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살구나무 세한도/최길하
속절없이 무너지던 살구꽃 그늘 아래 가만히 내 손을 펴 숨찬 듯 쓰고 간 말이 아직도 잠들지 않고 날 흔들고 있단다. 살 무르던 그 때 그 시절 뿌리 내린 그 말이 4월이면 덩그렇게 구름 실어 놓더니 눈 쌓여 반 희고 반 검은 글을 이제 읽는다.
<창작노트> 벚꽃 살구꽃은 무너지듯 피고 진다. 그 꽃그늘 아래 내 손바닥을 펴고 써 준 말. 그 땐 아뜩하여 무슨 말인지 몰랐다. 물어볼 수도 없었다. 혜원 신윤복의 춘화첩에 이런 그림이 있다. 댓돌 위에는 한 쌍의 남녀 신발이 놓 여 있다. 여자신발은 얌전히 놓있고 남자신발은 무엇이 급했는지 흩어져 있다. 급하게 벗다보니 한 짝은 털듯이 벗은 것이다. 방안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문 창살 사이 창호지만 불그레하게 물들 여 놓았다. 후끈 열기가 느껴진다. 조선 춘화가 일본이나 중국 춘화와 다른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는 숨겨서 드러내는 방법을 쓴다. 그런데 그것이 더 침이 마르게 하는 것이다. 시도 여백으로 써야 한다. 넌즈시 귀띔만 해야한다. “눈 쌓여 반 희고 반 검은 서한을 이제 읽는다.” 살구나무 가지 위에 눈이 쌓이면 가지 밑부분은 눈이 쌓이지 못하니 화선지 위에 붓글씨를 쓴 것 같다. 꽃이 무너지듯 핀 그날 내 손을 펴서 써준 그 말, 그때는 아뜩하여 몰랐는데 몇 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살구나무는 검게 늙었다. 한겨울 눈이 덮이니 눈에 글씨가 드러난 것 같다. 몇 십년이 흐른 지금 그 때 그 아득한 말을 비로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세한 연후에야 속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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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의 시조를 감상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으니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넌즈시 귀뜀만 하는 여백의 시조는 언제쯤 쓰게 될런지 모르겠지만요ㅎ
세한도 그림에 까마귀가 없는것처럼,
숨겨서 드러내는방법...
깔끔한 세한도 한폭을 보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