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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박 양 리
(동의대학교)
【초록】본고는 병자호란의 기억이 야담 속에 어떻게 형상화되었는가를 역사
적 트라우마와 그 서사적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 것이다. 병자호란은 오
랜 시간이 지나서도 조선 사회에 정신적 상흔으로 남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트라우마와 다른, 역사적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트라우마
의 극복을 위해 사회 문화적으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자연스레
야담에도 영향을 미쳤다.
먼저, 병자호란을 예견하거나, 막고자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
나 야담 속에서 이인들의 예견이나 방비는 언제나 실패로 돌아가고 전쟁은
발발한다. 즉, 병자호란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므로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
는 일이었다는 운명론적 인식과 체념의 정서가 반영된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이전의 사회질서를 다시금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이념을 강조하고 절의의 가치를 선양하고자 하는 서사적 대응은 주로 열녀담,
절의담 등을 통해 드러난다. 역사적 서술과 달리 야담에서 편찬자들은 허구적
인 이야기를 통해 절의를 강조하고 트라우마 극복을 시도하였다. 마지막으로,
* 이 논문은 201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5S1A5B5A07043274)
2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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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반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병자호란 및 청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야담 속에도 드러난다. 청과 청나라 황제에 대한 야사와 북벌
의 허상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서 병자호란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역사적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서사적 대응으로서의 나름의 모색이 야
담 속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제어 : 야담, 병자호란, 병자호란의 기억, 역사적 트라우마, 중화주의, 북벌론
1. 서론
17세기 초 발생한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두 달 남짓의 기간 동안 벌어진 전쟁에 대한 기억은 오랫동안 조선인들에게
는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본고는 이러한 병자호란의 기억이 야담
속에는 어떻게 형상화되었는가를 역사적 트라우마의 치유와 극복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병자호란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史實)이라는 점에서는 역사
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연구자의 자의적 해석을 지양하
고 객관적으로 공명정대하게 기록되는 것을 본령으로 삼는 역사로서의 병자
호란이 아닌, 개개인 혹은 집단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기억으로서의 병자호란
에 주목하였다.
병자호란은 6년 동안 이어진 임진왜란에 비하면 단기간에 종결되었으며,
전쟁의 공간도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서울‧경기 지역으로 국한되
었기에 그 물질적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오랑캐를 물리쳤다는 승리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던 임진왜란과 달리 왕이
직접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신하를 자처하는 패배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볼 때 그 정신적 충격은 적지 않았다. 더군다나 병자호란의 패배는 곧 중세적
질서의 전복을 의미했다. 중화로 대변되던 명의 멸망과 오랑캐인 청의 중원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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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라는 믿기 힘든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전쟁 직후에는 전쟁의 원인
을 찾으려는 책임 논쟁과 잡혀간 백성들의 속환 등을 둘러싼 제반 문제가 중
심이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곧 흐트러진 중화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는 정
신적‧사상적 차원에서 대응이 사회 문화적으로 시도되었다. 이러한 사회 문화
적 변화는 문학에도 영향을 끼쳐, 실기, 전,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속에
전란의 체험과 기억이 형상화되었으며, 이에 대한 연구 성과도 적지 않게 제
출되었다.1)
야담의 경우, 지금까지 병자호란 관련 연구는 주로 북벌론과 연계되어 이
루어졌다.2)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되, 그 범위를 확장시
켜 병자호란 전반에 대한 기억3)을 담고 있는 야담을 대상으로 논의를 전개하
고자 한다.
야담은 여항에 구전되던 이야기,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일화, 자신
의 생각을 드러내는 의론이나 시화 등 여러 종류의 단형 서사들을 채록, 편집
한 것으로, 결국 야담의 편찬자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수록한 것이다. 계서
야담 서문의 “야담은 그가 보고 들은 것에 따라 기록한 것이다.”라는 기록을
보면, 결국 야담집에 수록된 이야기는 편찬자의 의식에 따라 여과된 결과물이
1)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실기, 전, 소설의 주요한 연구결과는 박양리(2015), 병자호란의
기억, 그 서사적 형상과 의미,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6쪽 참조.
2) 야담에 나타난 북벌론에 관한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이명학(1990), 「북벌론과 비판
의식-관련 야담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25,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최광석
(1995), 「북벌계획의 설화화와 그 의미」, 국어교육연구27, 경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김수현(2013), 「야담과 시대정신」, 영남학 23,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3)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6일 청군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가 올라가면서부터 시작되어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의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
를 행하면서 종결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둘러싼 기억의 흐름을 제대로 살피려면
훨씬 이전의 일은 물론 이후 조선 조정에서 발생한 정치 사상적 담론까지 아울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병자호란 자체는 짧은 기간 벌어진 전쟁이지만, 그 이전에 벌어진 심
하전투 및 정묘호란이 이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효종 즉위 후 조정 안팎에서
벌어진 북벌과 관련한 여러 논란 역시 병자호란의 기억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없다.
더불어 이 사건들은 ‘오랑캐(夷)에게 참혹하게 패배한 치욕과 분노’라는 가장 중요한
정서적 동질성을 병자호란과 공유하고 있다. (박양리, 앞의 논문, 13쪽 참조)
4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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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는 전문적인 이야기꾼에게 들은 것일 때도 있
고, 가문의 사람이나 지인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은 물론 여러 문헌
등에서 읽은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야담집에는 시정세태와 관련된 민중의 이
야기는 물론이거니와 사대부 가문과 사대부 사회에서 형성된 이야기들이 상
당수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야담 속에 나타난 병자호란 관련 기억을
살펴보는 것은, 조선 후기 시정은 물론 사대부 사회에서 병자호란을 기억하는
방식, 나아가 병자호란의 패배를 어떻게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그 서사
적 대응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 먼
저 병자호란이 단순히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 후대에까지 정
신적 상처와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
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병자호란이 유발한 역사적 트라우마가 우리 사회
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그 치유와 극복를 모색하는 담론과 서사적 대응 양
상이 어떠했는가를 야담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텍스트는 천예록,
박소촌화, 청성잡기, 학산한언, 송천필담, 동패락송, 계서야담,
기문총화, 청구야담4)을 대상으로 한다.
