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적인 학설 도일원론(道一元論)을 주창한 대유(大儒) 장현광(張顯光)>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경북 인동(仁同) 출신 대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영남학파의 주리론(主理論)과 기호학파의 주기론(主氣論)을 통합 조정하려는 목적에서 도일원론(道一元論)이란 새로운 이론 체재를 정립한 대현(大賢)이었고, 세속의 굴레에서 얽매이지 않는 호방(豪放)한 인품을 지닌 대학자로서, 여헌(旅軒)만의 학문인 여헌학(旅軒學)을 완성한 분이었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등은, 각자 독창적인 성리학설을 주장하여 조선조 유학을 꽃피운 대유(大儒)들이다. 독창적인 성리학설을 폈다는 것은 도통(道統)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교 연원적인 측면이 아니라, 현대 철학자들이 순수한 학문적인 견지에서 재고찰한 평가이다.
○ 본관이 인동(仁同)인 여헌(旅軒)은 1554년에, 현재의 구미시 인의동에서 태어났다.(舊 칠곡군 인동면) 그러나 그의 일생은 한마디로 불우와 수난의 나날이었다. 경북 인동에서 7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집자성구(集字成句)한 실력을 보였고, 8세 때 아버지 장열을 잃었다. 9세 때 홀어머니를 떠나 선산에 있는 매형인 송암(松巖) 노수성(盧守誠)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1세 때 학자 신당(新堂) 정붕(鄭鵬)의 아들인 정각은 그를 보고 "이 아이는 기상이 굉위(宏偉)하여 반드시 세상에서 특출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운명은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동서남북으로 떠도는 나그네 생활이었다. 그의 호 ‘旅軒’이 갖는 의미가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14세 때인 1567년(명종 22)부터 문중 어른 진사 학거(鶴渠) 장순(張峋)에게 학문을 배웠고, 성리대전을 읽고 심취하여 스스로 깨우치고 연구했다. 1571년(선조 4) 18세에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대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말미에 이르기를 '능히 천하의 제일사업(第一事業)을 할 줄 알아야 바야흐로 천하제일의 인물이 된다'라고 원대하고 굉위한 포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부터 다른 스승에게 별도의 배움을 청하지 않고 스스로 독창적인 이론체계를 세웠다는 것이 그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의 견해이다. 이것은 실로 놀랄만한 사실로써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우주 속에 있는 삼라만상의 변화의 원리를 밝히고 인간사회의 도덕법칙과 역대의 인물론 그리고 학술 및 학습지침 등을 담고 있다. 책 말미에 그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사업을 이룩해야만 천하에서 제일가는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서술했다. 또 그는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우주 간에 사업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야지 단순히 눈앞에 있는 사소한 일에 한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가 얼마나 장대한 기상과 높은 사상을 가졌나를 가늠할 수 있다.
○ 여헌(旅軒) 26세에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질녀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겨우 6년 만에 사별하고 그 후 5년 동안 그냥 지내다가 37세에 야성(冶城) 송씨(宋氏)를 새 아내로 맞았다. 2년 뒤 임진왜란이 발생한 와중에 모친상을 당했다. 그는 모친의 신주를 모시고 금오산 성주 가야산 소백산 등지로 계속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는 고난 속에서도 <평설(評說)>이란 책과 당시의 참상을 적은 <용사일기(龍巳日記)>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자연인으로서 도학까지 겸비하여 자신의 영역을 개척한 종합적인 낙천적인 사상가였다. 우주의 나그네인 그의 입장에서 보면, “우주 속에 존재하는 만물이 나그네 아닌 것이 무엇인가? 천지 그 자체도 만물의 나그네다.”라는 그의 우주관이 확연함을 알 수 있다. 