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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에 다녀와서
<姜信杓. 2001>
지금까지 약 두시간에 걸처 게시판에 올릴글을 쓰내려갔다가 그만 날려버렸다. 한심한 노릇이다. 오랫만에 올리는 글이라 어렵게 어렵게 적어나가든 글이 한순간에 없어저버리니 이만 저만 낭패가 아니다. 컴맹세대라 할 수 없다.
兼山과 九雲이 공개적으로 출석하라고 압력을 가하니 고개를 내밀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구차스런 변명도 할 수없고... 그래서 고심고심하며 그동안의 일들을 변명삼아 자세히 적어 나가다가 변을 당하고 보니, 다시 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제는 이 게시판이 송효섭, 유춘박, 김정대, 김윤배, 엄정길, 목영민, 이수근 등이 출석해서 이인극, 北村, 兼山을 도우고 있어 나는 좀 조용히 쉴려고 하였는데 珝韶, 山公을 호명하니 숨는 일도 마음대로 않되는구나.
北村으로 인해 경기고녀 옛여인들의 꽃다발로 이게시판이 장식되는 일은 우리 모두 잊어버린 옛추억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兼山의 "나의 청춘 마리안느, 우리 사랑 KBG!"은 無號의 말데로 "謙山의 향기"에 취해 버렸다. 겸산이 "곡부의 인상"을 올렸을때 나도 한마디 하고 싶었는데 무슨 일들이 그렇게 계속 터지는지... 내같은 사람은 한가지 일에 메이면 다른일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결국 호명되어 불려 나와야만 겨우 이렇게 몇자 적어 본다.
지난주말에는 경북대 의대 간호학연구소에서 주최한 2001년 춘계학술대회에 "한국문화간호의 방향"이란 제목의 주제강연을 2시간 반에 걸처하는 것을 준비하느라 바빴고, 그 전주일에는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Media for Democracy" 라는 주제의 국제회의에 panelist 로 초청되어 다녀왔고, 그 전 주일에는 兼山의 부탁으로 네델란드 정신분석학자에게 한국문화전통을 소개하느라 정신없이 뛰었다. 학기말이되면 선생들은 이일 저일로 정신없이
쫓긴다.
지난 5월 27일부터 6월 3일까지 일주일간 스리랑카 여행은 Worldview
International Foundation 이 주최한 "Media for Democracy" 에 참석한 것인데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에는 전에도 가보았지만 스리랑카는 초행이라 기대도 많았다. 이번 여행에는 집사람도 함께 동행해서 여행이 심심하지 않았다.
싱가포르를 거처가느라고 생각보다는 긴 비행시간이 걸렸다. 동아시아 내지 동남아시아와 유럽사이에 있는 인도와 스리랑카 등은 항공기 기착 시간이 한 밤중인 경우가 많아 이번에도 밤 1시에 도착했다. 3시간 시차가 있으니까, 한국시간으로 새벽 4시에 도착한 셈이다.
콜롬보의 첫 인상은 공항에서 옛날 뉴델리나 닥카에서 느끼던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시내로 달려나오면서 곳곳에서 보이는 부처님 불상은 한밤중인데도 밝게 조명을 해놓고 있어 한마디로 불교의 나라로 온것을 실감나게 했다. 거리 곳곳에는 군인들이 무장한 체로 검문도 하고있어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라는 것도 느끼게 했다.
옛날 唐나라 玄奬(컴퓨터 한자로 장字가 없구나)법사가 인도에 불교를 공부하러 갔을때 나이 60 이 넘어서 한때 이곳에서 수행한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지만 이번여행에서 이에대한 것은 알아볼 길이 없었다.
인구 1800만에 남한면적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6 평방 키로의 작은 섬 나라인데, 인구의 70% 가 불교도이고, 15%가 힌두교, 8% 무스림, 7%가 기독교라 한다. 인종적으로는 74% 가 신하리스, 18% 가 타밀, 7% 무스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스리랑카 북쪽에 있는 타밀 족이 1990년대 중반 부터 분리 독립을 요구하면서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한다.
국민소득 년 $500에 불과한 이나라가 전쟁에 휩쓸리면서 나라 경제는 더욱 궁핍해 졌다고 한다. 주 생산품은 역시 우리가 잘 아는 실론 티를 비롯해서 방직, gem stone, 고무, 그리고 관광산업이 중심인데, 의류봉제 산업이 활발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약 4-50개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교민도 약 만명에 가깝다고 한다. 최근에와서 茶산업은 세계적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서 급격히 신장되고 있다고 한다.
