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무진(谿山無盡)
박경선
해마다 4, 5월이면 추사 김정희 특별 기획전이 전국 곳곳에서 열린다. 작년에는 제주도에 가서 추사관을 찾았지만, 올해는 추사 김정희 탄신 240주년을 맞아 대구 간송미술관에서도 추사와 그 제자들의 《그림 수업》특강이 있었다. 4월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육행정 연수반 101기 모임 회원 20여 명을 대구 간송미술관에 초대해서 특강을 들으며, 학문과 예술과 교육이 하나로 녹아든 작품들에 대해 조금 깊이 공부해보았다. 5월에는 영남수필문학회에서도 간송미술관을 찾았다. 올 때마다 <계산무진> 네 글자 앞에서 마음이 머문다. 어린 시절에 현액(懸額)에서 처음 본 ‘산’ 자는 습자 시간, 내 연습장에 썼던 글씨처럼 다른 글씨들과는 전혀 균형이 맞지 않아 오히려 정겹게 보였다. 나 같은 문외한을 염두에 두고 환재 박규수는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라고 예언했다. ‘무진’도 정자로 쓴 글씨체가 아니고 끝없이 흐름을 회화 미가 흘러넘치도록 표현하고 있었으니, 내 눈에는 글씨가 글씨로 보이지 않고 자유롭게 춤추는 그림으로만 보여 황홀하기만 했다. 이렇게 느낄 사람들에게 박규수는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차차 글씨체에 관해 공부해 보니 유별나게 크게 보이는 '계(谿)' 자와 짧게 덜렁 올라앉은 ‘산(山)' 자가 서로 어울리는 모습이 서로를 배려하고 지지해 주는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선학자들의 해설도 조금 알아듣게 되었다.
’뫼 산 자가 가장 단순하고 낮은 모양이면서 복잡한 좌우 글자들 사이에 끼여 중심을 잡아 주어 좌우 글자들의 형세를 극대화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盡 자에서 그릇 ‘맹’의 맨 아래 기로획을 ’山‘ 자 아래 빈 공간으로 굵고 길게 뽑아냄으로써 전체를 지극히 안정시켜 첫 자인 ’谿‘자, 끝 자인 ’盡’ 자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이로써 谿山無盡 네 자는 진서와 고예 및 팔 분석법을 두루 혼영하고 해서와 행서 초서의 필법으로 자법과 장법을 창신 해내어 추사체의 완결체를 과시한다‘-최완수
‘전‧예‧해‧행 초서의 필법이 융합된 추사체의 완결이자 서화 일치와 법고창신의 전형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추사는 외형에 치중하는 사실주의 화법에서 벗어나 문인의 사유체계를 필 목의 순수 조형으로 담아내어 그림의 격조를 높였다. 장식적 기교와 상업성이 짙어지던 조선 말기 화단에 일어난 각성이자 문인화의 본질을 돌아보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평을 읽으면서 ‘그 정도로 좋은 작품이었구나!’하는 경이로움에 옷매무새를 고치며 다시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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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마음 끌렸던 것은 어려운 글씨체보다 글씨의 뜻이었다.
시내 계(谿), 뫼 산(山), 없을 무(無), 다할 진(진). ‘산과 시내는 다함이 없다’는 뜻이 귀신 들린 신기처럼 내 마음을 붙잡았다. 단순히 자연의 풍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뜻으로만 다가오지 않았다. <계산무진> 글자가 흘리는 묵향을 타고 추사가 이 글씨를 쓴 시기를 찾아봤다.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경기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노년을 보내던 68세 무렵(1853년 전후)이었다. 조선 후기 당쟁에 휘말려 9년간 제주 유배 생활을 하며 학문과 예술에 매진하며 ‘谿山無盡’이라는 글씨를 김수근(당시 이조판서)에게 써 보낸 글씨라 한다. 스스로를 '谿山樵夫(계산초부, 시냇가와 산에 사는 나무꾼)'라고 칭한 김수근은 추사의 이 작품을 받고, 추사의 유배 생활의 고통을 서로 이해하며 예술적 영감을 나누던 소중한 벗이 되었겠다. 김수근은 이 글씨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1854년에 세상을 떠났고, 추사는 2년 뒤에 생을 마감했으니 ‘谿山無盡'은 두 거장이 이승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이며 영원(無盡)을 향한 '마음 나눔’의 글이었겠다. 김수근에게 칭송해 써 보낸 ‘계산무진’은 단순히 산천이 아름답다’는 찬사만의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의 우정과 추구하는 정신세계가 영원히 다함이 없기를 바란다’는 축원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자연만 영구히 흐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간을 품고 사는 자연이라야 자연의 존재성과 의미가 살아나지 않을까.
