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인난 유래와 더불어민주당의 정청래
김충영 국방대학교 명예교수/한국시니어과협 회원 2024년 7월 13일
현종은 경종의 4번째 왕비 헌정왕후 뒤에 효숙태후(孝肅太后) 황보씨(皇甫氏)를 어머니로 헌정왕후의 배다른 숙부인 안종(安宗;왕욱, 王郁)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났다. 그러니까 안종은 현종의 5촌 당숙이다. 성종, 헌 애왕후(뒤에 천추태후), 헌정왕후는 형제지간이며 아버지는 왕욱(王旭; 대종)이다. 안종과 대종은 배다른 형제이다. 헌 애왕후와 헌정왕후는 모두 경종의 비였다. 경종의 4번째 왕비 헌정왕후는 경종 사후, 왕륜사 남쪽 개인 집으로 옮겼는데 꿈에 곡령(鵠嶺)에 올라 소변을 하니 흘러 나라 가운데가 가득 차 모두 은빛 바다가 되었다. 그래서 무속인을 찾아가 꿈 해몽을 하자 무속인은 아들을 낳으면 일국의 왕이 될 것이라고 점하였다. 그러나 헌정왕후는 "내가 이미 과부인데 어찌 아들을 낳겠는가?"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경종 사후 헌정왕후는 개인 집에서 살면서, 이웃에 사는 숙부 왕욱(王郁, 뒤에 안종)과 자주 교류하면서 결국 정을 통해 헌정왕후는 왕욱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임신한 사실이 성종(成宗)에게 발각되자, 성종은 안종(安宗)을 사수현(현재 사천시)으로 유배 보냈다. 한편 그녀는 안종의 유배길을 배웅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산통을 느껴 자기 집 앞의 배나무 밑에서 아들인 왕순(王詢; 뒤에 현종)을 낳고는 산고로 죽었다. 그러나 다른 설에 의하면 수태 중에 왕욱의 사저에 있다가 발각되어, 부끄러워 울며 도망가다가 집으로 돌아와 문 앞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부여잡고 아들인 왕순을 출산하고 죽었다고 한다. 왕순은 어머니 측으로 보면, 5촌 당숙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난 것이다. 고려 성종은 왕순을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봉(封)했다. 1009년(고려 목종 12년) 서북면도순검사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하고 대량원군을 옹립하여(강조의 정변) 18세에 왕위에 올라 현종이 되었다. 그전에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가 대량원군을 죽이려 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절에서 승려들의 보호를 받고 살았다.
1018년 10월 19일, 고려 현종은 18세에 등극하자마자 거란의 침입을 받아 나주로 피난하는 어려움을 격었다. 이 와중에 강감찬의 평소 군사 식견을 파악하여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서북면행 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원수(元帥)/부도통으로 삼고, 전쟁 동원령을 내렸다. 강감찬은 71세로 문관이며 전혀 전투에 참여한 경험도 없었다. 그러나 평소 글 읽기를 좋아하여 제자백가는 물론 손자병법에 통달했고 사마천 사기를 읽어 한신의 전법을 익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제2 여요(고려 거란) 전쟁을 경험하여 강감찬의 전략을 믿고 철저히 따랐다.
