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15장 35-41절. 바울과 바나바가 싸우고 헤어짐
35절.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Paul and Barnabas stayed in Antioch, teaching and preaching with many others also, the word of the Lord.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Παῦλος δὲ καὶ Βαρνάβας διέτριβον ἐν Ἀντιοχείᾳ,
Paul but Barnabas stayed in Antioch
‘유하며’(διέτριβον)는 미완료과거로서(stayed) 계속 머무르는 것을 뜻합니다.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διδάσκοντες καὶ εὐαγγελιζόμενοι μετὰ καὶ ἑτέρων πολλῶν τὸν λόγον τοῦ Κυρίου.
teaching and proclaiming the good news with also others many the word of the Lord
‘가르치며’(διδάσκοντες)는 현재분사이고(teaching), ‘전파하니라’(εὐαγγελιζόμενοι)도 현재분사로서(proclaiming) 계속 가르치고 전파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1. 이 35-36절 사이에 어떤 한 스토리가 있는데 그것이 갈라디아서 2장에 나타나는 내용입니다.
율법을 행하거나 할례를 받지 않고도 구원은 완전하다는 선언은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로 확증되었지만, 실제적으로 생활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들이 음식을 같이 먹는 것조차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즉 안디옥 교회에 이 문제로 실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3.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들이 안디옥 교회에 오매 베드로가 그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심지어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인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 와서 자기가 설교하고 자기가 선언한 그대로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식사하고 교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에게서 유대인 신자들이 안디옥 교회에 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야고보에게서 온 이 할례자들에게 비판받을 것이 두려워서, 음식을 먹다가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러자 심지어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인 바나바까지 자기 성도들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유대인 신자들도 일어나서 모두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2. 이 사건은 사람이 자기가 믿는 신앙 진리대로 살기가 실제적으로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성경 진리대로 살려고 해도, 온 나라가 지키는 불신 문화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명절 때 제사 지내는 문제가 이처럼 어렵습니다.
분명히 제사는 우상숭배인 줄 알지만, 우리나라에서 명절 때 제사를 안 지내면 욕을 먹고 가족에게서 왕따를 당하고, 상종을 안 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적으로는 분명히 제사가 우상숭배인 줄 알지만, 실제 삶에서는 제사를 거역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이런 신앙과 생활의 괴리는 제사만이 아니라, 술 문제나 주일 성수나 다른 문제도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꾸 우상숭배나 점이나 사주팔자나 풍수지리 등에 빠지지는 않습니까?
3.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이처럼 바울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자기를 절대적으로 도와준 베드로가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단호하게 책망했습니다.
철저하게 강직한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4. 그런데 오늘 본문인 36-41절에서도 바울은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은인인 바나바가 정실에 치우쳐 생질인 마가를 선교 보조로 채용하려고 하자 심히 다투어 서로 갈라지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진리에 따라 신념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사도행전 1장에서는 궐석 사도를 보선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2장 성령 강림 사건 때도 불신자들에게 설교해서 하루에 3천 명이 결신하게 했고, 8장에서 사마리아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교회를 대표해서 그곳 성도들에게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게 했고, 10장에서는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복음을 전하여 성령님이 임하시게 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 중심의 기독교를 지도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총회에서 안디옥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와 바울을 두둔하는 발언을 해서 예루살렘 율법주의자들을 제지한 일로 바울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베드로를 존경하고 감히 책망을 하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소신 발언과는 다르게 외식적으로 처신하자, 바울은 여지없이 베드로를 모든 사람 앞에서 책망한 강직하고 단호한 성품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베드로가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이고,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일지라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인정사정없이 단호하게 처신하는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갈라디아 2장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사도행전 15장 뒷부분에서는 교회 안에서 바울에게는 최대의 은인인 바나바조차도 인정사정없이 올바르지 않다고 싸우고 헤어진 결단성 있고 엄중한 인물이었습니다.
36절.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fter some days Paul said to Barnabas, "Let us return and visit the brethren in every city in which we proclaimed the word of the Lord, and see how they are."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Μετὰ δέ τινας ἡμέρας, εἶπεν πρὸς Βαρνάβαν, Παῦλος
after now some days, said to Barnabas, Paul,
‘말하되’(εἶπεν)는 부정과거로서(said) 과거에 확실하게 말한 것을 가리킵니다.
