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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 치우
절대 권력의 화신, 황제에게 반기를 든 신은 누구일까? 바로 염제의 후손인 치우(蚩尤)였다. 치우는 지금의 중국 산동성 일대에 거주하던 구려(九黎)라는 신족의 우두머리였다. 치우의 생김새는 기괴하고 무시무시하게 묘사되고 있다.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 소의 뿔과 소의 발굽, 그리고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갖고 있었다고 그려진다.
치우에게는 72명 혹은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다들 이렇게 기괴한 모습으로 모래와 돌, 쇳덩이를 밥으로 씹어 먹고 매우 용맹했다고 한다. 특히 병기 제작 능력이 뛰어나 활, 화살, 창, 갑옷, 투구 등 각종 무기를 만들었고 큰 안개를 일으킬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개의 중국 역사서에서는 대부분 치우를 흉악한 괴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황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폄하한 것으로 보인다.
드디어 치우는 황제에게 패해 남방으로 쫓겨간 염제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치우의 군대는 용맹한 형제들과 바람의 신 풍백(風伯), 비의 신 우사(雨師), 거인인 과보(夸父)족 그리고 산도깨비 이매(魑魅), 물도깨비 망량(魍魎)등이었다. 그들이 탁록(涿鹿)에 도착했을 때, 황제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황제는 호랑이, 표범, 곰, 독수리, 솔개, 매 등의 맹수 부대 귀신들과 하늘을 나는 응룡(應龍)등을 거느리고 치우를 기다렸다.
황제와 치우의 싸움, 탁록 전쟁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황제의 군대는 치우의 군대에게 밀렸다. 먼저 치우는 비를 뿌리고 안개를 피워 황제의 군대를 교란시켰다. 온 하늘과 들판을 뒤덮은 안개가 황제의 군대를 에워싸자 황제의 군대는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였다. 그 사이 치우의 날랜 군사들이 황제의 군대를 사정없이 베어 버리니 황제의 군사들은 벌벌 떨고 비명을 지르며 여기저기 숨기 바빴다.
전세가 위급하게 돌아가자 황제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고민이 되었다. 그때 자신의 신하 중 하나가 전차 위에서 살짝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는데,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이름은 풍후(風后)였다. 황제는 이렇게 전세가 급박한 상황에 태평스런 풍후의 모습을 보자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러했다. 풍후는 안개 속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북두칠성의 손잡이가 늘 북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에 착안하여 그 전쟁의 와중에 지남거(指南車)각주1) 라는 수레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다. 덕분에 황제의 군대는 지남거에 의지해 안개 속에서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계속 밀리기만 하던 황제군이 마침내 반격을 시도하는데, 바로 응룡으로 하여금 많은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치우군에게는 바람의 신인 풍백과 비의 신인 우사가 있었다. 응룡이 하늘을 날며 날개를 펼치고 비를 모으는 사이 풍백과 우사는 선수를 쳐서 선제 공격을 퍼부었다. 거센 바람과 비가 황제군의 진영에 맹렬하게 몰아쳤다. 황제군의 진영은 물바다가 되고 군대는 이리저리 흩어지거나 물에 휩쓸려갔다.
이런 지경이 되니 황제는 새로운 방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는 치우의 물 공격에 맞설 인물로 자신의 딸인 발(魃)을 내세웠다. 발은 가뭄의 여신으로 늘 푸른 옷을 입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대머리였다고 한다. 그녀의 몸속에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들어있어 그녀가 나타나면 주변이 뜨거운 열에 의해 가뭄이 들었다. 전쟁터에 그녀가 나타나자 비바람은 모두 사라지고 황제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기와 뇌수가 만나 내는 북소리
황제는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치우군의 기세에 점점 초조해졌다. 전쟁이 오래 가면서 황제군의 사기는 많이 떨어졌지만 용맹한 치우와 그 형제들이 중심인 치우의 군대는 아직도 펄펄 나는 듯하였다. 그러던 중 황제는 묘안을 생각해냈다. 아주 특수한 북을 만들어 군대의 사기를 높이고 적군을 제압하는 방법이었다.
"기(夔)를 잡아 오너라!"
동해의 유파산(流波山)이라는 곳에 생김새는 소같이 생겼으나 외다리를 하고 천둥 소리를 내는 기(夔)라는 괴물이 살았다. 황제는 이 괴물을 잡아 그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고 용의 몸에 사람 머리를 한 뇌수(雷獸)를 잡아 가장 큰 뼈를 뽑아 북채를 만들었다. 기와 뇌수가 만나 내는 북소리는 어마어마하게 커서 오백 리밖까지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우레보다도 더 큰 소리에 치우군은 혼비백산하여 갈팡질팡하면서 사기가 떨어졌고, 황제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치우군을 섬멸하였다.
