다.
“우리 집이 영남에서도 알려진, 책이 많았던 집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없어졌어요. 이유는 양자로 온 분들의 생졸년을 보면 이해가 되는 점이 있어요.
겸암 선조의 손자께서 1629년에 돌아가시는데, 양자로 오신 회당(悔堂) 류세철(柳世哲) 선조께서는 1627년생이십니다. 돌아가실 때 두 살이셨다는 얘기지요.
그러니 오랫동안 큰집에 부녀들만 있었을 게 아닙니까? 그리고 겸암 선조의 9대손 대에 양자가 있었는데, 8대조께서 돌아가실 때 9대조께서 열 살이셨어요.
그리고 13대조께서 양자를 오셨고, 15대조인 저의 선친 역시 양자를 오셨는데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생몰 연대를 따져보면 얼마나 집안 사랑채가 비어있었는지 아실 것입니다. 사랑채만 주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문헌(文獻)들도 그랬겠지요.”
종손의 이야기를 들으며 종손이 없는 사랑채에서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문중의 여러 원로 어른들의 주장을 안채에서 꺾을 장치가 온전히 마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보종(保宗)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측면이 오늘날 종가의 문헌이 일실(逸失)하게 된 주요 원인이 아니었을까.
종손의 선친인 류한수(柳漢秀, 1916-1980) 씨는 전형적인 선비요 한학자였다. 신학문에도 조예가 있어 안동사범학교에서 행정업무를 맡기도 했다. 종손 형제들을 만나보면 체격이 좋은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데, 선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 생전의 풍채를 짐작할 만하다.
“아버지께서 십 년만 더 살아계셨어도 우리 집과 하회에 득이 될 일이 많았을 텐데….” 지난해 겨울 오랜 객지생활을 청산하고 환향한 종손의 선친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이 담긴 말이다.
모친인 김명규(金明圭) 여사는 지금의 구미시에 편입된 선산 들성에서 하회로 출가해 평생을 종부로, 그리고 상부(喪夫)한 뒤로는 노종부(老宗婦)로서 올곧은 삶을 살아온 ‘우리 시대의 어머니 상(像)’을 가진 이다. 오래 전에 노종부로부터 구미에서 초등학교 시절 함께 학교에 다녔던 박정희 전 대통령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시집 온 뒤 한 번 만났어요. (박 전 대통령이) 영주에 와서 나를 보고 싶다고 해서 내가 그곳까지 찾아갔더니, 내 손을 잡고 반가워했죠. 그것이 마지막이 됐어요. 참 인정 많고 체구는 작아도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어요. 나중에 그렇게 세상을 떠난 뒤 내가 이 안방에서 얼마나 울었다고요.”
종손은 퇴계 이황 선생의 후예인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문과 장원급제, 1910년에 24일간 단식해 순국한 애국선열) 선생의 현손(玄孫)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두었다. 그들은 현재 대학에서 기계공학과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공학도의 길을 걷고 있다.
종손에게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묻자 첫째가 경제요, 둘째가 문중 간의 화합이란다. 자신은 우선 생활이 힘들어도 문중 간의 화합에 중점을 둘 생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사진제공= 나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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