자연이 담고 있는 심오한 통찰을 글씨나 그림만으로 다 담아낼 수 없듯, 삶의 가능성도 한계에 갇힐 수 없다는 추사의 통찰이 이 현액의 작품 속에 담겨 보였다. 제주도 유배의 고독 속에서도 서적을 구해 보낸 제자에게 ‘세한도’를 그려보내고, 칠십 평생 10개의 벼루, 1,000자루의 붓으로 끊임없이 필법을 바꾸며 자신을 벼려낸 정신! ‘유배지’라는 한계에 갇히지 않으려는 통찰로 자신을 지켜낸 위대한 예술가의 길! 그 길 위에서 갇힌 공간, ‘유배지’라는 한계를 딛고 유구히 흐르는 물처럼 살다 가신 예술가의 삶이 경애로웠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유구한 자연의 품 안에서 살다가 그 품을 벗어나면 다른 세계로 떠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남편이 퇴임하고 흙 만지며 살고 싶어 조용한 시골집을 찾아다닐 때, 집 앞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산에는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마을이라 ‘계산무진’ 이라고 표현하기에 딱 좋은 산동네였다. 산 아래 납작 엎드려있는 집은 15채! 동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사는 집처럼 정겨워 보였다. 집을 보러 갔을 때 대문이 열리며 668평의 잔디밭에 깔린 푸른 색깔이 마음에 확 들어와 깔렸다. 꿈꾸던 전원주택의 잔디밭이라니. 정원에는 소나무 32그루, 단풍나무 22그루가 울타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무와 새를 좋아하는 남편은 정원을 돌며 어떤 나무들이 심겨 있는지 나무 구경하는데 온통 정신이 빼앗겼다. ‘새집도 있네. 새소리도 공짜로 들을 수 있겠군.’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잔디밭과 나무들만 보고 이 집을 찜했다. 나는 어떻고? 집을 살펴보려고 거실 문을 열었는데 시원하게 펼쳐진 넓은 공간에 나무 탁자 두 개가 기다랗게 편안히 놓여 있었다. 늘 아파트 베란다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던 남편한테 ‘저 넓은 거실을 선물해 주면, 퇴임해서 편안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테지.’ 그 생각만 하고, 아무것도 둘러보지 않고 그 집을 찜해, 한 달 뒤에 급하게 이사를 했다. 정원에서 마을 사람들과 남편이 근무했던 학교 선생님들만 모셔 퇴임식을 하려는데 초임 때 제자들이 ‘퇴임 기념식수’와 표지석을 들고 와 퇴임식에 참석했다. 남편이 그려왔던 그림과 도자기들을 펼쳐놓고 전시회를 하면서 전시회 작품과 부채에 그림을 그려 손님들 이름을 써서 선물로 주었다. 2014년 8월이었다. 그 뒤로 이 집에는 작가와의 만남을 위한 문학 기행으로 버스를 대절해 와서 강의를 듣고 가는 학생들, 어린이날 맞이 잔치로 놀러 오는 굿네이버스 아이들, 어버이날 잔치로 모신 마을 어르신들, 각종 출판기념회와 기념식, 리마인드 웨딩 촬영 식 등 축하해주고 싶은 일들을 찾아내어 정원에서 재미나게 놀았다. 12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셈이다. 그동안 이 집에서 놀다간 1,325명은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며 한마디씩 정감을 남겨두고 갔다. 되새기며 기억할 수 있는 추억 부자로 살 수 있는 세월이었다. 그런 추억도 모아두지 않았다면 지금 이 나이에 그저 덧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이렇게 살다가 팔다리에 힘 빠져 내 몸을 가눌 수 없을 때, 내 영혼이 돌아갈 마지막 안식처는 역시 자연이겠다.
한때는 ‘계산’ 동네 같은 시골 ‘베나의 집’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는 대왕 소나무 밑을 수문장으로 욕심을 내어보기도 했다. 가을이면 뒷집 이장님 댁 멍석에 널어놓은 땅콩을 까치들이 물고 와 이 대왕 소나무 가지 위에서 식사했다. 땅콩을 떨어뜨리면 내려와 찾지 않고, 다시 날아가 더 튼실한 땅콩을 물고 와 까먹었다. 그 덕에 우리는 참새가 놓친 땅콩을 주워 먹기도 했다. 내 죽은 뒤에도 까치들이 이 식탁에서 식사하며 온 동네 이야기를 동화처럼 재미있게 재잘거려 줄까? 두 아들에게 부담이 안 되려면, 경남 고성 ‘동동숲’에 ‘동화 작가 박경선’ 이름으로 동백나무 한 그루 얻어 두었으니 유골 가루가 바람 타고 그곳까지 찾아갈지.
하지만 다 부질없어라. 수문장이든 풍장이든 모두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치에 그저 순응하며 떠나리라. (2026년 7월 20일. 21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