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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기가수 지중해 원문보기 글쓴이: 그도세상김용호
이현옥 시 모음 8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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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 끝
이현옥
내가 전부라던 그를 보냈습니다
나 때문에 살맛 난다던 그를 보냈습니다
함께 마시던 소주 한잔 달디달던
싸한 별빛이 너무 좋았던
가로등 불빛에 비친 눈발이 흰나비 떼 같다던
나와 함께라면 행복하다던
우리가 헤어졌던 긴 시간들이
다시 만남을 예고했듯이 다시 만난 행복의 시간이
헤어짐을 예고하고 있었다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지금의 거리의 쥐똥나무 찬바람이 걸려 있고
흐린 하늘에 낮달이 창백한 그의 얼굴로 걸려
가슴 메어지는 눈물을 솟게 합니다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데
내 곁엔 그가 없습니다
사랑이란 불꽃이 사그러진 가슴이 너무 춥습니다
그를 보내고 황량한 벌판에 나만 혼자 남았습니다
그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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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갈대
이현옥
몸부림이라고
몸부림이라고
너를 향한 약한 몸부림이라고
낯빛이 하얗도록
백발이 되어 흩어 지도록
끝나지 않는 몸부림이라고
오직 하나
너를 향한 가냘픈 몸부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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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네게
이현옥
나는 네게 물이고 싶다
마른 가슴 구석 구석을 적시고
그리고도 남는다면
네 마음 한가운데 담겨지도록
나는 네게 술이고 싶다
꽃술에 취하고
눈동자에 취하고
밀어의 술잔에 담겨
네 몸 깊이 퍼지도록
나는 네게 불이고 싶다
세월의 상처
그리움의 찌꺼기 훨훨 태우고
한 줌 재로 남아
내게 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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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들꽃
이현옥
너무 작습니다
너무 아픕니다
너무 외롭습니다
너무 슬픕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꽃을 보고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고개르르 들어 하늘을 봅니다
폭포처럼 터지는 눈물
메마른 당에 피어 있는
작은 들꽃 웃음
만나기 바람니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나 그대를 사랑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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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랑
이현옥
눈을 뜨면 가슴이 뻐개지는
고통을 느낍니다
아무런 그림도 그리지 않습니다
커다란 통 유리 안에 갇힌
슬픈 노라 입니다
동그란 원이 조금씩 무너지면서
그저 눈을 감고 있습니다
눈을 감아야 보이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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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운명
이현옥
바람에 허리 꺾여진
은사시나무
산등성 잡풀들과 누웠어도
눈부신 그대
무심히 지나다 눈빛 마주쳐
돌아본 은빛 입술
어디즘에서
내 마음의 고통 꺾어질 것인가
시간 사이마다 가득 찬
비명들이 달려들어
비로소 꺾어진 은사시나무처럼
눕고 싶었다
누워서
바람을 잡고
예전 그 사람
어디서 나처럼 누웠는지
물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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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파도
이현옥
안겨 부서지리라
세월의 무게를 털고
목에건 주홍 스카프
온 몸에 달빛 슬퍼 울부짖던 밤
하얗게 마르던 슬픔
수평선까지 차 오르면
달려와 부서 지리라
살다 보면
잊힐 날 있겠거니 하다가도
밤마다 무섭게 일어서는
내 몸살 근처
이젠 푸른 바다로 뜬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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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슴 데이지 않게
이현옥
하루 종일
그대 생각으로
촘촘히 들어찬 머릿속에
꽃이 피었다.
연이아!
건널 수 없는 강이라면
그냥 물처럼 흐르자
그리움도 씻어내고
보고픔도 씻어내자
불화로 들여놓고
가슴 데이지 않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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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가을이기 때문에
이현옥
그대였군요
알싸한 들국화
안개 속에 피어나듯
갑갑하게 그리운
통신 두절 된 첩첩한 날들 속에
그래도 퍼져나던 한줄기 향기가…
돌아와
그대 앞에서
투정하듯 내 던진 햇살 눈이 부셔
가만히 눈감고 그대를 떠올립니다.
가을!
제 살 깎아 내려준 들판
조금씩 비어가며
텅 빈 가슴에 들어차던 바람
목이 말라 물이 들던 단풍잎 애잔한 눈빛같이
그리움에 목말라 타 내리던 늑골
부르지도 못하고
그 이름 부르지도 못하고
가을 속을 걷습니다
그냥
그대가
내 곁에 있다고 믿으며…
가을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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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겨울나무
이현옥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헤프게 웃음 쏟아내듯
붉은 양수 쏟아내더니
두터운 살비늘까지 다 떼어내 발밑에 묻더니
속이 텅 빈 피리만 불고 있을 줄
한때는 생명 품었던 둥지
쩌렁쩌렁 목청 돋우던 푸른 시절
전기톱날 같이 매서운 바람 스쳐
소금덩어리만 남은 바다에서 햇살 건지며
폐허로 남은 시계 바늘만 맞추고 있을지 몰라
심장만 살아있는 채로
몸뚱이는 냉동고에 갇혀 지독한 에틸렌 속에서
살갗 터진 손등을 던져
슬픔의 강 깁고 있을지 몰라
어머니는
혈관 주사를 맞으며
혈관속의 통증을 쏟아내고
싱싱한 푸른 나무를
가슴에 심는다
도드라지지 않는 혈관을 찾느라
수 십 번씩 찔려야 하는 팔목대신
줄기 푸른 나무 들이대고 싶어
입 안 가득 독한 약 냄새 퍼지면
눈을 감고 숲으로 간다
동맥을 깨워들고 살아있는 나를 삼는다
힘찬 내달림을 하는 회복의 숲이
푸르게 웃고 있다
응고 된 시간을 풀어 약을 섞는다
숲,
내가 또 하나의 숲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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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백
이현옥
간절하게 그리울 때 있다
형상도 없는 그리움 조각이지만
흩어진 퍼줄처럼
맞춰보고 싶은 때 있다
눈빛조차도
햇살에 부셔
뾰얗던 유년의 기억 너머에 출렁이는
바다 같은
넓은 한 폭의 화첩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아직도 설렘의 자투리로 남아
내 가슴에 꿈틀대고 있다
이렇게 많이 시간이 흐를 줄 모르고
그때 하지 못하고 접어두었던 고백
흑백사진이 되어 다시 돌아와
내 입 속에 맴돈다
그 때 했어야 했다
용기조차도 고개 들지 못하는 나이가 되어
되돌아 본 길 끝에
난 아직도 서 있고
다시 불붙이고 싶은
스물 두 살 나이로 돌아가
첫 페이지를 열고 싶다
그대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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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고백할게요
이현옥
고백할게요
그대를 사랑하게 해줘서 고마워요
또 고백할게요
나를 사랑해줘서 감사해요
또 말하고 싶어요
그대 사랑해서 미안해요
마지막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
그대 사랑하는 거 용서해요
그대 사랑하는 거
용서
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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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대에게 가는 길
이현옥
그대에게 가는 길
너무 멀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끔 바람도 불었으면 합니다.
종일토록 나를 기다렸으면 합니다
그리고 반갑게 달려 나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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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대의 어깨
이현옥
그대의 어깨 빌려줄 수 있나요?
함께 바라보고 싶은 서녘 하늘
우리 천.천.히
사랑을 시작했나요?
