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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독 將軍, 제1선에 서다
7월13일, 사령부를 일본 東京으로부터 大邱(대구)로 이동 개설한 워커 중장은 미 제8군에 대한 지휘권을 발동했다. 월튼 H. 워커 장군은 텍사스 출신으로 1889년생. 별명은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불독.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고, 제2차대전 때는 패튼 전차군단의 제4기갑군단장으로서 유럽의 여러 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다. 대전 후인 1948년 제8군사령관이 되었다. 훗날(1963년) 서울에 건립된 워커힐 호텔도 그의 戰功(전공)을 기리기 위해 명명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의 진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워커 중장은 금강-소백산맥의 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한다고 하는 작전명령 제1호를 발령하고, 전투에 지친 미 제24사단에 금강 南岸(남안)에서의 방어를, 한국군엔 소백산맥에서의 방어를 명했다.
美 제24사단은 금강의 하천을 이용하여 서쪽의 公州(공주) 정면에 제34연대를, 그 동쪽의 大平里(대평리) 정면에 제19연대를 배치했다. 금강에 걸린 다리 錦江橋(금강교)와 錦南橋(금남교)를 폭파하고, 발견된 나룻배 등은 모두 소각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정면으로부터의 사격으로 미군을 견제하는 사이에 兩 전선 모두 측면과 背面(배면)으로부터 보병부대를 기습 도하시켜 후방으로 진출했다. 미 제34연대와 제19연대는 후방이 차단되자, 사기를 잃고 후퇴를 했다. 이리하여 워커 중장이 기대하고 있던 금강의 방어는 7월14~16일에 걸쳐 잇달아 붕괴하고, 북한군은 大田에 육박했다. 북한군은 제2, 제3, 제4사단을 투입하여 이곳 미군을 섬멸하려고 기도했다.
작전권 이양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東京에 있는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작전이양에 관한 서한을 보냈다. 공산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하기 위해서는 유엔군의 작전지휘권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과 이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지휘권도 유엔사령관에 넘기기로 한미 양국이 합의했던 것이다. 이 협의의 중간역할은 무초 駐韓대사가 맡았다.
<맥아더 장군 귀하
대한민국을 위한 유엔의 공동 군사노력에 있어 한국 내 또는 한국 근해에서 작전중인 유엔의 육·해·공군 모든 부대는 귀하의 통솔 하에 있으며, 또한 귀하는 그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있음에 비추어 본인은 현 적대행위의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모든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입니다.(하략)>
이리하여 1950년 7월14일 부로 국군의 작전지휘권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이양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을 받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17일 미 제8군사령관에게 한국 지상군의 작전지휘권을 再이양했다. 국군 해‧ 공군의 작전지휘권도 각각 미 극동 해·공군 사령관에게 이양되었다. 이로써 모든 부대의 지휘통일이 이뤄지게 되었다. 이후 영국 등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 회원국의 모든 부대도 유엔군사령관의 작전지휘를 받게 되었다. 현재는 한미 양국 공동으로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는 한미연합사 체제로 발전해 있다.
美 제24사단의 大田전투
서울과 대전을 잇는 전략상의 요충인 대전은 서울로부터 160km, 부산으로부터 200km에 위치해 있다. 소백산맥 서쪽 기슭의 큰 분지로서 교통의 요지이다. 경부선 철도는 대전에서 부산行 경부선과 木浦行(목포행) 호남선으로 갈라진다. 1번국도는 대전 서쪽에서 목포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 대신에 금강하구 長項(장항)에서 시작한 4번 국도가 大田 시가지 한복판을 횡단한 후 秋風嶺(추풍령)을 넘고 낙동강을 건너 다시 大邱(대구) 한복판을 횡단한 후 文武大王(문무대왕)의 水中陵(수중릉)이 위치한 동해안의 甘浦(감포)에 와 닿는다.
7월16일, 금강방어선이 붕괴되자,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대전에서 지체작전에 의해 북한군을 최대한 저지한다는 방침을 결심했다. 그는 대전 서남방 論山(논산)에 있던 예하 제34연대를 불러올려 대전의 방어를 명했다. 이와 함께 제21연대를 대전 동쪽 馬達嶺(마달령)에 배치해서 경부선 철도와 4번국도의 수비를 맡기고, 다시 1개 중대를 대전 남쪽 錦山(금산)에 배치하여 경계부대로 삼았다. 또 전력이 소모된 제19연대는 대전 동쪽 40km의 永同(영동)에 집결시켜 재편성과 보급로의 엄호를 맡겼다.
