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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33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성경을 읽다보면 종종 읽기 어려운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족보를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1장과 같이 누가 누구를 낳고 혹은 누구의 아버지는 누구이고 하는 등의 내용은 집중해서 읽기가 참 어려운 내용들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고 처음 성경을 읽을 때 마태복음 1장에서 걸려서 더 이상 읽지 못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처음 대할 때는 나름대로 그 종교의 경전으로서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펴는데 처음부터 나오는 것이 오로지 아이 낳는 이야기이니 이게 도대체 족보인가 아니면 성경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새신자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권할 때 마태복음 2장부터 읽으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그런 예가 마태복음 1장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족보이야기는 아니지만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지루하게 느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여호수아 13-21장까지는 각 지파 별로 땅을 분배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어떤 지파에게는 무슨 땅을 주었고 하는 내용이 21장까지 나옵니다. 여러분, 걱정되지 않으세요? 앞으로 도대체 그 긴 내용을 언제, 어떤 식으로 다 설교를 들어야 할 지 말입니다. 인내심이 깊은 사람이라도 이 부분을 집중해서 읽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이런 내용들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지루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땅에 사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는 성경시대와 우리와의 간격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적인 간격, 공간적인 간격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당시 사람들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한번 상상력을 발휘하여 당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로 지냈습니다. 아주 긴 시간을 다른 나라에서 노예로 갖은 학대를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모세라는 걸출한 인물의 인도를 통해 애굽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그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는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이 바다를 넘으면 곧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꿈을 꾸면서 기대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수 있는 것이, 사실 홍해를 넘어서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가는 것은 한 달 정도, 약 30일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애굽을 탈출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황량한 광야였습니다.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죽음의 땅 광야에서 그들은 40년간을 방황했습니다. 그러던 사이에 1세대들은 대부분이 죽고 말았습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죽어가면서 애굽에서 나온 1세대들이 얼마나 가나안 땅을 사모했을까요? 아마도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들은 자기의 부모들로부터 수도 없이 많이 가나안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정말 기적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첫 관문이었던 여리고성이 정말 기적적으로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대부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오늘 본문에 있는 땅 분배기록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약속의 땅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오늘 본문에 담겨 있는 땅 분배에 관한 기록이 지루한 지명의 나열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눈물겹도록 소중한 기록인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소위 집문서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6.25전쟁과 관련하여 월남한 분들은 지금도 그 때의 집문서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통일이 되기만 하면 올라가서 내 땅을 찾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집문서를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실제로 통일된 이후에 아주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내 땅 한 평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소작농으로 생활하셨던 분들은 내 땅 한 평이라도 소유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땅이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셋방살이의 설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식으로 말하면 세를 살든 내 집에 살든 생활에는 큰 차이가 없는데 한국사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셋방살이를 하는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언제 주인이 나가라고 할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임대차 보호법이 강화되어서 상황이 나아졌지만, 전에는 어느 날 주인이 가격을 올려달라고 하고 싫으면 나가달라고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셋방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이 인생의 소중한 꿈 중에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비슷한 정서가 남아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잘 모르는 서양의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20~30년 동안 월급 받은 것을 착실히 저축해서 집을 장만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내 집 마련을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아주 바람직해서 권장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무랄 일도 아닙니다. 한국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정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내 집 마련의 정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언제 우리도 땅에 정착해서 그곳에 농사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꿈처럼 생각했고, 자기의 부모들이 그것을 꿈으로만 생각하다가 결국엔 소원을 성취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역사적 배경을 먼저 이해하고 본문을 바라볼 때 오늘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땅에 대한 말씀을 이렇게 길게 기록하는가?
그런데 우리가 이 부분에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왜 성경은 이 부분에서 이렇게 땅에 대해서 길게 기록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땅에 대한 기록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을 향한 절박한 소원 때문이라면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여호수아서를 강해하면서 첫 주에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땅은 여호수아서의 중심 주제입니다. 여호수아서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말씀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먼저 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이 여호수아 때에 와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는 땅에 대한 약속과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13 - 21장에서 각 지파의 기업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은 단순히 부동산의 소유를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정확하게 성취된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동시에 앞으로 차지할 땅의 목록도 제시하여 앞으로도 계속하여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3장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차지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2-6절은 이스라엘이 앞으로 차지해야 할 땅의 목록들입니다. 비록 여호수아가 늙었고 정복할 땅은 아직도 많지만 여호와의 권능은 이 과업을 수행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영도로 가나안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남은 땅을 분배하여 각 지파에게 맡기라고 요구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라는 탁월한 영도자를 잃고 각 지파 별로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 지파 별로 전쟁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신 것이 아닙니다.
