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레위기 11장 1-8절)
“먹는 게 남는 것이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이 살면서 제일 즐거운 때가 먹는 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먹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즐겁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누구나 다 행복해 보입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잘 먹여 주기만 하면 그런대로 버틸 수 있는데, 일도 힘든데 먹는 것도 부실하면 짜증과 스트레스가 폭발합니다. 요즘 대박 수준으로 매출을 올리는 식당들을 보면 위치가 어디에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맛있다고 소문만 나면 골짜기에 있어도 다 찾아다닙니다. 잘 먹어서 건강하면 좋죠. 잘 먹고 싶어도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맛있는 식당 후기를 올리는 파워블로거들의 글을 읽다보면 저기 꼭 한 번 가봐야 되겠다는 생각보다, 저 음식들 다 먹어보고 글 올리려면 돈 많이 들어가겠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비싼 음식이 꼭 몸에 좋은 것은 아닙니다. 콩 음식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다 아실 겁니다. 콩은 단백질이 40% 지방이 20%가 들어 있을 만큼 영양소가 풍부한 식품으로 식물이라기보다는 밭에서 나는 고기라고 말 할 정도로 암 발병의 위험도 줄일 뿐만 아니라 콜레스테롤의 수치도 낮추어주고 비만을 감소시켜주는 신비의 식품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경제 사정이 어려워도 콩 정도는 드실 수 있잖아요. 콩 많이 드시고, 건강하십시오. 먹는 이야기를 하니까 더 배가 고파지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제일 걱정거리가 우선 물이고 다음이 음식, 그 다음이 잠자리 였습니다. 이 세 가지만 어느 정도 충족 되면 그런대로 살만 했습니다. 물은 하나님께서 반석에서도 나오게 해 주셨고, 음식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여 주셨고, 잠은 임시나마 천막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대책을 세워 놓으시고 광야로 인도해 내신 것입니다. 만나라는 음식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요즘의 밀가루처럼 반죽을 해서 빵을 만들어 먹는 가루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만나를 40년간이나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와 야채와 기타 과일 같은 것들을 얼마나 먹고 싶었겠습니까? 우리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40일 동안 김치 하나만 반찬으로 먹이면 아마 다 집을 뛰쳐나갈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돌아다니다가 눈에 아무 음식거리라도 보인다면 닥치는 대로 먹고 싶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동물도 마구잡이로 잡아먹었을 것이고, 식물도, 과일 열매도 씨가 말랐을 겁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백성들의 음식문제의 질서를 바로잡아주기 위해 규정을 세워서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할 것”을 구분해 주셨습니다.
오늘 레위기 11장 전체가 정(淨)한 음식과 부정(不淨)한 음식이 무엇인지 구분해 주신 말씀입니다. 먹어도 되는 정한 음식 보다 먹지 말아야 하는 부정한 음식의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그 종류도 다양해서, 가축, 야생동물, 조류, 파충류, 양서류 등, 거의 모든 동물들을 망라해서 세밀하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이름만 보면 무슨 동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각양각색입니다. 먹어도 되는 정한 음식은,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동물이 소, 양, 염소, 사슴 등이 있습니다. 먹지 말아야 하는 대표적인 동물에는 돼지(멧돼지), 개, 말, 등이 있습니다, 돼지는 굽은 갈라져 있지만 새김질하지 않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 규정대로 하면 삽겹살과 보신탕 많이 먹고 있는 우리나라는 성경을 어기고 있는 나라입니다. 성경규정을 지키려면, 식탁에 자주 오르는 오징어나 회집의 단골메뉴인 산낙지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이 밖에도 랍스터, 전복, 새우, 굴 등의 해산물도 먹어서는 안 됩니다. 뷔페에 가기도 곤란해지죠. 성경에 나온 대로 하자면 식탁이 많이 빈곤해 질 것 같습니다.
먹는 것에 있어서 기독교 보다는 타종교나 이단들이 더 엄격합니다. 힌두교는 소를 신성시하고, 인도 불교의 소수종파 중 하나는 걷다가 발에 생물이 밝혀 죽을까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앉아서 굶는 것이 최고의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굶어 죽으면 최고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추앙된다고 합니다. 불교는 불살생(不殺生)의 교리에 따라 오로지 채식을 강조합니다. 유대교는 생선과 곡류(Neutral food)는 동시에 섭취해도 되지만, 우유와 육류는 동시에 섭취하지 않습니다. 그릇도 별도로 사용하고 일회용을 사용하고, 동물의 피는 절대로 섭취하지 않습니다. 반추동물(되새김)의 고기만 먹고, 비늘이 있는 생선만 섭취합니다.