회의가 열린곳은 콜롬보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Mt. Lavinia 시의 Mt. Lavinia Hotel 인데, 이곳이 옛날 영국 총독이 살던 관저라고한다. 그래서 영국풍의 건물에 영국식 옛날 복장을 하고 있어, 언듯 영국식민지시대에 온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여기와서 비로소 알게 된것이지만, 스리랑카는 영국식민지전에는 1600년대 부터 50년간 포르토갈의 식민지였고,1658년부터 1815년까지는 네델란드의 식민지, 그리고 그 이후는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948년에 독립하였다고한다.
후추와 계피등의 향료를 찾아 동방무역길에 오른 서양제국주의자들이 이 땅에 남겨놓은 식민지 잔재는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언듯보기에 지중해식 주택은 포르토갈 영향같고, 기독교는 네델란드 식민지 후손들에 의한것이고, 곳곳에 남아있는 네델란드식 성곽, 운하, 교회, 그리고 영국식 주택, 공공건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시골에 가면 물론 불교적인 유적과 불상이 많이 산재해 있었다. 음식은 역시 그 유명한 안남미 쌀과 커리 그리고 다양한 과일들이 입맛을 돋구었다.
이제 국제회의와 관련된 이야기도 몇자 적어보자. 우선 이번 회의를 주최한 Worldview International Foundation 부터 소개해야겠다. 1979년에 설립된 이 재단은 정보화시대에 걸맞는 "개발을 위한 메디아(Media and Communication)" 활동을 지원하는 재단인데, 특히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중남미 등지에 지역사회개발, 환경개선, 건강 영양 아동보호, 여성문제, 인권, 그리고 매스 메디아 등에 관한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비정부조직(NGO) 이지만 유엔 경제 사회이사회, 그리고 유네스코와 긴밀히 협조하고 있어서, 이번회의에서도, UN 본부의 Kofi Annan 사무총장을 대신해서 Joseph V. Reed 사무차장이 참석을했다. 이모든일은 노르웨이 인인 Arne Fjortft 라는 재단사무총장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추진되는 것이었다. 년간 소요 예산이 약 440만불인데 이중에 약 300만불을 노르웨이 정부 해외원조지원부서에서 조달되고 나머지가 각종 국제적인 기구와 재단그리고 국가에서 지원되고 있었다.
이번 행사기간에 이 재단에서 지원해서 새로히 신축된 Young Asia TV 본부 건물 낙성식이 있었는데, 이건물의 설계를 노르웨이인과 스리랑카인의 공동작품으로 친환경적 건물로 스리랑카 건축사상 역사적인 이정표로 손곱힐만 하다면서 스리랑카 도시건설부 장관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자연채광, 태양열전기, 자연통풍, 스리랑카의 전통 색갈을 살리고, 그러면서도 현대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 큰 자랑거리였다.
이 낙성식 이후에 참가들가운데 일부는 스리랑카 대통령 궁으로 Chandrika
Bandaranaika Kumaratunga 대통령을 예방하였다. 여성대통령으로 남편은 유명한 영화배우였는데 얼마전 사별하고 독신으로 두 아이와 살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모두 총리 대통령을 지난 가문이라고 한다. 대통령이 간단히 인사한다는 것이 스리랑카에 관한 여러가지 일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강연이 되어버렸다. 사실 우리가 대통령궁에 가서 대통령을 만나게 되기 까지는 식사도 하고 약 두시간이 지났을 때에 늦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녀의 지칠줄 모르는 정력에 역시 보통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감탄했다.
5월 29일 열린 재단 21차 총회는 년례 보고회와 앞으로의 전망에대한 협의가 있었는데 특기할만한 것은 Worldview University 에 관한 제안이 있었다. internet을 통한 이른바 국제적인 가상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것이다. 노르웨이 산공회의소 부회장과 미국 North Dakoda 대학 부총장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자 하는 이 과제는 매우 야심찬 것이었다. 사회자 Fjortoft 씨가 이에 대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이야기 해달라고 하는 통에 발상은 참 좋지만 한국 일본 중국 경우에 모두 해당되겠지만 영어로 하는 가상대학은 언어적 장벽이 큰 장애로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보화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시도는 매우 뜻 깊은 것이라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향후 3년간 예산심의에 매년 약 300만불을 산정하고 있는데, 현재 약 200만불은 확보 해 놓고 있다고 한다.
