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촉도 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 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은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아.
1944년 발간된 서정주의 시이다. 촉나라의 두우의 전설에서 따온 새 귀촉도를 배경으로 쓴 시.
화사(花蛇)
- 서정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석유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드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스며라, 배암!
-<시인부락> 2호 (1936)
반도학도특별지원병 제군에게
정면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느니라
그리움에 젖은 눈에 가시를 세워
사랑보단 먼저 오는 원수를 맞이하자
유유히 흐르는 우리의 시간이
이제는 성낸 말발굽 뛰듯 하다
벗아 하늘도 찢어진 지 오래여라
날과 달이 가는 길도 비뚜른지 오래여라
거친 해일이 우리와 원수의 키를 넘어선지
우리의 뼈와 살을 갈기 시작한 지도 벌써 오래여라
지극히 고운 것이, 벗아
우리 형제들의 피로 물든 꽃자줏빛 바다 위에
일어나려 아른아른 발버둥을 치는도다.
우리 혼령으로 구단(九段) 위에 짙푸를
사랑에, 사랑애 목말라 있도다
정면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느니라
그리움에 젖은 눈에 가시를 세워
사랑보단 먼저 오는 원수를 맞이하자
주사위는 이미 던지어졌다
다시 더 생각할 건 절대로 없었다
너를 쏘자, 너를 쏘자 벗아
조상의 넋이 담긴 하늘가에
붉게 물든 너를 쏘자 벗아!
우리들의 마지막이요 처음인 너
그러나 기어코 발사해야 할 백금탄환인 너!
교복과 교모를 이냥 벗어버리고
모든 낡은 보람 이냥 벗어버리고
주어진 총칼을 손에 잡으라!
적의 과녁 위에 육탄을 던져라!
벗아, 그리운 벗아,
성장(星章)의 군모 아래 새로 불을 켠
눈을 보자 눈을 보자 벗아......
오백 년 아닌 천 년 만에
새로 불을 켠 네 눈을 보자 멋아......
아무 뉘우침도 없이 스러짐 속에 스러져 가는
네 위엔 한 송이의 꽃이 피리라
흘린 네 피위에 외우지는 소리 있어
우리 늘 항상 그 뒤를 따르리라
『매일신보』 1943년 11월 16일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 살구가 곡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숫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친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는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덕거리며 나는 왔다.
동천(冬天)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는 해방 후에 쓴 시 ‘귀촉도’에서는 시에서 사변성보다는 서정성으로, 감각적인 것에 전통적인 정서를 포갰다. 이후로, 토착세계에서 전통적인 정서로 나아갔다.(국화 옆에서, 밀어)
시집 ‘동천’에는 불교의 인연설을 가져왔다.
(권영민의 한국현대문학사(민음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