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칼루(Makalu·8,463m)는 남서쪽 바룬(Barun) 빙하, 북서쪽의 차고(Chago)빙하, 그리고 동쪽의 사키에텡(Sakyeteng)빙하, 이렇게 3대 빙하에 둘러싸여 있는 세계 제5위 고봉이다. 이 산의 산세(山勢)는 카라코룸의 세계 제2위 고봉 K2(8,611m)에 못지않을 정도로 험준하다.
노멀루트인 북서릉은 정상에서 북서쪽의 마칼루라(Makalu La·7,400m)와 캉충체(마칼루 2봉·7,640m)를 향해 뻗어 내린다. 이 루트는 악명 높은 강풍으로 인해, 에베레스트(8,848m)의 노멀루트인 남동릉 루트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게 평가된다. 이 평가를 증명이라도 하듯, 에베레스트의 초등자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1954년 맥파레인 대원과 마칼루 북벽 등반 중 크레바스에 추락해 부상을 입고, 등정에 실패했다.
1955년 프랑코 대장이 이끄는 프랑스 등반대의 장 쿠지와 리오넬 테레이 대원이 5월 15일 유산소로 마칼루라에서 북서릉 암릉의 좌측, 설릉으로 전진해 초등했다. 1961년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이끄는 영-미 합동대가 무산소로 등정을 시도했지만, 2명이 정상 아래 120m 지점까지 진출하고 악천후로 실패했다.
- ▲ 마칼루 북서릉 등반. 등 뒤로 참랑이 바라보인다
- 폴란드의 보이테크 쿠르티카와 카라코룸의 가셔브룸 4봉의 ‘빛나는 벽’, 즉 서벽을 등정해 유명세를 타게 된 오스트리아 산악인 로베르 샤우어가 이 루트를 최초로 단독 등정했다. 폴란드의 유명 산악인 예지 쿠쿠츠카는 프랑스 대의 초등 루트 우측에 위치한 북서릉의 암릉, 즉 북서 립(North-West Rib)에 신 루트를 개척하며 알파인 스타일로 단독 등정에 성공했다.
마칼루의 두 번째 개척 루트, 남동릉은 정상에서 남동봉(8,010m)을 지나 남동 콜(Col·일본 대 콜)로 이어진 기나긴 칼날 능선의 난코스다. 1970년 마코토 하라 대장이 이끄는 일본 대는 3,000m의 고정 자일을 깔며 남동릉을 등반했는데, 남동봉 아래쪽의 ‘검은 장다름(Black Gendarme : 검고 뾰족한 암탑)’ 때문에 남동릉으로 직등을 계속할 수 없었다. 셰르파들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이 암탑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능선의 우측 설원으로 우회해 남동봉 위쪽의 남동릉 상부에 도달했다. 2명의 대원들은 주봉에서 180m 아래 지점까지 진출하고, 산소가 바닥 나서 무산소로 등정에 성공했다.
1980년 포스트 몬순에 영국의 유명 산악인, 더그 스코트가 마칼루의 남동릉-북서릉을 트래버스할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조르쥬 베탕부르, 로저 박스터-존스와 3명이 마칼루의 남동릉을 등반 중에, 무자비한 파괴의 신(神), 서풍의 제트 기류와 맞닥뜨렸다. 7,760m 지점에서 비박 중에 강풍과 눈보라가 텐트 폴을 모두 박살내 버렸다. 그들은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폐수종에 걸린 조르쥬를 후송하며 구사일생으로 생환했다.
더그 스코트는 1984년 스트브 서스태드, 프랑스의 유명 산악인 장 아파나시에프와 셋이 마칼루를 트래버스하려는 죽음의 행진을 다시 시도할 계획이었다. 그들은 남동릉 8,370m 지점의 암탑 밑에서 비박하고, 폭풍설과 조우했다. 그들은 남동릉 상부의 심설지대를 도저히 통과할 수 없어, 탈진 상태의 아파나시에프를 이끌고 남동릉으로 죽음의 탈출을 감행했다. 에베레스트의 난코스, 남서벽의 초등자이며 소규모 등반 팀으로 폭풍설 속에서 캉첸중가(8,586m) 북벽에 신 루트를 개척한 바 있는 영국의 유능한 산악인도 마칼루의 강풍과 폭풍설 앞에서는 위력은커녕, 맥을 출 수 없었다.