새로 제34연대장에 착임한 뷰챔프 대령은 제1대대(아이레스 중령)을 甲川(갑천)에, 1개 중대를 경계부대로서 대전 북방의 경부선 철도에, 다시 제3대대(렌드론 소령)를 예비로서 대전비행장에 배치했다. 지금 이곳엔 정부 대전 청사·대전시청·아파트 단지 등이 밀집해 있다.
7월17일 밤에는 이런 배치를 완료했지만, 제34연대는 병력에 비해 너무 정면이 넓고, 통신기재의 부족에 의해 연락도 잘 이뤄지지 않았다.
군인의 모범을 보이려 했지만…
그런데 7월18일 정오 무렵, 딘 사단장은 “한국에 파견된 제1기병사단이 전선에 진출하는 7월20일까지 대전 확보를 요망함”이라는 워커 중장의 명령을 받았다. 당초, 워커 중장은 ‘대전 死守(사수)’를 고집하지 않았다. 낙동강을 최후방어선으로 이미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전 사수’를 결심한 것은 오히려 딘 소장이었다. 그는 후퇴를 거듭하는 예하부대와 한국군에 본때를 보이고 싶어 했다.
워커의 ‘요망’은 딘 소장이 바라던 바였다. 딘 사단장은 7월19일까지 방어하려던 당초 계획을 변경해, 20일까지 대전을 固守(고수)하기로 번의했다. 이에 따라 제19연대 제2대대(마크 그라일 중령)을 대전으로 불러 제34연대장의 지휘 하에 넣고, 동시에 錦山(금산)에 배치했던 정찰중대도 연대에 배속해서 전력을 강화했다.
이때 이 전쟁 최초로 신형의 3.5인치 로켓포가 제34연대에 지급되었다. 7월10일 대전에 긴급 공수된 것이었다. 졸자도 1968년 육군보병학교 훈련 때 알미늄製(제)인 3.5인치 로켓란처를 어깨에 올려 놓고 모의 로켓탄을 발사해 보았지만, 앞으로 나가는 로켓포탄의 충격과 발사 순간의 후폭풍이 상쇄되어 몸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M1 소총보다 훨씬 반동이 없는 부드러운 가벼운 무기지만, 위력은 탱크 정면의 두터운 철판을 뚫을 만큼 대단하다.
이 무렵, 북한군은 제2, 제3, 제4사단으로 淸州(청주)·鳥致院(조치원)·公州(공주)-論山(논산)의 3방향으로부터 대전의 포위를 기도했다. 그러나 敵 제2사단의 진출이 늦어져 2개 사단과 전차부대로 대전을 공격하기로 변경했다. 敵 제3사단이 대전의 北西로부터, 敵 제4사단이 대전의 서쪽과 남쪽으로부터 포위한다는 계획이었다.
7월19일 아침,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이 甲川(갑천)으로 진격해 왔다. 갑천은 대전의 서쪽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금강에 합류한다. 제34연대 제1대대는 儒城(유성) 정면에서, 제19연대 제2대대는 長城里(장성리) 정면에서 버텨 그날 중은 적의 대전 진입을 막아냈다. 그런데 이 무렵, 敵 제4사단의 일부가 대전의 南(남)과 東(동)으로 크게 우회하고 있었다.
20일 새벽 3시를 조금 지나 북한군은 미 제34연대 제1대대 진지를 일제히 공격했다. 적 전차는 제1대대 본부 가까이까지 육박했다. 대혼란에 빠진 제1대대는 아침 5시경 무단으로 으로 후퇴해버렸다. 이른 아침, 대전비행장 방면의 정찰에 나섰던 뷰챔프 연대장은, 남하하는 적 전차를 발견, 즉각 3.5인치 로켓포를 발사해 1대를 파괴했다. 연대장은 제1대대가 여전히 진지를 固守(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비의 제3대대에 대전비행장 부근에 침입한 적에 대해 역습을 시켰다. 그러나 제1대대는 전차를 앞세운 적에 유린되어 본래의 진지인 대전 동남의 寶文山(보문산·457m)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런 상황도 연대장에게는 보고되지 않았다. 이리하여 제1대대·제3대대 모두 격퇴되어 오전 6시30분경에는 보병을 차체 위에 가득 실은 적 전차가 시가에 침입했다.