4) 본고에서는 시기적으로 병자호란 이후에 등장한 야담집을 주 텍스트로 삼았다. 많은
작품들을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나, 필자의 역량이 부족하여 주로 대표적인 야
담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 가운데 국역된 야담집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또 저자
및 이본에 대한 검토는 기존의 연구자들의 연구를 참조하였다. 텍스트로 사용한 저서
는 다음과 같다. 임방, 김동욱·최상은 역(2003), 천예록, 명문당; 이동윤, 박소촌화
天‧地‧人(후손가장본); 성대중, 김종태 외 역(2006), 국역 청성잡기, 민족문화추진회;
신돈복, 김동욱 역(2006), 국역 학산한언 1‧2, 보고사; 심재, 신익철 외 역(2009), 교
감역주 송천필담1‧2‧3, 보고사; 노명흠, 김동욱 역(2012), 국역 동패락송, 보고사; 이
희준, 유화수·이은숙 역(2003), 계서야담, 국학자료원; 김동욱 역(2008), 국역 기문총
화상‧중‧하, 아세아문화사; 이월영·시귀선 역(1995), 청구야담, 한국문화사. 이후 작
품 원문 및 해석은 위의 책을 인용하되, 텍스트를 인용할 경우 책명과 쪽수만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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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
주지하다시피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가지고 왔다. 이는
비단 국토가 황폐해지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의 물질적‧육체적 피해
에 그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사대부 신료는 물론 백성들까지 임금이 오랑
캐에게 무릎을 꿇고 아홉 번 절을 하며 신하를 자처하는 치욕적 패배의 순간
을 목도했다는 것에 있다. 더 나아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국가이자 중화질
서의 수호자라고 굳건히 믿고 의지하던 명이 청에 멸망했다는 사실은 큰 충
격과 패배감을 조선인들에게 안겨주었다. 이러한 병자호란의 경험은 조선인
들에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 정신적 상흔, 다시 말해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병자호란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전쟁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당사자들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트라
우마와 다른 성격을 지닌다.
병자호란이 끝난 지 150여년이 지난 정조 24년(1800년) 강화부 유수 이경
일은 왕에게 체직(遞職)상소를 올린다.
강화부 유수 이경일이 상소하기를, “옛날 병자년과 정축년의 병란 당시
신의 온 가족이 강도(江都)로 피난해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던 날 신의
고조모가 갑자기 적병을 만나 칼에 찔려 돌아가셨는데, 애통하고 분한 자
손의 마음으로서는 세월이 오래되었으나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
쪽 나라와 서로 관계되는 일에 혐의쩍어 간섭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강화
도 바다의 뱃길을 차마 건너지 못하겠습니다. 왕명을 받들고 머무르는 것
은 여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신의 사적인 의리로서는 실로
부임하기가 어렵습니다.”하니, 체직을 허락하였다.5)
이경일은 그의 고조모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피난해 들어갔다가 적병
을 만나 칼에 찔려 죽었다면서, 세월이 오래 지났지만 애통하고 분한 마음으
로 잊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저쪽 나라와 관계되는 일에 간섭
5) 정조실록 54권, 정조 24년(1800) 6월 정사.
6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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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강화도에도 차마 가지 못하겠다고 한다. 이경일은 병
자호란을 직접 경험한 당사자가 아니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가장 참혹한
공간이었던 강화도를 기억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기억으로 인해서 청과
관련 된 일은 물론 강화도로 가는 일 자체가 그에게는 트라우마가 되었기에,
왕명조차 거부한다.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후대까지 기억으로 전승
되고, 그것이 150년 이후의 사람에게도 트라우마의 원인이 된 것이다.
이렇게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
에게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는 것을 ‘역사적 트라우마’라고 한다. 역사적 트라
우마는 일반적인 트라우마와 달리 아무런 체험적 관련성이 없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며, 이들 비경험자는 세대를 넘어 후세대까지 연장되면서 세대를 걸쳐
유전된다. 또 이러한 역사적 트라우마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을 통해 나타난다
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6)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
건은 조선사회에 오랫동안 역사적 트라우마로 작동했음은 자명하다.
한편, 트라우마가 발생하면 그것에 대하여 극복과 치유를 모색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이때 병자호란 트라우마는 그 원인이 되는 충격, 즉 전쟁이
라는 역사적 사건이 단순히 물리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과 청의 교
체, 중화질서의 붕괴 등 정치 사회적 문제와 사상과 이념의 문제를 복합적으
로 불러일으켰기에, 그 극복과 치유를 위한 대응 담론 역시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병자호란 직후의 대응담론은 복수설치(復讐雪
恥)와 북벌론(北伐論)으로 시작되었다. 전쟁 직후 심양으로 끌려갔다가 귀국
한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여 우리의 힘으로 어그러
진 중화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러나 북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효
종이 죽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대응 방식은 점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청의 중국 대륙의 지배는 공고화되었으며, 북벌론 역시 오히려 당쟁
의 수단으로 변질되기도 했다.7) 이에 병자호란 트라우마의 대응 담론도 점차
6) 김종곤(2013), 「‘역사적 트라우마’개념의 재구성」, 시대와 철학 제24권 4호, 한국철학
사상연구회, 41~42쪽 참조.
7) 허태용(2010), 「17‧18세기 북벌론의 추이와 북학파의 대두」, 대동문화연구 69집, 성균
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참조.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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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기 시작했다.