나는 Norway 라는 나라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동문들이 Norway 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는 친구가 얼마나 될까? 나도 얼마전에 알았지만 불과 350만 밖에 않되지만 이나라가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면 놀랄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때부터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난민 수용에 적극적인 공노로, 그이후 UN 을 비롯해서 각종 국제기구에서 그들이 벌리는 각종활동이 돋보이는 전통을 수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 Worldview
International Foundation도 같은 맥락에서 활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재단본부도 아에 Sri Lanka,
Colombo 에 두고 제3세계에 대한 개발원조 계획에 현명하게 참여하면서 자국의 위상을 고취하고 있는 셈이다. 노벨 평화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갑자기 우리의 자랑스러운 손명현 노르웨이 대사가 생각나고, 또 이시영 UN 대사가 생각난다. 이시영대사는 남아프리카 지도자에 대한 글을 이곳에 한번 실었으니 손대사에게 노르웨이 이야기를 부탁해도 좋을 것 같다. 허기야 손명현 대사도 싱가포르 대사시절 그곳 소식을 한번 적어올린적이 있다만은, 北村이 이번기회에 부탁하면 또다른 좋은 글을 얻을수 있을것 같구나.
5월 30일과 31일 양일간 개최된 "Media for Democracy" 는 언론자유와 정치상황에 대한 다양한 검토가 있었다. 언론의 편파성에 대한 문제는 어느 나라나 쟁점사항이다. 분명한것은 민주주의를 위하여서는 언론만큼 중요한것이 없다. 그래서 각국의 언론실태에 대한 보고가 있었고, 다시 분과별로 공공방송의 역활, 언론윤리와 지배, 정신건강과 메디아, 메디아 수렴과 민주주의, 평등과 참여, 동남아에 있어서 언론법의 조화, 그리고 언론과 어린이 등의 주제로 나누어 토론을 하고 다음날 각분과별로 당면한 과제를 정리하고 건의문을 작성하여 폐회식때에 이를 채택하고 끝맺었다.
이 회의는 매우 고차원의 논의로 진행되었지만 이 재단이 지원하고 있는 Young Asia TV 프로젝트에는 제 3세계 주민들이 알아야할 정보들을 어떻게 제공 할것인가하는 문제, 다시말해 풀뿌리 백성들에게 공급되어야할 정보 프로그램들을 어떻게 만들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내가 만난 어떤 인류학자는 원주민의 민속지혜를 다큐멘다리로 기록해놓고, 이제 근대화의 물결속에 잊혀져가는 자기들의 전통을 되돌아 보게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많은 보고서들은 우리들의 50년대 60년대의 사업들을 상기시키는 것들이었다. 우리들의 지난날들을 상기시키는 것들이 많았다. 사실 우리들은 급속한 산업화 속에 얻은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다. 매우 햇갈리는 상황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내가 늙은 세대라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6월1일 이른 아침에 우리 내외는 인도 국회 여성의원 Margaret Alva 내외와 반글라데시에서 온 여성언론인과 함께 Kandy 라는 스리랑카의 제 2의 도시이자 영국식민지로 전락하기 전까지 불교왕국의 수도에 다녀왔다. 두대의 taxi 를 대절해서 다녀오는데만 7시간이 걸리는 장거리 관광을 다녀왔다. 택시 기사는 열심히 자기나라 자랑을 널어 놓았다. 한마디로 자기나라 만큼 살기 좋은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먹을 것이 걱정없고, 더우면 시원한 고산지대에 있어 그곳에 가서 지내면 되고, "인도양의 진주"같은 나라라는 것을 확신에 찬 이야기로 들려준다. 결코 겉으로 만 하는 이야기는 분명 아니었다.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기사같은데, 자기나라의 삶의 만족도는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 같은 가난한 나라사람들이 가장높다는 것을 이제 그현장 사람들의 목소리로 들으니, 정말 햇갈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어중간하게 잘사는 우리같은 사람들이 아닌가 여겨진다.
캔디로 가는 도중에 Alva 의원은 고아원에 꼭 들려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것은 코끼리 고아원이란다. 병들고, 늙고, 어리고, 버려진 코끼리들을 돌보는 고아원이란다. 시간이 늦어 식사시간이 지나 강가로 이동해서 물놀이하는 것을 구경했는데 각국에서 온 외국인과 자국민의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스리랑카는 사회주의 국가라 어린이 복지정책에도 최우선을 두고 있어, 주말에는 박물관, 공원, 식물원등을 무료로 개방하고 있어서 다음에 들른 식물원, 캔디의 불교 사원에도 학생들로 넘쳤다.