맑은 별 하나 네 별이라고
서녘 하늘 바라보라던 낮은 목소리
바람처럼 맴돌면
나는 그대의 어깨에 기대에 기대고 싶어져요
너무 외롭지 않았으면 해요
내 볼에 스치던 입맞춤
가을바람처럼 지나가지만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아
어깨를 빌리고 싶은 그대
내게 단 하나의 사람 이였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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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다림
이현옥
그래야 할 것 같아
이제는
마음을 열어
그대를 기다리는 것도
행복한 일이라고
서로 마주보는 사랑이 아니라
같은 생각
같을 곳을 바라보는
서늘한 눈빛을
기다리는 일이
고되고 힘들다지만
기다릴 사람 있다는 것
내게 올 사람 있다는 것
나를 품은 사람 있다는 것
가을 같은 등을 가진 사람 있다는 것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
내게 단 한 통의 편지가 되어 줄 사람
그 사람이 그대라는 것
그것 하나로도
아릿한 통증
쓰다듬을 수 있다고…
그래야 할 것 같아
이제는
아프게 기다리지 말고
그리움으로 기다리자고…
약속처럼 내게 올 날
그 날은 오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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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기억 한 장
이현옥
언젠가 그 겨울
지리산 노고단 아래
골 깊은 계곡 속
그대가 뿌려놓은 精液(정액)같은 안개 바다
온몸을 휘감던 오르가즘
그 날부터 예고된 그대와의 인연
흐르고 흘러
진주 남강
달개비 꽃 풀어 물들인 강변에
유년의 기억을 묻은 핏줄
비단 모래 속으로 스며들었네
숨막히던 숲 속을 헤치며
지리산 한 마리 노루
푸른 군복을 입은 소년 같은 힘찬 산맥
순한 눈망울 찾던
기억 한 장 들고
그대를 안고
풀어지지 않게 그대를 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처럼
마음은 이미 물에 던지고
여기까지 닿았네
비단 강 흐르는 여기
밤새 뒤척여 남겨놓은
별빛하나
그대 정수리에 내려앉아
내 뒷모습 오래도록 바라보았을
눈빛을 찾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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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길
이현옥
밤길 길 알 듯이
그대에게로 가는 길
알지 못해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몸이 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가는 것이니...
몸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마음 먼저 보냅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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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나이테
이현옥
날카로운 톱날이 건너간 자리
둥근 곡선 시를 쓰고 있다
벼락 천둥 소나기 쏟는 여름 지나고 나야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나야
단단히 시간을 끌어안고
새겨두는 넉넉한 웃음
내 몸 어딘가도
고통의 시간 이겨 낸
환한 웃음 수 천송이 피었으면 좋겠다
살아 낸 시간만큼
둥근 시 써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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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낙엽 비 내린다
이현옥
그대에게로 가는 마음
이미 쏘아버린 화살
심장 안에 그려 놓은 내 몫의 과녁에
꽂히기를
침묵도
가을비처럼
소중한 걸 알아
말하지 않아도
마음 앓고 있는지 알아
얼마만큼 세월이 흘러야
강물이 될까
연인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적시던 노란 은행잎 비 쏟아지던 창밖
저 먼 하늘을 보며
그 아래서 나를 기다리는 그대를
생각하면 가슴 저리는 데
가지 못하는 마음도 젖고
기다리는 마음도 젖는
가을을 배웅하고 돌아서며
뜨거움을 삼킨다.
또 낙엽 비 내린다
연인아
寒氣(한기) 파고드는 가슴에 새겨진
보고 싶다는 말
그냥 삼킨다.
그대가 찾아와야 할 그 길로
가을이 간다
가을이 간다
비단 노을
불길로 타오르던 절정
느낌을 남겨둔 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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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내 마음을 꺼내 줄 사람
이현옥
13층 하늘에 매달려
외줄 타기 시간을 보냅니다.
창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불혹의 근을 던지고 싶습니다.
'나 유혹 받을래'
막걸리에 설탕을 타서 마시던 느낌
달콤하고 가슴 한 구석에 뜨거워지던
관념을 벗어 던지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몸을 주자고
틀 속에 갇힌 마음을 꺼내
허공으로 날려 주자고
그래서 만약 민들레 홀씨처럼
척박한 가슴에라도 떨어지면
다시 시작해 보자고
창 밖을 보지만
종이비행기조차 되지 못하는
내 마음을 다시 접어
관념의 틀 속에
넣어 두고
그대를 기다립니다.
내 마음을 꺼내 줄 사람
그대뿐이라면……
빗줄기 소리만큼 커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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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내 심장 한가운데
이현옥
심장을 흝고 지나가는 바람줄기
그대의 얼굴을 여기서 보았네
상처를 함부로 내색하지 않고
삭히고 삭혀 온
바다에 그대가 있었네
숨쉬고 있었네, 살아있었네
고요하면서 고요하지 않고
울고 있으면서도 울지 않던
부드러운 손길로 이마를 더듬으며
말없이 전하던 불길
가만히 내 손을 잡고
산길 오르던
바위 같은 등줄기
거기 있었네
참아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기다려주고
내 심장 한가운데
그 속에 가만히 들어가 있는 사람
아늑한 눈빛으로
앞서서 걷는 사람
뒤돌아보며
서늘한 한기를 걷어주는 사람
"당신과 함께여서 참 좋다"
그 한마디로
전부를 주는 사람
"당신 눈 속에 다 담아가"
그렁이는 눈빛으로
애절하게 날 바라보는 사람
노래 한 줄기 부르며
산바람 같은 박하향
내 폐 속에 가득 넣어주는 사람
내게 있네
거기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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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눈물 꽃 사랑 매화
이현옥
길을 나서던 아침엔 비와 함께 가는
눈발이 섞여 눈앞을 흐리게 했다.
매화꽃잎 같은 그녀가 있는 곳..
커다란 눈망울에 그리움 담고 유리창 너머를
기웃이며 그녀가 기다리는 곳.
화목난로가 활활 그녀 가슴처럼 타오르고
그 온기가 가득한 사랑을 끌어안고 고백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가 있는곳..
긴 겨울 눈 쌓인 속에 철골 같은 등걸 속에
이리도 고운 꽃송이 들어있으리라
누가 기대했을까?
그가 뿜어져 나오는 사랑꽃잎을 품고
그 겨울을 견디어 냈을 고통을 알 수 있을까?
그녀는 휠체어 앉아 눈망울 매화처럼
피어 나를 맞았다.
"선생님...."
그러고는 눈물이 가득하다.
그냥 가슴에 그녀를 안았다...
팔딱이는 심장소리가 내게 전해져왔다.
그리웠구나
사람이 그리웠구나.
한적한 그곳에서 겨울을 견디며
사람을 기다렸구나.
그녀의 머리칼을 올려주며
등을 가만히 쓸어 내렸다.
사랑해서 아픈 사람..사랑을 전하지
못해서 아픈 사람
그래서 그녀는 사랑을 앓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 두고 사랑한다 전하지
못하고 그녀는 눈망울에 가득 매화 눈물 꽃만
담아놓고 있다.
"제 몸이 이런데...제가 사랑한다 하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도 전해보지..."
하지만 그녀를 안다.
그냥 그 사랑을 앓다 삭여가고 있음을 안다.
난로 속의 사그라지는 불씨처럼
그녀도 그녀가슴을 재우고 있다.
그러며 그 사랑을 詩로 쏟아놓고 있다.
"있지..매화도 그런 아픔을 견뎠을거야...
그 눈보라 속에서
온기 없는 세상에 꽃잎을 내놓는 아픔..
곱고 여린 꽃잎을 꽃샘바람 속에 내놓으며
가장 먼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그렇게 고고하게 피어나는 게 아닐까.
절망하지마..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면 어느 바람결에라도
그 가슴을 흔들겠지.
그래서 자기의 마음을 알게 되겠지.
아픔 없이 오는 사랑이 어디있을까..
아픔먼저 겪으면 그 사랑 아름답게
이루어질거야"
유리창 밖으로 사선을 그으며 내리치는 눈발
화살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
그 화살 내 가슴에도 그녀 가슴에도 아프게 박혀
핏줄을 터지게 할 것 같은 날.
그녀에게 다녀왔다.
다시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고 돌아왔다.
아픈 사랑은 하지 말자.
너무 많이 아픈 사랑은 하지 말자.
사랑하는 마음을 곱게 포장해 속달로
배달하고 싶은 우수 지난 봄.
내가 보내고 싶은 수취인에게로
꼭 배달되기를 바라면서....
눈물 꽃 매화 꽃망울 터뜨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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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능소화
이현옥
드거운 7월
비로소 피어나는
그대 향한 꽃
눈멀도록 그리워 하다가
송이 째 마음 바쳐 떨어지는 꽃
가장 아름다울 때
온전히 그대에게 주고 싶어
지는 순간까지 모습 흩트리지 않는
그대 오는 길목
담장에서
목 늘여 기다리다
불혹의 강을 뒤돌아보며 건너는 꽃
어둠조차
묻을 수 없는
그대를 향한 마음이라면
그대 가슴에도
그리움이 쌓이려나
고독에 겨운
짙은 어둠 속에서도
불꽃을 피워 그리움을 사르는
담벽에 기대어
목놓아 기다리는 꽃
그대가 내게 오는 날 ……
☆★☆★☆★☆★☆★☆★☆★☆★☆★☆★☆★☆★
《24》
당신은
이현옥
아침에 눈을 뜨면 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싶은 사람
뜨거운 아침밥을 지어먹고 싶은 사람
출근하는 뒤에 서서 손 흔들고 싶은 사람
저녁 해 기울 때 발자국 소리
귀 기울이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인가요?