다 같이 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6]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의 산지 모든 거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나의 명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이 말씀에 보면 "내가 그들을 쫓아낼 것"이라고 분명한 약속을 주고 있습니다. 지도를 놓고 이미 정복한 땅과 남은 땅을 대조해보면 이 약속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아주 넓은 땅을, 저 북쪽 위까지 차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분이 아닙니까? 늘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무모해 보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것입니다.
이 약속이 주어진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1 장에 보면 모세가 죽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는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더 이상 군대를 지휘하는 지도자로서 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번에는 오히려 더 강력하게 이 약속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비록 모세가 떠나고 여호수아가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늘 살아 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종들의 유한한 목숨에 제한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일견 지루해 보이는 땅의 목록을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땅은 이미 차지한 것이고 또 어떤 땅은 앞으로 차지해야 할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목록을 주시면서 자신의 분명한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많은 땅을 차지했지만 아직 완전히 얻은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둘의 중간에 끼어 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씀에 감격하지만 때로 우리의 현실을 보며 절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약속이 감격스럽지만 아직도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살고 있는 자신을 볼 때 절망적인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우리가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끼어 살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두 나라 사이에서 끼어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이런 소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믿음의 순례길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런 사실에 대해서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과거의 승리를 통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도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 21-2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21]평지 모든 성읍과 헤스본에 도읍한 아모리 사람 시혼의 온 나라라 모세가 시혼을 그 땅에 거하는 시혼의 방백 곧 미디안의 귀족 에위와 레겜과 술과 훌과 레바와 함께 죽였으며 [22]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도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
오늘 본문 8-33절에서는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지파의 기업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지금 우리가 함께 읽은 22-23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에 승리한 것을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발람은 물론이고 시혼과 옥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가 거듭 언급되고 있습니다. 왜 약속의 땅을 열거하면서 이런 과거의 승리들을 다시 반복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과거의 승리를 통해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만 역사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상들의 삶에서만 역사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성취하신 것처럼 지금 이 약속도 반드시 성취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많은 유혹과 도전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에 내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이 오늘도 내게 주신 약속을 이루시는 분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우리 앞에는 남은 땅이 많습니다.
여전히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있습니다. 그 땅은 아직 우리의 땅이 아닙니다. 대적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땅입니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이 땅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땅, 여전히 복음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가야하는 이유이고, 그들에게 다가갈 때, 확신과 기쁨가운데 갈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것이 힘이 들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우리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그 남은 땅을 향해서 우리는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믿음의 순례길을 걸을 때, 이미 얻은 것 때문에 방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3]그술 사람과 마아갓 사람은 이스라엘 자손이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술과 마아갓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더라
이 말씀의 앞에는 정복한 땅의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정복한 땅을 열거하다가 왜 갑자기 정복하지 못하고 남겨둔 땅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왜 갑자기 그술과 마아갓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방심 혹은 안주를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러 정복한 땅을 이야기하다가 이 말씀을 슬쩍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그렇게 간단히 지나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 방심하고 안주하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족속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들었으면서도 많은 족속을 정복했다는 이유로 그술과 마아갓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 성취하고 나면 안주하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안정을 추구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취한 것을 가지고 방심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남은 땅이 많이 있습니다. 방심하지 말고 주님의 약속을 따라 잃어버린 양을 찾도록 찾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아직도 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새누리에게 주신 사명이 모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연구단지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건지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정도면 좋은 교회라고 자위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미 얻은 것 때문에 방심하고 안주하는 교회가 되면 결국은 그 남겨 놓은 것이 화근이 되어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는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내 판단대로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개척 초기에는 열정을 가지고 뛰어들어 헌신하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열정은 사라지고 나중에는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여 안주하고 싶어합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각에서 행해지고 있는 세습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세습문제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교회들은 대부분 대형교회입니다. 그 교회들이 대형교회가 되기까지는 사실 창립자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 그 일에 헌신했기에 그런 교회를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은 안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열매를 따먹고 그 열매를 누리며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피땀 흘려 일군 교회이므로 그 정도는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결국 그들을 넘어지게 했습니다. 현재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며 안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주신 명령을 따라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도록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님의 명령을 따라 끝까지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3) 우리가 이 믿음의 순례길을 걸을 때 눈에 보이는 땅 때문에 진정한 기업이 무엇인지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모든 백성들에게 땅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레위 지파에게만 땅을 주지 않았습니다. 본문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4]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 그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음이었더라
