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척간두
百尺竿頭進一步(백척간두진일보)..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이르러 또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뜻으로, 이미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인데 또 한 걸음 나아간다고 함은 더욱 노력해 위로 향한다는 뜻. |
10층[백 척] 꼭대기에 올라가 한 걸음 더 나아가라..
백척간두 진일보는 날카로운 송곳 같은 말로 긴장감이 극을 이룬다.
부드럽고 편한 말도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선종의 선지식들은 제자들에게 왜 이토록 긴장토록 할까..
장대 끝을 벗어난 곳은 허공이듯.. 자칫하면 죽거나 크게 다칠 수 있다.
참선 수행자의 용맹 정진은 아주 샤프해 자칫 엉뚱한 곳에 이르거나 베일 수 있다. 더욱 정신을 날카롭게 다듬어 조심해야만 한다.
그런 스승의 노파심인 자비가 화두에 담겨있기에 긴장감이 흐른다.
학인이 조주 선지식을 찾아와 묻는다.
"경전에 이르길 일체는 불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삼복이 시작되는 여름, 오늘내일 생명을 잃을 처지에 놓인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는 답한다. "없어[무]!"
순간 학인은 벙해졌다. 부처님은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스님은 없다고 하네?!
여기서 헤어 나오려면 찰나적 방심도 없어야만 한다.
유아라는 존재 세계에서 무아라는 무존재 세계로 넘어간다는 것은 간단한 사건이 아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라 넘어가는 순간이다.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 그곳으로 점프하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자칫 실수하면 곧 죽음이다.
긴장하라.. 방심하지 말라. 아차! 하는 순간 평생을 망친다.
고락 중도란
수행으로 보면 고행이 아니요, 쾌락도 아니라고 하지만.. 속은 고행을 비판하고 있다.
아무런 이익도 없이 몸만 망치는 고행을 하지 말라. 당시 고행자의 목표는 사후에 영생 jiva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석가세존께서 깨치고 보니 지바라는 존재는 없더라였다.
없는 것을 구하고자 고행을 하고 있다면.. 몸만 망치는 수행 아니냐 말이다.
쾌락은 저속하니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지만.. 쾌락은 지금 당장 추구하여 지금 즐거워하는 것이니 고행보다 차라리 낫지 않은가..
21세기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젏은이들은 모두 쾌락을 추구하는 자가 된다. 쾌락의 늪에 빠지면 불교를 멀리하게 된다.
중도를 설명하면서 쾌락 주의보를 내리는 이유가 그것.
단상중도라 했다.
중도란 한 번뿐인 생[단멸론]이 아니요, 윤회하는 생[상주론]이 아니라는 것.
과학자들 가운데 소수가 죽은 후 움직임에 대한 관찰을 열심히 하고 있다.
몸이 죽은 후 죽지 않는 게 있다면 그것은 죽으면 끝이라는 게 아니다. 그러면 윤회하는 게 있다는 건가? 하니
중도란 윤회하는 게 없다고 한다.
나는 한번뿐인 생이 아니요, 그렇다고 죽으면 다시 태어나는 나가 아니라면..
이런 모든 설명을 듣고 생각하는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없다[무아] 라고 하지 말라. 없다고 하는 그것을 보고 있는 나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어떻게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지금 여기서 그렇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자는 틀림없이 있지만..
그는 나가 아니다. 말하자면 사띠는 나가 아니다.
이것을 보면 중도가 무엇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것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진일보가 왜 나왔을까?
무아가 무엇인지를 말하려다 보니.. 존재가 아닌 나가 없는 허공으로 걸어가야 한다고 말하려다 보니.. 그런 말이 나온 게 아닌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 쉬운 걸 질문이라고 하나 하며 핀잔 비슷한 답변이 돌아온다
어떻게 하면 진일보를 할 수 있습니까?
없어[무!]
답은 아는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
석가세존이 가르치는 중도는 무지와 탐욕을 벗어나는 길이요,
무지와 탐욕에서 벗어나 언행이 중도다.
그것을 중도 달리말해 제3자 적 판단이고 행위라 하는데
사회에서 중도를 말하면서도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중도를 주장하는 자들이 무지와 탐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를 벗어난다는 것은 이 몸과 생각의 주체인 나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나가 없다는 무아는 석가가 가르친 이래 그 자리에 이른 자가 있기는 있느냐고 물을 만큼 깨닫는 게 어렵다
그뿐 아니다. 무아를 잘 이해했다 해도 그것이 생각과 몸에 익지 않으면 공허한 지식에 불과하다
제3자 적 길로 불리는 중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좌]과 저것[우] 둘의 갈등을 해소하고 진정한 자유와 사랑과 평화로운 자리에 이르려면 본원적인 출발부터 달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둘을 떠나야 한다.
둘 모두를 부정해야만 한다.
장대 꼭대기라는 지점은 한 극단이 된다. 이쪽이 극단에 이르면 저쪽인 상대를 정복할 수 있는 힘이 넘치는 것으로 보이나 그렇다고 상대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자석의 한 끝을 자른다 하여 상대 극이 사라지지 않듯이.
하여 둘의 갈등을 해소하는 진정한 방법은 한걸음 더 나아가 둘을 벗어나야만 한다.
더군다나 현실에서 존재가 극성이 되는 것은 탐욕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행을 가거나 자연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그것들을 취하려는 욕심을 많이 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예쁜 꽃이나 동물을 발견하여 그것을 갖겠다고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갈등과 고통이 자라기 시작한다.
석가모니가 존재 세계에서 무존재인 법세계로 들어가는 길로 제시한 방법인 중도는 아주 간단하다.
곧 무지와 탐욕을 버리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무지는 그렇다 해도 탐욕을 버리는 것은 우리에게 거의 불가능처럼 보인다. 어떻게 탐욕을 버릴 수 있는가.
무지와 탐욕을 버리라는 것은 불교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의 공통된 가르침으로
그들 역시 무지와 탐욕을 버리라고 강조하지만,
존재를 인정하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알기에, 사후에 완전한 행복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는 그런 종교와 달리 지금 여기서 존재를 부정한다. 높은 장대머리에서 한걸음 내딛으라는 것은
존재 세계로 알고 있는 그 자리에서 점프하라는 것이다.
그런 점프를 석가모니는 중도라 했고,
중국의 선지식은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