거듭된 판단 착오
한편 갑천 東岸(동안)에서 논산-대전 도로를 방어하던 美 제19연대 2대대는 적의 격렬한 공격으로 진지를 고수하기가 곤란하게 되어, 대대 본부 가까이에도 포탄이 떨어지던 상황이었다. 그때 論山道(논산도)와 京釜道(경부도)에 적 전차가 진출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것은 아침 일찍 뷰캠프 연대장이 3.5로켓포로써 파괴했던 전차였지만, 제2대대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적이 후방에 진출한 것으로 판단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제2대대(19연대)도 제1대대(34연대)도 대전 동부 寶文山(보문산)으로 후퇴했다. 이 적전 이탈도 뷰챔프 연대장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그 무렵, 대전 시내에서는 전방부대의 철퇴를 알지 못한 딘 사단장과 뷰챔프 연대장이 함께 있던 병력을 독려하여 침입해 온 적 전차를 3.5인치 로켓포로 격파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압력은 점점 거세져 당초 계획대로 7월20일 밤 12시까지 대전을 방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딘 소장은 예정시간을 앞당겨 예하부대에 후퇴를 명했다.
한편 뷰챔프 연대장은 “대전 동쪽에서 적이 접근중” “錦山(금산) 방향으로부터 적 차량 북상중”이라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것들은 사단수색대와 제21연대이라고 오판, 포격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로써 미 제24사단은 북한군에 포위되고 말았다.
세천터널을 장악하지 못해 완패
북한군 제4사단은 우회작전을 통해 대전의 남쪽과 동쪽에 침투했다. 특히 동쪽으로 진출한 부대는 대전 동쪽 경부선의 細川(세천)터널을 점령하여 미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세천은 6·25 당시엔 옥천군 군북면 세천리였지만, 지금은 대전광역시 동구 세천동이다. 경부선의 세천터널은 원래 제21연대가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제21연대는 착오에 의해서인지, 세천터널을 지키지 않고 세천터널(길이 500m) 동쪽 1.3km에 위치한 증약터널(길이 1km)을 지키고 있었다.
필자는 최근 세천터널과 증약터널 사이의 세천역을 두 번 답사했다. 이제 세천역은 물자만 가끔 하역되고, 승객은 승·하차를 하지 않는 기차역이다. 높은 울타리로 막은 세천역은 출입구를 큰 자물통으로 닫아걸고 있어 점잖게는 출입할 수 없었다. 졸자는 유격훈련을 하는 자세로 펜스 옆과 벼랑 사이의 틈을 헤쳐가며 세천역 구내로 들어갔다. 驛舍(역사) 안에 역 직원이 모두 철수한 상태였다. 이러는 사이에 증약터널을 빠져나온 기차가 휙 달려오더니 정차하지 않고 세천터널 속으로 화살처럼 들어박혔다.
고지대에 위치한 세천역에서는 북쪽으로 4번국도와 경부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인다. 6·25 때는 우리나라에 고속도로 같은 것은 없었고, 국도라 해봐야 폭 10m의 非포장도로였다. 그래도 이것을 ‘신작로’ 또는 ‘1등도로’라 불렀다. 요즘 건설된 경부고속철도는 세천역에서 산 하나 넘은 서남쪽을 달린다. 이렇게 세천역 부근은 우리 역사에서도 가장 예민한 클리토리스(陰核)에 해당한다.
서기553년, 백제 중흥의 군주 聖王(성왕)이 신라군의 포로가 되어 참수당한 곳도 대전 동구의 食藏山(식장산)과 옥천읍 管山城(관산성) 사이의 골짜기인 ‘구진배루’, 지금의 37번국도상이었다. 성왕이 참수당한 후 관산성에 포진해 있던 성왕의 아들 扶餘昌(부여창·성왕 전사 후에 즉위한 威德王)은 匹馬單騎(필마단기)로 탈출했지만, 그가 지휘하던 백제·가야·왜국의 연합군 3만 명은 거의 모두 전사했다.