제3차 여요(고려⋅거란) 전쟁으로 동북아시아 정세는 평정을 누리고 거란은 멸망의 길을 들어섰다. 고려는 현종 때 강감찬이 승리로 매듭지은 귀주 대첩 이후 금나라의 건국 때까지 북송, 거란(遼)나라와 더불어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서 120여 년 동안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강감찬의 업적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거란(遼)은 1125년에 여진족이 세운 금(金) 나라에 망했다. 그리고 현종의 치적으로 안정을 찾은 고려는 1170년 의종 때(정중부 난)까지 140년 간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뒤이어 김부식이 고려 인종 때 문관으로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문관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의종(毅宗)은 평소 문관을 일방적으로 우대하여 무관을 무시하여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불평을 사고 있었다. 의종(毅宗) 24년 8월에 왕이 보현원으로 행차 전에, 무신들이 “오늘 문신들은 의종의 사랑을 받아 배부른데 무신들은 굶주리고 피곤한데 이것을 참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정중부는 일찍이 김돈중(김부식의 아들)에게 쉬엄 깎인 일도 있고 하여 원한이 쌓인 터라 음모를 꾸몄다, “29일 왕이 연복정에서 흥왕사로 옮겨 가면 기회를 노치지 말라.”라고 이의방에게 지시해 두었다. 30일 보현원으로 가려고 궁중 대문에 이르러 무신들의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 5명씩 나누어 권법으로 승부 가리는 싸움)를 열어 무신들에게 상을 주어 위로하려고 하였는데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수박희에서 이기지 못하자 총신 한 뇌(韓賴)는 이소응의 뺨을 때리면서 모욕을 주자, 의종과 같이 있던 문신들이 기뻐하며 웃었다.
정중부는 큰소리로 한뢰를 힐난했다. 이소응은 비록 무신이기는 하지만은 벼슬이 3품인데 어찌 그토록 심하게 목욕을 주는가?“ 하니 왕이 정중부의 손을 잡고 그를 달랬다.이고가 칼을 뽑아 정중부에게 눈짓을 했는데 정중부는 그를 말렸다. 어가가 보현원에 가까이 가 문으로 들어가려 할 때이고 등이 측근에 있는 무신을 죽이자, 한뢰는 어상(御床) 아래 숨었다. 왕이 크게 놀라 금지시켰으나, 정중부 등이 ”화근인 한 뇌가 아직 왕 곁에 있으니 내 보내 죽이기를 청합니다. “하자이고가 끌어내어 한 뇌를 죽였다. 이 난동으로 안하무인격으로 설치던 많은 문신이 죽었다. 김돈중(金敦中)은 감악산으로 도망가 숨었는데 정중부 등이 현상을 걸어 잡아 죽였다. 무신을 무시하기로 이름난 김돈중은 김부식의 아들이다. 정중부 등은 의종을 거제로 추방하고 익야공(翼陽公) 호(皓; 의종의 동생)를 왕으로 세우니 바로 명종(明宗)이다
사신(史臣) 유승단은 이렇게 쌌다. ⌜옛날 명철한 임금은 문관과 무관은 오른팔과 왼팔과 같이 경중 없이 활용해서 임금은 위에서 밝았고 신하는 아래서 화합했다.⌟ 했고, 사신(史臣) 김양경은 ⌜의종은 간언에 성내고 스스로 성인체하여 곧고 바른 자는 물러나고 아첨하고 간사한 자들만 주변에 있어서 곤란을 당하여 목숨이 경각에 이르러 막을 자가 하나도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현재 부정선거에 의해 당선되었을지도 모르는 국회의원들이 국가 장래 정책은 뒤로하고 자질구레한 사건 사고를 가지고 무례하게 날뛰는 것은 보니, 나라 앞날이 캄캄하기만 하다. 특히 종북세력으로 분류되고 있는 정청래의 행동은 고려 시대 한 뇌(韓賴)를 보는 듯하다. 채상병 청문회에서 ”실질적인 반증이다. “라는 위원장 판단에 반증이 아니 다를 놓고 위원장 말에 반대한다고 사단장 보고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는 것을 보고 본인을 기절초풍했다. 국회 청문회는 죄인 다루는 데가 아니다. 사실을 밝히는 장소다 청문회 위원장이라는 자가 국가안보를 다루는 국가 핵심 인물을 죄인 다루듯이 위압하는 것을 보고, 고려시대 한뇌를 보는 듯했다. 선진국에서 군인을 그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다루는 사례는 없다. 어디까지나 국방 임무를 지고 있는 군인으로서 존대의 대상으로 대하고 있다. 사단장을 죄인 다루듯이 하는 정청래를 보고 이 사람 종북세력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정청래는 과유불급이라는 공자 말씀에 크게 벗어나 행동한 것을 직시(直視)하고 전 군인에 대해 깊은 사과를 드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