각 성으로 다시 가서---(형제들을) 방문하자 하고
Ἐπιστρέψαντες δὴ, ἐπισκεψώμεθα τοὺς ἀδελφοὺς κατὰ πόλιν πᾶσαν
Having turned back indeed, let us look after the brothers according to city every
직역하면 ‘되돌아가서 각 성을 따라 그 형제들을 방문하자’는 뜻입니다.
‘다시 가서’(Ἐπιστρέψ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이고(Having turned back), ‘방문하자’(ἐπισκεψώμεθα)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let us look after ) 권고하는 가정법(hortatory subjunctive)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ἐν αἷς κατηγγείλαμεν τὸν λόγον τοῦ Κυρίου,
in which we announced the word of the Lord,
‘전한’(κατηγγείλαμεν)은 부정과거로서(we announced) 과거에 전했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형제들이 어떠한가
πῶς ἔχουσιν.
how they are
직역하면 ‘그들이 어떠한가’란 뜻입니다.
여기 동사(ἔχουσιν)은 현재형인데(they are) 원형( ἔχω)은 ‘가지고 있다’(have)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그들이 어떠한 상태인가’(how they have it, how their state is)란 뜻입니다.
1. 바울과 바나바는 일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데, 바울이 바나바를 재촉해서 우리가 전도했던 사람들을 다시 찾아서 심방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이것이 2차 전도 여행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 예배드리고 밥을 먹고 선교전략을 짰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심히 싸우고 갈라섰습니다.
2. 바나바는 설교나 변증에는 약했지만 신약에 어떤 인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상담을 참 잘했고, 연약한 자들을 참 잘 돌보았습니다.
바울이 처음에 예수 믿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 바나바는 바울을 보호해 주고 변증하고 신원보증을 해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행 9:27)
사도 바울이 고향 다소에 낙향하여 10년간 허송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그를 데려다가 안디옥 목회 현장에서 사역을 하게 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행 11:25).
바나바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바친 사람입니다( 행4:37).
그는 그 재산을 팔아서 자기가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그 돈을 놓아두고 자기가 쓰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한 사람입니다.
이만큼 바나바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겸손하고 따뜻한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3. 바울은 원래 유대교의 지도자로 있을 때 기독교를 가장 심하게 핍박했고, 심지어 스데반을 죽이는데 책임자 노릇을 했습니다.
아무리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바울처럼 사람을 잡아다가 때리고, 감옥에 가두고, 재산을 몰수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외국으로 도망간 사람들까지 잡아 오려고 군사를 이끌고 다메섹으로 간 것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는 일이 아니었고, 바울같이 강직하고 철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성격이 강직하고 철저했기 때문에, 한번 예수 믿고 성령을 체험하고 복음에 사로잡힌 후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걸고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바나바와는 달리 타협을 모르고, 강직하고 철저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역시 전도하는 것도 목숨 걸고 전도했고, 세계 각처에 수많은 교회들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변증과 설교를 잘했고, 기적과 표적을 이루면서 선교의 큰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4. 이처럼 바나바와 바울이 성격적으로 대조적이었으나 처음에는 팀웍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은사가 다르고 나이가 다르지만 형과 동생 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 사역을 할 때 팀웍이 잘 이루어졌고, 1차 선교여행을 할 때도 팀웍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성격이 달라야 서로 보완하면서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2차 전도 여행을 하러 가자고 했을 때, 바나바는 1차 때 실수한 마가 요한을 용서하고 데리고 가자고 했고, 바울은 그런 헌신적이지 못한 어린 신자는 데리고 가서는 안 된다고 자기 성격대로 단호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립이 마가 요한이 바나바의 생질이라는 점 때문에 서로 감정적으로 비약되어서 서로 심히 싸우게 되었습니다.
아마 바나바는 바울이 인정머리가 하나도 없다고 비난했을 것이고, 바울은 바나바가 사적인 인정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일에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면서 싸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은 결국 서로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5. 36절에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도한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교회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나 몹시 궁급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구역장의 마음이고 교사들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없는 사람은 올바른 교회 일군이 아닙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집을 짓고 신학교를 만들고 병원을 만드는 것이 선교가 아니라, 선교지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돌보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 목사가 아니라 성도들을 향해서 이 관심과 사랑을 갖고 기도하고 심방하고 돌보는 것이 목사입니다.