캔디 시가지에 들어서자, 콜롬보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역시 오랜 역사적인 풍경이 인도 하이드라바드나 바라나시 아니면 이스탄불의 구시가지에 온것 같다. 옛상점, 시끄러운 길거리, 인산인해, 그러면서도 다른 한쪽에는 고궁과 사원이 호수가에 참으로 평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진난날의 왕도답게 주위의 산세도 아름답고, 넓은 호반과 불교사원은 옛날의 영화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 사원은 부처님의 진신 치아를 간직하고 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인도의 공주가 이곳으로 시집올때 머릿 장식 속에 숨겨서 가져왔단다. 마치 옛날 중국에서 비단 짜는 누애를 중앙아시아로 시집간 공주가 몰래 가지고 간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 공주를 기리는 벽화가 사원 입구에 그려져있다.
우리나라도 양산통도사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가져와 모셔 놓은 것으로 유명한데, 통도사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고, 그 자리에는 큰 유리창을 만들어 그 넘어로 진신 사리를 모신 부도탑을 바로보게 만들어 놓았다.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 三寶(佛,法,僧)사찰 중에 통도사를 佛寶 사찰이라는 것도 이에 연유하는 것이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있어 法寶사찰, 송광사는 고려때 17명의 國師가 나왔다고 僧寶사찰이라고 한다. 부처님을 따르는 스님과 신도들에게 있어서 다비식(불교식 화장)때에 얻은 사리와 치아는 참으로 소중한 부처님의 분신으로 친견과 경배의 대상으로 되어왔다.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캔디는 옛수도로서 보다는 "부처님의 치아를 모셔놓은 절"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매년 Esala Perahera 축제기간에 이 절의 모형을 코끼리등에 싣고 도시를 순례하는 행사를 열때는 전국에서 순례자들이 모여들어 도시전체가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우리를 안내하던 택시 기사도 캔디를 이해 하려면 그때 다시와서 보아야 한다고 열심히 꼬셨다.
사찰에는 맨발로 들어가야했다. 하루에 정해진 시간외는 부처님 치아의 친견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찰 입구에서부터 신도들이 바칠 연꽃 꽃다발을 참으로 아름답게 준비하여 판매되고 있었고, 이를 바치는 사람들의 경건한 모습속에서 이나라 사람들의 마음씨를 충분히 느껴볼 수 있었다. 사찰주변은 곧 박물관으로 되어있어 이들의 불교문화유산을 한 곳에서 다 감상할 수 있었다. 이런 평화로운 나라에 타밀족과 인종분규는 참으로 비극적이다. Tamil 족은 대부분 Hindu 교를 믿기 때문에 이 인종분규는 일종의 종교분쟁의 성격도 뛰고 있는 셈이다. 이념적 분쟁이 사라진 자리에 세계 곳곳에는 인종과 종교의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사는 곳은 어떠한 류의 것이든 분쟁이 필요악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일까.
동행한 Margret
Alva 인도 국회의원은 서울 올림픽때에 서울에 왔었다고 하면서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서울올림픽 개최되기전에 북한에도 두어번 갔었다고 한다. 당시에 그녀는 인도 정부의 체육 청소년부 장관직에 있었는데 남북한 올림픽 공동개최를 위한 중개자 역활을 북한 김일성 주석의 요청으로 방문 하였다고 한다. 여러가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자기자신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김일성주석이 "평양은 젊은 도시여야한다"는 교시 하나로 평양시민 가운데 어느 수준의 늙은이가 되면 평양에서 살 수 없게되어 딴 곳으로 쫒겨나고, 새로이 젊은 사람들로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북한에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한두가지가 아니니 놀랄 것은 없지만, 우리동문들이 평양에 살았다면 이제 곧 쫒겨 나야 할 신세가 될뻔 했으니, 남한에 살면서 이렇게 internet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나. 함께 살 수 없으면 함께 등산도 할 수 없을 것이고,...
시계를 보니 벌서 저녘 7시 20분이다. 점심먹고 와서 오후 내내 이곳에 메달려 겨우 이곳 까지 적어 내려왔다. 다음날 마지막으로 콜롬보 시내 관광 이야기는 여러 동문들이 직접 가서 한번 체험해 보라는 권유를 하는 것으로 끝 맺어야 할것 같다.
兼山, 九雲, 無號 님네들, 이상이 내가 할 수 있는 報告요, 답장이외다. 眞如와 北村의 수고에 작은 報答이 되었으면 하오. 안녕.
珝韶 山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