숙종 대에 이르러 송시열과 서인들은 효종의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북벌의
지를 국가적 차원에서 기념하기 위해 여러 가지 국가적 사업을 벌였는데 이
와 함께 복수론과 북벌론은 현실적인 문제가 아닌 이념적인 문제로 바뀌어갔
다.8) 병자호란 트라우마의 기저에는 단순히 조선이 오랑캐에게 침범을 받았
다는 사실과 함께 중화질서로 대변되는 명이 청에게 멸망했다는 역사적 현실
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로 인해서 초기 북벌을 주장했던 이들은 청을 몰아
내는 것과 동시에 다시금 중국 대륙에 명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
나 명의 유민들이 세운 남명(南明)이 멸망하고 청이 중화의 주인임을 자처하
며 이러한 대응은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조선에서는 청을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중화는 오랑캐가 아닌 우리가 바로 세워야 한다는 담론이
힘을 얻는다. 존주대의론에 입각하여 명이 멸망한 상황에서 중화를 계승하는
것은 천하에 우리 밖에 없다는 ‘중화계승의식(中華繼承意識)’이 바로 그것이
다. 다시 말해 물리적으로 청을 몰아내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이 아닌 이
념적으로 그들보다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태도가 사대부들 사이에서 공고화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보수적인 대응방식에 반발하여 전혀 다른 방식의 대응담론도
등장한다. 서울과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용후생(利用
厚生)적 관점에서 번성하고 있는 청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그들에게
서 부국강병의 방도를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홍대용, 박지원 등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 지식인들은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서는 역사적 과정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명의 멸망은 청이 아닌 그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명을 위해서 청을 물리칠 필요성은 없는 셈
이다. 나아가 그들이 보여주는 번성의 바탕에는 오랑캐의 문물이 아닌 중화의
문물이 자리잡고 있으니 조선이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
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였다..9) 이들 북학파 지식인들에게 병자호란 트
8) 정옥자(1998),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연구, 일지사, 참조.
9) 허태용, 앞의 논문, 400~403쪽 참조.
8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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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마는 청을 멸망시켜서 치유되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들의 문
물을 배워 그들보다 우리가 더욱 번성했을 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담이 본격적으로 성행하기 시작한 18~19세기는 이처럼 역사적 트라우마
의 원인인 병자호란의 기억에 대한 다양한 대응담론이 정치 사회 전반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러한 대응담론은 자연스레 야담에도 영향을 미쳤다. 단순
한 역사적 사실로서의 병자호란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역사적 트라우마 극복
을 위한 서사적 대응으로서의 나름의 모색이 작품 속에 내재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야담 속에서 병자호란의 기억이 어떻
게 형상화되었으며, 나아가 치유와 극복을 모색하는 서사적 대응이 어떤 방식
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 야담에 나타난 트라우마 대응 양상
3.1. 운명론적 체념과 자기위안
전쟁은 개인적 차원에서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압도적인 현실이다. 병자
호란의 경우 전쟁이 발생하기 전부터 청과의 외교적 마찰이 있었고, 이로 인
해 문제가 야기될 소지가 분명히 있었으나, 권력자들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전쟁은 일어났고 청의 기마병들은 순식간에 도성을 에워쌌다. 이러한 상황에
서 개인은 그저 달아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청의 군대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강화도는 오히려 가장 참혹한 전장이 되어 버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러한 충격적인 역사적 현실을 마주하고 사람
들은 전쟁의 책임이 있는 사람을 찾기 마련이다.
전쟁 직후에 인조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파 신료들에게 돌렸다. 그는 명분
만 앞세워 경거망동하는 바람에 임금과 종사를 불측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며 척화파 신료들을 배척하고 친청파 신료들을 대거 기용한다. 물론 그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온전히 떠넘기는 것은 무리한 점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분명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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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은 당시 권력에 중심에 있던 신료들이 중국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명
청 교체라는 역사적 흐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척화를 주장하면서 청을
자극한 것이 양국의 평화를 위태롭게 만든데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는 점이
다.10) 인조 역시 그러한 신하들을 방관한 책임은 존재했으나, 그에 대해서 인
조는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였다. 인조 사후 효종이 즉위하고, 송시열을 위시
한 서인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척화파 신료들은 오히려 권력에 중심에 서고
그들의 책임론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병자호란의 발생에 대해 책임을 지
는 사람은 사라진 것이다. 더군다나 왕조 국가에서 왕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
릴 수 있을리 만무했다. 이에 사람들은 전쟁이 발생한 것이 하늘이 정한 이치
였다고 정신적 차원에서의 도피 즉 운명론적 관점에서 병자호란을 받아들이
고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점 아래에서 야담에서는 병자호란이 하
늘이 정한 조선의 운수였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송천필담 63화와 기문총화 525화는 병자호란은 예견한 김시양에 관한
일화이다.
1. 청나라에서 용골대가 사신으로 왔는데, 서강 선유봉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2. 김시양이 용골대가 남한산성을 염탐할 뜻이 있는 것을 알고 동문 밖
에 장막을 치고 맞이하였다.
3. 용골대가 이에 놀라 달아나면서 관사 벽에 ‘靑’자 한 글자를 남겨 두
었다.
4. 이해 12월에 과연 청나라 군대가 침범하였다.
송천필담에서는 김시양이 남한산성을 염탐하고자 한 용골대의 뜻을 꺽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거의 동일한 구조의 기문총화에서는 청나라 사신
이 말을 씻긴다는 핑계로 10여 리를 달려 남한산성을 염탐하였고, 이에 김시
양이 탄식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야기의 세부 내용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전쟁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조짐이 있었다는 서사 구
10) 박양리, 앞의 논문, 15~17쪽 참조.
