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심리학자인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 5단계설을 발표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낮은 단계인 생리적 욕구로부터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 존경의 욕구, 그리고 가장 높은 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로써 하위 단계의 욕구가 실현이 되면 상위 단계의 욕구를 지향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리적 욕구로부터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를 지향한다. 이러한 욕구는 나이가 많든 적든, 잘 살든 못 살든, 지식인이든 아니든 누구가 갖게 되는 공통적인 욕구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배고프면 먹여야 하고, 보다 안전한 지역에서 살고 싶어 하며, 특정한 집단에 소속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존경의 욕구는 소위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에게는 쉽게 나오기 어려운 욕구다. 그저 먹기 살기에 바쁘고 때론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존경은 고사하고 남에게 주눅이 들어서 지내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경의 욕구를 가진 사람은 사회적으로나 지식적으로 또는 재정적으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교회는 다른 사회 집단에 비교하여 특별한 공동체이기에 매슬로의 욕구 단계의 적용이 다르게 나타나곤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존경의 욕구다. 앞서 언급한 대로 존경의 욕구는 사회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거나 자기만족의 수준에 있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인데, 교회에서는 사회에서 비록 존경받을 위치가 아니라 하더라도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구비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회의 여느 공동체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재산은 많은데, 사회에서 부자라고 인정을 받는 것보다는 다른 것으로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그것을 쉽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교회에 내재되어 있는 직분이라는 장치다. 직분은 분명히 계급이 아님에도 교회 안에서는 계급처럼 여겨지는 것은 목회자가 그것을 이용하기도 하고, 또한 성도들이 차별화된 것을 통하여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것이 서로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부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그 직업에서 출세한 사람은 극소수이기에 대부분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세상에서 명예를 얻은 사람도, 교회 안에서 또 다른 명예를 얻으려는 욕구는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은 교회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계급(물론 부정하겠지만)이 보이지 않는 차별화를 낳고, 이것은 교회에 속한 자들에게 하나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공동체에는 계급과 직급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상위 계급이나 직급으로 올라가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문제는 군대처럼 계급이 세분화되면 위계질서가 확실해지지만 반대로 수동적이며 피동적인 조직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즘 글로벌 기업이나 첨단 기업의 경우 직급의 수를 줄이고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수록 상명하복이라는 경직화된 조직에서 벗어나 상호 소통을 중시하는 열린 조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삼성생명의 경우 작년 1월부터 주임·선임·책임·수석 등의 명칭을 없애고 전 직원 간 호칭을 '프로'로 통일하였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경우 이미 2017년부터 사원~부장까지 7단계 직급을 4단계로 바꾸고 직원 상호 간에도 000님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처럼 사회도 직급을 줄이거나 없애고 있는데, 교회는 여전히 직분이라는 이름으로 보이지 않는 직급을 유지하고 있다. 교단마다 차이가 있지만, 교인·서리집사·집사·안수집사·장로·전도사(강도사)·부목사·목사의 직급은 사회보다도 더 세밀하게 나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교회는 사회처럼 지시나 명령에 따르는 수직적인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완장'이 그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윤흥길의 소설을 영화화한 '완장'은 시대를 넘어 여전히 인간에게 존재하는 권력욕(인정, 존경의 욕구)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땅투기로 졸부가 된 최 사장이라는 자는 저수지 사용권을 얻어 양어장을 만들고서는 임종술이라는 한량에게 저수지 감시를 맡긴다. 감시원 완장을 두른 주인공은 안하무인으로 마을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통해 인간을 억압하려는 권력욕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완장을 찬 모습은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의 장면을 지금도 떠오르게 한다.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모습이었든지 보는 내내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모습이 교회 안에서도 벌어진다면 어떻겠는가?
물론 교회 안에는 '완장'을 찬 사람은 없지만, 실상 교회의 직분자들의 태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영화 속의 '완장'의 주인공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다투는 모습을 꼴불견 중에 꼴불견이다. 목사와 장로가 보이지 않는 주도권을 행사하고 심지어 목사를 쫓아내고, 반면에 목사가 주도권을 쥔 교회는 직분 수여를 미끼로 성도의 주머니를 털곤 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서로의 암묵적 합의와 서로의 욕구가 일치되기에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실종된 지 오래다.
교회는 세상을 탓하기 전에 먼저 교회 안에 있는 권위의식부터 없애야 한다. 사회 집단도 직급을 최소화하는 판인데 교회가 사회 집단보다 더 많은 직급을 가져서야 되겠는가? 장로교와 감리교에서야 인정하지 않겠지만 감독과 목사와 장로는 하나의 직제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평신도와 목회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모자를 바꿔 썼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교회에 필요한 직분은 목사와 집사 두 직분이면 충분하다. 감독은 역할이기에 당회장처럼 목사 중에서 선출직으로 임명하면 되는 것이지 다른 이름으로 감투를 씌우고 여러 교회를 통제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교회의 자유를 훼손하는 일이다. 장로는 구약시대의 장로(원로) 제도에서 나온 것으로 시대적으로 의미가 없다. 장로교에서 말하는 치리 장로와 강도와 치리를 겸한 목사로 구분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호칭했고 데살로니가서와 빌레몬서에서는 이름만 언급했다. 즉 고린도교회처럼 사도의 권위를 나타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사도를 호칭했지만, 동역자로서의 친근한 사역을 중시했던 데살로니가 교회 등에서는 다른 동역자들과 함께 이름만 언급을 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종(로마서, 빌립보서, 야고보서),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도(고린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서, 디도서, 베드로서), 장로(베르도서, 요한2서), 무 호칭(데살로니가서, 빌레몬서)
권사는 한국 교회에만 있는 것으로, 평신도는 남자나 여자나 집사로 통일하면 된다. 안수 집사라는 것은 직분을 여러 개로 나누려는 의도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집사 자체가 직분이라는 것은 안수를 해서 임명하는 것이기에 집사라는 직분 자체가 안수집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도 안수목사로 해야 할 것이다.
서리 집사는 더더욱 필요 없는 직분이다. 왜 직분이 없으면, 소위 감투가 없으면 일하기가 어려운가? 부르기가 마땅하지 않아서인가? 평신도 직분자는 '집사' 하나로 통일하고, 나머지는 형제, 자매로 부르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목사와 집사는 교회의 일꾼이다. 그렇기에 섬길 수 있는 역량을 가져야 하고 아울러 겸손한 믿음의 소유자여야 한다. 하는 일이 일꾼인데 왜 군림하려고 하는가? 결국 목회자나 평신도나 교회를 사회에서 얻지 못한 인정의 욕구를 채우려는 장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겸허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자랑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교회는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이고 주님을 높이는 곳이다. 교회에서 주님이 주인 되심을 성도들이 쉽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완장을 찬 사람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일꾼들만 보여야 한다. 그래야 성도들은 일꾼을 부리는 분이 누구신지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일꾼들이 완장을 차고 주인 노릇을 하기에 예수님을 가리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자랑하는 교회만이 진정으로 주님이 주인 되시는 몸 된 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교회의 몸을 불릴 때가 아니라 교회의 완장을 제거하고 직분의 다이어트를 통해서 주님이 드러나시게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