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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에 대하여
신중식
우리가 주역이라 하면 무슨 신비한 책이요 점치는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신비한 책도 아니고 점치는 책도 아니다. 주역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하나로서, 하나의 경經이다. 사서삼경이란 기독교로 말하면 신약과 구약이다. 사서는 신약에 해당하고 삼경은 구약에 해당한다. 기독교에서 신약이란 크게 보면 복음서, 사도행전, 로마인서 그리고 묵시록으로 이루어져 있고 구약이란 모세 오경과 시편 그리고 예언서로 되어있다.
유교의 서경書經은 구약의 모세 오경에 해당하고 시경詩經은 구약의 시편, 그리고 역경易經은 구약의 예언서에 해당한다. 이렇게 유교에서는 사서삼경을 성경이라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신약과 구약을 성경이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역을 하나의 경으로서 읽어 가는 것이지, 무슨 점치는 법이나 신비한 것을 배우자는 것이 아니다.
주역이란 하나의 경經이다. 그런데 신약, 구약을 읽은 사람은 벌써 경이 무엇인지 다 알고, 논어 맹자 등 사서삼경을 읽은 사람도 경이 벌써 무엇인지 다 안다. 또는 불경을 읽은 사람들도 이미 경이 무엇인지 다 안다. 그래서 주역이란 우리가 이미 다 아는 책이지 특별히 모르는 책도 아니고 신비한 책도 아니다. 여러분도 다 알고 나도 다 아는 책이다. 이렇게 우리가 다 알면서 또 한 번 복습하는 책이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새롭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새롭게 공부하는 것이 되면 안 된다. 과학은 그래야 된다. 과학은 지식이니까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지혜다. 지혜란 알고 또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인식認識이라고 한다. 여러분도 알고 나도 아는 것을 또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이란 처음 보기 때문에 잘 모르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을 또 한 번 알 수 있도록 설명되어 있는 것뿐이다.
종교란 진리의 세계인데 이것은 알고, 알고, 또 알아야 된다. 이렇게 세 번을 알아야 알아지는 것이 종교다. 과학은 실험 관찰을 통해서 인과관계因果關係를 아는 것이므로 알기가 쉽다. 철학은 과학을 한 사람이 또 아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 또 아는 것이 철학이다. 종교는 철학을 한 사람이 아는 것이니까 알고, 알고 또 아는 것, 세 번을 겹쳐서 아는 것이다. 그래야 종교의 세계가 알아지지 그렇지 않으면 알기가 어렵다.
역경은 종교적인 내용도 들어 있지만 주로 철학적인 내용이다. 또한 철학적인 내용에 앞서 당시의 과학이 주된 바탕으로 되어 있다. 물론 당시의 과학은 현대의 과학과는 조금 다른, 옛날 사람들이 생각하던 과학이다. 그래서 역경에는 과학도 있고 철학도 있고 종교도 들어있다. 과학, 철학, 종교 세 가지가 겹쳐 있다고 보아야 된다.
옛날부터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 단군 할아버지를 말하듯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자기네들의 가장 으뜸가는 조상이라고 생각해 왔다. 유태민족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조상 중의 조상으로 꼽는 것과 마찬가지다. 삼황三皇은 중국 사람들이 신인神人이라 부를 정도로 아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는 목축 시대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복희伏羲라는 글자가 목축 시대의 희생 제물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는 농업 시대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황제黃帝 헌원씨軒遠氏는 무역 시대 혹은 공업이 발달하여 차를 타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던 시대의 지도자였을 거라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태호太昊라는 글자를 보면 하늘을 숭상하던 시대임을 알 수 있다. 호昊는 날 일日과 하늘 천天이 합해진 글자다. 그리고 염제炎帝는 불을 숭상하던 시대요, 황제黃帝는 땅을 숭배하던 시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를 배화교拜火敎라고도 하는데 불을 숭배하는 종교다. 하늘을 숭배하다가 하늘의 중심이 태양이요 태양은 불이기에 불을 자기 집에 모셔놓고 숭배하게 되는 불 숭배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맨 처음에 복희씨가 역易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염제 때도 역을 만들고 황제 때도 역을 만들었다고 한다. 황제 헌원씨의 역은 귀장역歸藏易이라 하고, 염제 신농씨의 역은 연산역連山易이라 한다. 복희씨의 역을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정리하여 주역周易으로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역을 시대적으로 볼 때 주周나라의 주역과 그 전의 은殷나라 때의 귀장역, 그리고 하夏나라 때의 연산역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그런데 ‘귀장歸藏’이란 흙을 말한다. 만물은 모두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귀장역歸藏易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산역連山易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산山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이 만들어졌는데, 일부一夫 김항金恒이 만든 정역正易이 그것이다.