황제는 치우가 어찌나 두렵고 무서웠든지 처형을 할 때도 손과 발을 족쇄로 채운 채 처형했다. 그렇게 하고도 두려워 머리와 몸을 먼 곳에 따로따로 버렸는데, 치우의 손발을 채웠던 수갑과 족쇄를 버린 자리에 붉은 단풍나무 숲이 생겨났다. 이후로 단풍나무가 핏빛처럼 붉은 이유는 치우의 넋이 깃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천하를 기울게 한 공공
황제는 치우와의 격렬한 전쟁에 승리한 뒤 천하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그 후 황제가 다스리는 인간 세상은 시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런데 황제가 중앙 최고신의 자리를 전욱에게 내주었을 때 큰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염제의 후손이자 물의 신인 공공(共工)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공공은 전욱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염제쪽 신들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공공은 군사를 일으켜 전욱을 공격했다. 그러나 전욱의 군대는 최고신의 군대답게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공공의 군대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초조해진 공공은 하늘을 지탱하고 있던 거대한 산을 머리로 받아버렸다.
쿵! 우지끈! 공공이 산을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하늘을 받치고 있던 거대한 산이 내려앉았는데, 그 후 이 산은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게 되어 부주 산(不周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일로 천하가 기울어졌는데, 중국의 서북쪽이 올라가고 동남쪽이 내려앉은 것은 이것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중국의 지형을 보면 서북 지대가 높아 모든 강들이 동남쪽으로 향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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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는 동이족, 역사적 근거가 있다.
대한민국~~~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와 전국민이 외치던 함성이었다. 붉은악마....
붉은악마의 상징은 고대의 제왕이자 동방의 軍神인 치우천왕(蚩尤天王)이다.
치우천왕은 한단고기, 규원사화에 의하면 고대, 중국의 황제헌원과 싸운 옛 인물이다. 특히 그는 전쟁에서 무패의 신화를 창조한 인물로 죽은 후에 사람들에게 군신으로 떠받든 인물이었다.(한나라 유방은 항상 전쟁에 앞서 치우 사당에 제사를 드렸다고 함)
붉은 악마가 자신들의 마스코트로 삼은 치우.....그렇다면 치우는 우리의 조상일까?
치우는 묘족이었다는 설, 동이족(좁게는 배달국 14세 한웅)이었다는 설이 있다. 앞서 본인은 서언왕에 고찰한 바있다. 이번에는 치우천왕을 고찰하여 치우천왕의 귀속이 어디인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1. 치우천왕은 동이족인가? 묘족인가?
치우천왕이 동이족의 조상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알아보려면 동북아시아 상고시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고시대 동북아시아에는 3개의 집단이 있었으니 화하족(華夏族:중국), 묘만족(苗蠻族:묘족), 그리고 동이족(東夷族)이 그것입니다. 중국사 연구가들에 따르면 화하족은 지금의 섬서성 황토고원을 중심으로 묘만족은 지금의 중국 남부를 중심으로, 그리고 동이족은 지금의 산동성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상고시대에 대한 중국 학자들의 견해 대부분은 치우=묘족의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욱생 교수는 1940년대 이 견해가 틀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발간한 『중국고대사적 전통시대』란 책에 치우는 남방 묘만족의 영수가 아니라 동이족의 영수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산동성에 있던 제(齊)나라에서 치우가 팔신(八神) 중의 하나로 존숭되었다
치우총은 산동성 동평현에 있고, 치우의 견비총(어깨와 넓적다리 무덤)은 산동성 거야현에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황제는 치우를 죽인 후 시신을 이 두 지역에 나누어 분장했다는 것입니다. 서욱생 교수는 치우가 있는 이 지역을 과거 동이족이 살던 지역으로 보았습니다. 이 지역에 치우의 무덤이 있는 것이 사기의 기록대로 황제에게 패배한 결과인지, 아니면 규원사화에서 말하듯 스스로 물러난 결과인지는 더 연구해야 하지만, 동이족의 활동지역인 산동성에 치우의 무덤이 있다면 치우를 동이족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2. 치우는 구려족의 대표이다.
『서경』 「공전」을 보면 "구려족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고 씌여 있으며, 『사기』에도 "공안국이 말하기를 구려 임금의 호가 치우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구려족은 지금의 산동성, 하남성, 하북성에 거주했던 종족입니다. 그런데 구려족의 가주지가 동이족의 거주지와 일치하기 때문에 구려족의 임금 치우는 동이족이라는 것입니다.
3. 『일주서』 「상맥」 편에 "치우가 소호에게 주거를 명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소호족의 거주지는 산동성 곡부였고, 이 역시 동이족의 근거지였습니다.