그가 42세 때 보은 현감이 되었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부임 몇 개월만에 사직서를 냈는데 수리되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조정대신들이 임금을 모욕한 처사라며 잡아들이려고 하자, 경연관에서 그만한 일로 죄를 준다면 선비를 대접하는 일이 아니다라며 압송 도중에 풀어줬다. 그는 군왕의 명령이라도 자신의 신념에 위배되거나 그 이상을 펼칠 수 없으면 언제라도 그것을 떨쳐버리는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 대자연 속의 나그네로 자처한 여헌(旅軒)은 몸은 하나의 작은 평상 위에 있지만 정신은 큰 우주 밖에서 노닌다고 할 만큼 초세간적(超世間的)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그는 현실을 도외시한 공허한 초월자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법칙과 인격완성 간의 일대 조화를 시도한 위대한 도덕가였다. 또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존엄성을 주창한 인간제일주의자이기도 했다. 인간은 우주에 소속된 인간이 아니라 우주와 동격의 인간으로서 우주를 지배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 장현광의 호쾌한 인간관이었다. 우주의 모든 사업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그 사업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주는 쓸모없는 공기(空器)가 될 것이다고 역설했다. 당시까지 우리나라 도학자 중에 이렇게 광범위하고 진취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이는 여태껏 없었다. 이상과 현실을 한 눈에 꿰뚫는 유무형의 이치를 학문을 통한 인격수양과 극도의 깊은 사유를 하지 않으면 깨닫기 힘든 일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타고난 천재성을 바탕으로 극진한 마음과 깊은 학문세계를 거치면서 통달한 결과였다. 동지를 만나면 도의를 강론하고, 후배를 보면 학문을 권장하며, 문인을 보면 글 이야기를 나누고, 시인을 만나면 함께 시를 지었다. 또한 농부가 오면 농사이야기를 나누고, 어부를 만나면 고기잡이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53세에 비로소 주위 지인의 도움으로 고향 옛 집터에 모원당(慕遠堂)을 짓고 정주하게 되었다. 광해군의 패륜정치가 계속되자 그는 영천 입암(立岩)으로 들어갔다. 그가 70세에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계속 그에게 벼슬자리를 주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어쩌다 부임한 경우에도 채 40일을 넘기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에는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으나 인조가 항복하자, “하늘도 없고 해도 없으니 어디로 돌아가랴”라며 다시 영천 입암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84세의 일기로 한국유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가장 어두운 시대를 살고 갔다. 그가 살던 시기는 광명과 암흑이 뚜렷했다. 명현재사들이 우후죽순처럼 태어나 이 땅의 정신문화의 절정을 이루었던 한편, 대륙에는 명(明)이 망하고 청(淸)이 일어난 교체기로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치렀을 뿐만 아니라, 광해군 폭정 인조반정 이괄의 난 등 외우내환에 시달렸던 시대였다. 거기다가 짧았지만 퇴계, 남명, 율곡 문도가 3각 관계를 형성한 시기이기도 했다. 장현광(張顯光)의 직계손은 그의 향리 옛 인동현(仁同縣)이었던 구미시와 칠곡군 등지에 많이 거주하고 있고 그의 종손(宗孫)이 구미시 인의동에서 종택과 사당을 지키고 있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사상과 철학>
여헌(旅軒)의 학문세계 즉 논리적 체계는 다양하게 표현되어 때로는 주기적(主氣的) 입장인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주기론(主氣論)과 주리론(主理論)을 절충한 입장을 취한 인상을 주기도하며, 때로는 노장(老莊)의 도가적 견해를 채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주리론의 입장에서 우주의 근본실체를 도(道)라고 밝힌 도일원론자(道一元論者)라는데 현대 학자들은 의견의 접근을 보고 있다. 여헌(旅軒)이 독특하고 새롭게 펼친 도일원론(道一元論)의 이론체계는 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로 표현된다.