- ▲ 마칼루 루트 개념도
- 무산소, 노셰르파, 알파인스타일 추구하는 등로주의자
마칼루의 세 번째 개척 루트, ‘웨스트 리지(West Ridge)’는 남동릉의 상부에 위치한 버트레스(Buttress)에서 서쪽에 위치한 유모(Jumeaux·6,420m)봉을 향해 내리 뻗은 난코스 능선으로 ‘웨스트 버트레스’ 또는 ‘마칼루의 디레티시마(Direttissima)’라고 불린다. 1971년 로베르 파라고 대장이 이끄는 프랑스 등반대가 히말라야의 8,000m 급 봉우리들의 여러 루트들 중에서 최대 난코스의 하나로 평가되는 이 루트를 돌파했다. 최대 유공자는 베르나르 멜레(Bernard Mellet)와 야니크 새뉴르(Yannick Seigneur) 대원이었다. 그들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혹한이 맹위를 떨치는 악천후 속에서, 사경을 헤매면서 히말라야 등정의 가장 위대한 금자탑 하나를 이룩했다.
이 난코스를 재등한 사람은 미국의 위대한 산악인 존 로스켈리로, 그는 라인홀트 메스너나 더그 스코트처럼 등정주의자가 아니라 등로주의자다. 그는 8,000m 급 14개봉 완등에는 무관심했고, 히말라야에서 난코스 그리고 알파인스타일만이 유일한 관심사였다. 그는 “산소를 사용하며 8,000m 급 봉우리를 등정하는 것은, 실제로 산의 높이를 6,000m 급 봉우리로 깎아내리거나 진배없다”고 주장하는 라인홀트 메스너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조한다. 그는 고산 등반에서 산소 사용은 산악인에게 가장 필요한 모험심의 제거 행위로 간주한다. 그는 또한 고산 등반에서 고소 포터를 고용한다면, 그 등반 업적의 일부는 고소 포터의 몫이라고 주장하며, 고소 포터의 고용을 거부했다.
로스켈리는 워싱턴주립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했으며, 북미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여러 유명 암벽 루트들을 초등하며 클라이머의 길에 진입했다. 그는 이본 취나드와 미국 요세미티 엘캡의 ‘디헤드럴 벽(Dihedral Wall)’을 등정했고, 동료 메드 하기스와 엘캡의 세계 최고난도 거벽인 ‘북아메리카 벽(North American Wall, 높이 900m)’을 이틀 반 만에 등정해 노련한 암벽 등반 전문가로 변신했다.
- ▲ 울리비아호와 킴 몸 대원.
- 그는 1973년 루 라리차트, 고소 포터 나왕 삼덴과 ‘폭풍의 산’, 다울라기리(8,167m)를 북동릉을 통해 세 번째로 등정했다. 그는 1974년 러시아 파미르의 ‘19차공산당회의봉(Peak of the Nineteenth Part Congress, 5,882m)’을 등정했고, 악천후 속에서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3,907m)의 노멀루트를 등정했다. 1976년 그는 루 라이차트, 스테이츠와 가르왈히말의 난다데비(7,817m) 북서벽과 북릉 상부의 높이 300m의 버트레스를 돌파하고 이 산에 신 루트를 개척했다.
그는 1977년 데니스 헨넥, 갈렌 로웰, 킴 슈미츠와 파키스탄 카라코룸의 트랑고타워(6,172m)를 초등했고, 1978년 세계 2위 고봉 K2(8,611m)의 북동릉에 무산소로 신 루트를 개척했다.