10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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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동일하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김시양은 청나라 사신의 의도를 간파하
고 그를 막을 계책을 내었으나 그것이 전쟁을 막거나 방비하는 데에는 이르
지 못하였다. 전쟁은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고, 일어날 운명이었다는 인식
이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야담 속에서 병자호란을 예견한 인물로 김시양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흥미
롭다. 김시양은 실제로 평안감사와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국비를 확충하고
황폐해진 산성을 수리하는 등 전쟁의 방비에 공을 들인 인물이다. 그러나 안
타깝게도 김시양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몇 년 전 병을 얻어 장님이 되는 바
람에 고향으로 내려가 전쟁 당시에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가 청의 침
입을 예견하고 그러한 방비를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찌 되었든 병자
호란의 기억이 후대로 이어지면서 김시양에게 전쟁에 대해 미리 예견하였으
나 끝내 막을 수는 없었던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진 셈이다.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이 존재했지만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는 운명
론적 사고는 박엽에 관한 야담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박엽은 광해
군 시절 평안감사를 비롯해 관서 지방의 방백으로 6년 간 역임한 인물로 병
자호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앞서 국경을 책임지고 있던 인물로 명과 청에
관련된 여러 가지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조반정 직후 참형을
당하였는데 야담 속에서는 청의 침입을 예견하고 그들의 야욕을 억제한 인물
로 그려지고 있다.11)
그가 하루는 비장을 불러 술과 안주를 갖추어 주며 말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중화에 있는 구현 아래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건장한 사
내 둘이 채찍을 들고 지나갈 것이다. 그들에게 내 말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전하여라. ‘너희들이 비록 우리나라에 몇 달째 왔다갔다는 것을 다른 사람
들은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너희들이 다니느라고 참으
로 고달팠으리라. 그래서 술과 안주를 보내니 한 번 배불리 취한 뒤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비장이 구현에 가서 기다리니, 과연 두 사람이
11) 동패락송, 기문총화, 계서야담에 각각 4편의 박엽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내
용은 대동소이하다.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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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갔다. 비장이 박엽의 말을 그대로 전하니,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며 놀
라 얼굴빛이 변하여 대답하였다. “저희들이 비록 여기에 왔으나 어찌 감히
신과 같은 장군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겠습니까? 장군님이 계신 동안은 저
희들이 어찌 감히 다시 오겠습니까?” 하고는 술을 마시더니 가버렸다. 이
들은 곧 용골대와 마부대였다. 우리나라에 몰래 들어와 허실을 탐지하기
위하여 때로는 승정원의 종으로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고 박엽만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12)
이시양이 용골대의 계책을 미리 눈치채고 대책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박
엽은 승정원에 잠입한 용골대와 마부대의 존재를 간파해 낸다. 또, 이후에 전
쟁을 막기 위해서 첩과 함께 오랑캐의 진영에 가서 누르하치와 칼싸움을하기
도 한다. 부하들을 모두 잃고 박엽에게 패한 누르하치는 그가 살아있을 동안
에는 절대 조선을 넘보지 않겠노라 약조를 한다. 이렇게 박엽이 오랑캐의 야
욕을 예견하고 심지어는 억눌렀지만, 그 역시 하늘이 정해 놓은 운명을 거스
를 수는 없었다. 박엽은 어린 시절에 ‘천인을 죽이지 않으면 천인이 죽일 것
이다.’라는 점괘를 받는다. 이에 수령이 되어서 천 명의 사람을 죽였다. 그러
나 결국은 인조반정 이후에 구인후가 가지고 온 사약을 마시고 죽게 되는데,
구인후의 자(字)가 다름 아닌 천인이었다는 것이다. 용골대의 첩자를 간파하
고, 누르하치와의 무술 대결에서 승리하는가 하면 하루에도 천리를 날아다니
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박엽은 하늘이 정한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은 전쟁의 책임이 나, 혹은 우리에게 있는 것
이 아니라 그저 하늘이 정한 운수였다는 운명론적 체념을 하게 된다. 병조판
사였던 김시양도, 영웅적 면모를 갖추었던 박엽도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전
쟁을 막지 못했다. 국가도 왕과 권력자도 전쟁의 패배나 개인의 고통에 책임
지지 않았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전쟁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체념의 정서가 오히려 스스로를 위로하는 하나
의 방도가 되었을 것이다.
12) 기문총화 상, 470~471쪽.
12 박양리
- 136 -
3.2. 이념의 강화와 가치선양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인 혼란을 막기 위해 지배층은 우선적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이전의 사회질서를 다시금 공고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 일반적으로 윤리적 질서의 강조를 통해 정신적 충격과 혼란을
수습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병자호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지배층은
조선의 상하층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 밖에 없는 오랑캐에게 패배했다는 정신
적 충격을 완화하는 동시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이념, 그 중에서도 절의(節
義)를 강조하고 이러한 윤리적 가치를 선양하는 데 힘을 썼다. 송시열은 오랑
캐가 천하를 차지한 것으로 보이는 작금의 현실은 도리와 의리가 쇠한 세상
이기 때문에 도리와 의리를 다시금 드높이면 세상의 질서는 다시금 바로잡아
질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이에 그는 다수의 전(傳)을 통하여 전란 속에서도
절의를 지킨 인물들을 부각시켜 이념을 강화하였다.13) 이러한 서사적 대응은
야담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청의 조병 요청으로 참전하였으나 대명의리를 지키다가 순절한 이사룡은
극적인 삶의 궤적으로 말미암아 이미 당대에 여러차례 입전된 인물이다. 그에
대한 기억은 청성잡기과 송천필담에서 다시금 소환된다. 심재는 송천필
담에서 송시열의 <포수이사룡전>을 간추려 기록하면서, 이야기 말미에 “우
리나라가 불행히 병자년의 변란을 당함에 참으로 소중화라는 칭호가 부끄럽
다고 하겠다. 벼슬아치로는 청음과 삼학사가 있었고, 말엽으로 임경업이 있었
으며, 군중의 천한 병사로 이사룡이 있어서 의리를 지키고 굴복하지 않으며
죽음을 택하고 후회하지 않았다. 이들은 강상의 윤리를 직접 실천하여 천하를
꾸짖음이 있었으니,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 어찌 여러 성군께서
배양한 소치요, 명나라의 어진 덕화가 깊이 젖어들어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
가.”14)라며 병자호란은 치욕적인 기억이지만, 청음과 삼학사, 임경업, 이사룡
등 절의를 지킨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말한다. 절의를 지킨 인물
13) 박양리, 앞의 논문, 64쪽 참조.