○ 장현광의 우주설은 “만물을 만들고 여러 가지 사물이 있게 하는 것은 천지요, 천지를 만들고 우주(宇=공간・宙=시간)를 되게 한 것은 도(道)이다. 그러므로 천지를 창조하는 도가 따로 천지 밖에 있는 일도(一道)가 아니며, 천지가 만물을 창조하는 도 또한 따로 천지를 만드는 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천지를 창조하였고 또 만물을 창조함이 있다면 같은 하나의 도이니, 이 어찌 두 가지임을 용납하리까?”했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우주설은 절대자인 도(道)의 현현(顯現 뚜렷이 나타남)으로 보는 세계관이다. 즉 그는 이기상대(理氣相對)의 세계를 초월한 도(道)의 일체만물에 내재한다고 보는 범신론적 우주관이다. 결국 창조적 실체로서의 도는 종래의 이기설을 흡수통합하여 이기(理氣)를 도의 양속성으로 간주했다. 도는 창조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理)와 기(氣)가 요청되었다. 그래서 장현광의 도(道)란? 이기(理氣)를 합하였고, 체용(體用)과 본말(本末)을 겸비하였다고 한다. 이(理)는 만유의 근본원리라 한다면, 기(氣)는 만유(萬有 우주의 온갖 물건)의 생성근원이라 할 수 있다. 또 도의 주재원리가 이(理)라면 도의 생성 운동하는 측면이 기(氣)인 것이다. 따라서 도는 원리이면서 생성자라는 이중성을 갖게 된다. 일반적으로 정주학(程朱學, 정자와 주자의 학문)의 도는 유행하는 법칙으로 보는데 비하여, 장현광의 도는 창조적인 유일절대자다. 이점에서 그의 학문세계는 정주학적 개념을 넘어 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여헌(旅軒)은 이기를 양속성으로 한 도일원론(道一元論)의 논리 체계를 더욱 쉽게 풀이하기 위해 경위설(經緯說)을 도입하였다. “경(經)은 베 짜는 날줄이며 위(緯)는 씨줄로, 그 기능만 다를 뿐이지 결국 씨줄과 날줄은 같은 실로서 이물(二物)이 아니고 일물(一物)이다. 경계(經系)는 처음부터 끝까지 곧게 관통하여서 변하거나 바꾸지 않는다. 위계(緯系)는 좌우로 왕복하는 운동을 함으로써 천이 만들어진다. 만물의 창조생성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천지의 삼라만상이 되게 하는 근본법칙이 이(理)라면 경(經)과 같은 것이며, 그 이(理)를 현상화 시키는 능동적 작용이 기(氣)라면 바로 위(緯)에 비유될 수 있다. 따라서 이(理)는 곧 도(道)의 경성(經性)이요, 기(氣)는 도의 위성(緯性)이 된다. 그렇다면 경계(經系)인 이(理)와 위계(緯系)인 기(氣)가 이물(二物)이 아니고 일물(一物)이듯이 이(理)와 기(氣)는 이물이 아니고 일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학설은 주리(主理)이건, 주기(主氣)이건 양파 모두 이원성(二元性)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당시 유학계의 양설을 근원적으로 통합하고 분쟁을 봉쇄하려는 사상을 담고 있다. 그의 학설은 새로운 독창적 논리체계였으나, 정통 정주학을 맹신하는 주리론 입장을 지지한 퇴계(退溪)문도와, 주기론을 받드는 율곡(栗谷)문도의 세찬 비판을 받기도 했다. ○ 그러나 현대철학자들은 ‘이기(理氣)・경위(經緯)・상변(常變)・체용(體用)・본말(本末)・강목(綱目) 등은 본질적으로 도(道)란 동일자의 양면(양속성)이므로 이본(二本)이라 할 수 없다’는 장현광의 학설은 성리학사상 최초로 대두된 형이상학이란 점에서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장현광은 어느 뛰어난 기존학설에 매달리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아무리 훌륭한 선현의 학설이라도 객관적 위치에서 자신이 체득한 견해와 신념으로 그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검증하는 과학적인 학습태도를 견지했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인 학습태도는 기존학설을 맹신하지 않고 일단 의심하여 스스로의 노력과 수양에 의한 직관으로 다시 검토해보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기존 학자의 학설을 채택 수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 그의 끊임없는 호학정신은 오히려 성리학 전반에 걸쳐 연구하였을 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제설(諸說)을 섭렵하고 특히 주역에 남다른 탁견을 갖고 자신이 체득한 신념을 농동적으로 새로 정립해간 진정한 학자였던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기존 학설을 준수하고 고수하려는 보수적 사고가 아니라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성리학에서 금기로 되어있는 불교・양명학과 노장철학까지 수용할 수 있으면 수용해야 한다는 창의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의 학설이 다양하게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한편 류성룡(柳成龍)은 12살 아래인 장현광(張顯光)을 만나보고는 아들 진(袗)에게 “여헌의 사람됨이 확고하고 혼후(渾厚)하여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으며, 그 깊고 넓은 양을 헤아릴 수 없다. 그를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도취되게 하는데, 다음날 세상에 알려지는 큰 유학자가 되어 유도를 주장할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나아가 배우게 하였다. 또한 정조 왕은 시대가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장현광을 흠모하는 제문을 친히 지었다. “여헌(旅軒)의 학문 연원은 퇴계의 흐름이요, 한강(寒岡)과는 도(道)와 뜻이 맞았다. 그는 우주의 기수와 경위(經緯)의 이치를 밝혀 저서로 말을 남겨 세상에 보여주니, 염계 주돈이의 흉금(胸襟)이며 면재(勉齋) 황간(黃幹)의 심지(心地)이다. 나라의 풍속을 돈후 질박하게 하고 사림을 흥기시켜 주었다.”
