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엘공원은 가우디의 상상력과 창의적인 세계, 자연과 인간을 배려한 마음이 가득 담긴 곳이다. 이곳은 본래 가우디의 경제적 후원자인 구엘이 영국의 전원 도시를 모델로 대규모 주택단지를 짓기 위해 가우디에게 의뢰하여 설계된 곳이다. 구엘과 가우디는 이곳에 고급 주택 60호 이상을 지어 부유층에게 분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돌도 많고 경사진 비탈길이어서 작업을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결국 지형적 한계와 자금난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14년이라는 긴 공사 기간에도 불구하고 단지 몇 개의 건물과 커다란 광장, 예술작품 같은 벤치 정도만 남긴 채 야심찬 프로젝트는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구엘 사후 1922년 바르셀로나 시가 이 땅을 사들여 다음해 시영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 가우디와 구엘의 이상 주택이라는 본래의 계획에는 실패했지만 이곳은 가우디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고 시민과 관광객들은 예술작품 같은 공원이 주는 무한한 감동을 선물 받게 되었다. '하마터면 이 아름다운 곳을 모두와 함께 나누지 못할 뻔했다니' 주택 건설의 실패가 너무도 감사하게 느껴진다.
구엘공원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과 철저히 계획한 인공미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대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다양한 색과 곡선의 아름다운 건물들, 화려하고 신비한 모자이크 장식의 타일, 땅을 고르는 것도 반대한 만큼 자연스럽게 터진 길과 인공 석굴 등 어느 것 하나 가우디답지 않은 것이 없다. 마치 은밀한 언덕 위에 만들어진 초현실 영화의 세트장처럼 멋지고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야자수 같은 나무와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타일벤치가 장관을 이루는 광장은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하나 타일을 붙여 만든 벤치는 같은 패턴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계획성 있게 색의 조화를 고려해 만들어졌다. 아이들은 비둘기가 있는 광장 중앙을 뛰어다니고 벤치의 모양을 따라 걷는 등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 곁에서 즐거운 시간을 만끽한다. 어떤 아이들은 벤치에 장식된 타일 문양을 그려보며 가우디의 작품을 감상한다.
놀라운 것은 이 광장을 거대한 돌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소 그리스, 로마 신전에 관심을 가졌던 구엘의 요청으로 가우디는 신전 모양의 건물을 지었는데 86개의 견고한 도리아식 기둥들이 광장을 받치는 디자인으로 설계한 것이다. 천장에도 깨진 타일 조각과 버려진 술병 등을 재활용하여 장식한 섬세함이 돋보인다.
정문 쪽을 바라보면 금방이라도 단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과자집 같은 건물 두 채가 보인다. 본래에는 수위실과 관리실 등 사무를 보는 공간으로 쓰려고 했다는데 지금은 기념품 숍으로 운영되고 있다. 뾰족한 지붕과 갈색과 흰색의 멋있는 색의 조화가 눈을 즐겁게 해준다. 또한 구엘공원의 마스코트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하수의 수호신 퓨톤을 지나칠 수 없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것 같은 퓨톤분수 앞에는 사진 촬영을 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가우디의 예술 혼이 곳곳을 휘감고 있는 이곳에서 방문객들은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을 배려한 천재 작가의 열정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우디는 19~20세기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의 건축가다. 본명은 안토니 플라시드 기옘 가우디 이 코르넷(Antoni Plàcid Guillem Gaudí i Cornet)이다. 미술과 공예 부흥운동인 카탈루냐 문예부흥에 크게 공헌했다.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학교의 설계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썼다. 그러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희한하게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냈고 그 표면에 무늬를 새긴 벽돌이나 돌, 화려한 자기 타일 및 꽃이나 파충류 모양을 세공한 금속을 붙여 생동감을 주었다.