14) 송천필담 1, 102쪽.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13
- 137 -
들의 일화를 환기시킴으로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치유하고자 한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수많은 여성들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앞서 강화부 유수
이경일의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들 여성들은 또다른 트라우마의 원
인이 되었다. 그나마 적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혹은 스스로 목숨을 버린 여성
들의 경우 오히려 열녀로 숭앙 받으면서 사회적 파장이 적었다. 그러나 포로
로 잡힌 여성들을 둘러싸고 그들의 속환(贖還) 문제와 함께 훼절과 관련된 사
회 정치적 논란이 불거졌다. 사실 그녀들은 스스로 원하지 않았으나 전쟁으로
인해 포로가 되었던 피해자였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들은 오히려 정절을 더렵
혔으므로 혼인생활을 계속 할 수 없는 존재이자 대의를 저버려 집안의 제사
를 맡길 수 없는 여인라면서 그들을 죄인취급을 한다. 왕이 나서서 사태를 수
습하고자 했으나 결국은 해결되지 않았다.15) 사대부들은 그녀들을 지켜내지
못한 것을 자책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녀들의 훼절을 탓하면서 트라우마를 극
복하려고 하였다.
박소촌화 1권 59화 <이민구성구>는 호란 때 적에게 치욕을 당하게 된
두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경개를 간략히 드러내면 다음과 같다.
1. 민구와 성구 형제의 처가 호란 때 절에 숨어 있다가 적에게 잡힌다.
2. 성구의 처는 자결하고 민구의 처는 끌려가게 되었다.
3. 민구의 처가 당나귀를 타고 채찍질을 하며 자못 당당하니 사람들이
욕을 하였다
4. 앞서 시아버지가 며느리들에게 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하였는
데, 민구의 처는 죽겠다고 하고 성구의 처는 죽기 쉽지 않을 것이라
답하였다.
15) 병자호란 직후 사대부 여인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여인들의 처우에 대한 논란
이 있었다. 영의정 장유는 인조에게 속환되어 온 며느리 김씨를 이혼시켜 달라고 청
한다. 인조는 이를 거절하였으나, 그녀는 끝내 시부모에게 불손하였다는 이유로 이혼
당한다. 이에 대해 당시 사대부들은 “그들이 목숨을 버려 죽지 않은 것을 책할 수 없
다 해도 남편의 집안에서 볼 때 이미 대의가 끊어진 것이니, 어찌 강제로 다시 결합
하게 하여 사대부 가풍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라며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4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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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구와 성구 형제의 처는 동시에 적에게 욕을 당하게 되었는데 성구의 처
는 자결하였으나, 민구의 처는 포로가 되었음에도 오히려 당당한 모습을 보여
세간의 욕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소촌화의 저자인 이동윤은 두 여인이
일화를 시간 순으로 배열하는 대신, 사건의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원인이 되
는 사건을 나중에 제시함으로써, 그녀의 행동이 왜 비난받아야 하는지를 강조
하였다.16)
청에 포로로 끌려간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같은 야담집 101화에 더욱 흥미
진진하게 그려진다. 어느 절에 선비들이 모여 각기 자신의 아내의 어짊에 대
해 자랑하고 있었다. 이때 한 승려가 아내는 진실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한다.
소승 또한 사대부 가의 아들로서 열여섯에 아내를 맞았는데 모습이 아
름답고 성품이 지혜로와 금슬이 서로 좋았습니다.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게
되자 분하여 한 마음으로 결심하기를 죽어도 잊기 어렵다 하여 몰래 심양
에 들어갔지만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홀연히 집안 여종을 길에
서 만났는데 그 여주인이 사는 곳을 말하고 한 민가로 데리고 들어갔습니
다. 처가 저를 보고는 기뻐하는 빛이 없더니 밥을 지어 올린 후 한 빈 방
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자물쇠를 채우고 말하기를 ”가히 사냥개의 밥을 마
련할 만하다“ 하였습니다. 해가 저물고 한 오랑캐가 말을 달려 채찍질하고
돌아오는데 개 세 마리가 그를 따랐는데, 그 여자가 밥을 지어 올리고 함
께 잤습니다. 내가 이에 활과 살 세 개를 끼고 집에 올라가 구멍으로 그들
을 보니 여자와 오랑캐가 바야흐로 웃으며 장난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화살 가운데 하나로 오랑캐를 죽이고 들어가 그 여자를 보니 여자가 성난
빛이 있어 그에게 말하나 듣지 않으므로 또 쏘아 거꾸러뜨렸습니다. 숨겨
진 것을 뒤져 말린 박가루를 전대에 담아 그것을 차고 또 고기 세 덩어리
를 지니고 나오니 개 한 마리가 나를 쫓아오기에 고기 한 덩어리를 던져
주니 그것을 물기에 쏘아 죽였지요. 또 개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쫓아오기에 모두 또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밤에 가고 낮에 숨어 박가루
를 물에 타서 마시고 겨우 조선 경계에 이르러 다시는 혼인하지 않고 머리
깎고 중이 되었습니다.17)
16) 조선옥(2008), 박소촌화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33쪽, 참조.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15
- 139 -
승려의 이야기 속 여인은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가서는 호의호식하
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남편이 찾으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표정을
보이기는커녕, 오랑캐를 죽인 남편에게 성난 빛을 보였다. 이동윤은 어릴 적
에 노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노인들은 또한 노인들로부터 전하여 들은
말이라고 이야기의 출처를 밝혔다. 즉, 민간에 널리 유전되어 전해지던 이야
기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속에는 포로가 된 여인이란 기본적으로 실절하여 믿
을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있다고 하겠다.