○ 성리학의 핵심문제의 하나가 천일(天一)합일 사상이다. 정주(程朱)중심의 성리학은 지선지대한 보편적 인격완성을 위한 윤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유학자들은 주리(主理), 주기(主氣), 절충파 어느 쪽이든 인간수양의 도덕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론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 장현광(張顯光)이 창조한 도(道)의 속성으로서의 이기(理氣)는 도덕적 측면에서 어떤 기능을 할까? 이기(理氣)는 곧 하나의 도이다. 이 도가 이면(理面)에 있을 때는 아직 운용이란 단계가 아니므로 선(善)에 대립하는 악(惡)과 정(正)에 반하는 사(邪)를 보지 못하니 이는 그대로 순선하여 무악한 것이다. 그러나 도(道)가 기면(氣面)을 발휘할 때는 이미 운용된 것으로 운용과정에는 법도에 맞을 수 없거나 혹은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한 무리가 있기 때문에 기(氣) 그대로는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도(道)의 이면(理面)은 순선하고 도의 기면(氣面)에는 선(善)과 악(惡)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다.
그렇다면 우리의 도덕적 수련이란 점은 다름 아닌 기(氣)의 미정성을 바로잡아 이에 맞도록 하는 노력이다. 성현의 사업이란 것도 이(理)의 경(經)을 주인으로 하여 이 기(氣)의 위(緯)를 다스리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일을 강습하는 것이 학(學)이요, 이 일을 궁행(躬行)하는 것이 윤리의 도(道)이며 이 일을 마음에 체득하는 것이 덕(德)이다. 이러한 윤리관의 이론적 근거는 자연(宇宙)과 사회는 이(理)에 의하여 주재되고 지배된다는 논리다. 현실의 사회질서는 절대적 진리가 형상화된 것이다. 이 점에서 장현광은 정주(程朱)적 윤리관과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
한편 초감각적인 도(道)를 인식으로 하는 방법은 감성계의 논리가 아니라 직관하는 것이다. 동양철학의 모든 인식론이 직관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 역시 이 범주를 철저하게 궁행(躬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대유나 석학과는 달리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모든 현상을 분합과 동이(同異)로 관찰하는 안목을 지닌 뛰어난 대유(大儒)였다.
○ 그리고 분(分)과 이(理)는 현대적 의미에서 분석론이요, 합(合)과 동(同)은 종합론이다. 그는 논리성이 극도로 무시되었던 성리학 분야에서 기초적이나마 오늘날 자연과학에서 널리 활용되는 방법론을 도입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엎치락뒤치락 거리며 논변을 거듭하고 있는 영남⋅기호학파간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통합조정하기 위해 일원론적(一元論的) 해석을 내리려고 시도했다. 정주학(程朱學) 특히 우리나라의 퇴계학파(退溪學派)가 주창한 본연지성(本然之性)의 사단(四端)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칠정(七情)은 별개(二本)으로 간주한다. 이와는 달리 여헌(旅軒)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모두 동일한 감정 즉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규정하고 사단은 칠정에 배합시켜 그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는 「진실로 능히 정밀하게 연구하고 익히 살펴본다면 사단은 칠정 안에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주자(朱子)⋅퇴계(退溪)의 이발기발(理發氣發)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는 한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정면으로 거부한 폭탄선언이었다.