당신은 ….
쇼원도우에 있는 멋진 바지 입히고 싶은 사람
함게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깎이고 싶은 사람
탐스런 포도 하나씩 따서 먹이고 싶은 사람
뭐 할까 궁금해 전화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인가요?
당신은 ….
아플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배고플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외로울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심심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그런 사람인가요?
당신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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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덫
이현옥
목숨이야 한낱 바람인 것을
사랑하는 일
천상의 빛
그대를 사랑하는 죄가
목숨과 바뀌어야 한대도
사랑은 버릴 수 없는 지독한 덫
운명의 사랑
알 수 없는 길을 떠나게 하지만
그대 품에 …
가슴 시린 사라 던질 수 있다면
비에 젖은 낮은 목소리 속에
예감되어진 느낌
연인아!
너를 부른다
대숲 소리처럼
휘날리는 눈발처럼
뜨겁고 날카로운 비수 같은
키스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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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동행
이현옥
잔가시 가만히 헤쳐
도톰한 살 떼어 나에게 주고
마른 뼈 발라 당신이 먹고
허절한 쓰레기 봉지
냄새까지 묶어 버리는 일
모두 당신이 하고
열뜬 아내의 머리 가만히 쓸며
죽 수저를 넣어주던 애잔한 그 힘
가끔 넘어지고
가끔 슬픈 길
불끈 일어나 다시 걷게 하던 파란 웃음
어느새 귀밑머리에
뽑아도 뽑아도 쌓이는 잔설
아아
내 머리칼로 당신의 신발을 삼아
아름다운 동행 그대와 함게라면
나 쓸쓸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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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마이산
이현옥
내 사랑 그러했듯이
돌 하나 들어
흔들리지 않게 쌓아 나가는 것
태초의 목소리까지 들어
찰랑한 석간옥수 고이고
시누대 서걱이는 품안
눈물로 쌓은 돌탑
거친 바람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오직 하늘 향한 사랑이어라
내 사랑 그러했듯이
둘 하나 하나
견고히 쌓아 나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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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마이산 연가
이현옥
우뚝 선 두 봉우리 사랑하는 그대와 나
쌍돛대도 용각봉도 계절마다 바뀌는데
은수사 북소리도 은은하게 퍼지고
천지 탑 하늘을 향해
사랑 사랑 끝이 없는 내 사랑
이제는 돌아가서 당신 품에 안기리라
마이산 내 사랑아
화암 굴 마루턱에 돌탑 쌓은 사랑이여
마이봉도 용출산도 계절마다 바뀌는데
탑사 처마 끝에 들려오는 풍경소리
어머님이 부르는 소리
사랑 사랑 끝이 없는 내 사랑
이제는 돌아가서 당신 품에 안기리라
마이산 내 사랑아
☆★☆★☆★☆★☆★☆★☆★☆★☆★☆★☆★☆★
《29》
머위 꽃
이현옥
집은 비어있었다
쿨럭이는 기침 소리조차 나지 않는 집을 채운 건
발목까지 내린 눈이었다
눈이 덮어버린 빈집은 고요히 잠이 들고
저 홀로 외출 보일러만 돌아가며 간간 귀뚜라미 소리를 냈다.
겨울지나 봄이 되자 주인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봄은 분주해졌다
칙칙한 겨울을 걷어내는 손길이 바빠졌다
돌나물은 부지런히 줄기를 뻗고
하얀 민들레 그 파란 잎을 마당에 내보냈다
환영의 플랭카드처럼 냉이 달래 봄 향기를 걸어놓고
졸던 고양이 한 마리 봄 햇살에 눈부셔 했다
겨우내 아무런 발자국 소리도 듣지 못한
뒤울 안에도 소식이 들려왔다
쌉쌀한 머위 보랏빛 물을 들이고
힘껏 꽃을 밀어 올렸다
달콤함보다는 쌉쌀한 인생을 살아온 주인을 위로하는
꽃송이 들고
머위는 손바닥을 마주쳤다
주인이 돌아오자
봄은 박수를 쳤다
☆★☆★☆★☆★☆★☆★☆★☆★☆★☆★☆★☆★
《30》
목욕탕에서
錦沙 이현옥
더 이상 꽃피지 않을 완경의 몸을
슬프지 않게 닦아낸다
몸을 빠져나가 있는 영혼을 불러들여
김이나는 탕속에 담가놓고
볼 발갛게
노래를 부른다
갈비 뼈 사이마다 음계 다른 현들이
각자 물을 튕기며 문자들을 짜깁기한다
잠들었던 언어들이 일어서는 시간
풍선처럼 팽팽해지는 욕망을 풀어
거품을 낸다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때처럼
이제 밀어 낼 일이다
죽을 것 같던 사랑도 때론
늙어가는 길
전신 거울에 비춰진 굴곡진 몸통에
꽃 떨어진 자국
아직 남아
다시는 볼 수 없는 꽃을 기억하고 있는
나이 줄 옹이로 박힌
목욕탕 밖은
환한 꽃 세상.
☆★☆★☆★☆★☆★☆★☆★☆★☆★☆★☆★☆★
《31》
몹쓸 밥
이현옥
-수항리연가 3
비닐팩에 담겨 냉동실에서 꽁꽁 언 국덩이
가슴까지 시린 아버지를 슬프게 한다
수전증으로 떨리는 손
목숨까지 슬픈
언 국덩이를 녹여
밥을 넘겨야 하는 쓸쓸한 아침
애잔하게 바라보던 아들의 눈을 기억해내며
목이 메인다
아버지
어찌 그리 작아지셨는지
산처럼 너무 커서 너무 무서워서
아버지만 나타나도 숨죽이던 어린시절 있었는데
담장마저 허물어져가는 빈 울안에
잎 떨군 밥풀꽃나무
그래
밥풀꽃처럼 환하던 아내 있었지
다닥다닥 정을 쏟은 그 아내
도둑맞은 것처럼 허망하게 잃고
비틀거리는 몸 끌며
밥솥을 연다
아내 밥을 잃고
몹쓸 며느리가 얼려놓은 국
쓰게 마신다
결코, 살기위해서가 아니고
자식들에게 폐되지 않기 위해
사력다해
밥을 삼키고.
☆★☆★☆★☆★☆★☆★☆★☆★☆★☆★☆★☆★
《32》
못 자국
이현옥
상처를 주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내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아
뜨거운 튀밥기계처럼
막 터질 것 같아
참을 수 없어
그대 향해 내 던진 마음
바스락이게 마른 가슴이란 걸 알면서도
오히려 밟고 말았네요.
산산이 조각 나
재로 흩어질 수도 있는 얇은 마음을
다치게 그렇게 두었네요.
내 마음 알죠
마음과 말이 다르다는 것
그냥 그대니까 던져 본 거란 걸
내 마음 편하냐구요?
아니라니가요.
예리한 면도날에 그인 상처
그 위에 소금 뿌린 것처럼 쓰라려요.
알잖아요.
내 맘 약한 것
그냥 가슴이 터져 내장이 쏟아져 나올까봐
40여년 목으로 넘겼던
말들이 썩어질까 봐
그대 가슴에 못을 박았다는 걸
뺄 수도 없는
빼내도 자국이 남을 화살을 쏘았다는 걸∼
미안해요
미안해요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용서해요
용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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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무심한 사랑
이현옥
그대만 바라보고 살 수 있다면…
그대를 바라보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면…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견딜 수 있습니다.
사랑을 잃어 본 사람은 압니다.
무심한 사랑을 기다려 본 사람은 압니다.
기다림이란 얼마나 아픈 하늘을
바라보는 일인지
무정한 기다림이란
얼마나 가슴을 흝어 내리는 일인지……
수신음 울려도 받지 않는 전화기처럼
절벽같은 외로움을 느끼며
그래도 사랑이라고 믿어보며
다시 기억해보는 처음처럼
아버지는 그랬습니다.