이슬람교는 이슬람 율법이 정한 기준과 절차에 따라 생산하고 가공된 것만을 허용 하는데 이를 ‘할랄(Halal-허용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슬람들이 먹는 육류는 이슬람의 신인 알라의 이름으로 도살된 고기만을 취급하여 할랄 마크가 부착되어 있는 것만을 허용한다. 이슬람들이 먹지 말아야 하는 육류는 돼지고기, 개, 고양이 등의 동물이나, 자연사했거나 잔인하게 도살된 짐승의 고기 등은 ‘하람(Haram-금지된 것)’이라고 부르면서 엄격하게 규제 합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는 교리상으로는 구약 율법의 정결한 짐승은 허용하면서도 육식을 일체 금하는 채식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살코기 대신 견과류, 동물성 지방 대신 올리브유, 흰 밀가루 대신 통밀가루로 만든 빵의 섭취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몰몬교)는 경전 중 하나인 ‘교리와 성약’에 명시된, 독한 음료와 뜨거운 음료를 금한다는 교리에 따라 콜라와 커피, 홍차, 녹차 등을 먹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창세기 1장 29절에서,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용한 주식은 채식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채식규정을 지킨 것은 아니어서 타락한 많은 인간들은 육식도 마음대로 하고, 동물의 피도 마음껏 취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며 지냈습니다. 하나님이 육식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시기는 노아의 홍수 이후입니다. 창세기 9장 3, 4절의 말씀입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2천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까지는 인간들에게는 육식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무분별한 동물 살육으로 인해 인간이 점점 포악해지는 것을 염려하셨고, 가인과 아벨 사건에서 보듯이, 피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육식을 금해놓으셨습니다.
노아에게 말씀하신 육식명령이 구두로 된 허용 이셨다면, 모세에게 말한 레위기 11장의 음식규정은 명문화된 육식명령 입니다. 레위기의 음식 규정이 공표된 이후에는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에 나온 대로 정한 음식만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먹는 문제로만 이러한 규정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음식 문제를 통해서 모든 율법조항들을 연관시켜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음식문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고 싶다고 해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먹고 마시며 살아서는 안 되고, 절제하고, 질서 있고, 품위 있는 행동을 할 것을 주문하신 것입니다.
음식규정을 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세는, 외면적으로는 먹는 문제도 조심하여야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언행과 마음자세까지도, “해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해서, 매사에 조심하고 분별력 있는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지켜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는 레위기 19장의 말씀처럼, “나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선민으로서의 거룩한 삶,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음식 규정에 담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먼저 살펴 볼 것은 외면적으로 보여지는,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 알아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정에서 잔치를 위해서 고기가 필요하다든지, 여러 가지 이유로 고기를 먹으려고 한다면 꼭 정해진 장소인 성막의 뜰에서 가축을 죽여야 했습니다. 성막 안에서 잡은 가축만 먹을 수 있게 허용하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먹을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제일먼저 감사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먹을 것은 혼자 먹지 말고 나누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에 감사기도를 하는 행위가, 성전 앞에 가축을 잡으려고 나아가는 백성들의 마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감사하지 않는 삶, 감사함 없이 음식을 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불순종의 사람들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복도 없고, 빈곤과 파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청교도(Pilgrim Fathers)들이 미국에 정착하고 제일 먼저 했던 일이 교회를 세우고 감사를 드렸던 것이고, 그들이 처음 수확물을 거두었을 때의 축제는 감사의 절기가 되었습니다. 감사를 앞세우는 나라는 부강함과 풍요의 복을 받게 되고, 감사하는 것이 습관이 된 민족은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시는 번영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막에서 가축을 잡는 다른 이유는, 감사와 더불어서 음식을 먹을 때 오직 내 건강, 내 만족을 위해서 먹는 것으로만 그치지 말고 꼭 이웃을 생각하며 나누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음식을 나누는 것은 사랑을 전하는 좋은 방법이고 관계를 좋게 하는 최고의 재료가 됩니다. 시골 인심이 좋은 것 중에 하나가 음식을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음식 심부름 많이 다녔습니다. 소쿠리나, 쟁반에 음식 담아다 이웃집에 갔다 주면, 꼭 그 가져갔던 그릇에 다른 음식을 담아 주셨던 후한 인심들이 기억이 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에서 가축을 잡으면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린 후에, 제사장도 고기를 먹고, 가축을 잡은 사람도 고기를 먹고, 이웃과도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특별히 감사의 희생제사를 올린 후에 고기를 먹되, “이튿날 까지 두지 말라”고 규정했는데, 그 이유는 가능한 한 주위의 많은 사람과 나누어 먹으라는 의미입니다. 음식하나로, 하나님과 관계가 좋아졌고, 제사장을 통해서 축복도 받았고, 이웃에게 고기를 나누어주는 후한 인심으로 칭찬도 받았습니다. 나누게 되면 일석 삼조의 효과를 얻게 됩니다.