4. 『염철론』 「결화」편에 "황제가 탁록 전투에서 양택과 소호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양택은 양호(兩昊)의 오기라며 양호는 대호와 소호를 뜻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구절은 황제가 탁록전투에서 대호, 소호, 치우를 꺾고 염족(炎族)과 황족(黃族)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대호와 소호는 모두 동이족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렇다면 왜 치우가 남방 묘족의 우두머리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서욱생 교수는 과거에 화하족과 남방 묘만족 사이의 투쟁은 잘 알려졌지만 동이족과 화하족의 격렬한 전쟁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이래 출토된 금석이나 갑골문을 연구한 결과 동이족이 화하족과 크게 싸운 사실들이 드러났다며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이추를 동이족의 우두머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근래의 주목할 연구 결과로 치우는 동방 구려족의 우두머리이자 동이족의 우두머리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황제와 탁록대전을 벌인 후 치우 계열의 몇 개 씨족이 남하해 남방 삼묘족이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구려족의 후예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를 따르면 치우는 남방 묘족의 조상도 되는 것입니다. 묘족의 거주지인 귀주성에서 간행된 『낭대현방책』에는 "묘인은 옛날의 삼묘족이다. 탁록대전 후 점차 남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흥미로운 사실로, 탁록대전 후 치우 세력의 일부는 산동성 등 동이족 지역에 남아 있거나 만주와 한반도 지역으로 갔고 다른 일부는 중국 남방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 남방의 묘족과 동이족인 우리 민족은 치우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같은 지류가 됩니다.
참고문헌: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권, pp28~31
2. 치우천왕의 일대기
이 글은 한단고기, 규원사화를 바탕으로 읽기 요약한 것입니다.
치우천황은 고조선 이전 존재했던 고대국가 배달국의 14대 한웅(또는 환웅)이었습니다.
치우천황은 기원전 2749년 배달국의 도읍지 신시에서 태어았습니다. 그는 명문가 치우의 자손으로 치우천황의 시조 치우는 초대 거발한 한웅 때 거발한 한웅이 배달국을 세운 일등공신이었습니다.
치우천황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도 어떤 이는 배달국의 고토수복정복활동으로 보고있습니다.
치우천황은 자부선인이라는 뛰어난 선인을 스승으로 모셔 그로부터 천문,지리,역사,무예 등을 배웠습니다.
그 후 기원전 2707년 치우천황은 42살의 나이로 배달국 한웅의 위에 올랐는데 이를 자오지 한웅 또는 치우천황이라 불렀습니다.
치우천황이 즉위했을 때 배달국의 힘은 약화되었고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즉위 후 치우천황은 군제 개혁을 단행하여 신병기 즉 철제무기(청동기 무기라는 주장도 있음)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형제,친적 중 뛰어난 인물 81명을 골라 장군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치우천황은 인류최초로 갑옷을 만들었고, 길로산에서 쇠를 캐내어 도개(칼),모극(창),대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갑옷으로 무장한 치우와 그의 부하장군을 보고 당시 미개인이었던 중국인들은 구리머리에 쇠이마를 가졌고 치우와 그의 부하장군을 81명의 형제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군제개혁을 단행한 치우천황은 배달국의 제후국 염제국의 유망이 백성들의 신망을 잃고 배달국에 반기를 들려고 하자 군사를 일으켜 유망을 정벌하여 공상에 입성하여 유망을 멸망시켰습니다.
한편 치우천황이 공상에 입성했다는 소문을 들은 중국인들의 수장 공선헌원(황제헌원)은 자신도 치우천황처럼 천하를 호령하는 천자가 되고자 치우천황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그가 군사를 일으킬 때 마다 치우천황에게 패했습니다. 당시 치우천황의 배달군은 철제무기에 갑옷을 무장하여 헌원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또한 염초와 유황을 태워 연기를 일으켜 헌원군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자신의 패인이 배달군의 우수한 무기와 연막작전이라는 것을 안 헌원은 배달국에 첩자를 보내 배달군의 무기및 갑옷 제조기술을 빼내오고 연기에도 항상 남쪽만을 가리키는 지남거란 수레를 만들어 연기속에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헌원은 이런 무기들을 믿고 배달국에 도전하였으나 치우천황의 배달군에 패했습니다.
이 때 치우천황의 동생인 치우비가 공을 세우려다 전사했는데 중국인들이 이 사건을 보고 마치 치우를 죽였다 라고 사기라는 역사책에 기록했습니다.
한편 치우비의 전사소식을 들은 치우천황은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비석박격기라는 투석기를 발명하여 헌원군을 공격하여 탁록에서 마침내 헌원이 항복하였습니다. 이 전쟁을 탁록대전이라고 합니다.
치우천황은 109년간 배달국을 다스리다가 기원전 2599년 1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무덤은 산동성 수장현에 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