사랑을 잃은 아픔 얼마나 큰 지
헤어날 수가 없다고
다시 일어설 수가 없다고
자꾸 무릎이 꺾인다고
그리고
가슴에
뺄 수 없는 못 촘촘하게 박는 일 이라고
그대를 바라보고 사는 일
죄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를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를 향한 마음이
죄가 되지 않는다면
내 목숨과 바꿔도
그대와 함께이고 싶습니다.
내 목숨처럼 귀한
그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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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舞姬(무희)
이현옥
먼 기다림의 몸짓
온 몸으로 울던
찬 바람 속에 내던져진
타오른 절규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당신을 향한 몸부림
녹아든 상흔
이사도라 덩컨의 작은 넋
어지럽게 흩어 지는 불빛 아래
발끝 핏줄 속으로 찾아 든 오한
먼 - 기다림의 날개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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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묵은 쌀을 씻으며
이현옥
작년 농사지어 한 가마니 아파트에 가져다 놓은
쌀 온도가 맞지 않아서인지
밥을 잘 안 먹어서 인지
해를 묵으니 묵은내 나고 벌레가 파먹어
쌀을 씻을 때마다 벌레가 둥둥 뜨고
속 파 먹힌 쌀 껍질이 떠내려간다
떡국떡이나 빼야겠다고
쌀을 씻는데
가슴 한쪽이 뻐근해져온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렇게 냄새나고
빈 껍질만 남는 것
오십년 넘게 묵은 내 몸
맹장도 난소도 생명창고도 떼어내고
뱃속 텅비어
쓸데없이 묵은 세월만 가득차
꽃 피우지 못하는 꽃눈만
몇 년째 동면중이다
쌀은 묵으면 떡국떡이라도 빼지
사람 묵으니
쓸데라곤 없어
공연히 수돗물 잠그지 못하고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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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문풍지
이현옥
세상밖은 어둠으로 깔아놓고
바람은 무장을 했다
단절한 공간
나 대신 울어주던 곡비
흰 뼈가 드러나던 가슴
한복판에 구멍이 나면
아무것으로도 막을 수 없어
문구멍으로 내다보던
그리움
뒷모습만 흔들려
녹슨 시간을 닦던
어머니
몸을 갈라
내 몸에 옷을 입혀
겨울바람을 막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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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반달로 뜬 그리움
이현옥
길은 끝나지 않았다
내 가슴을 불게 들이던 밤
몸 속에서 터지던 실핏줄의 아릿한 통증
들이쳐 온 사랑을 누가 막으랴
반달로 하늘에 뜬 음력 팔월
그리움으로 채워 두면
동그랗게 뜨려나
꿈구는 눈동자
슬프게 보이지 않으려
다부지게 마음먹지만
먹먹하게
가슴에 담아둔 아쉬움
눈물이 참아내지 뫃가고
긴 기다림
도 시작된
텅 빈 광장 같은 가슴 한 장
바람에 펄럭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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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반영
이현옥
마이산
사랑한다면 이별하지 말일이다
쑥부쟁이 꽃 손 흔드는 호수 가에서
이별을 말하지 말일이다
똑같은 모습 똑같은 그림자로 눈부처 될 일이다
그렁한 눈빛이 녹아 물결로 다가와도
흔들리는 그림자로 곁에 있어야 할 일이다
그대가 나고
내가 그대이니
사랑한다면 이별하지 말일이다
☆★☆★☆★☆★☆★☆★☆★☆★☆★☆★☆★☆★
《39》
밥을 푸며
이현옥
칙칙 거리며 화력기차여행을 끝낸
압력밥솥 뚜껑을 열자
완두콩 듬성듬성한 햅쌀은
반지르한 가을햇살 품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킨다
아니지
윗밥은 내 밥이 아니지
윗밥은 시아버지가 오실때는 시아버지 밥으로
남편밥으로
아이들 밥으로 밥상에 올랐다
묵언으로 전해져온 오랜 습관이었다
내 밥은 저 밑
제일 먼저 불과 닿는 곳
뜨거운 몸을 뒤척이며 윗밥을 지키는 그 곳에서
철수세미로 닦여져 상처난 밑바닥에서
단단히 눌어붙은 그 밑밥
그것도 주걱으로 득득 긁어
밥그릇 한쪽에 척 반달처럼 붙인 것
그렇게 공들여 윗밥을 펐는데도 야속한 돌은 꼭 윗밥에서 나왔다
와작
덜컹 심장을 씹는 소리
하지만 그렇게 윗밥을 정성들여 푸는 일이
건강한 일임을 알았다
식구들에게 먼저 먹인 가을햇살
그 햇살 찰지게 몸속에 번져
도독도독 살이 되고 철심 같은 힘이 되고
용담호 수면 같은 맑은 피가 되어 흐르게 한 것을
마음공모 한다, 은밀하게
나도 시침 뚝 떼고 가을 햇살 삼켜보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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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백지
이현옥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
백지로 남겨 둘게요
그대가 서 주세요
내게 하고 싶은 말….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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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보고 싶다
이현옥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죽을 만큼보고 싶다
그 노래가
가슴에
박히는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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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보리밥 집에서
이현옥
엄마 뱃속에서 나오며
떨어진 탯줄
배꼽 딱지처럼
보리밥집 마당에
떨어진 감꼭지 돌멩이처럼 밟힌다
바람 불 때마다 뚝뚝
엄마 손을 놓쳐
감이 되지 못하고
수없이 바람 불고
태풍도 올 텐데
다닥다닥 달린 감들이
수두룩하게 떨어져 내릴 텐데
그 냉정한 엄마를 본다.
약하면 기르지 않는다
몸뚱이 휘어지도록 낳은 새끼지만
끝까지 탯줄 놓지 않는 것들만
젖을 먹이고
함께 익어 갈 테다
고추장독처럼
물드는
가슴 터지는 사랑
보리밥 비벼 먹는 탁자 위 물 컵 속으로
퐁!!
엄마 뱃속 양수인 양
자연 유산된 미숙아
떨어져 눕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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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보일러
이현옥
- 수항리연가 4
아버지
방은 따뜻한지요?
보일러 온도 좀 높이고 따뜻하게 지내세요
눈 내리는 대설아침
따뜻한 아파트에서 아침을 맞은 아들
줄어가는 기름 아까워 냉골에서 지내셨을 아버지께
안부를 묻는다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아버지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아버지의 찬 방을 마음으로 더듬으며
자전거 타고 눈길 조심하시라고 당부당부하는
목소리가 젖는다
눈 내린다고
철없이 좋아하는 아내에게
당신 좋아하는 눈내리네…라고 전화를 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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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비밀
이현옥
은밀한 비밀 하나
내 가슴속에 스며들었습니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가을 속을 걷는 그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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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사랑은 믿음
이현옥
아직도 그대를 보면 설렐 수 있는
가슴이 있다는 것
完經(완경)의 나이라 주저앉고 싶을 때
그대의 거친 숨소리에
다시 일어서던 푸른 숲
7년을 기다려
그대 향해 일주일을
목놓아 울며
부르다 다시 허물 벗고 돌아간대도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그대에게 바칠 수 있다면
사랑은 믿음
저버리지 않을 그대이기에
겸허히 몸을 열던
숭고한 의식
사랑하지 않으면
허락할 수 없던 대지
씨방에 고이 간직한
믿음
그대
내게 준
열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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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사랑한다면 가을처럼
이현옥
단풍 너무 뜨거워 숨을 쉬 수가 없습니다.
내 가슴에 찍어놓은 그대 손자국
뜨거운 문신으로 남아
어느 단풍도 따라올 수 없게
불게 물들었습니다.