김항이 정역正易이라는 한국식 주역을 만든 것인데 이것은 소태산이 만든 ‘원불교’나 최제우가 만든 ‘천도교’처럼 ‘정역파’라는 하나의 민속 종교가 되었다. 그래서 교주도 있고 김항은 그리스도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되었다. 이 정역正易의 후계자가 이정호라는 사람인데 이화대학에서 국문학과 선생을 했던 사람이다.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의 이동준 교수가 그의 아들이다. 이정호는 이화대학에 있다가 충남대학으로 가서 대학원장도 하고, 총장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김항의 ‘정역正易’에 대해 대가라는 사람이다. 이정호도 유영모 선생 집회에 가끔 나왔는데 나는 그가 그런 대가인 줄도 모르고 지냈다. 그래서 이정호가 금강산에 들어가 주역을 14년 동안 공부했다고 했을 때도 혼자 공부했다는 것인지 일부一夫에게 배웠다는 것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때는 정역正易을 몰랐는데 도서관에 가서 보니 그가 쓴 정역연구正易硏究라는 세 권의 책과 주역정의周易正義라는 책이 있었다. 그런데 정역연구는 너무 복잡해서 일반 사람들이 읽을 책이 못 되고, 주역정의는 주역 전체를 한 번 정리해 놓은 책으로, 초보자들이 쉽게 읽어 볼 수 있다. 주역정의는 주역 64괘를 10개씩 잘라서 설명을 했는데 나름대로 쉽게 잘 정리해 놓았다. 정역에 관한 이정호의 책 가운데서 이 주역정의가 가장 읽어 볼 만한 것이라 하겠다.
정역正易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산山이다. 즉 艮(☶)을 중심으로 하는 역이 정역이다. 옛날 중국에도 하늘을 중심으로 하는 역, 땅을 중심으로 하는 역, 산을 중심으로 하는 역 등 서너 가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하늘을 중심으로 하는 주역周易만이 전해진다. 주역은 하늘이라는 건乾 괘를 첫머리에 두고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김항은 건乾보다도 곤坤보다도 산이라는 간艮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의 정역은 옛날 중국의 연산역連山易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삼황三皇 다음에 오제五帝가 나오는데 오제 가운데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가장 유명하다. 서경書經을 보면 요堯, 순舜부터 시작한다. 요임금의 일생은 이렇고 순임금의 일생은 저렇다하고 기록되어 있다. 요임금 순임금 다음이 우禹임금인데 이때부터 중국에서는 왕조가 시작된다. 하夏왕조 다음이 상商 혹은 은殷왕조이고 그 다음이 주周나라다. 주나라는 은나라 말기에 지방 관리였던 문왕文王이 일으켜 세운 나라다.
문왕은 오늘날의 도지사격인 서백西伯이라는 지방 관리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문왕 밑으로 몰려와서 나중에는 문왕에게 속한 땅이 중국 전체의 3분의2가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은나라는 주紂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주왕에게 속한 땅은 3분의1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문왕은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고 주왕을 섬기다가 결국은 주왕에게 붙잡혀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감옥에서 주역을 연구하여 지금 보는 바와 같은 주역 본문을 썼다고 한다. 문왕의 뒤를 이어 무왕武王이 주나라를 통일했는데 무왕의 동생이 주공周公이다. 주공도 주역 본문의 일부를 만든 사람이라고 한다. 문왕과 주공이 역경을 만든 사람들이라면 공자孔子는 이 역경을 해설한 사람이다. 공자의 해석은 7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세 개를 상하로 나누어서 전부 10개가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십익十翼’이라고 부른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주역도 하나의 경經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경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 손자孫子의 병법 가운데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오늘의 결론도 이것이다. 주역을 읽고서 주역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라 주역을 읽지 않고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 주역을 읽고서 아는 것은 진실로 아는 것이 아니다. 주역을 읽지 않고서 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바로『주역』이라고 해서『논어』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주역이라고 맹자와 다를 것도 없고, 대학이나 중용과도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대학을 알면 중용도 알고 중용을 알면 주역도 알게 된다.
