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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표적(5)
제목 : 예수님의 존재 표현
성경 : 요 6:16~21
찬송 : 401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40811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요 6: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요 6: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요 6: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요 6: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요 6: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요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오병이어의 표적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에는 오병이어 사건 후에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만나를 먹이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분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4절을 보면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18:15절에서 모세도 “나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이다.”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 대망사상’은 신앙의 큰 뿌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같은 분, 엘리야와 같은 분, 다윗과 같은 분이 나타나서 나라를 회복하고 곤고함에서 건져줄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니 이 분이 분명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을 삼으려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들의 왕이 된다면 제일 먼저 해결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빵의 문제만큼은 확실하게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요즘 같으면 경제부총리 겸 재무부 장관으로 모셔서 경제를 확실하게 회생시켜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들의 의도를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셨습니다. 사실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서 떡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고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겠다고 아우성치던 사람들이 며칠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으며 믿었고 그 분의 능력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에는 몇 가지 함정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신앙의 함정
1)신앙의 정치화입니다.
신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선거철마다 교회와 연관 짓는 정당이 출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한 사람도 당선자를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정치를 신앙으로 하는 것은 좋은 것이나 신앙을 정치화하면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중세교회가 그래서 타락한 것입니다. 교회를 정치로 이용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로서 항상 서있어야 합니다. 여당도 야당도 신앙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 큰 함정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바로 그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2)신앙의 세속화입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그 믿는 목적을 물질의 번영에다 둔 것입니다. 예수 믿어 돈 벌고, 병고치고, 출세하고, 사업에 성공하는 것으로 세속화 현상으로 빠지는 신앙은 대단히 위험한 신앙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 세속화의 거대한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습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 거대한 쓰나미에 떠내려가고 말 것입니다.
3)신앙의 인간화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신앙과 인도주의를 혼동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불쌍한 사람을 돕는 구제 기관 정도 잘못생각해서 오늘날 교회가 무엇들 하느냐고 나무라기도 합니다. 교회란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돕고 장례식이나 하는 구제기관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화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도주의를 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정체성을 바로 해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붙들고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하는 것은 정치적, 세속적 측면에서 이용하려는 것이요, 신앙을 인간화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을 보시고 예수님은 산으로 홀로 들어가셔서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인간적으로 말하면 인기 절정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울 때 기도하고, 억울할 때 기도하고, 실패할 때 기도합니다. 그러나 인기 있고, 칭찬받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에도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요 6: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요 6: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제자들은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오시지 않자 먼저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떠났습니다.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의 항해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제자들만의 항해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그들만의 항해에 들떠서 오병이어의 표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계시지 않자 긴장이 풀어져 본성적인 생각이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제자들은 열심히 노를 저어 가버나움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환란이 닥쳐왔습니다.
√요 6: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여기‘큰’이라는 말은 “메가스”라는 말입니다. 요즘 인터넷 이용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 가운데 “메가패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굉장히 빠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폭탄을 투하하는데 “메가톤급”이다고 말합니다.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말들입니다. 그러므로 큰 바람은 보통 바람이 아니라 폭풍이나 태풍과 같은 그런 바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바람이 불면 집 채만한 풍랑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잔잔하던 갈릴리 호수에서 일어난 파도는 제자들의 뱃길을 가로막고 목숨을 위협했습니다.
마태복음 14:24절을 보면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뜻하지 않은 파도로 말미암아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항해 길에서도 뜻하지 않은 파도로 고난을 당하는 때가 많습니다. 어떤 분은 사람을 통해 고난을 당합니다. 또 어떤 분은 직장에서 파도를 만납니다. 어떤 분은 가정에 감당 못할 정도의 파도가 밀려옵니다. 어떤 이는 물질을 인하여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질병의 파도를 만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도는 누구에게나 닥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풍랑 없이 항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의지에 상관없이 풍랑이 찾아옵니다.
√풍랑이 일어난 이유
√첫째는 날이 저물었기 때문입니다.
16절과 17절을 보면 '날이 저물었고 이미 어두워졌다'고 했습니다. 그 날 낮 벳세다 들판에서 있었던 흥분도 환호도 날이 저물면서 시들해졌습니다.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던 군중들도 다 흩어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현장에 머물 필요도 남아 있어야 할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한마디로 축제는 끝나고 적막과 고요만 남게 된 것입니다.
날이 저물었다는 것을 인생 삶에 대비시켜 보십시다. 누구나 젊고 팔팔하던 청소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인생의 황혼기를 맞게 됩니다. 힘도 기력도 쇠하고 꿈도 이상도 없어집니다.
누구나 건강하고 왕성한 기개를 자랑하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건강과 기개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성공과 영광과 풍요의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역시 영원히 계속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저녁노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실패와 질병과 고통과 패배로 날이 저물었을 때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절망하고 낙담하고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조용히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밀레가 그린 '만종'이라는 그림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때는 저녁놀이 져오는 석양입니다. 곳은 불란서의 농촌 들녘입니다. 그때 교회의 저녁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종소리가 들리자 일손을 멈춘 부부가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립니다. 밀레의 만종은 미술적 가치보다 그 그림이 풍기고 있는 서정적이고 신앙적인 가치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때가 저물 수 있습니다. 그때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저녁이 아침으로, 석양이 새아침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을 해뜨기 전시간이라고 합니다. 해가 지면 아침이 오는 것은 자연의 순리입니다.
