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천역에 바람이 인다. 정오를 향하는 투명한 햇살 아래 코스모스들이 들판 가득 산들거린다. 사람이 반가운지 하양 분홍 빨강의 꽃 웃음을 한꺼번에 보내온다. 산골 허허한 벌판에 꽃을 심어 여행객을 불러들인 마음이 시(詩)적이라고 할까. 숨은 듯 외딴 역, 그것도 코스모스가 지천인 기차역은, 처음이다.
역이라지만 코스모스가 지고 나면 존재마저 분간키 어려운 성싶다. 흡사 옛날 영화 속에나 나옴 직한 역사(驛使)의 대합실엔 올망졸망한 액자 너덧 개가 벽면을 채우고 있다. 그나마 차표를 파는 사람이 있고 열차 시간표가 걸려있어 조그만 시골 역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하동 북천역은, 지금 그렇게 코스모스 꽃 빛으로 가을을 건너는 중이다.
천 개의 바람이 불다 가고 수만 송이 꽃이 만발해도 사람이 찾지 않으면 고적할 테다. 잠잠하던 역이 열차가 부려놓고 간 한 무리의 관광객들로 수런거리기 시작한다. 코스모스와 철길 사이에서 사진 촬영을, 하느라 난데없는 사람 꽃도 피었다. 꽃보다 더 꽃인 청춘들이야 그렇다 쳐도, 만화방창 찬란하던 꽃의 계절을 하마 사윈 사람들은 꽃 빛이 아쉬워서인가, 뜨거운 결정(結晶)들도 조용히 여물어가는 시점이면 맹맹하게 나이만 먹은 빈 가슴이 그러하다. 불꽃 같은 사랑에 미쳐 본 적도, 어떤 일에 목숨 걸어본 적도 없으며, 간절함마저 잃어버린 채 당도해 버린 망망한 가을에, 낯선 길이라도 나서지 않고서야 배길 수 있었으랴. 대합실 액자 속에 든 작자 미상의 시구절이 꽃을 보는 객의 마음을 헤아려 준다.
코스모스가 미쳤다/ 북천 기찻길 옆 가을 들판이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대낮에 연분홍 붉은 입술로/ 떼 지어 유혹할 수 있을까/ 미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미쳐야 저지르고/ 저질러야 일을 내고/ 일을 벌여야 다다를 수 있는 것/ 아! 기찻길 옆 남바구들처럼/ 아름다이 미치고 싶다.
역은 내게 왠지 ‘떠남’의 이미지였다. 바람 부는 플랫폼과 긴 철로와 기차를 품고 있는 역은 외할머니 손을 잡고 처음 기차를 타 보면서부터 그랬다. 기적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기차는 떠난다는 의미와 함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고, 어딘가로 향한 무한한 동경이 들어있었다. 요즘에도 기차역은 인파로 빽빽한 고속버스터미널보다 정(情)적이면서 약간의 쓸쓸함과 그리움,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날엔 내 여행의 목적지가 그곳 지명을 단 ‘o역’일 때도 있다. 책 한 권 끼고 훌쩍 찾아갈 기차역이 있다는 건, 마음 붙일 곳 없는 팍팍한 삶에서 얼마나 위안인가. 여행이란, 과거와 현재의 길 위에서 나도 하나의 순순한 길이 되는 것이다.
가을엔 고속열차보다는 조금쯤 더딘 열차를 타고 북천역을 찾을 일이다. 잃어버린 이름처럼 아스라한 그리움 하나를 만날지도 모른다. 가녀린 꽃대에 하늘빛 닮은 코스모스들이 역의 배경이면서 주인공으로 일명은 ‘코스모스 역’이다. 탐스럽도록 풍성한 꽃송이도 아니 되며, 핏빛으로 격하게 토해낸 꽃 빛이어도 운치가 덜하리라. 기찻길 옆 코스모스의 연연한 빛에 가을 하루를 온통 맡겨 보아도 좋겠다. 티끌 한 점 없는 꽃 빛을 받아 마음을 적셔보거나, 속속들이 물든다면 더욱 좋겠지. 가슴 안에 꼭꼭 심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디.