불길 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불길 그대만이 끌 수 있습니다
모두가 타버려 재가 된다 해도
그대 아니면 끌 수 없습니다
그대,
가을 가면
저 홀로 떨어져
썩어 당에 묻힐 그리움
가을에게 고백합니다
등 돌려 가는 가을에게 고백합니다
사랑했다면
사랑했다면
이 불길 가만히 타오르게
저 홀로 타오르게
뜨거움에 견디지 못해
비명 지르며 자지러지게
그냥
놔두세요
사랑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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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삭제시키다
이현옥
네가 보낸 이메일을 읽다가 델리트 키를 누른다
남아 있음 그 달콤한 말에 빠져 들까봐
휴지통으로 들어간 편지를
다시 꺼내 읽고
영구 삭제를 다시 한 번 누른다
다시는 내 눈에 안 뜨였으면 좋겠다
스팸 같은 편지지만
간간 내 마음 흔들기도 했다
피지 않으면 꽃 아니고
가지 않으면 길 아니듯
버려진 편지는 마음 아니다
네가 보낸 편지 삭제시키며
내 머릿속에서 또 한번 지운다
불끈 불끈 일어나는 글귀 밟아놓고
아주
분쇄기에 넣는다
나를
흔들지 마라
그렇잖아도
억새바람에도 지금 나는 흔들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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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상사화
이현옥
천 갈래 만 갈래 꽃잎 갈라지듯
그대 그리는 마음
상사화로 피어
선운사 가을 속에도
다른 꽃은 보이지 않아
바다 한 가운데도
그대 모습만 붉게 물들어
비단노을 되었네.
이제 내 눈은 다른 것은 볼 수가 없어
오직 그대가 가득 찬 내 눈 속에
가득하게 들어온 꽃 무더기
애타게 피어
그대를 기다리네
사랑은 절대적인 믿음
가까이 있지 않아도
손에 잡히지 않아도
누구 함부로 내 마음 흔들지 못해
가을바람에 꺾이지 않는
목이 긴 상사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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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생강나무 꽃
이현옥
때 늦은 폭설에 가슴 아프다
눈치 못 채게
아기 얼굴에서 스멀스멀 번진 황달기 마냥
가지 위로 올라오는 노란 기운 때문
텅빈 둔덕에 납작 붙어 있던 냉이.벌금자리부터
비알에 서로 기대 선 나무들까지
봄은 이리 저리 꿈꾸다가
저도 모를 사랑에 가위 눌리는 시간
내 서늘함에 익숙한,
뜯으면 당장 훼손되고 말 러브레터
흰 눈 속 저 꽃떨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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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서로 물들이는 나무처럼
이현옥
그대와 내 마음 하나 되면
어떤 모양 될까?
언제쯤 하나 되어
둥글게 될까?
어절 수 없이 물 드는 가을 나무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물들이고 있을까?
그대에게 붉게
나에게 붉게
타오르는 그 불꽃
사랑의 심지에 피어난
아프지 않을 꽃일까?
두 손 포옥 가리고
그 불꽃 꺼지지 않게
지키고 싶은데
먼 길 지치지 않게 함께 가고 싶은데
서로 힘이 되면서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 가슴 내가
얼마만큼 차지하고 있는지…
내가 기대고 싶을 때
그대 가슴 가만히 내어줄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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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섬
이현옥
-수항리 연가 2
물줄기 시원하게 흐르던 수항리 냇가
하나 둘
사람들 떠나니
물줄기도 가늘어졌다지
고향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던 느티나무
저 홀로 외롭게 그늘을 만들고
저 혼자 물들어가고
잎 지고 또 새잎을 틔우던 수 십년
늙은 아버지 몸속 물줄기도 가늘어져
전립선만 비대해지고
한 점 작은 섬으로
수항리를 지고 계신다
등굽어
등굽어
☆★☆★☆★☆★☆★☆★☆★☆★☆★☆★☆★☆★
《52》
수항리 연가
이현옥
섬망
어느 시절 어느 시간이 가장 마음에 걸리시나요
가슴에서 지우지 못한 분노는 무엇인가요
자꾸 헛것이 보이고
집으로 간다고 하시는 아버님
아버지가 가고자하는 다복동은 어디인가요
5대조부터
뿌리를 알아야한다고
살아오시며 가장 숭배하셨던 조상에 대한 정성이
무너진 것 같아 두려워하시나요
명치끝에 매달린 저 헛것에 대한 두려움
아
아
나를 천국에 보내지 마소서
아버님 마음 맺힘 풀지 못한 불경의 죄
큰며느리
머리 둘러 마음 둘 곳 없어
아버님 마음이 떠도는 그 허공을 함께 헤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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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소
錦沙 이현옥
가끔은 아홉살 적
띠골에서 살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다
뱃속 가득하게 찬 이물질
씹고 씹어도
소화되지 않는 도시에서
뒷동산 묫등아래서 뽑아먹던 삘기
그 달달한 맛
개울가에 통통한 찔레순 껍질 까먹던 떫은 맛
혀 끝에 박혀
깨소금맛 나던 깨금
시디신 명아
진달래
먹기만 하면 그대로
녹아내려
온통 추억이 된
열살 봄
전학한 도시학교 교실문 드르륵 열고 선생님 뒤에 숨어 들은
와와 촌뜨기다
함성에 묻혀
목에 걸린 유년
그때부터 소화불량이다
메꽃도 잊었고
나팔꽃도 잊었고
매미도 잊은 위胃에
낯선 미네르바가 더 깨져 있다
세상에
머리에 얹은 달이 밥이 된다니
이런 기막힌 운명을 죽도록 반추해야 하다니
트렉터에 일자리를 빼앗기고
언제부터인가 알약으로 대신한 밥을 먹으면서
네개의 위를 가진 소와 어린 시절로 가고 싶은 나는
신경성 궤양을 앓는다.
☆★☆★☆★☆★☆★☆★☆★☆★☆★☆★☆★☆★
《54》
손내옹기
이현옥
참 맑은 눈빛을 가지고
참 순한 눈빛을 가지고
물 솔 바우
모양대로 뒹구는 마음
혀 속에 녹아내린 홍삼 초콜릿을 빚는 손으로
불붙여 구운 초콜릿색 옹기
달이 뜨고
별이 지는 뜨락
풀포기처럼
제 멋대로 서 있지만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면
달려와 웃는다
그 아내처럼 웃는다
그이처럼 웃는다
뒤척이며 서러운 세월
다 담아놓고
아닌 척 웃는다
아닌 척.
☆★☆★☆★☆★☆★☆★☆★☆★☆★☆★☆★☆★
《55》
송어회
이현옥
-수항리연가 5
주황색 살을 도려내 촘촘히 얼음위에 얹혀진 송어회
내 마음을 도려 입에 넣는 것처럼
섬뜩하게 아팠습니다
쓴 소주한잔을 따라드리며
그동안 무심함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
얼음위에서 꼬들해지는
송어살처럼 마음도 움츠러듭니다
괜찮어~나는 괜찮어
며느리가 왔다고 차디찬 방 보일러 온도를 올리고
까막까막 어둔 방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십니다
그게 며느리사랑의 온도를 올리는 방법이었습니다
상추에 송어살 한점 올리고
매운 고추냉이간장을 찍어 꾸역 삼킵니다
코끝 찡하게 울리는 눈물
그냥 간장이 매워서
매워서라고
아버지 송어회 맛있게 드시더니
잘 먹었네, 잘먹었네
손 떨며 지팡이를 짚으십니다
마이산 산바람
함께 일렁입니다.
☆★☆★☆★☆★☆★☆★☆★☆★☆★☆★☆★☆★
《56》
수항리 연가
이현옥
개망초
그리움이 수북하게 자란 마당
점점이 불을 켜두고
보고싶다고 쓰고 있다
어린 시절
소꿉장난 할 때
계란으로 쓰던 개망초
밥상을 차려놓고
그리움으로 피고
주인 없는 빈집을 지키고 있다
웃자라는 여름은
이제
뭘 또 대문에 세워놓을까
대문 앞 단풍나무
붉어 가는데….
☆★☆★☆★☆★☆★☆★☆★☆★☆★☆★☆★☆★
《57》
수항리연가1
-시골가자
이현옥
자꾸만 지워져가는 기억 속에서
한 가지 또렷한 영상
아버님 계시던 진안군 부귀면 수항리 981번지
주소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애는 진안 부귀면 수항리 981번지지
내가 그걸 모를라고
아
다른 건 다 지워져도 아마
아버님 머릿속에 남아있을 그곳
그곳에 못간지도 벌써 9개월이 지나가
흑백사진처럼
희미해지는 영상 속에
일찍 보낸 아내가 묻힌
진달래꽃 꺾던 산등성이
그리고 지게지고 넘나들던 들길
자꾸만 튀어나와
시골가자 시골가자.
아버지 마음을 끌고 갑니다.