그는 1979년 네팔의 가우리샹카(7,145m) 서벽 등반대에 참가해 셰르파 페르템바와 서벽의 2,000m 지점의 허공 속에서 기나긴 수평 트래버스, 즉 ‘하늘 다리’의 트래버스를 감행했고, 셰르파 도르지의 확보를 받으며 3,000m 높이의 허공 속에 위치한 좁은 크랙에 피톤을 계속 설치하며 악전고투했다. 그는 깊이 박히지 않은 피톤에 에트리에(etrier, 줄사다리)를 걸고 매달려 추락의 공포를 감내하며 악전고투했다. 그는 인공 등반 난이도 A3의 높이 3m의 오버행 암벽을 우회한 후 샹카(7,134m)의 북서릉 상부에 도달했고, 이어 정상 능선으로 등정했다. 이 등정은 히말라야의 6,500m 고도에서 행해진 최대 난코스 인공등반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같은 해 카라코룸의 율리 비아호(Uli Biaho, 6,069m)를 초등했다. 그는 1980년 3명의 동료 짐 스테이츠(Jim States), 크리스 코프친스키(Chris Kopczynski), 킴 몸(Kim Momb)과 함께 무산소로 마칼루의 웨스트 리지 등반길에 나섰다. 다음 글은 로스켈리의 마칼루 등정기의 초록이다.
- ▲ 마칼루 웨스트리지를 등반 중인 로스켈리.
- 등반의 고통서 벗어나려 가상의 시나리오 상상
나는 마칼루 웨스트 리지의 제5 캠프(7,772m)의 좁은 텐트 안에서, 텐트 천을 건드려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 모양의 흰서리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두 사람 위로 얼음 조각들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짐 스테이츠와 크리스 코프친스키는 침낭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며 온기를 향유하려고 애썼다.
“웬 수선이야?”
코프친스키가 퉁명스럽게 질문했다.
“벌써 밤 11시 30분이야.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해. 새벽 2시에는 출발해야 하거든.”
내가 대답했다. 나는 헤드램프를 착용하고 스위치를 켰다. 얼음 무덤 속에 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두 개의 침낭이 애벌레 고치처럼 옆에 놓여 있어 요리할 공간이 없었다.
스테이츠가 꿈틀거리며 공간을 마련해 주어 스토브를 피울 수 있었다. 나는 냄비에 얼음을 넣어 녹였다.
“오늘 하루는 휴식을 취하고 내일 등반하는 게 어때?”
탈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스테이츠가 중얼거렸다.
“오늘 등정을 해치워야 해.”
내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우리는 오전 1시까지 식사를 끝내고, 텐트 천에서 얼음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팔을 비틀어 대며, 나무늘보처럼 느린 동작으로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노력은 무위에 그쳤다. 얼음 조각들이 마구 쏟아져 내려 텐트 속은 사방이 얼음 벌창이 되었다. 마칼루 ‘웨스트 리지’, 7,772m의 지점에서는 복장을 갖추는 일마저 스태미나를 소진시키는 고역이었다. 밖의 온도는 코끝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영하 37℃의 혹한인데, 노스페이스 돔 텐트 속에서는 호흡할 때 섞여 나온 콧김이 헤드램프 불빛에 의해 자욱한 안개처럼 보여, 마치 뜨거운 사우나 탕 속 같은 허구적(虛構的)인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제 691m의 고도만 더 오르면, 마칼루의 정상을 밟을 수 있다. 그러나 탈진으로 인해 우리들은 정상을 향해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새벽 2시에 나는 텐트에서 기어 나와 크램폰을 차고 출발했다. 곧 스테이츠와 코프친스키가 뒤따랐다. 혹한이 마치 아이스 액스(Ice-axe) 피크로 살을 찌르듯이 통증을 유발했다. 내 마음은 갑자기 약해져서, 안전하고 따뜻한 텐트 속으로 되돌아갈까, 아니면 혹한과 미지의 세계 속으로 계속 나아갈까, 망설이기 시작했다.