이로써 신라는 한반도에서 가장 경제력이 높은 한강·낙동강 유역, 둘 모두 차지하여 삼국통일의 지름길을 달릴 수 있었다. 대전전투에서도 이곳은 많은 사연을 남겼다. 대전전투 후 철수 시, 미 제24사단이 많은 손실을 입게 된 요인은 마달령 일대에 있는 세천터널과 그 북쪽을 지나는 4번국도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 제21연대는 증약터널만 장악하고 그 서쪽의 세천터널에는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결국 大田에서 철수하던 병력들은 적의 세천터널 차단선을 돌파하지 못했고, 각 부대 및 개인별로 산악의 ‘길 없는 길’로 철수하게 되었다.
제21연대장은 사단의 철수로인 세천터널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병력이 부족하여 두 개의 터널을 모두 확보할 수 없었다면 당연히 대전에서 가까운 세천터널 쪽부터 먼저 확보해야 옳았다. 제21연대는 옥천-대전 가도(4번국도)에서 도로정찰을 실시하였는지, 또 정찰에 의해 적의 도로차단 기도가 드러날 경우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두었는지, 지금으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1진지 점령시기를 놓쳤다는 이유만으로 제2진지에 눌러앉아 겨우 1km 남짓한 거리에서 빚어지고 있던 아군의 참극을 외면했다는 것은 군인으로서 용서받기 어려운 일이었다.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데다 일본 점령업무로 인해 실전훈련을 게을리 하여 전투력이 약화되어 있었던 만큼 전투 패배는 당연한 결과였다.
딘 장군의 실종
딘 장군은 7월20일 18시경 대전 시내 도로상에서 철수부대의 출발을 확인한 다음에 호위 차와 함께 沃川(옥천) 방향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앞장 섰던 호위차가 옥천방향 도로(4번국도) 들머리길을 지나쳐 錦山(금산) 방향인 17번국도로 잘못 들어서게 되었다. 17번 국도는 秋富(추부)에서 37번 국도와 만난다. 37번 국도는 최근에 聖王路(성왕로)로 명명되었다. 백제의 성왕은 관산성(지금의 옥천)으로 가기 위해 지금의 37번국도를 북상하다가 신라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斬首(참수)당했고, 딘 소장은 17번 국도로 남하했다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딘 사단장 일행이 5km쯤 남하하여 郎月里(낭월리·지금의 낭월洞) 부근에 이르렀을 때 금산 방향 도로가 적에 의해 차단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의 습격을 받아 파괴된 차량과 부상병 몇 명을 만났다. 딘 장군은 부상병을 그의 전용차와 호위차에 실어 부관 클라크 중위가 인솔토록 하고, 자신은 남아 있는 병력을 수습하고 있는데, 때마침 그곳으로 온 반궤도 포차 1대에 나머지 병력을 실어 클라크 중위 일행을 뒤따랐다. 그들이 다시 1.5km쯤 남하했을 때 클라크 중위는 어깨에 적의 기관총을 맞아 부상했다.
어두워질 무렵, 이들은 도로 서쪽 고지에 이르렀다. 부상병들은 갈증을 호소했다. 사단장은 손수 수통을 들고 계곡으로 내려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실신하고 말았다. 그 이튿날 새벽 3시가 넘도록 딘 사단장이 나타나지 않자 클라크 중위는 종일 그 부근 숲속에서 수색했지만, 딘 사단장을 찾지 못했다.
추락한 지 몇 시간 후 정신을 차린 딘 장군은 그 이튿날부터 벼 이삭을 씹으며 혼자 산야를 헤매었다. 그 뒤 딘 장군은 茂州郡(무주군) 赤裳面(적상면) 방이리 거주 박종구 씨 등의 도움을 받아 1개월을 더 산속을 헤매다가 鎭安(진안)까지 남하하였으나, 그가 도움을 청했던 한두규·최천봉(진안군 안천면 노성리)의 밀고로 完州郡(완주군) 상전면 운산리에서 적 자위대원 20명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날이 8월25일, 대전을 떠난 지 36일째 되는 날이었다. 당초 90kg이 넘던 그의 몸무게는 58kg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는 3년의 포로생활을 마친 뒤인 1953년 9월4일에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딘 장군은 1981년 82세로 별세했다. 밀고한 두 한국인은 5달러에 해당하는 3000원 씩을 북한군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수복 후 그들은 총살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