☆★☆★☆★☆★☆★☆★☆★☆★☆★☆★☆★☆★
《58》
수항리연가2
-주인없는 집을 지키는 자전거
이현옥
돌아가던 바퀴 멈춘 녹색자전거
헛간에 누워 빈집을 지키고 있다.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푸른 혈관에 피를 나르며 푸르게 가꾸던 시절이 있었다.
양지쪽에 걸린 시레기줄도
어떻게 썼는지도 기억도 없는 호미 갈퀴 낫
저마다 수런거리며 빈집을 지키고 있다.
자전거가 멈추자 전화소리도 멈추고
대문 앞 우편함에 쌓이는 세상소식
궁금해 안을 엿보고 있다.
☆★☆★☆★☆★☆★☆★☆★☆★☆★☆★☆★☆★
《59》
수항리연가3
-백내장-
이현옥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눈동자가 하얗게 됐을까
눈동자 속에 망초꽃 한 송이 피어
앞을 가렸을까
그리운 것 많아
보고픈것 많아
심장에 열나더니
온통 하얀 세상
세상 꼴보기 싫은 자식들
애써 봐야하니
그저 형체만 보고 싶으셨을까
영사막처럼 흰 천 내리고
마음속 영상만 혼자 보고 계셨을까
-나도 니들처럼 젊었을 때 있었느니라
세월이…세월이 이만큼 끌고 왔느니라
너희도 끌려오고 있느니라-
이 무력한 경고 앞에 눈앞이 하얗게 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비내리는 거리를 바라본다
거기 훗날의 내가 서있다.
☆★☆★☆★☆★☆★☆★☆★☆★☆★☆★☆★☆★
《60》
수항리연가4
-걸음마-
이현옥
아가로 태어나서 걸음을 걷기까지
2천번을 넘어져야
걸을 수 있다는데
80평생을 걸어오신 아버님
수천 번을 넘어지고 계시다
일어서 걷는다는 게 이렇게 큰 축복이란 걸
이제서야 느낀다
다리에서 빠져나간 힘은 어디를 헛딛고 있는 건지
반듯한 복도를 걷기가
젊은 날 황토길 걷는 것 보다 더 힘들어
맨발로도
물 고인 논 속에 들어가
모내기를 하고
지게를 지고 불끈 일어서던 그 힘
허리가 무너져 내린 후
더 이상 땅을 디딜 수 없어
병원 창문에 고이는 네모진 고독과 함께하며
별이 몇 개인가를 세다 잊어버리고
주인 없는 정원에다 불 켜놓고 백일기도 하던 금낭화
줄줄이 불을 켜고
열 달 이틀 만에 밟은 고향땅에
슬픔을 지우고 있네
돌아봐도 돌아봐도 반가움 없는 빈집
대문마저 허리처럼 허물어지고
쓸쓸한 바지랑대 혼자 훠이 훠이
불두화를 피우네
☆★☆★☆★☆★☆★☆★☆★☆★☆★☆★☆★☆★
《61》
수항리연가5
-시골가자-
이현옥
자꾸만 지워져가는 기억속에서
한가지 또렷한 영상
아버님 계시던 진안군 부귀면 수항리 981번지
주소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애는 진안 부귀면 수항리 981번지지
내가 그걸 모를라고
아
다른 건 다 지워져도 아마
아버님 머릿속에 남아있을 그곳
그곳에 못간지도 벌써 9개월이 지나가
흑백사진처럼
희미해지는 영상 속에
일찍 보낸 아내가 묻힌
진달래꽃 꺾던 산등성이
그리고 지게지고 넘나들던 들길
자꾸만 튀어나와
시골가자 시골가자.
아버지 마음을 끌고 갑니다
☆★☆★☆★☆★☆★☆★☆★☆★☆★☆★☆★☆★
《62》
시들지 않는 꽃
이현옥
또 그렇게 고개를 넘었습니다
사랑의 웃음을 가슴에 담아두고 싶었던 세월
정결히
몸을 열고 그대를 받아드린 날
하얗게
고개를 내민 그대를 봅니다
나이의 숫자가
가로막는 건 아니였습니다
이제야 다시 꽃봉오리 진
사랑임을 알았습니다
두발 담근
화끈거리는 진흙 속에서도
말갛게 정화되는
몸짓이었다는 걸
그대를 만나고 난 후 알았습니다
사랑은 결코
시들 수 없는
한 송이 꽃이란 걸
눈이 시리게
그대를 사랑했다면
그 사랑 지키는 일도
함께 할 일이란 걸 알았습니다
하얗게
하얗게
그리움이 변해
피어난
사랑임을 알았습니다
☆★☆★☆★☆★☆★☆★☆★☆★☆★☆★☆★☆★
《63》
심장 안에 들어있는
이현옥
그대를 잃는 다는 건
내 목숨을 버리는 일
그대를 잊는다는 건
내 기억이 상실증에 걸리는 일
그래도
잃어야 한다면
잊어야 한다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목숨을 버리는 일
심장 안에 들어 있는
그대 눈빛과
목소리와
노랫소리
고스란히 핏속으로 흘러드는데
불혹의 동반자로
함께 걸어온
뒤돌아 본 길 위에
남아 있는 흔적
한 조각도 편집 할 수 없는
기억의 파편들이
낙엽처럼 구르고 있어도
그대만이 내 위안이란 걸
알고는 있는 건지…….
창백하게 정지된
목메는 그리움
그대란 걸……
☆★☆★☆★☆★☆★☆★☆★☆★☆★☆★☆★☆★
《64》
아버지의 연인 상사화 相思花
이현옥
기다림도 이젠 힘이 듭니다.
길게 목 내민 대굴
눈물 꽃 달고
그대 떠난 길목
기웃이고 섰는 메마른 날
손사래 치며 떠난 그대
바람 한줌으로
내게 돌아와
조각난 그리움 맞추고 있습니다.
등이 굽어
손이 떨려
당신 떠난 하늘에
편지를 쓰기도 숨이 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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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어머니의 화단
이현옥
옹기종기
장 냄새를 풍기고 저마다의 모습으로 섰는 장독대 옆
불두화 주먹만한 눈물 달고 피어납니다.
'초파일이 다가오니 불두화가 피더구나'
뿌리를 캐내 달려주시며
'여자에게 좋단다'
붉은 목단도 커다랗게 피어납니다.
그 옆에 금낭화 청사초롱 밝히고
호미 들고 가꾸시던 팍팍한 가슴팍에
꽈리도 목을 들고
둥글레 실하게 올라옵니다.
어머니 가고 없는
주인 잃은 화단엔
그리움에 지친 눈길 짓물러
꽃으로 꽃으로 피어납니다.
백합도 나팔을 들었고
상사화 땅속에서 울음을 삼킵니다.
어머니 웃음 같던 겹봉숭아 피어나면
어찌할까요
등 굽어 자꾸 당으로 가는 아버지
당신 그리며 붉게 울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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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언제나 내 앞에
이현옥
하나인 그대
기다리고 섰는 일
목이 타는데
하얗게 재로 남는
기다림의 무게 감당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 것 같아
여인아!
이 가을 등 보이며 떠나려 하는데
언제 내 앞에
흰눈 밟고 오시려는가!
새잎 돋는 밤
소리 없이 오시려는가!
붉게 오시려는가!
가을이 다시 올 때
첼로의 낮은 음과
오까리나 아픈 음처럼
그렇게 부른다
연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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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얼굴 없는 미녀
이현옥
사랑을 뼈아프게 앓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속으로 걸어들어 간 폭염
더 이상 녹아 들 불꽃도 이젠……
그대가 그어 놓은 보더라인
이젠 지울 수 없고
금을 밟아버린 그림자
그녀에게 피아노 소리나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게 했다
소유하고 싶던 인형
서툴게 들켜버린 마음에
늑골이 아프고
길을 잃엇다
그대가 이
있는 곳이 어딘지
맞지?