- ▲ 마칼루의 웨스트리지에서 정상을 향해서
- 나는 자일을 풀어 23m 간격으로 세 사람을 묶었다. 헤드램프 때문에 시야가 좁아져서, 어둠 속에서 루트를 찾아내는 일이 현미경 속에서 박테리아를 찾아내는 일처럼 힘겨웠다. 경사 57도의 얼음 사면이 좁아지고 가팔라졌다. 사면에 화강암 바위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스테이츠가 아직 출발 준비가 덜 되어, 내가 23m를 전진하니 자일이 당겨졌다. 잠시 후 나는 가파르고 얕은 걸리(gully) 속으로 트래버스해 들어갔다. 걸리는 별들이 찬란한 하늘 속으로 이어진 듯, 허공 속으로 솟아올라 있었다. 얼마 전 나의 의식에 잔뜩 끼었던 먹구름, 즉 자신감의 상실은 내가 등반에 몰두하는 동안 안개처럼 사라졌다.
나는 걸음걸이의 리듬감을 되찾았다. 한 발짝, 휴식, 세 차례의 호흡, 호흡, 호흡, 다시 한 발짝, 세 차례의 호흡, 호흡, 호흡…… 나는 만년설 속에 발을 깊숙이 찔러 넣으며 걸었고, 눈사태의 위험성도 없었다. 우리는 꾸준히 전진하고 있었고, 점차 고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걸음새의 리듬을 되찾자, 지난 45일 동안 캠프 사이에 짐을 나르면서 떠올렸던 즐거운 시나리오가 되살아났다. 마칼루로 등반을 떠나기 전에,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아카데미상 수상작 ‘디어 헌터(Deer Hunter)’를 관람했다. 그 영화 속 전쟁터에 등장하는, 군인들이 겪는 위험과 시련은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등반가들이 겪는 위험과 시련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대의 헬기들이 내는 귀를 찢을 듯한 소음(騷音)은 고봉(高峰)의 능선에서 휘몰아치는,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돌풍(突風) 소리와 흡사했고, 전장에서 화포(火砲) 공격 시에 발생하는, 코를 마비시킬 정도의 화약 냄새는 고산의 걸리에서 발생하는 돌사태의 화약 냄새를 방불케 한다.
나는 1970년 봄 징집영장을 받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척추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강풍이 휘몰아치는 마칼루 서릉의 혹한 속에서, 백색 정글(jungle)에서 베트콩과 전쟁을 하고 있다는 상상을 했다. 그것은 내가 등반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강열한 욕구(慾求)에서 비롯된 가상(假想) 시나리오였다.
곡예사를 닮은 산악인과 레슬링 선수 출신의 막강한 체력의 소유자
휴식을 위해 3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이의 바위 선반에서 동료들을 기다렸다. 위쪽 화강암벽 사이로 여러 개의 얼음 걸리들이 솟아 있었다. 우리는 정신적 유대를 위해 로프를 묶었지만, 최대 난코스를 제외하고는 서로 확보해 주지 않고 독립해서 등반했다. 한 사람이 실수로 추락하면 자일로 연결된 세 사람은 모두 미등의 서벽, 높이 2,436m의 절벽으로 추락을 면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시간 관계상 안전한 확보를 생략해야 했다.
며칠 전 제5 캠프에 고정 자일을 설치할 때, 입은 동상의 후유증으로 발가락이 무감각해졌다. 지난 45일 간, 우리는 몸을 극도로 혹사시키며 근육에 휴식과 영양 공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직 등정 일념에만 사로 잡혀, 단 하룻밤도 단잠을 허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의 근육은 발악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칼루 등정이 끝나는 대로, 절벽을 내려가 지옥에서 탈출하고, 카트만두를 거쳐 천국 속에서 귀국 길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아픈 기관지도 치료될 것이고, 산소에 굶주린 근육도 강화될 것이고, 우리들의 주변 세계가 얼음과 바위에서, 나무와 새들과 곤충들과 온기로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