형제들이 어떠한가 이것이 궁금한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 그 형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이 혹시 시험에 들지는 않았을까?
그들이 불신자들에게 시련을 당하고 마음에 고난을 받아서 혹시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닐까?
여기에 대한 애틋한 마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목회자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이고, 특별히 병든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목회와 심방은 이런 부모와 같은 목회적인 마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7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arnabas wanted to take John, called Mark, along with them also.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Βαρνάβας δὲ ἐβούλετο συνπαραλαβεῖν καὶ τὸν Ἰωάνην τὸν καλούμενον Μάρκον·
Barnabas but wanted to take along also the John the called Mark
직역하면 ‘그러나 바나바는 마가라 일컬어지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원했다’는 뜻입니다.
‘원했다’(ἐβούλετο)는 미완료과거로서(wanted) 계속 원했다는 뜻이고, ‘데리고 가고자’(συνπαραλαβεῖν)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take along) 간절한 마음으로 데리고 가기를 (계속 원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일컬어지는’(καλούμενον)는 현재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called) 현재 불리어지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전도 여행을 가자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주장했고, 바울은 데리고 가지 말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심히 다투고 헤어졌습니다.
2.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 교회가 있는 집 주인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소의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교회당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입니다.
즉 마리아의 아들이 마가요, 마리아의 남동생이 바나바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의 외삼촌이었습니다.
3. 이 마가 요한은 일차 전도 여행 때 바나바와 바울의 수종자로 동행했습니다.
처음에 전도 여행을 가자니까 너무 신이 났습니다.
그래서 나도 가겠다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가보니까 먹을 것이 없고 잠자리가 불편하고 사람들이 핍박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사명감이 없었으므로, 이런 불편 사항들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외삼촌인 바나바가 대장 노릇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바울이 대장 노릇을 한 것이 기분 나빴습니다.
그리고 마가 요한은 유대인 중심의 신앙에 빠져 있었는데, 바울은 철저히 이방인 중심의 신앙에서 설교함으로써, 신앙적으로도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밤빌리아에서 마가는 도중에 하차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굉장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2차전도 여행 때, 바나바가 다시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니까 바울은 성질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가를 절대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바울이 용서할 줄 모르는 편협한 사람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자기가 바울을 용서하고 받아주었는데, 바울은 은혜를 모르는 배신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의 일은 인정으로 해서는 안 되고, 일이 되게 해야 한다고 끝까지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나바와 바울은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갈라디아 지방과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38절.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Paul kept insisting that they should not take him along who had deserted them in Pamphylia and had not gone with them to the work.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옳지 않다) 하여
Παῦλος δὲ ἠξίου, τὸν ἀποστάντα ἀπ’ αὐτῶν ἀπὸ Παμφυλίας
Paul but thought fit, the (one) having withdrawn from them from Pamphylia
직역하면 ‘그러나 밤빌리아에서 그들을 떠난 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이) 바울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맨 앞의 동사(ἠξίου)는 미완료과거로서(thought fit) 계속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떠난’(ἀποστάντα)은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withdrawn) 과거에 확 떠나가 버린 모습을 가리킵니다.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καὶ μὴ συνελθόντα αὐτοῖς εἰς τὸ ἔργον,
and not having gone with them into the work
직역하면 ‘그들과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 한’이란 뜻입니다.
‘함께 가지’(συνελθόντα)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gone with) 과거에 단호하게 일하러 가지 않은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μὴ συνπαραλαμβάνειν τοῦτον.
not to take along him
‘데리고 가는’(συνπαραλαμβάνειν)은 부정사형 동사로서(to take along) ‘마땅히 않다고 생각했다’(ἠξίου)에 연결됩니다.
‘않다’(μὴ: not)가 여기에 나옵니다.
1. 사도 바울은 화가 났습니다.
사실 마가 같은 사람은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똑같이 있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고 했는데, 가보니까 화장실이 없고, 먹을 것이 없고, 잠자리가 불편하고, 물도 부족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도중에 하차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바나바가 또 데리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화가 났습니다.
바나바는 차세대의 교회 지도자가 될 마가를 꼭 데리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정에 치우쳐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일은 일이 되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일로 둘이 심하게 다투다가 결국 서로 헤어졌습니다.