내가 사랑한 사람
그대지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며
오늘도 확인해 보고 싶은
애절한 사랑
오늘도
그대가 오고 있다는
느낌으로
온 몸이 덜리던
그 밤의 정사
최면 속의 길을 걷던
세상
그 속에서조차
그대를 사랑하고 싶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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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연꽃처럼
이현옥
연꽃이 피었더군요
진흙 뺄 속
얼마쯤 발이 닿아있는지
깊이는 알 수 없지만
그대 가슴에 얼만큼 내가 발을 들여놨는지
어느 만큼을 채우고 있는지
어느 댄 전부이고 싶다가
어느 땐 일부분이라도 차지하면 좋겠다 하다가
슬며시 웃어요
당 긋고
땅따먹기 하던 그 때
한뼘 한뼘 땅을 재며
그것도 내거라고
뿌듯하게 웃었죠
저녁연기 피어오를 때
날 부르는 소리가 나면
그 땅 모두 놓고도
행복하게 돌아가던 가벼운 주머니
그래요
차지하려는 욕심이 아닌
느낌만으로 가득 찬 가슴
거기 그대로 있다면
연꽃처럼
환하게
그렇게 사랑할래요
연꽃이 피었더군요
그대 가슴에도 피었나요?
내 가슴엔 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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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영원이란 없을까
이현옥
지루한 겨울이 녹는다
다시는 돌아 올 수 없어
풍장으로 묻어둔 약속을 꺼낸다
바람이 그려낸 문자는 이미 희미해졌지만
목숨처럼 들고 있던 삶의 무게를 저울에 달면
나이테 그리듯 또 하나 잔잔한 고요가 그려진다
그대가 선언하듯
안겨준 영원이
겨울처럼 녹는다
떠남이 준비된
신발을 신으며
주머니 속 낱말부스러기들을 모아
자음 모음을 맞춰 영원이란 동그라미를 그린다
영 아귀가 맞지 않는다
삶이라는 재고처럼.
새가 되고 싶은 날
사랑을 거래 할 때도 마침표가 필요할까
해진 사랑 수선하던 그 날
세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인터넷 한 공간
우수수 비늘처럼 떨어지던 막막한 이름을 읽으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날개를 찾고 있다
어깨아래 겨드랑
불 밝히지 않은 구석
따뜻한 목소리 고이는 샘물 퍼 마시면
백지 같은 네 가슴에 둥지 틀 수 있을까
턱까지 치오르던 어둠은
정수 되지 않은 마음 흡수하고
손뼉 친다
촘촘히 고명으로 얹은 별빛이 부화되고
거리는 온통
처녀막 같은 비 꽃 터지며
온몸에 불을 켜는데
오르가슴 파편에 맞아 그믐 달 혼절하는 사이
축제를 준비하는 백일홍
단전호흡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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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영평사에서 꽃을 줍다
이현옥
어디쯤일까
불혹의 끄트머리 이제는 셀 수 없는 나날의
길이 흐트러졌고
알 수 없는 혼돈의 머리 속에 엉긴
실마리 풀어야 하는데
잔잔히 잦아든 노을도
울컥 토할 것 같은 붉은 젊음도 사라진 길을
헤매다 찾은
고즈녁한 산길
내 모습과 닮아있다.
화려하지 않다
눈물나게 슬프다
외로운 노래한줄 묻어나는 언덕에
내가 서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이제서야 꽃이된
이제서야 노래 할 줄 아는
한 송이 꽃으로 다시 핀
훌륭한 연주에 맞춰 춤출 줄 아는
한 줄 오르가즘에 환희로운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영평사 언덕에 온통 하얀
부처님 미소 흐드러졌다.
뽀얗게 꽃잎 강 흐르던
마흔 일곱의 가을 영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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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오래된 문
이현옥
시골집 오래된 경첩
덜렁거리며 말 걸어온다
세월이 흔들어 골다공증 걸린 못
풍치처럼 아프다 한다
얼마나 많은 날
들랑거렸는가
설익은 꿈 조각 해부해
날줄 씨줄로 엮은 시간
이제 바람에게 맡긴 쇳조각
바람이 마지막까지 흔들다
바람 따라 가야 할 낡은 통로
바깥을 엿본 푸른 날
녹슨 기억이
거기서
애잔하다
여든 아홉 무릅 헐거운 아버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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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완경
이현옥
읍내동 건너 계족산
맨발벗은 그녀 섰다
갱년기 증후군 얼굴까지 달아오르고
등 뒤에 불화로 쏟아 부은 날
어찌된 일인지
이미 몸 안에서 피던 꽃은 시들었는데
밤마다 불 지피는 꽃 문
분화구처럼 활활 타는지
회색조각을 두른 그녀 가슴
첫 눈 뿌리는 그 밤
맨 발로 떨쳐내는 꽃잎하나
붉게 붉게 흐르는 바람
무희, 옷을 벗어 던지고
가끔 머리에 꽃 한 송이 꽂고 비 오는 길 뛰쳐나가고 싶을 때 있다
마음 숨긴다는 게 무거울 때 있다
엄지발톱 빠지도록 돌던 시간 두터운 껍질 벗겨내고
거기 역 주행하는 바람 가리키는 이정표대로 달려보고 싶다
털어 내고 싶다
김치찌개 들어있는 도톰한 살점을 건져내듯
심장 채운 이름 하나 빼내어 바람에게 내어주면
비탈길 내려오며 느끼던 감전
여자들은 웃었다 오르가즘 느낀다며
커피 자판기 동전 넣었다
주루룩 쏟아지던 맑은 가난 걷어내고 가지가지 사이
푸른 하늘 한 조각 걸어둔 은행나무처럼 웃는다
제 곡조에 못이긴 은밀한 고백 노을에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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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욕심
이현옥
왜 그렇게 바라는 것이 많은지
그대에게
나만 바라보기를
나만 생각하기를
나만……
그저 산 같이 흔들림 없는
그저 바다 끝 수평선 같이 가이없기를
북극성같이
늘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있기를
바라면서도
아주 가끔은 나를
귀찮도록
불러주었음 할 때
그런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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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용담댐에서
이현옥
어디 숨었는가!
술래잡기하던 어린 웃음 숨던 미루나무
이젠 물 속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고
지워진 세월
치맛자락조차 보이지 않는다
볕드는 언덕 위에
탑 하나 덜렁 세워놓고
이곳이 고향이라고 억지를 쓰는 바람
파랗게 눈뜨고 있어야
고인 추억 마르지 않는다고
나룻배만 출렁이고
어디 숨었는가!
저녁나절 골목골목
밥 먹으라 부르던 어머니 음성
물결처럼 퍼지던 목소리
거울 같은 수면위로 아무리 찾아도
없
다
그리운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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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원추리 꽃
이현옥
세월 멈추고
추억 멈춘
빈 집
주인 대신 집 지키는
수항리 원추리 꽃
자꾸만 야위는 목
길어지는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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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인생이 뭐여?
이현옥
산소가 섞였다고?
마실수록 숨을 쉴 수 없는데
취한 그녀는 자꾸 인생이 뭐냐고 물었다
소름끼치도록 아픈 하루하루가
구겨진 돈처럼
젖는데
산소가 섞였다고
마셔봐도
가슴 답답하다고
불에데고
칼에 베인 손가락
반창고 붙일 시간도 없이
속창아리 배알까지
다 빼놓고
식당일을 하는 그녀가 취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인생이 뭐냐고 묻는 그녀에게
그 고단한 오답을 아무렇게나 말해줄 수 없었다
대리운전을 부르 듯
인생도 대리로 누군가 살아준다면
하루하루를 녹화해 두었다가
잘못된 곳만 골라 편집해 다시 볼 수 있는것도 아니고
홈쇼핑에 전화해 필요한 것만 골라내 선택해서 살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수학공식처럼 풀어낼 수 없는
그 단한번의 인생이 뭐냐고 묻는데
정답을 말하지 못한다
인생이 뭐여
대답해봐
그래 그거야
눈물
그게 인생이야
눈물 먹고 사는 나무
시간이 상처가 되고 옹이가 되고 나이테가 되고
희망이 되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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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종이배
이현옥
이 강을 건너면
그 섬에 닿을까?