계속해서 본문 32-3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32]요단 동편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분배한 기업이 이러하여도 [33]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왜 레위 지파에게만 기업을 주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레위 지파에게만 여호와가 그들의 기업입니까? 다른 모든 지파에게는 땅이 기업이고 레위 지파만 여호와가 기업입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뜻으로 레위 지파에게만 땅을 주지 않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실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레위 지파는 기업이 없으므로 백성의 십일조 가운데 일부가 그들의 기업입니다. 백성들이 드린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지파들은 그들의 수입 가운데 일정부분을 떼어서 레위 지파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레위지파의 백성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다른 지파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자신들의 수입 가운데 일부를 레위인들에게 주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기업이라는 사실을 되새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들에게도 하나님만이 참된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 때마다 되새기고 또 되새길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레위 지파에게 기업을 주지 않은 것은 단순히 레위 지파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레위 지파는 온 백성에게 샘플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업이라는 것을 온 백성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레위 지파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지파의 백성들도 그들을 바라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기업이심을 기억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눈에 보이는 것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삽니다.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가 진정한 기업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기업은 여호와가 아니고 땅입니다. 그래서 늘 잊고 삽니다. 보이지 않는 기업은 젖혀 두고 눈에 보이는 기업만을 추구하면서 삽니다. 우리 교회는 요즈음 건축에 관한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진행하면서 제 마음에 심히 우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우리의 기업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기 위한 전진기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공식적으로는 건물이 교회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상황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온통 건물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분명히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건물을 짓는 문제를 논의할 때도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한 수단으로서 건물문제를 논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덧 우리의 논의에서는 건물의 가격과 땅의 가격에 대한 것이 중심에 있고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것은 저 뒤로 밀려나 있습니다.
우리의 기업이 무엇입니까?
땅입니까?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까?
교회가 진정으로 추구할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건물입니까?
아니면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일입니까?
건축에 관한 일을 진행한다고 해서 이런 기본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할 일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추수하는 일이지 땅을 사고 건물을 매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든지 교회가 해야 할 본연의 일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건물을 사거나 땅을 사는 것은 오직 잃어버린 영혼을 추수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는 건물을 마련하고 하나님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아름다운 건물을 마련하고 우리끼리 좋아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건물을 보시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다른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때 우리가 땅을 기업으로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우리는 여호와만이 나의 기업이시라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 애가는 이스라엘이 땅을 빼앗긴 후에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기록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19-24은 진정으로 우리의 기업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땅을 빼앗긴 후에 기록한 것입니다.
[19]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21]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22]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24]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그들은 모든 땅을 빼앗겼습니다.
한 평의 땅도 자신들에겐 이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으로 주신, 선물로 주신 모든 땅을 빼앗겼지만, 그들은 그 땅을 빼앗긴 순간에 여전히 여호와가 우리의 기업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땅을 빼앗겼을지라도 여호와는 여전히 그들의 기업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상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업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땅을 빼앗기고 절망가운데 있지만 그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여러분의 기업은 여호와이십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땅이 아니라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업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그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땅이 있고 없고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믿음의 순례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언젠가 진정으로 이런 참된 삶의 고백이 나오기를 원합니다.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하박국 3:17-18)
기도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땅을 보며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 선물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에게 그런 것이 없을지라도
주님 한 분으로 인해 만족하고
주님이 내게 계심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새누리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