17세기에 활발하게 창작되었던 열녀전의 경우 주된 창작계층은 당대의 사
상계를 주도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열녀전을 통해 ‘외적에 항거하여 정절
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죽음을 열행의 평가
기준으로 각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18) 즉, 모범이 될만한 여성을 기리는 데
주력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야담에서는 주로 포로가 된 여인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여, 트라우마의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동시에 열행의 가치를 선
양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열녀전과 변별된다.
야담에서는 이념의 강화를 위해 비현실적 요소를 적절하게 사용하기도 하
였다. 학산한언의 98화는 역관 정명수와 의로운 말의 일화이다. 인조 말엽
의 청나라 역관인 정명수는 본디 우리나라 사람인데 청에 망명하여 역관이
되었는데 극히 흉악하고 교활한 인물이었다. 특히 청나라 사신으로 올 때 우
리나라에 재물을 많이 뜯어갔다. 어느날 그가 준마 한필을 구하여 날랜 말을
준비하였다. 정명수가 말을 타고 녹번재를 막 넘었을 때, 말이 갑자기 뛰어
올라서 그를 내동댕이 치고는 그대로 해주 수양산으로 들어가 내려오지 않
았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그 말을 ‘의마(義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실제로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조선 사회를 괴롭힌 것 중 하나는 조선 출신
의 청나라 역관들의 횡포였다. 특히 정명수는 조선의 동향을 청 수뇌부에 전
하고 조선을 압박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는 용골대 등과 유착하여 그
들의 비호 아래 조선을 압박하며, 때로는 청의 칙사보다 더한 횡포를 부렸다.
17) 박소촌화 1책 101화
18) 홍인숙(2001), 「17세기 열녀전 연구」, 한국고전연구 7권, 한국고전연구학회, 참조.
16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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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의주부윤 황일호 등 11명의 처형에 직접 관여하면서 조선 신료들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그에게 매번 막대한 뇌물을 안겨
야만 했다.19) 이들에 대한 기억은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또다른 트라우마의
원인이었을 터이다. 실제 역사에서 그를 치죄할 수는 없었지만, 역사적 서술
과 달리 야담은 전해 들은 이야기를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그 진실성 여부에
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허구적 이야기가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사대부들의
대응이었다는 것은 학산한언의 편찬자인 신돈복의 의론을 통해서 더욱 분
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아! 병자년 정축년의 호란을 당하면서 우리나라는 어디나 개돼지와
같은 수치를 안게 되었으면서도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어찌 열사의 의
연한 혼백이 이 말에 의탁하여 일세에 경종을 울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
지 않은 것이라면, 말은 짐승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오랑캐를 태우는 것이
더럽다는 것을 알았으며, 또한 수양산이 마침내 돌아가 의지할 만한 땅이
라는 것을 알겠는가!20)
병자호란 당시 수치를 당하면서도 감히 저항하지 못한 것이 트라우마의 원
인이었다면, 미물인 말이 절의를 지켜 원수인 정명수를 땅에 떨어트렸다는 이
야기는 비록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이념적 가치를 드높이고 그
를 통해 트라우마의 극복에 도움이 되었던 셈이다.
3.3. 객관적 역사인식과 현실비판
청이 중원을 차지한 지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천리(天理)에 따
라 오랑캐가 쇠퇴하기는 커녕, 청의 국운은 오히려 융성해지기만 하자 조선
사회에서는 이제 청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
작했다. 더불어 이 시기에 역사를 비롯한 특정한 대상에 대한 정보나 실물을
수집하며, 각종 기록을 남기는 것이 일종의 경향으로 등장하였는데, 이와 함
19) 한명기(2009),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180~182쪽, 참조.
20) 학산한언 1, 186쪽.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17
- 141 -
께 청에 사신으로 다녀온 이들이 남긴 다양한 연행기록들은 청에 대한 다양
한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세기 중엽 서얼 출신 성대중은 그의 야담집 청성
잡기에서 병자호란에 대한 야사류는 물론 청과 관련한 이야기를 다수 기록
하였다. 그는 누르하치에서 황태극, 순치제 등으로 이어지는 청 황제의 가계
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고, 창업 군주 누르하치의 능력이나 성품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누르하치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의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천하의 주인이 되지 않겠는가.”21)며 나
름의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 이동윤 역시 청에 대한 관
심을 보였다. 그는 박소촌화에서 누르하치 집안의 연원에 대해 기술하는 가
하면, 숭정, 숭덕, 순치, 강희, 옹정, 건륭제의 내력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기
도 했다. 또한 홍대용의 연행록을 읽고 그가 청에서 겪은 일화들을 요약하여
기술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 야담집에서 보이는 청에 대한 관심이 이용후생적 관점의 북학이
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또 이러한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청성잡기에서 성대중은 누르하치의 자식들에 대해 언급하면
서 맏아들 귀영개가 다섯째 홍태시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조선에 망명해서 곤
궁하게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역사서는 물론 중국의 역사서에
서도 그러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박소촌화에 보이는 강희제의 생모에
대한 이야기의 경우에는 설화적 성격이 강하다. 병자호란 당시 누르하치가 수
원에서 한 여자를 데려갔는데, 그 여자가 오줌을 누니 땅에 구멍이 생길 정도
였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그 여자의 능력을 알 지 못하
고 칸이 데려갔는데, 그녀가 강희제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강희제가
조선에 후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역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그러나 중요
한 것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러한 이야기가 민간과 사대부에 유전하고
있었으며, 야담집의 편찬자가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즉, 이념적인
차원에서 청을 오랑캐로 무시하거나 적대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존
21) 청성잡기, 321쪽.