○ 자기 파벌의 학설을 부정하는 행위를 추호도 용납할 수 없었던 당시 사림계의 풍토였지만 여헌(旅軒)의 생존 시에는 그의 학설에 대해 별다른 물의가 없었다. 그러나 여헌이 세상을 떠난 뒤 몇몇 영남학파 학인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기호학파 중심의 서인들이 여헌의 학설을 퇴계학을 공격하는 주무기로 사용했다. 사건의 발단은 서인들이 추진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배향을 영남학파서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장현광이 저술한 경위설(經緯說)은 극도로 이기를 논하는데 횡설수설로 수천만 단어로 돼 있고, 퇴계(退溪)와는 다르고 율곡(栗谷)과는 같지 않는 것이 없으니 후학이 진실로 이것으로 퇴계학(退溪學)을 의심하게 되었다.’라는 소(蔬)를 올려 영남학파를 공격했다. 이로부터 여헌(旅軒)의 학설은 본의 아니게 기호⋅영남학파간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고 급기야는 그의 고향 학인들로부터 경원시 되었다. 퇴계학(退溪學)의 정통성을 고수하기 위해 장현광(張顯光)이 창조한 이기일본설(理氣一本說)을 비판했던 것이다.
● 마무리 말(結語)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성리학은 명확한 실체도 없고(渺茫) 멀고 아득하며(幽遠) 황홀하기만 하고(恍惚) 과장되고 허탄한(夸誕) 학문일 뿐이다. 그런고로 여헌의 학문을 통해 되짚어 보아야할 부분이 있다. 그런고로 퇴계학설이든 율곡학설이든 관계없이, 전국의 유림들이 사대주의에 깊숙이 빠져 정주학(程朱學)을 맹신한 풍토를 배격하고 자주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이학(理學)체계를 정립한, 여헌(旅軒)의 도일원론(道一元論)의 이기(理氣)철학이 제대로 전승 발전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영남 퇴계학파의 권위와 기호 율곡학파의 위압 앞에 여헌(旅軒)의 제자들은 스승의 학설을 고양시키지 못하고 움츠려 들고 말았다. 그렇지만 여헌의 독특한 학술은 기호지방의 남인 거두인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3~1682)과 백호(白湖) 윤휴(尹鑴 1617~1680)의 이기철학에 투영되어 전하고 있다. 허목(許穆)의 우주상성(宇宙常性)도 장현광(張顯光)의 도일원론(道一元論)과 기맥(氣脈)이 상통하고 있다. 이외도 허목(許穆)은 평소 여헌(旅軒)을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그가 지은 여헌(旅軒)의 제문에 백세의 스승으로 표기했다. 허목(許穆)의 후배 윤휴(尹鑴)도 여헌을 지극히 흠모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휴 역시 금과옥조같이 신봉된 주자(朱子)의 해석을 배격하고 자주적인 입장에서 대학(大學)⋅중용(中庸)⋅효경(孝經) 등 제경전을 새로 해석하는 태도는 여헌(旅軒)의 모습 그대로였다. 또 그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학설을 비판하고 두 학설의 절충을 시도한 점도 여헌(旅軒)과 유사하다. 그 후 윤휴(尹鑴)는 기호학파의 태두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학파와 예송(禮訟)으로 일대 격전을 벌이다가 사문난적(斯門亂賊)으로 몰려 사사되었다. ○ 무조건 맹종(盲從)만을 일삼던 조선조 유학사에 김시습(金時習)의 반유반불관(半儒半佛觀), 남효온(南孝溫)의 반유반노장(半儒半老長) 태도, 반역아 허균(許筠)의 천학(天學), 장현광(張顯光)과 윤전(尹烇)의 이기(理氣) 철학 등 자주적인 학문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주자성리학 이외의 학문이나, 자기의 학파와 다른 견해를 갖거나 독자적인 경전 해석을 내 놓으면 가차 없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배척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자의 이론과 해석에 비판을 가하거나 별도의 이론을 제시한 자주적 학문의 씨앗은, 그 때마다 정주(程朱)의 정통성을 고수하려는 영남⋅기호학파의 위압 앞에 제대로 꽃피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여헌(旅軒)은 당시 사대주의사상에 젖은 우리나라 정주학(程朱學)을 금과옥조, 심지어 종교적인 권위까지 발휘하던 그 두터운 성역에 굴하지 않고 정주학의 어느 일설에만 충실하는 태도를 버리고, 자주적인 입장에서 독자적인 이학(理學)을 전개한 진취적인 대유(大儒)였다는 점에 무한한 존경을 표한다. 