다른 형식을 띤 세부(細部)를 빼면 이 양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이슬람 양식과 그리스도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어 양식(또는 무데하르 양식)이었다.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은 카사 비센스(1878~80)와 엘 카프리초(1883~85), 그리고 1880년대말에 지은 구엘 저택과 구엘 궁전이 있으며 엘 카프리초를 빼고는 모두 바르셀로나에 있다. 2번째 시기에서 안토니 가우디는 역사상 유명한 양식들의 역학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고딕 양식으로는 아스토르가의 주교 궁전(1887~93)과 레온의 카사데로스보티네스(1892~94)를 지었고, 바로크 양식으로 바르셀로나의 카사 칼베트(1898~1904)를 지었다. 그러나, 1902년부터는 이런 전통양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안토니 가우디의 건물들은 몇 가지의 뚜렷한 자연적·종교적 상징물을 제외하고 본질적으로 구조와 재료를 표현했다. 바르셀로나의 벨 에스과르드 별장과 구엘 공원,콜로냐 구엘 교회는 내부 기둥이 외부 부축벽 없이도 지탱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구조는 평형구조(equilibrated)로 일컬어지는데, 안토니 가우디는 이것을 나무가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구조의 기본 요소는 사선으로 미는 힘에 견디도록 설계된 비스듬히 서 있는 기둥과 미는 힘을 거의 받지 않도록 얇은 판과 타일로 이루어진 볼트 등이다.
안토니 가우디는 자신의 평형구조를 바르셀로나에 있는 두 고층 아파트 건물에 적용했다. 카사 바틀로는 기존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특히 정면에 새로이 고안한 평형구조 요소들을 덧붙였다. 카사 밀라에서는 몇 층의 구조에서 마치 연꽃의 잎맥처럼 철근을 이용했다. 안토니 가우디의 많은 작품에서 자주 그랬듯이, 그는 이 두 건물의 형상과 표면에 산이 많고 해안에 자리잡은 카탈루냐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괴짜였지만 훌륭한 건축가였던 안토니 가우디는 카탈루냐 문예부흥에 크게 공헌했다. 미술과 공예 부흥운동인 카탈루냐 문예부흥은 열렬한 반(反)카스티야주의인 '카탈루냐주의'로 일어난 정치부흥운동과 결합되었다. 이 두 운동의 목적은 카스티야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고 마드리드가 중심이 된 스페인 정부 밑에서 오랫동안 압박받던 카탈루냐의 생활방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교회는 카탈루냐 르네상스를 종교적으로 상징한다.
이것은 안토니 가우디가 전 생애를 바친 계획으로 1883년에 이 교회 건설을 위탁받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일을 하면서 가우디는 신앙이 깊어졌으며 1910년 뒤에는 실제로 다른 모든 일을 포기하고 그곳에 은둔하며 일에만 매달렸다. 75세 때 가우디는 저녁기도를 하러 가다가 전차에 치어 죽었다.
미완성된 성가족교회(계획되었던 탑 4개 중 하나만 세워진 트랜셉트만이 그가 죽기 전에 완성되었다)의 설계도와 모형에는 고딕 양식 성당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나선기둥, 쌍곡면의 볼트와 측벽, 쌍곡포물면 지붕 등이 복잡하게 상징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경이로운 성당 구조는 1960년대의 많은 엔지니어들과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떠한 콘크리트 골조물보다 안토니 가우디의 것이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도 초현실주의자와 추상표현주의 화가, 조각가들로부터 거의 무비판적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으나 가우디의 영향은 그 지역에만 국한되었고 평형구조를 따르는 몇 사람에 의해서만 표현되었다. 가우디는 국제주의 양식이 성행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전문가와 비전문가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안토니 가우디가 살았던 시대에 그에게 다가온 디자인의 난관들을 헤쳐나갔던 무한하고 끈질긴 상상력 때문이었다.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들은 형태, 질감, 다색장식을 매우 다양하게 사용하며 이 요소들을 자유스럽고 표현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가우디 건축의 복잡한 기하학은 그 건축 구조와 훌륭하게 일치되어, 외벽면을 포함한 전체가 마치 자연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 자연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전체적인 통일성에 대한 감각은 가우디의 생애를 말해 준다.
안토니 가우디의 사생활이 바로 직업이었으며 건축예술에 관한 침착한 그의 비평은 삶의 예술에 관한 격언 그 자체였다. 가우디는 자신을 송두리째 건축에 바쳤으며 그에게 건축은 모든 예술의 총체였다. 가우디의 건축 작품 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2019년 기준 모두 7개이다.
바르셀로나 관광지도▼
심 산 바르셀로나 전경▼
구엘공원▼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