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한여름밤의 반딧불이
나는 캄캄한 밤이 내려야 잠이 드는 사람이 되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서울 시댁에 갔을 때 남편이 통 잠을 못 잤단다.
20년간 살아온 자기 방이 왜 불편할까 의아했는데, 다음날 암막 커튼을 사서 달더니 이제야 잘 수 있겠다고 했다.
숲 안에서 살다 보니 칠흑같은 어둠과 고요한 적막은 밤의 당연한 요소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사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밤의 적막함이 존재한다.
밤이 있고, 쉼이 있고,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도심의 휘황찬란한 불빛 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오롯한 어둠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자연을 찾는다.
분명 저 하늘 위에는 수많은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데, 수많은 가로등과 간판들이 그의 존재를 볼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어둠이 진해야만 별을 헤아릴 수 있고, 어둠이 깊어야만 반짝이는 반딧불이도 발견할 수 있다.
간혹 밤 산책 중에 반딧불이를 점점이 마주칠 때가 있다.
사람들이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바라본다.
불씨가 사그라들 듯 점점이 멀어져서 사라질 때까지 정적이 이어진다.
그 풍경이 아름다워 나는 한여름 밤의 반딧불이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되길 바라게 된다.
누군가에게 반딧불이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내가 사는 곶자왈 숲은 반딧불이의 최대 서식처이다.
밤에 누워 가만히 밖을 보고 있으면 창문에 붙은 반딧불이를 만날 수 있다.
환상숲은 손으로 낸 돌길이라 깊은 숲까지 등불 없이 들어가기는 매우 위험하다.
하지만 바로 옆에 위치한 청수곶자왈이나 산양곶자왈은 길이 잘 닦여 있다.
밤 산책이 수월해서 마을 단위로 반딧불이 축제를 열기도 하고 시간별 밤 투어도 진행한다.
덕분에 나는 매년 그 친구들을 마주한다.
밝은 불빛 아래서는 그저 곤충이고 벌레이다.
그 조그마한 생명이 어둠 속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몽실거리게 하는 재주를 발휘한다.
불빛 하나만으로도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준다.
봐도봐도 참 오묘하고 신기한 불빛이다.
아이가 세 살쯤 되었을 때였다.
이제 제법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했고, 아들에게 반짝반짝 크리스마스 트리를 연상케 하는 그 풍광을 보여주고 싶어 깜깜한 밤 곶자왈 숲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매년 보는 풍광이어도 괜히 설레는 엄마와 달리 아들은 별 감흥이 없다.
좋아하고 흥분하며 쫓아 다닐거라 기대했는데 반짝거리는 그 생명은 쳐다보지도 않고 불이나 켜라는 듯이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는 것이다.
하긴 그 아이 눈에는 반딧불이보다 집에 있는 TV가 더욱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것이겠지 생각하며 씁쓸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평상시에 이 작은 아이는 길을 갔다가도 멈춘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있는 아이다.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개미 무리를 보기 위해서, 혹은 지천으로 널려있는 콩벌레를 찾아다니기 위해서, 꾸물거리는 애벌레에게 나뭇잎을 주기 위해서 애타게 자기 이름을 부르는 엄마를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러한 행동을 하고 있을 때 빨리 일어나서 가자고 재촉했던 내가 반딧불이를 보고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다니, 곤충 좋아하는 아이니 반딧불이를 보고 무척 놀라고 좋아할 거라는 기대가 내 선입견이었음을 깨닫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멸종 위기 식물이라 하면 특별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었다.
그래서 숲 해설을 할 때도 이 나무는 귀하고 이 넝쿨은 쓸모없는 것이라는 잣대는 모두 사람들이 내리는 판단이라고, 하늘에서 보기에는 똑같이 살고 싶은 귀한 생명이고 똑같이 귀한 땅이라고 강조했던 나였다.
그러면서 콩벌레보다는 반딧불이가 중요하다고 당연하게 여기고 판단했구나 싶었다.
아이 같은 눈으로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희귀식물이라 해서 무조건 채취해버리는 이들이 없겠지?
반딧불이를 보기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한 장소에 모이는 일 또한 없지 않을까?
숲스러운 사이 중에서
숲이지영 지음
첫댓글
어머, 댄스 실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