그래서인지 자주적 학문의 위업을 세운 장현광(張顯光) 같은 학자의 학설이 오늘따라 유난히 빛나 보인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한문학 몇 편 소개>
1) 흰 머리를 읊다(皓首吟) 皓首猶存赤子心 백발에도 적자의 마음 그대로 보존하니 此時方會一源深 이때에야 비로소 한 근원이 깊음을 알겠네 眼中天地都眞境 눈 안에 천지가 모두 진경이니 外誘何從得我侵 외물의 유혹 어찌 나의 마음 침노하랴
2) 백발(白髮) 少年惟恃氣力剛 소년 시절에는 오직 건장한 기력 믿고는 一蹴當窮萬里長 단김에 만 리의 먼 길 다하려 하였네 攬鏡如今驚白髮 지금 거울을 보며 백발을 놀라워하니 乾坤回首此心忙 천지를 돌아봄에 이 마음 바쁘누나
3) 칼을 읊다.[詠劍] 吾劍得之天 내 칼 하늘로부터 얻었으니 腰間吼不歇 허리춤에서 포효하며 쉬지 않네 如得一試用 만약 한번 쓰게 된다면 必將天下易 반드시 천하를 개혁시키리라
4) 감흥(感興) 此心如水意如波 이 마음은 물과 같고 뜻은 파도와 같으니 動是浙江靜汨羅 움직이면 절강(浙江)이요 고요하면 멱라수(汨羅水)라오 若做敬功終始一 만약 경 공부(敬工夫)를 시종 변함없이 한다면 鯨藏風止淨如何 고래가 숨고 풍랑이 멈춰 그 얼마나 깨끗할까 [주1] 절강(浙江) : 오늘날의 전당강(錢塘江)을 가리킨다. 중국 저장성의 항조우(항주)를 휘돌아 흐르는 강인데 장시성에서 시작하여 항주만을 거처 동중국해로 흘어 들어가는 근 700키로 달하는 큰 강이다. 이 전당강에 추석 직후의 밀물시기에 커다란 조수파도가 밀려들어와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주2] 멱라수(汨羅水) : 굴원(屈原)이라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에 빠져 유배를 갔다. 거기서 자신의 지조를 보이고 탁하고 흐린 세상에 자신의 고결함을 더럽힐 수 없다며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후 굴원이 죽은 5월 5일은 단오절이 되었다.
5) 부지암(不知巖)에 배를 띄우고 놀다[泛舟不知巖] 육언(六言) 上有天下無地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땅이 없으니 是何界超世間 이 어느 세계인가 인간 세상 초월하였네 世間幾般消息 세간에는 얼마나 많은 소식 있는가 雲外一鴻自閒 구름 너머 한 기러기 스스로 한가로워라
○ 부지암(不知巖)은 선생이 이름 지은 바위이다. 부지(不知)는 ‘알지 못한다’인데 공자의 군자삼락에 나오는 “부지불온(不知不穩) 즉,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고 하겠다. 임인년 1602년에 선생은 이웃 고을의 선비인 친구 두세 명과 배를 띄우고 부지암(不知巖) 아래에서 놀았다. 술이 반쯤 돌자, 선생은 육언(六言)의 짧은 시(詩) 짓기를 했다. 4구에서 구름 밖의 한 기러기는 선생 자신을 비유한 것인 바, 이는 선생의 호걸스러운 기운을 드러내었다. 그의 제자 조임도(趙任道)는 젊었을 때에 이 시를 매우 좋아하여 도흥강(道興江)의 배에 써 놓고 읊고 감탄하곤 했다. 부지암(不知巖)은 現 구미시 임수동 동락서원 옆 낙동강 다리밑 왼쪽에 보이는 돌출 바위이다.
6) 장사거(張斯擧) 광한(光翰)의 시에 차운하다.[次張斯擧 光翰] “수방심(收放心) 세 글자가 공부의 첫 번째라오. 그대 이제 훌륭한 시구(詩句) 지었으니 내 그대의 수렴함 본받고자 하오.(收放心三字 功夫第一頭 君今有傑句 我欲師君收)”
○ 수방심(收放心)이란 ‘달아난 마음을 거둔다’는 뜻으로, 늘 마음을 주시하여 다잡는 것을 이른다. 선유(先儒)들이 학문을 논함에 있어서 반드시 ‘흐트러진 마음을 구하는 것(收放心 수방심)’과 ‘덕성을 기르는 것(養德性 양덕성)’으로써 심성 수양공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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