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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설맥
천국에서 큰 자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는 자가 큰 사람이다)
마태복음 18:1-14절
성자의 소원
옛날 어떤 곳에 성자 한 분이 살았습니다. 그의 생활은 참으로 경건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천사들까지 이 성자의 삶에 매우 감동을 받았습니다. 천사들은 땅으로 내려와 겸손한 그 성자에게 은혜를 더 주려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 그대가 기도하기만 하면 무슨 병이든지 다 낫고 죽은 자라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성자는 천사의 제안을 듣더니 “감사합니다만 저는 그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하나님이 친히 하셔야지 감히 인간인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은혜를 사양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천사들은 다시 말합니다. “그럼 그대가 말만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여 새 사람 되게 하는 권세를 드리려는데 어떻습니까?”그러자 성자는 같은 대답으로 “저는 그 은혜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러시지요?” “그것은 성령님께서 하셔야 할 일이지 어찌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천사들이 그 성자에게 또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도대체 무슨 은혜를 원하십니까?” 성자가 대답합니다. “예, 한 가지 바라는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천사들은 성자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의논한 끝에 결정했습니다. 그 성자의 그림자가 비칠 때 그 그림자 안에 들어오는 모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고 모든 죄인들이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성자다운 고귀한 모습입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고 경험한 사람입니다.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 가운데 사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에서 큰 자
본문 1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마음으로 무척 기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나를 따라다니고, 나의 가르침을 받더니 생각의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성장한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 성장합니까? 인식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영적인 가치관으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제자들의 의식은 땅에서 누가 크냐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는데 천국에서는 누가 큰 사람인가에 대해서 궁금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180도로 바뀐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건을 앞두고 그들은 주님의 나라에서 좌의정, 우의정을 꿈꾸며 다투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천국에서 누가 크냐에 질문에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웁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3-4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합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
우리는 제자들의 질문에서 순서상 잘못이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천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한 생각보다는 누가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인식과 믿음이 변해서 자신들은 천국에 100% 들어갈 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능력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이 땅에서 이렇게 주의 이름으로 많은 업적을 쌓았으니 천국에서 우리의 등급은 몇 등급일까? A는 보장된 것 같고, A+, A+++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때 천국 커트라인도 통과하지 못하는 엄청난 실패를 경험할 수 있따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돌이킴과 낮춤
천국에서 큰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어떻게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 둘째,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돌이킴과 낮춤이 필요합니다. 돌이킴과 낮춤의 기준은 어린 아이입니다.
돌이킴이란 무엇입니까? 변하고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천국에 들어 갈 자는 끊임없이 변하고 바꾸어야 합니다. 낮춤은 무엇입니까? 영어로 humble입니다. 겸손이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입니다. 잘난 체하거나 아는 체하지 아니합니다.
내가 어른인데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될 수 있을까? 내가 어른인데 어린이처럼 단순하고 순박하게 살 수 있을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돌이킴과 낮춤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천국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자, 니고데모는 내가 늙었는데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고 날 수 있겠습니까? 인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내가 어린 아이처럼 돌이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낮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합니다. 낮춤은 레벨입니다. 어른이 내가 어린 아이의 레벨로 낮추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영접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놓고 말씀하는 이유는 어린 아이가 가진 특성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약하기 때문에 돌봄이 필요합니다. 부모가 있는 어린 아이든지, 부모가 없는 고아든지 그 어린 아이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약한 어린이 배경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5절에서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어린 아이처럼 돌이키고, 내가 어린 아이의 수준으로 낮추는 방법은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더 이상 약한 존재가 아니라 강한 하나님이 계시는 존경하고, 사랑하고, 대접해야 할 대상입니다. 외적으로 어린 아이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가복음 10:15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드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실족을 시키는 자와 실족을 당한 자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은 6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연자 맷돌을 매고 있는 주체가 누구냐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한 그 사람은 작은 자를 실족하게 했으니 그 책임으로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합니다. 맞습니까? 그러나 이 말이 아닙니다. 잘못 읽고 있습니다. ‘달려서’라는 단어와 ‘빠뜨려진다’는 단어는 문법적으로 3인칭 단수 수동입니다. 수동은 당하는 대상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자가 아니라 실족당한 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에서 그 목은 실족당하는 사람의 목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합니까? 어떤 경우든지 실족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실족의 엄중함을 경고합니다. 실족하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구원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잊게 됩니다. 한 영혼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실족으로 잃게 된다면, 실족으로 잃기 전에 차라리 그 사람을 연자 맷돌을 목에 걸게 해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5절에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실족과 화
어린 아이와 같은 작은 자, 예수를 믿는 자가 교회 때문에, 목사 때문에, 나 때문에 실족을 당해서 하나님을 떠나, 영혼을 잃어버린다면 이런 일은 주님의 입장에서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7-9절에서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이 세상에 있지만 실족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화가 있고,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잃어버린 세상에 화가 있고, 잃어버린 사람에게 화가 임합니다.
대접하는 일이 무조건 하나님의 응답이요 축복이라면, 실족은 무조건 화가 됩니다. 그래서 이런 실족을 예방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조치까지 하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네 손이나 발이 범죄하면 찍어 내 버리라고 말합니다. 눈이 범죄하면 빼어 내 버리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은 지옥가게 해놓고 너만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실족하게 한 손이나 발을 찍어내고, 눈을 뽑아낼 정도로 실족하게 하는 일에 대한 심각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10절에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합니다. 수호천사가 항상 하나님 앞에 보고하고 있는데, 작은 자라고 어린 아이라고 해서 무시하고, 멸시하고, 상처를 준다면 그 사람의 수호천사가 하나님께 보고를 하고 있으니 실족시키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실족 시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실족의 무풍 지대는 없습니다.
양 백마리 비유
예수님은 12-14절에서 양 백마리 비유를 합니다. 목자는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그 양을 찾아서 기뻐한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 비유와 그 강조점이 다릅니다. 이곳에서는 공동체는 떠난 양은 탕자처럼 자기 책임 하에 떠난 양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목자의 잘못보다는 양 자체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양은 누군가에 의해 실족당한 양입니다. 그래서 양의 목자는 실족당한 양을 찾으러 갔고, 찾아서 기뻐합니다. 14절을 보면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은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 한 영혼이라도 실족당하지 않는 것임을 말합니다.
다윗의 회개
다윗은 밧세바의 범죄로 많은 사람을 실족하게 했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 기도입니다. 그 내용 중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11-13절).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다시는 자신을 통해서 그 누구든지 실족 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실족시키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은혜를 나누고 싶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천국에서 큰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돌이키는 사람,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어떤 사람이든지 실족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사람입니까? 어떤 경우든지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는 사람입니다. 실족 시키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 안에는 실족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대림동 예일교회 이동섭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