요즘에는 well- being시대라고 해서 부쩍 먹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T.V에서 전국의 맛집을 소개하거나 요리사들이 경쟁을 하는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요리사라는 말보다는 쉐프(chef)라는 말이 더 익숙해졌습니다. 어린이들도 장래희망이 chef가 되는 꿈을 가진다고 합니다. 이러한 먹거리를 중시하는 시대에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과소비와 낭비가 심화되지 않는가라는 점과, 나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철저한 개인 유흥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성경의 가치관은 허용된 음식을 나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경험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받을 때 기쁨보다 나눌 때의 기쁨이 훨씬 더 큽니다.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이 좋은 음식을 먹거리로 허용하신 온전하신 뜻을 이루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먹어도 되는 것에는 감사와 나눔이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앞에서 다 답이 나왔습니다. 감사하지 않고 먹는 음식, 이웃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나만 먹으려는 지나친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먹지 말아야 하는 음식이, 먹어도 되는 음식보다 훨씬 더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풍족하면 더 감사하고, 더 나누어야 되는데, 인간은 부요해지고 풍족해지면 점점 교만해져서 감사는 하지 않고, 이웃에게는 더 인색해집니다. 하나님이 복과 저주의 말씀을 하시면서도, 복 주시는 말씀보다, 저주의 말씀을 몇 십 배 더 많이 하신 이유도, 인간이 그만큼 하나님을 배반하고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임을 경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완악함을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먹어도 되는 음식을 아주 적은 숫자로 제한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도 오직 만나만이 주식이었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매일 같이 일용할 양식을 채워 주시는데도 감사와 나눔, 단 두 가지를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목이 곧고 완악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먹는 문제에 대해서 먹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의 문제를 더 이상 논하는 것보다 한층 더 높은 수준의 인식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레위기 11장의,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의 규정이 폐지되었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는 다 자유의사에 의해서 먹고 있으니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음식을 먹는 어떠한 것도 제약을 받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설립된 신약시대에도 먹는 문제 때문에 논란이 많았는데, 교회의 최고지도자들이 모였던 예루살렘공회의에서 먹는 것에 관해서는, “우상에게 드려진 더러워진 제물 음식,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 짐승의 피” 이 세 가지를 먹지 말라고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결정한 것은 이 외의 음식은 자유롭게 먹어도 가능하고, 음식 먹는 문제로 인해 더 이상 교회 내에서 믿는 사람들끼리 분쟁하지 말라는 규칙을 세운 것입니다. 먹는 것에 부담감을 갖지 말고 자신의 선택과 결정대로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먹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더 절실한 것이, 형제를 사랑하고, 불신자를 구원으로 인도하는데 먹는 문제를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먹는 문제로 인해 논쟁이 많았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 하기를, “모든 음식은 양심에 따라 먹되, 나를 위하지 말고, 남을 위하라고 하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은,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는 문제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실족하거나 복음의 통로가 막히는 것을 더 염려 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고기 먹는 것보다 형제를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값진 일입니다. 우리가 좋은 음식 먹을 때, “아, 배불러, 너무 맛잇다, 다음에 또 오자” 이렇게 감탄만 하고 포만감을 즐기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아!, 이 음식을 00와 같이 먹으면 마음을 조금이라도 마음을 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 번 대접해보고 슬쩍 전도한번 해볼까?” “야!, 이 음식 진짜 맛나네, 나 혼자 먹기 아까운데, 00집사님 좀 사다 드려야지” 이렇게 내 주변에 전도할 대상을 교회로 나아오게 하는데,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에게 대접하는 마음으로 모든 먹는 문제를 연결시켜 가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 이었습니다. 배고프고, 추위에 떨며, 어둠의 구석에서 숨어 지내는 잃어버린 어린 양들을 찾아서 배불리 먹이고, 그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데 맛있는 음식을 사용하는 것이, 수준 높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방향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먹는 문제에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항상 레위기의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이 지닌 의미와 정신은 항상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우선시 하는 삶, 주신 것을 이웃에게 나누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음식을 지혜롭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이 대접하시고, 많이 섬겨 보십시오. 기분도 좋아지고, 구원의 열매도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가 먹을 때마다 하나님께 충분하게 감사를 드리시고, 먹을 때마다 이웃에게 나누려는 따뜻한 마음을 품으셔서, 이 세상에 예수님의 사랑의 온기를 많이 전하여서, 불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음식문제를 내면적으로 바라보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되는 것”에 대해 알아봅니다.
