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수가?
박심문朴審問 부인 청주 한씨와 헌민공獻愍公 그리고 바람
생육신들의 활동 상황과 인물에 따라 나름 이해하기 쉽게 글을 올리다 보니 청재공 이야기를 나누어 올리게 되네.
청주 한씨 부인의 의연한 태도에 감동받아
주루룩 흘리는 뜨거운 눈물이 액정에 떨어져 흐르자, 화면이 떨리고 글이 제멋대로 써지기에 눈물이 멈춰지기를 한참 기다린 후쓰니 화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남편의 갑작스런 병사病死 소식은 박심문의 유지를 가져온 심복에 의해 3일 뒤, 한양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부인과 가족들 그리고 조정에 전해졌다.
부인인 청주 한 씨 는,
남편의 부음관련 밀지를 부엌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면서 읽자 마자 즉시 태우고, 시신이 도착하기 전 3일간 곡을 한 뒤에 남편과 이심전심인지라 남편의 속내를 따라, 충의로운 남편과 사육신들에게 술상을 차려주고 망을보던 그날들의 추억을 떠올리며 어린 자녀들에게 밀지 내용을 숨긴채 46살의 나이로 목숨을 끊었다.
박심문의 유해가 도착하자 부인과 함께 선산이 있는 고양 원당리 포도골로 옮겨 장사지냈고, 묘비에는 박심문의 유언대로 질정관 임무를 다하지 못했으니(세조에게 결과 보고를 못한 핑계를 댐) 예조 정랑까지만 기록하겠다며 기록했다.
박심문은,
세조가 행여나 있을 제2, 제 3의단종복위 조짐에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거라 판단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병사病死로 죽음을 위장하자고 결단하여 심복 한 명에게만 속내를 말했다.
명리보다 가족과 가문의 안전을
위한 고심과, 심복의 충절, 자식들의 인고 덕분에 박심문의 충절과 맹약의 자결은 합법적인 병사病死로 처리되어 장례되었다.
세조의 눈초리하에서도 세간에는 사육신 생육신 초혼칠신 등의
충의 열사들의 흠모가 이어지고, 조선 성리학에 걸맞는 민족의 충혼이 되어갔지만, 계유정난 직후 맨 처음 관직을 떠난 충절만 미미하게 회자되었다.
박심문의 이름 석 자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단종의 매형인 헌민공獻愍公(문종 딸 경혜공주 부마 정종鄭悰, 단종 때 형조판서였다가 사육신 사건 후 유배됨. 사육신 죽음 5년 후1461년 승려 성탄과 역모를 꾀하다가 능지처참 됨)의 꼼꼼한 기록에 의해서 였다.
박심문이 심복을 통해, 부인과 헌민공에게는 단종복위관련 내용과 그의 죽음의 진실을 밀지로 보내면서, 헌민공에게 200년이 지나 밝혀지도록 안배해달라고 부탁했으며, 자식들에게는 일반적인 가장으로서의 유언을 보냈다.
그렇기에
헌민공은 박심문에 관한 충절의 행적을 은밀히 기록하여 적어도 200년이 지나 먼 후세에 알려지도록 안배했다.
이럴수가?
선조 때 사육신이 대공불천의 역적으로 몰리는 진통을 극복하고, 223년이 지난 1679년 숙종17년 때부터 단종복위 관련자에 대한 복권의 기류가 나타나고 1691년에 복권되었다.
그뒤 325년이 된 1781~2년 정조때 충의의 열사들로 시호를 받고 이조판서 등에 추증되었다.
박심문 행적은
숨겨온 헌민공 기록이 안전한 기류를 타고 375년이 지나 1831년 순조임금(31) 밝혀진 것이다.
순조 임금이 말하길, 청재 공은 당시 삼왕의 총애를 받은 자로서 계유정난이 일자 가장 먼저 관직을 버리고, 단종 성왕 복위를 주도하다가, 명나라 사신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사육신과의 맹약에 대한 책임감에 부창부수로 부부가 자결하였다. 이것을 높이 기려 '사칠신死七臣'이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조판서에 추증했다.
동학사에서 세조가 기록한 충신들의 명단엔 빠지고,
김시습이 주관한 추혼제 때도
청재공은 빠졌지만
비로소 1828년 영월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으며 1871년에는 고종 황제가 충정공(忠貞公) 시호를 내렸으니
성삼문忠文ㆍ박팽년忠正ㆍ하위지忠烈ㆍ유응부忠穆ㆍ유성원忠敬ㆍ이개義烈 등의 시호보다 의미가 더 높다.
뿐만 아니라 이후 공주 숙모전, 진안 이산묘, 대전 숭절사, 진주 충정사, 해남 죽음사(竹陰祠), 장흥 세덕사, 영주 영모정 등 14군데의 사당에서 충정공 박심문을 기리고 있으니,
청재공 보다 많은 곳에서 충절을 기리는 충신 뉘 있을까?
사육신 구성에 포함되지 아니하더라도, 이로나마 가문의 쓰라린 원혼이 위로되고 있다.
명종 때 대제학을지낸 밀양박씨 규정공파 박충원의 단종 제문
'왕실의 맏 아드님
어린나이에 보위 올라
때마침 비운 만나
두메산골 내 치었소
한 조각 푸른 뫼에
만고 원혼 슬프외다
임이시여 강림하와
이 술잔을 드옵소서'
청재 박심문의 지혜로운 결단과 부인ㆍ심복ㆍ사육신ㆍ헌민공 등 의리를 지킨 분들 덕분에 밀양박씨가 환란을 당하지 않고, 조선과 한국의 든든한 기둥이 되었으며, 우리들의 친구인 바람 상호가 태어나 우리들과 인생을 즐기고 있으니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