벌써 출항을 시작하는 종이배
가슴까지 젖어드는데
언제까지나 비밀하게 간직하고 싶은
익명의 섬
억새풀 포자처럼 훌훌 날아
그곳에 닿으면
사랑하기 좋은 사란 거기 있을까
바쁘지 않고
힘들지 않고
내 힘듦을 받아줄 수 있는
깨긋한 그대 가슴에 물감이 번져가듯
내가 그대 가슴을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
알고 싶고 확인하고 싶은
쓸쓸한 날
그냥 그대를 가만히 생각한다
가만히
불러본다
가을아
너도 내 가슴 온통 가득 차 있다는 것…
내 연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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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줄기 세포
이현옥
피 끌어당김
떨어져 있어도
주파수가 그대에게로 맞추어져
온통
내 몸 속에
그대 피만 끓어
나를 다시 곧추세우는
생명의 줄기…
단 한 줄로도 힘이 되는
사·랑 ·하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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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짐작
이현옥
가슴속에 있는 말
다 할 수 없다면
그대는 짐작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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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첫눈 내리는 날
이현옥
떠나는 가을 속
폭설 내린 대청호변 억새
날카로운 키스처럼
가슴을 긋고
비단노을 품속에 안겨
잔잔히 떠나는 가을을 배웅하자고
쓸쓸하거나 슬픈
바람 속을 헤매는데
가을이 가야 슬프지 않을 거란 웃음
낙엽처럼 떨어지고
광장 가로질러 떠나는 아픈 뒷모습처럼
가는 가을을
그냥 바라봐야 하는 가로등처럼
혼자인데
연인아∼
아는가!
첫눈 내리는 날 온다는 약속
흔적처럼 남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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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큰아들
이현옥
-수항리연가 1
때로는 그리움이었지
켜켜이 쌓인 쓸쓸함 털어내며
운장산 바라보는
그렁그렁 달린 기억방울 하나씩 터뜨리며
물목으로 흘려보내는 시간조각
고장난 시계처럼 정지된
얼굴하나 그린다
억새 부서지던 산등성이를 달리던 추억을 접어놓고
막차가 남겨놓은 눈물까지도
졸아든 밤
아무에게도 말 걸지 못하는 고독한 아버지
하늘 리모콘을 돌리며
어딘가 채널을 맞추고 계시다
어금니 부서지게 물고 돌아오는 아들
울고 있는지 알고는 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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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풍경 그 쓸쓸한
이현옥
다음주 일요일이 말(午)날 이란다.
말날은 예부터 損이 없는 날이라 하여
결혼식이나 이사..
그리고 여인들의 손꼽음으로 장 담그는 날이란다.
어머님 계실 때도 늘 말날을 택해 된장을
담그셨다고 아버님이 설에 쓸쓸히 말씀하셨다.
달력을 넘겨보니 다음주 일요일 27일이
말날이다.
그래서 아버님께 다음주 일요일에 된장을
담글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사실은 걱정이 앞선다.
작년에도 된장을 담갔지만 그때는 이웃집
아주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작년 가을
메주를 쑤어 매달아 놓은 것을 지금 이불 덮어
띄우고 있다.
푸른곰팡이가 핀 메주를 깨끗이 씻어 소금물에
담가놓으면 되는 것이지만 장 담그는 일은
정말 신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년간 집안의 음식 맛을 내준 된장과 간장.
그래서 옛 여인들은 장담그는 날은 뽀얀
행주치마를 두르고 머리에 수건을 쓴 후
동트기전에 깨끗한 물을 받아 소쿠리를 바치고
소금을 풀었다.
동트기전에 소금물을 내려야 소금이
더 잘 녹는다는 지혜는 어떻게 아신걸까?
그리고 음력 정월장을 담가야 간이 너무
짜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근거를 어떻게 알았을까?
소금간을 보려면 계란을 담가 그 계란이
동전만하게 떠오를 때가 간이 잘 맞는거란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붉은 고추와 깨 숯 대추를 띄우며 된장을
담가놓고 소나무 가지를 꺾어다 금줄을 매며
신성하게 가꾼 어머니 장독대.
그 곁에 봉숭아 맨드라미 피어나고 채송화 낮게
엎드려 그리움 토하는 장독대..
하얀 불두화 주먹만하게 피어나 초여름 밤을
환하게 밝혀주고 여린 쑥을 뜯어다 돌확에
갈아서 장독대 위에 올려놓고 밤이슬을
맞게 한 새벽 진청색 쑥물을 사기대접에
담아주시며 여름 입맛 잃지 않게
마시라던 어머니.
마늘한쪽 까서 주시며 그 쑥풋내를 가시게 해
주시던 어머니는 오월 단오무렵이면
쓰디쓴 익모초도 즙을 내 주셨다.
이별의 아픔보다 더 쓴 맛에 도리질을 하면
그래도 마셔두면 어머니 손처럼 유익하다고
그래서 益母草라고 하시며 억지로 먹이셨는데...
그 쓴맛이 이렇게 그리운 맛이 될 줄
어떻게 가늠이나 했을까?
그러고 보면 어머님 반찬은 쓴맛이 많았다.
어린 머위잎도 삶아 무치고 쌈으로 주시면
쌉쌀했고 거기에 고들빼기도 쌉쌀했고
가새씀바귀잎을 넣은 비빔밥도..
씀바귀뿌리 초고추장 무침도 입안을 쌉쌀하게
만들었지만 먹고 나면 배앓이 심한 나도
그 여름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먹기 싫다고 투정하는 며느리를 아기
달래듯 "어서 먹어 어서 많이 먹어.."하시며
애잔히 바라보시던 그 눈빛..
그 눈빛이 이렇게 울컥 눈물 쏟는
그리움이 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더 맛있게 먹을걸..
'맛있어요..맛있어요'..하면서 먹었다면 어머님
얼마나 더 기뻐하셨을까?
철부지 8남매 맏며느리
24년간 애지중지 사랑하시다, 2년전 가을
하늘가신 어머님이 그리운 날
어머님 손길처럼 정성스럽게 된장을
담글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홀로 남으신 아버님 가슴에 어머님
생각으로 우러난 그리움
조금이나마 달래 드릴 수 있을런지..
어머님 그림자가 아직도 남은 장독대에 서면
나는 목 메이는 그리움이 별빛처럼
쏟아져 내린다.
뜨거운 눈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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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해지는 저녁 한 송이 분꽃
이현옥
사랑의 눈금 자구만 내려가
가슴가지 허허로운 가을 들판
그대라면
됫박 같은 셈을 멈추고
원초적인 태반 같은
자궁 속 사랑으로
씨앗을 키우리라
깊게
뜨겁게
씨방 속에 넣어두고
알밤처럼 토실하게 햇살 익혀
사랑의 눈금 다시 긋기 시작할래
사랑한다면 하루 세 번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고백하라던 광고처럼
피어도 피어도 시들지 않는
사랑꽃 피어나게 할래
꽃잎 열어
다시 꽃이 된 그날처럼
다시 꽃으로 피어난 그날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안.아.주.면.돼
나는 그대 마음 따라가는 그림자
소리 없이 피어나는 한 송이 분꽃
해지는 그 저녁 살포시 꽃잎 여는
한 송이 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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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아침 산 노을
이현정
산은 해를 껴안고
밤새워 사랑을 나누고도
더 품고 싶어
깊은 슬픔이 산그늘로 드리우고
높이 흔들리는 영봉 하늘엔
밤새 어둔 내를 흐르고 흘러
갓 건져 올린
아침 해가
무릎 꿇어 기도의 몸짓을
아지랑이로 피워 올린다.
어디선가 까치 한 마리
둥지를 지으려는지
마른 나뭇가지 하나 입에 물고 날아가다
전봇대 위에 잠시 날개 접고 앉아
스러지는 노을을 바라보다
제 둥지 찾아 날개 퍼덕여
햇살 가득 등지고 날아간다.
산은
날아가는 까치를 부르지 않았다
☆★☆★☆★☆★☆★☆★☆★☆★☆★☆★☆★☆★
《85》
자귀 꽃
이현옥
붉은 영혼 강을 건너다
발목이 빠진다
쏜살같이 달리는 세월과 함께 달리기란
얼마나 숨 가쁜 일인가
더러는 너와 포개져
네 몸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쉬고 싶다
아니면 그냥 벗은 몸 그대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채로
산다는 것은
참나무 굴뚝에 활활 타고
숯으로 남는 것
꺼진 듯한 불꽃
다시 피우며 살아내는 것
때로는 심장 가득 슬픔을 채워두고
보고싶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한
꽃 한 송이 피워내는 것
소낙비처럼 쏟아내는 거친 숨소리
가만히 덮어두고
몸속에 남아있는 흔적을 닦는 것
머릿속에 감긴 필름을 되돌리며
간혹…웃다가
간혹…울다가
숨넘어가도록 황홀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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