물론 나중에 마가 요한은 차세데 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하고, 베드로의 믿음의 아들로서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바울도 나중에는 마가 요한이 자기 일에 유익하다고 하면서 디모데에게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딤후 4:11).
39절.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 And there occurred such a sharp disagreement that they separated from one another, and Barnabas took Mark with him and sailed away to Cyprus.
서로 심히 다투어
ἐγένετο δὲ παροξυσμός,
arose therefore sharp disagreement
직역하면 ‘그러므로 심한 다툼이 일어나서’란 뜻입니다.
여기 동사(ἐγένετο)는 부정과거로서(arose) 과거에 심한 다툼이 일어난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피차 갈라서니
ὥστε ἀποχωρισθῆναι αὐτοὺς ἀπ’ ἀλλήλων,
so that they were separated they from one another
직역하면 ‘그래서 그들은 서로 피차 갈라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αὐτοὺς: they)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갈라서니’(ἀποχωρισθῆν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수동태로서(were separated) 확실하게 갈라서게 된 사실을 가리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τόν τε Βαρνάβαν παραλαβόντα τὸν Μάρκον, ἐκπλεῦσαι εἰς Κύπρον.
the and Barnabas having taken the Mark, sailed to Cyprus
직역하면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항해했다’는 뜻입니다.
‘데리고’(παραλαβόντα)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taken) 확실하게 데리고 간 사실을 가리키고, ‘항해했다’(ἐκπλεῦσ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sailed) 배 타고 간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이것을 볼 때 위대한 사도라고 할지라도 인간적인 허물과 잘못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잘못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점은 교회 안에서 서로 성격과 의견이 다를 때, 서로 보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본질적인 진리 문제는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 때는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선교하러 가는 자체나 복음 진리를 왜곡해서 이단이나 율법주의를 전하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시기나 방법이나 동행자 같은 문제는 서로 양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2. 이 때 마가 요한을 선교여행에 참여시키냐 안 시키냐는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었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여행을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마가 요한이나 실라를 데리고 간다고 선교여행에서 성령님께서 바울을 들어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도리어 이 때 바울이 바나바와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음으로써 이후에 바울의 선교 사역과 목회 사역에는 큰 방해 거리가 생겼습니다.
과거에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이 핍박자 바울을 상종하지 않으려고 했을 때, 바나바가 중간에 개입하여 기존의 사도들이 바울을 상종하도록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 행 9:27)
뿐만 아니라 바울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10년을 썩고 있었을 때, 바나바가 바울을 데려다가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했고, 그럼으로써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여행을 갈라디아 지방에 성공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하는 데 있어서 바나바가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 간에 중간자적 가교역할을 해주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바울이 바나바와 심히 싸우고 갈라졌기 때문에, 이후에 바울과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사도들이나 교인들과 다툼이 생겼을 때, 중간에 바나바가 화해와 중재자 역할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설립한 갈라디아 교회에서 예루살렘 율법주의자들이 쳐들어와서 바울을 배척하고 바울의 복음을 대적했던 것입니다. (갈 3:1)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어도 고린도 교회에도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공격하고, 바울의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후 11:4-5)
이런 사정은 빌립보 교회나 데살로니가 교회나 골로새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때 바나바나 마가와 싸우지 않고, 계속 선교 사역을 함께 계속했더라면,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비난하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의 복음을 공격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3. 이처럼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이 싸우면 큰 문제가 없으나, 지도자들이 싸우면 교인들에게 크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가 싸우면 자식이 마음속으로 굉장히 갈등을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기 도덕의 기준이고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격렬하게 싸우고 이혼하면 자녀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마치 온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톱으로 켠 것과 같은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싸우지 않도록 철저히 주의해야 합니다.
3. 그런데 실제로는 교리의 주장과 성격상 차이로 서로 나누어져서 교파들이 생겨났습니다.
어떤 교회는 악기를 사용하는 좋아하고 어떤 교회는 악기 사용을 싫어합니다.
어떤 교회는 기도와 찬양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만, 어떤 교회는 조용하고 성경 공부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교회는 국외 선교를 좋아하고 어떤 교회는 국내 전도를 좋아합니다.
이런 문제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취향대로 교파를 만들어서 분야별로 사역하고, 이단 방지나 부활절 행사 등은 연합해서 연합활동을 하면 됩니다.
