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비의 회한
고르바초프는 체르넨코 정권의 제 2인자의 자리에서 농업, 경제, 이데올로기, 당 인사 정책 등 중요 직책을 담당한 실력과 신뢰를 겸비한 소련 정치국의 신진 기대주였다.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죽은 후 당 서기장에 선출된 그는 과감한 세대교체를 단행하여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로의 글라스노스트(대외개방)를 천명하고 개방된 새로운 환경을 수용하기 위한 페레스트로이카(국내 개혁)를 추진하였다. 그는 공산주의 방식으로는 결코 소련 국민들을 배고픔에서 구원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영원히 가난과 질곡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부동의 신념을 갖고 개혁정책의 1차적 과제를 군비 감축에 두고 미국과 「중거리핵전력협정」(INF Treaty)을 체결하고 9년 동안 점령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철수 시켰다.
경제 개발을 위해 소모적 예산을 줄여야하는 소련의 처지로서는 미소 간의 군비경쟁 종식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군비 감축으로 일시에 처량한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게 된 소련 군인들은 개혁 불만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개혁반대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역사의 흐름을 역류시키지는 못하였다. 쿠테타로 인해 고르비는 실각하고 소련은 붕괴되었으며 개혁 추진은 지지부진해져 오늘날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파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고르비가 새로운 소련의 건설을 위해 추진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이 양대 정책 때문에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지배 이념의 한 축으로 버텨온 공산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그에게는 노벨 평화상이란 영광과 쿠데타에 의한 실각이라는 아픔을 동시에 주었다.
러시아는 지금 개혁의 실패로 엄청난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자기 조국 러시아를 바라보는 고르비의 심정은 영광도 고통도 아닌 실패한 개혁에 대한 회한만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됨은 작금의 우리가 처한 현실이 주는 동병상련 때문이 아닐까. (1998년 8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