√둘째는 큰 풍랑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보면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니" 라고 했습니다. 갈릴리는 호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보통 호수보다는 크고 넓기 때문에 바다라 불렀습니다. 갈릴리는 호수이긴 하지만 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북쪽 산맥에서 형성되는 이상기류로 인해 수시로 돌풍이 몰아쳐 바다에서처럼 파도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날도 무서운 바람과 함께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현대 과학 문명도 자연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집도, 자동차도, 대형 트레일러도 휩쓸어 버리는 토네이도, 미친바람이 있습니다. 수만 명을 한꺼번에 삼키고 도시하나를 폐허로 만드는 지진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의 공격은 그런대로 피할 수도 있고 예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드는 풍랑은 막을 길도 없고 대책도 없습니다. 건강의 풍랑을 만난 사람, 경제적으로 광풍을 만난 사람, 회사에서 풍랑을 만난 사람, 그들이 무슨 재주를 부려서 풍랑을 피할 수 있습니까?
나폴레옹 힐은 말했습니다.
"숲 속에서 가장 튼튼하기로 소문난 떡갈나무는 폭풍으로부터 숨어있는 나무가 아니다. 폭풍과 비, 찌는 더위와 추위에 맞서 생존을 위해 빈터에 서 있는 나무이다."
세계 최고의 오페라 가수인 파바로티가 1975년 12월 22일 공연을 미치고 밀라노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그날따라 밀라노의 말펜시 공항은 짙은 안개로 항공기의 이착륙이 어려웠습니다. 그가 탄 비행기가 짙은 안개를 뚫고 착륙을 시도하다가 활주로를 벗어나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잃고 있던 그가 깨어나 보니 비행기 안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가 생사의 갈림길이로구나, 살아있다는 것은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억세고 무서운 풍랑 속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토록 험하고 모진 시련 속에서지만 그것을 통과하고 오늘 여기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는 예수님 없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보면 예수는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고 했고, 17절을 보면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위기의 결정적 원인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을 느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부재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홀로된 여인을 과부라고 합니다. 홀로된 남자를 홀아비라고 합니다. 홀로된 아이를 고아라고 합니다. 홀로 있는 것을 고독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없는 사람, 예수님 잃어버린 사람, 예수님 떠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곧 위기의 사람입니다. 영적 고아입니다. 예수님을 떠나 홀로 있으면 누구라도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 것인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성공도 다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버리면 그것들은 위기의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제패의 꿈을 안고 마케도니아를 출발할 때 그는 자기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보물들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신하가 물었습니다.
"폐하 그런 식으로 값진 보물들을 나누어주신다면 얼마 못가 폐하의 보물창고가 텅 비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대왕은 "나는 모든 보물을 다 나누어 준 것이 아니다. 가장 값진 보물은 손에 쥐고 있노라" "폐하 그 비장의 보물은 무엇이옵니까?" "그것은 희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 희망 때문에 오늘 살아있고 그 희망 때문에 승리하게 될 것이다."
위기를 만난 사람들이 붙잡아야 할 보물은 무엇입니까? 알렉산더처럼 막연한 희망을 붙잡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예수를 찾고 붙잡아야 합니다.
√승리의 비결
√1)계속해서 노를 저으라!
특별히 역경의 밤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권면하고 싶은 말은 이 제자들의 자세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제자들은 역경의 밤을 헤쳐 나갈 때 두려웠지만 계속해서 노를 저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계속해서 노를 저었습니다.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보신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과 같은 병행구절이 마가복음 6:48절에 있습니다.
막 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피곤하고 지친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크게 쓰신 종들의 특징을 보면 그들에게 괴로이 노 젓는 과정을 통과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가끔 배를 타고 건너다녔기 때문에 노 젓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았습니다. 바람이 불면 아무리 힘써 저어도 자기가 원하는 데로 가지 않고 엉뚱한 데로 떠내려가고 맙니다. 그럴 때 얼마나 답답하고 피곤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괴로이 노 젓는 과정을 통과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에게 큰 바람이 불어와 풍랑이 몰아치고 있습니까? 지치셨습니까? 괴롭습니까? 앞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계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로이 노 젓기를 계속하십시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위하여 폭풍을 뚫고 찾아오십니다.
√2)예수님을 영접하라!
요 6: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요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폭풍을 만나 고통당하며 괴로이 노 젓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얼마나 급하셨던지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시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의 자비로운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존재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 영어로 번역하면 ‘I AM’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WHO I AM)(출 3:14)라고 하신 말씀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라는 단 한마디로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들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기뻐서’(델로)라는 말은 ‘바라다, 원하다, 좋아하다, 기뻐하다’라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였던 것은 그토록 예수님을 간절히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였습니다. 자기네끼리만 모여 있던 그 배에 예수를 모신 것입니다. 그 시간부터 바람도 풍랑도 위기도 절망도 사라졌고, 가려던 땅에 갈 수 있었습니다.
가려던 땅!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는 어딥니까? 지금 내가 바라고 정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그 목적이 성취되지 못한 채 좌초되고 위기를 겪어야 합니까?
제자들이 겪고 있던 위기는 그들이 타고 있던 배로 주님이 돌아오셨을 때 끝났습니다. 이것은 위기를 해결하고 문제를 푸는 열쇠가 나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놀만 빈센 필은 말했습니다.
"문제를 붙잡은 당신의 손을 하나님의 손 안에 넣으시오. 그리하면 당신이 붙잡은 문제가 하나님의 문제가 될 것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경제위기, 정치위기, 사회위기, 도덕적 위기, 가정의 위기, 질병의 위기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길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길이 있습니다. 마지막 종점입니까? 아닙니다.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시대의 절박한 위기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괴로이 노 젓는 제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풍랑을 잠재우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분이 해결책입니다. 그분만 모시면 소원의 항구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의 파도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른 채 믿음의 유익을 잃어버리고 이런저런 문제로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우리 삶의 한 가운데 영접할 때 우리는 두려움 없이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모십시다. 주님을 부릅시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가려던 땅에 우리 함께 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