18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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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이자 이웃 국가로서 청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이 생겨났으며, 이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자 하는 의식의 흐름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을 단순히 운이 좋아서 중원을 차지했을 뿐 천리에 따라 조만간 쫓겨날
오랑캐로 보지 않고 국가로 인정함과 동시에 병자호란과 그 전후의 대처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인식도 나타난다. 이는 병자호란을 절의를
드러내는 이념의 장으로 인식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이러한 객관적인
인식은 야담 속에서 북벌론에 대한 비판적 이야기로 드러난다.
동패락송과 계서야담」에는 북벌과 관련한 송시열과 정태화의 이야기
가 전해진다.
1. 효종이 북벌의 일을 송시열에게 맡겼다.
2. 송시열이 독대를 마친 뒤 재상 정태화를 보러 갔을, 그 아우 정지화
가 자리에 있다가 눈썹을 찡그리고 자리를 피하였다.
3. 송시열이 북벌에 일로 상을 만났는데, 군량을 나를 사람이 없다고 하
여 대감을 천거하였다며 의향을 물었다. 이에 정태화는 군량 한 가지
일은 감당할 만 하다고 하였다.
4. 그 때 곁 방에 있던 정지화가 “그 놈은 갔습니까?”라며 큰 소리로 묻
자, 정태화는 미소를 지으며 “과천 산지기 놈은 벌써 갔고, 송상께서
는 자리에 계시다.”고 답하였다.
5. 송시열이 간 후 정태화가 아우를 경박하다고 꾸짖으니, 아우는 형님
이 사세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군량을 담당한다고 하니 어이가 없어
그리하였다 하였다.
6. 정태화가 웃으면서 병사가 압록강을 넘어가기만 하면, 군량은 내가
독려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7. 이에 형제가 한바탕 웃고서 이야기를 그쳤다.
정태화는 인조부터 현종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정승을 역임한 인물이
다. 특히 한당과 산당의 갈등, 북벌을 둘러싼 효종과 신료들 간의 갈등, 예송
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갈등 속에서 그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조정자의 역
할을 수행하였다, 정태화는 여러 야담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 위 일화는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재상인 그의 입을 빌려 북벌의 허상에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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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군량을 맡아 달라는 송시열의 청을 허락한 정태화에게 그의 아우는 “지금
경비로 보아 어떻게 군량을 잇게 하시겠습니까? 사세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이처럼 가볍게 말씀하시니, 제가 마음 속으로 웃으며 불복하는 바입니
다.”라고 불만을 표시한다. 아무리 정태화의 재주가 빼어나더라도 곡식이 없
는 데에야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뜻이다. 이에 대해 정태화는 “병사가 압록
강을 넘어가기만 하면, 군량이야 내가 독려할 수가 있다.”며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이는 북벌을 이야기 하면서도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군사적・재정적 기
반이 전혀 없는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웃음이면서 동시에 북벌이 사실은 이
상적인 논의와 명분일 뿐이고 북벌론을 주장하는 자들조차 그것을 실재로 행
하지 않을 것이라는 날카로운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야담에서는 송시열과 함께 북벌의 한 축이었던 효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드러나기도 한다. 효종이 북벌을 수행할 만큼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인데, 주
로 시정 인물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청성잡기에는 효종과 임경업의 첩 매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임경업과 같은 장수를 얻어 북벌을 이루겠냐는 효종의 질문에
북벌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병자호란 때에 전하께서 종묘와 사직을 받들고 강도(江都)로 피난 가셨
습니다. 이때 전하께서는 김경징(金慶徵)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을 알면
서도 어찌하여 그를 참수하지 않으시고, 병사를 거느려 오랑캐를 막게 하
셨습니까? 김경징을 참수하는 것은 그저 손바닥을 뒤집듯이 쉬운 일이었는
데도 전하께서 하지 못하셨거늘 하물며 북벌하는 일이겠습니까. 저는 비록
여자이지만 전하께서 실행하지 못하실 줄을 압니다.” 효종은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22)
김경징은 병자호란 당시 빈궁과 원손, 봉림대군 등 왕실 식구들을 호종하
여 강화도로 들어가서 수비 책임을 맡았으나, 대군 등의 의견을 무시하고 안
22) 청성잡기, 115쪽.
20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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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게 대응하다가 결국 강화도가 함락하자 방어를 포기하고 자신의 가족만
챙겨 도망간 인물이다. 후일 그 죄로 사사되기는 하였으나 인조는 끝까지 그
를 옹호하였다. 그에 대해서 사대부는 물론 당대 민중들에게도 부정적인 인식
을 보였다. 왕과 임경업의 첩의 대화라는 허구적 장치를 통해 김경징의 일조
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왕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계서야담, 동패락송, 기문총화, 삽교만록 등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
기가 실려 있다. 효종이 미행을 나갔다가 우연히 시정 인물들이 자신과 북벌
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된다는 것을 기본적인 서사 골격으로 하고 있
는데, 이들 작품에서 등장하는 시정 인물은 궁궐의 수졸이나, 떡장수 등 그
신분은 다양하나 미행이라는 장치를 통해 북벌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고 있다
는 점에서는 동일하다.23)
북벌이 허상이며, 왕와 신료들이 이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한 비
판은 허생이야기에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현재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허
생이야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옥갑야화」에 수록된 작품이다. 그러나
허생이야기는 박지원에 <허생전> 뿐만 다양하게 변주되어 조선후기 여러 야
담집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청구야담, 계서야담, 기문총화, 동야휘집
, 차산필담 등 조선후기 대표 야담집에 일곱편 정도가 보이며,24) 최근 발
굴된 <선유동기> 역시 허생이야기의 변주라 할 수 있다.25) 허생이야기는 치
부와 관련된 전반부과 북벌과 관련된 후반부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후반부는
송시열과 함께 북벌과 관련한 주요 인물이었던 이완이 등장하여 허생에게 북
벌의 계책을 물어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각편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
23) 김수현, 앞의 논문, 참조.