에두르고 에둘러 온 길이다. 어디를 어떻게 디뎌야 할까 노심초사하며 허둥대는 세상 길에서 비켜난 걸음이다. 아니 작정하고 찾아온 길이다. 얇은 바바리코트에 가방 하나 가볍게 달랑 메고 무궁화 열차로 두 시간 사십 분에 걸쳐 달려온 하루낮의 여행길이다. 코스모스 하늘하늘하는 가을을 걸으며 그윽하게 깊어져 보리라. 남몰래 맑아 보리라. 이 시간 고요의 하늘에 떠 있는 유유한 구름 일 수도,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다가 다시 욱신거리는 세상길을 그리워할 수도 있지 않으랴.
어디라도 간다면 좋아서 따라나섰던 세상은 마냥 들뜨던 ‘소풍 길’ 이었다. 종착역을 떠올리며 기차표도 챙기고 잊은 건 없는지 이것저것 살피는 나이부터 인생은 ‘추억 여행’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문득 돌아본 뒤안길은 힘겨웠던 날과 방황하던 장소와 길조차 여리고 순한 색으로 채색되어 졌다. 세월이 그렇게 만들어 놓는다. 하지만 그 세월 탓에 마음속이 허허롭고 자주 옛길이 겹쳐진다면 인생의 가을에 든 것일 터, 추억이라고 아름답기만 하겠는가.
가끔 가슴이 먹먹하다. 오래 전, 주말이면 오가던 부산역과 동대구역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대구에 있는 요양원으로 아버지를 뵈러 다니던, 여행 아닌 여행길이었다. 철없는 동생들과 병약한 어머니의 근심을 뒤로하고 눈물 바람으로 달려가야 했던 내 이십 대의 동대구역, 그때의 깜깜하던 시간 들과 아버지 얼굴이 되살아나면 지금도 아프다. 인생의 봄날에 맞닥뜨린 삶으로는 난해하기 이전에 혹독하게 아리고 절박한 것이었다. 저마다 명치에 박혀 세월이 가도 새록새록 돋는 통증도 있는 법이라서 인생은 아무래도 눈물겨움인가 싶다.
내게 조금쯤의 방랑벽이 생겼었다면 아마 그런 시간 들 때문일, 게다. 그러면서 나를 싣고 아득한 철로 위를 달려가던 기차는 인생에서 선물 같은 여행길을 안겨 주기도 했다. 여행은 새로움에 대한 ‘눈 뜨임’ 인 동시에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었으며, 내 여행길엔 늘 많은 풍경을 담은 기차역이 있었다.
다시 북천역을 언제 찾게 될는지, 만일 다시 온다면 나는 또 어떤 모습일까. 하동 북천엔 코스모스꽃만 있는 게 아니다. 때론 사람으로부터도 그곳이 읽히며 덤으로 나를 읽기도 하므로, ‘이병주문학관’ 가는 길을 묻자, 타고 오던 자신의 차를 돌려 선뜻 실어다 준 산 동네 아주머니의 마음을 새겨 둔다. 문학관에서 내려오는 길은 꽃을 벗 삼아 한껏 유유자적해 보는 참인데, 뜻밖에도 볼일 차 나간다며 뒤따라오신 노(老) 관장님, 기어이 태워다 주신 호의도 소중히 간직한다. 나, 스쳐 가는 길손에게 그만한 정을 베푼 적 있었던가. 남을 사랑한 적이나 있었던가. 얼떨결에 받아 안은 인정에 호젓한 꽃길은 살짝 아쉬움으로 남겨 두었다.
인생은 단 한 번의 여행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행 중의 여행은 삶의 간이역과도 같지 않을까. 분주함과 번잡함을 내려놓은 소적한 간이역은 가쁜 숨 돌려 갈 수 있는 곳이다. 이제부터 나의 여행은 꽃과 풀과 바람 향기를 품은 간이역이면 좋겠다. 거기엔 사람이 아름다워지는 마음의 길도 들어있으리라.
어쩌면 북천역의 가을을 또 한번 예약할지도 모르겠다.
첫댓글 염 작가님의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내 발 밑으로도, 마음 길로도 가을이 구르고 있네요. 사뿐사뿐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들의 수런거림이 나를 밖으로 불러내고 있답니다. 오늘은 어디 가을 냄새를 제대로 품어 볼까 합니다. 염 작가님 건강하시어 좋은 작품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