예수님이 사역 중에 바리새인들과 식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왜 당신 제자들은 장로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비판적으로 질문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생각하기를, “오라, 이제 딱 걸렸어, 부정하게 음식을 먹는 장면을 목격했으니 변명도 못하고 꼼짝 못하겠지”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사야 29장 13절의 말씀으로 응수를 하십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하는구나” (6-7절)”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입술’과 ‘마음’입니다. 먹는 입은 깨끗한 척 하면서, 정작 음식물이 들어가서 소화되는 몸 안의 마음은 더럽고 불결하다는 질책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고 말씀 하셨습니다. 손 씻고 먹으면 위생에 좋죠.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비판할 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 합니다. 8복 중에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어디를 가든 음식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겉과 속이 다른 신앙행태를 ‘외식주의’라고 합니다. 이런 외식적인 신앙이 되는 것은 자신의 육체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막뜰 안에서는 제사를 위해서든, 먹기 위해서든 매일 같이 가축을 죽여야 했으니 성막 안에서는 동물의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았고 피 냄새가 진동을 했을 것입니다. 가축이 완전히 죽어야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가축이 죽는 것은 희생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겁니다. 살아가면서도 마찬가지이고, 예배의 자리에서는 더욱 더, 내 자신이 가축과 같이 완전히 죽지 않고는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세례와는 달리, 우리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의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할례(골 2;11)를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곧마음의 할례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내 육체가 완전히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육체가 죽었다는 생각을 한 시도 잊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육체가 죽었다는 것을 쉽게 표현하면 리셋(reset)이 되어서 아무것도 남지 않고 텅 빈 상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겁니다.
성막 안에서 완전하게 죽은 가축이, 자기 잘났다고 뽐내고, 자기 자랑 일삼으며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아 육체가 완전히 죽어버린 사람이, 돈이 왜 필요하고, 명예와 권력이 무슨 소용이 잇습니까? 안 죽었기 때문에 내 성질, 내 자존심 내세우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무관심을 갖게 되고, 말씀을 멀리하고, 기도는 내일이 아닌 것처럼 여기고, 예배시간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겉만 포장된 채로 살아가는 ‘외식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성령 받았던 베드로조차도 먹는 문제 때문에 외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또 베드로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부정한 음식들을 세 번이나 보고서도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있는 유대 율법주의를 단 번에 버리지 못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그럴 지경이었는데, 우리가 얼마만큼 우리의 육체를 죽이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내 마음에는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온통 쌓여져 있는데도, 우리의 관심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너무나도 안타까워하고, 한편으로는 씁쓸해 하실 것 같습니다. 내 육체를 죽여 가는 일은 평생토록 하여야 하는 절대 절명의 과제이고, 한 시라도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마음의 생각이었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 외길 밖에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을 채워가는 것, 이것이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의 육체를 죽이신 이유는, 오직 예수님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셔서, 죽어버린 우리의 육체를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려 주시기기 위함입니다. 내가 살아야 내 가족도 내 이웃도 살릴 수 있습니다. 가을에는 살좀 쪄도 됩니다. 살 찔 걱정하지 마시고 맛있는 것 많이 드시고, 힘내십시오. 시간 되시면 서로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들을 마련해서 좋은 교제들도 나누십시오. 다 드셨으면 소화도 시키셔야죠. 커피가 소화제가 아니라, 기도가 소화제입니다. 좋은 음식 먹고 힘이 생기셨으니, 그 만큼 힘써 기도하셔서 예수님이 내 안에 꽉 차도록, 예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하게 채워지도록 구하고, 또 구하십시오. 예수님이 내 안에 가득 채워지면, 제가 여러분들을 말린다고 해도 이웃에 나가서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몸이 뜨거워 질 것입니다. 저는 00교회 모든 성도 분들이 먹고, 기도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아서 영혼구원의 열정이 불같이 일어날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를 많은 기도로 협력하시고,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레위기 11장의 먹는 문제와 관련해서, 외면적으로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내면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먹을 때마다 항상 감사와 나눔을 생각해야 하고, 먹는 문제 보다 영혼을 구하고 살리는데 축복의 통로로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지 말고, 더러운 마음의 속을 정리하여 외식주의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오직 예수님을 채워가는데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정한 음식, 부정한 음식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녀로 거룩하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입니다. 말씀대로 따르고 순종해서, 우리 00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충만하게 채워감으로,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이 부요해지고 풍족해져서 날마다 감사, 날마다 나눔의 자리가 되기를 바라고, 00교회는 영혼구원의 열정이 불같이 일어나서 하나님께 큰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날이 속히 올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들에 있는 꽃들도, 공중에 나는 새들도 다 먹을 것을 예비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먹을 때마다 감사하고, 먹을 때마다 이웃에게 나누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먹는 것 보다는 우리 마음을 청결하게 하여 외식적인 신앙을 버리도록 도와주시고, 오직 예수님을 마음에 가득 채워, 복음의 열정으로 영혼구원에 앞장서는 00교회 모든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김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