24) 기존의 연구 성과를 살펴볼 때, 박지원의 <허생전>은 그의 완전한 창작물이라기 보다
는 조선 후기에 널리 유전되고 있던 허생이야기를 나름의 문학적 역량을 발휘하여 개
작한 것으로 보인다.(<허생전> 정착에 관한 논의는 정출헌(1998), 고전소설사의 구도
와 시각. 소명출판; 임형택(1978), 「한문단편 형성과정에서의 강담사」, 창작과 비평
제13권 3호, 창비; 장진숙(2013), 야담 서사변개의 사회문학적 맥락과 의미, 인하대
학교 박사학위논문, 참조)
25) 정환국(2006), 「허생고사와 북벌인식의 추이-자료 <선유동기>를 통해서」, 한국어문학
연구47, 한국어문학연구학회, 참조.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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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어찌 되었든 허생은 이완에게 산야에 숨어 있는 인재 등용, 훈척 권귀 종
친의 부를 빼앗아 명의 유민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에게 종실의 딸을 시집보
내는 방안, 국중자제들을 변발하고 호복을 입혀 청나라 과거에 응시하고 상업
활동을 하게 만드는 방안을 내어놓는다. 그러나 이완은 이를 불가하다고 말하
고, 이에 허생은 크게 화를 내고는 사라진다.
세 가지 안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연구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한 바 있다. 그러나 각각의 안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든지 중요
한 것은 북벌을 위한 실용적인 안이 결국은 이완으로 대변되는 지배층에 의
해 부정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허생은 “너는 이 시대에 마땅한 일이 무엇인지
도 모르면서 망령되게 대사를 도모한다고 떠벌이니, 무슨 일인들 할 수 있겠
느냐?”26)고 일갈하였는데, 이 말 속에는 시대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명분론
에만 사로잡혀 있는 지배층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
다. 결국 이들 작품은 더이상 이념에만 사로잡혀 있어 허상에만 빠져 있는다
고 병자호란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없고, 오히려 그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북학을 통해서 청을 이겨나가야 한다는 인식과 대응의 방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4. 결론
1636년 겨울, 불과 100여 일 동안의 전쟁은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남겼다.
병자호란의 충격은 비단 육체적 물질적 피해에 그치지 않았다. 특히 전통적
화이론의 붕괴와 중화질서의 재편은 정신적인 상흔을 가지고 왔다. 이러한 트
라우마는 당대를 넘어서 후대까지 이어져 역사적 트라우마로 고착화되었다.
트라우마에는 자연 치유와 극복이 필요하다. 이에 조선사회는 정치 문화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대응을 모색하였다. 이는 야담에서도 드러났다.
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참극인 전쟁을 하늘이 정한 운명이었다고 설명
26) 기문총화 中, 130쪽.
22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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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야담들 속에는 운명론적 체념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체념의
정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못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
서 자기 위안의 방편이 되었다.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사대부들을
중심으로는 보수적 이념을 강조하여 정신적 상흔을 메꾸려는 움직임이 활발
했다. 야담에서도 절의를 지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칭송, 훼절자에 대한 강한
비난의 이야기를 통해 병자호란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모색이 보인다. 한편,
18세기에 이르러서 청을 배워야한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다. 이러한 분위
기 속에서 병자호란과 그 이후 조선의 대응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비
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 연구를 통해 야담 속에 나타난 병자호란의 기억의 면모를 총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기억의 모습은 단일하지 않았다. 이러한 다양한 기억의 모습
은 조선사회가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하고 극복하고
자 노력하였는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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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양리
동의대학교 문학인문교양학부
전자우편: arine2000@naver.com
24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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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접수일: 4월 7일
심사 기간: 4월 17일 ~ 5월 10일
게재확정일: 5월 12일
야담을 통해 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 병자호란의 기억과 그 서사적 대응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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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Memories over Byeongjahoran as Historic
Trauma and Narrative response Seen
through Yadam
Park Yang-ri(Dongeui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memories over
Byeongjahoran were embodied within historical tales in the perspective of
healing and overcoming historic trauma. It can be said that Byeongjahoran
is historic trauma different from other types of trauma in that it was left
as mental wounds in Chosun society even after a long period. Also, to get
over that historic trauma, attempts were made socially as well as
culturally. This coping discourse naturally influenced yadam, too.
First of all, there are tales about figures who try to predict or prevent
Byeongjahoran. In those stories, their prediction or prevention all went into
failure, and the war occurred after all. It reflects the people’s recognition
and sentiment of resignation that Byeongjahoran was doomed to happen
and could not be avoided by men’s power. After Byeongjahoran, to get rid
of the disturbed national state of mind and solidify social order like before,
narrative response was tried for stressing ideology and elevating the value
of integrity, and this was shown mainly through yeolnyeodam and
jeoluidam. Unlike historic narrative, in yadam, compilers emphasized
integrity and tried to get over trauma through fictional stories. Lastly,
within the trends of the mid-18th century, the movement to view
26 박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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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eongjahoran and Qing objectively was revealed in yadam, too. These
are mainly the critical stories about the absurdity of bukbeol and historical
tales about Qing.
Through these yadam, we can see that the works are not about
reproducing the memories of Byeongjahoran merely as historical facts but
about looking for something as narrative coping to get over that historic
trauma.
Key word : Yadam, Byeongjahoran, Memories over Byeongjahoran, Historic
Trauma, Asianism, Conquest of the Northern Ar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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