역사적으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갈라진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장로교회는 성경을 강조하는 교단이고, 감리교회는 기도와 성령과 선교를 강조하는 교단입니다.
장로교회에서 기독교 장로교단은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교단입니다.
감리교회에서는 감리교단과 성결을 강조한 성결교단으로 나누어지고, 성결교단에서는 성결교단과 오순절 순복음 교단이 갈라졌는데, 오순절 순복음 교단은 성령의 은사와 방언과 신유를 강조한 교단입니다.
이런 교단들은 정통교단들이고, 여호와증인이나 통일교나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 같은 이단들과는 다릅니다.
40절.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Paul chose Silas and left, being committed by the brethren to the grace of the Lord.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떠나
Παῦλος δὲ ἐπιλεξάμενος Σιλᾶν, ἐξῆλθεν,
Paul but having chosen Silas, went forth
직역하면 ‘그러나 바울은 실라를 택하고 떠났다’는 뜻입니다.
‘택한 후에’(ἐπιλεξάμενο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chosen) 확실한 의지로 택한 사실을 가리키고, ‘떠나’(ἐξῆλθεν)는 부정과거로서(went forth) 단호하게 떠난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παραδοθεὶς τῇ χάριτι τοῦ Κυρίου ὑπὸ τῶν ἀδελφῶν·
having been committed to the grace of the Lord by the brothers
‘부탁함을 받고’(παραδοθεὶς)는 현재분사 수동태로서( having been committed) 형제들에게 계속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으면서 떠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의 동역자로 실라를 택했습니다.
이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총회의 결의를 가지고 유다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 왔던 사람입니다. (행 15:27, 32, 34).
그래서 2차 선교여행 중에 빌립보 전도에서는 바울과 함께 매를 맞고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찬송 중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행 16장).
그러나 바나바는 다시 생질인 마가를 데리고 선교여행을 했으나 성경에 별다른 기록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성격적으로는 과격하고, 은인인 바나바와 싸웠지만, 그래도 성령님께서는 바울을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바울이 성격적으로는 과격했지만 올바른 길을 주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났다>는 것은 온교회가 모여서 바울의 선교 출발을 기도로 후원해주고, 주님의 은혜에 부탁하면서 정식으로 파송했다는 말입니다.
처음 1차 선교여행 때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행 14:26).
41절.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he was traveling through Syria and Cilicia, strengthening the churches.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διήρχετο δὲ τὴν Συρίαν καὶ Κιλικίαν
He was passing through then the Syria and the Cilicia
직역하면 ‘그는 (교회들을 견고케 하면서)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통과해 갔다’는 뜻입니다.
‘다니며’(διήρχετο)는 미완료과거로서(He was passing through) 계속 통과해서 지나가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ἐπιστηρίζων τὰς ἐκκλησίας.
strengthening the churches
‘견고하게 하니라’(ἐπιστηρίζων)은 현재분사로서(strengthening) 계속 견고하게 하면서 다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수리아>는 안디옥 교회가 소속된 지역과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버가가 소속된 지방입니다.
그리고 <길리기아>는 더욱 북쪽으로서 바울의 고향 다소가 있는 지방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1차전도 여행을 했던 지역 교회들과 또 바울이 10년간 머물렀던 고향에 세워진 교회를 돌아보면서 북쪽으로 전진해갔습니다.
여기까지는 심방 목회였고, 더욱 북쪽으로 가서는 개척 전도인데 빌립보에 가기까지는 개척 전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 선교팀은 북쪽으로는 흑해가 가로막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지중해 에게 해협이 가로막고 있어서, 동쪽의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는데, 성령님께서 이를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되돌아갈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목회도 그렇지만 특히 선교는 성령님이 함께 하셔야 할 수 있는 일인데, 성령님이 허락지 않으니 얼마나 죽을 맛이었겠습니까?
그 때 바울은 자기 문제가 무엇인가 되돌아보고, 바나바와 싸운 일이 마음에 걸려서 철저히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인이 부르는 환상을 보고 드디어 에게 해협을 건너서 구라파로 갔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6장에서 빌립보 전도에 성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나바는 목회적인 심정을 가진 분이고, 바울은 선교적인 자질을 가진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역자들은 서로 다른 은사와 직책으로 서로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주의 일을 잘 감당하셔서 하나님께 큰 영광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