유교의 핵심이 담긴 책이 중용이다. 중용의 맨 첫머리를 보면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고 나온다. 천명天命, 성性, 도道, 교敎 네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공자는 주역을 설명하는 「설괘전說卦傳」 첫 머리에 “궁리窮理 진성盡性 이지어명以至於命”이라 했다. 맹자는 진심盡心 지성知性 지천知天 또는 존심存心 양성養性 사천事天을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같은 말이다. 대학은 “명명덕明明德 친민親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을 말한다. 논어는 첫머리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유붕이자원방래有朋而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라고 했다. 이것들도 모두 같은 말이다. 어느 하나만 알면 다 알게 된다. 논어 하나만 알아도 주역을 알 수 있고, 대학이나 중용을 알아도 된다. 무엇이거나 하나만 알면 다 되는 일즉일체一卽一切의 관계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 하나 알면 또 다 알아진다. 기독교 하나 알면 불교를 알기 위해서 따로 절간에 가지 않아도 된다. 또한 마찬가지로 불교 하나 알아도 다 알게 된다. 이것을 이른바 ‘알고 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가 중용을 많이 보았는데 중용에서 천명天命, 성性, 도道, 교敎라고 하는 것을 주역에서는 천명天命대신 지명至命, 성性대신 진성盡性, 교敎대신 궁리窮理라고 한 것뿐이다. 이것을 불교식으로 설명하면 더 쉽다. 인도 사람들은 설명하는데 아주 능숙하기 때문이다.
열반묘심涅槃妙心 - 천명天命
정법안장正法眼藏 - 성性
실상무상實相無相 - 도道
미묘법문微妙法門 - 교敎
중용에서 천명天命, 성性, 도道, 교敎라고 한 것을 불교는 열반묘심涅槃妙心, 정법안장正法眼藏,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이라 한다. 또는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불타佛陀라고도 하는데 결국 이것은 귀가 뚫리고 눈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입이 뚫린 것을 말한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철위총耳徹爲聰
목철위명目徹爲明
비철위전鼻徹爲顫
구철위감口徹爲甘
먼저 귀가 뚫려야 한다. 영어를 한다 해도 귀가 뚫려야 된다. 보는 것부터 시작하려고 하면 잘 안 된다. 귀가 뚫리면 눈이 뚫리게 되고 코가 뚫리게 된다. 영어를 듣고 보고 쓸 수 있게 된다. 그 다음에는 입이 뚫려서 말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외국어인 영어를 예로 들었지만 우리가 통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이다. 기독교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요 불교에서는 법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게 되어야 한다. 교회에 자꾸 다니는 것도 귀가 뚫리게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귀가 뚫려서 하나님의 말씀이 귀로 들어오게 되면 눈으로 말씀을 보게 된다. 말씀을 자꾸 보게 되면 결국 그 핵심을 붙잡아서 자기가 그것을 붙들고 살게 된다. 그렇게 사는 것이 기쁨이요 즐거움이 되면 남에게도 그것을 권하게 되고 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른바 ‘설법’이요 ‘설교’요 ‘전도’이다.
먼저 귀가 뚫려야 한다. 귀가 뚫리지 않으면 보는 단계로 넘어 갈 수가 없다. 선불교에서는 견성見性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것을 중용에서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한다. 보는 단계를 넘으면 실천하는 단계가 나오고 이어서 말하는 단계가 온다. 신학교에 가면 눈도 뜨지 않았는데 자꾸 말하라고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대학지도大學之道는 바로 수신위본修身爲本이다. 귀, 눈, 코, 입이 뚫리는 것이 수신修身이다. 그렇게 수신이 되어야 한다. 논어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수신이다. 맹자도 진심盡心 지성知性 지천知天을 말하지만 표현만 다를 뿐 내용은 같은 수신이다. 대학과 맹자는 100여년의 차이가 난다. 이와 같은 시대적 차이로 인하여 표현이 달라진 것뿐이다. 시대가 달라져도 사람은 똑같다. 사람은 누구나 눈 코 귀 입을 가졌다. 그러므로 사람이면 누구나 귀가 뚫려야 되고 눈이 뚫려야 되고 코가 뚫려야 되고 입이 뚫려야 된다. 수신修身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학에 “자천자이지어서인自天子以至於庶人 일시개이수신위본壹是皆以修身爲本”라는 말이 있다. 천자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수신을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다. 수신修身을 요즈음 표현으로 하자면 진선미眞善美라 할 수 있고 심리학적으로는 지정의知情意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중학교에 가거나 대학교에 가거나 모두 이것을 위한 공부지 다른 것이 아니다.
아는 문제가 해결되면 눈이 뚫린다고 한다. 의지의 문제가 해결되면 코가 뚫리고 감정의 문제가 해결되면 입이 뚫린다고 한다. 이렇게 그때 그때마다 표현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언제나 같다. 주역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이목구비가 뚫리는 것이다. 이목구비가 뚫릴 때를 거룩할 성聖이라고 부른다. 성聖이라는 글자가 바로 이목구비가 뚫린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성경聖經이다. 경經이란 다름 아닌 성경聖經이란 말이다. 귀에서부터 눈, 코, 입을 뚫는 것이다. 이렇게 이목구비가 뚫리면 주역』이나 논어를 읽을 필요가 없다. 예수가 어찌 논어를 읽고 주역을 공부했겠는가. 이목구비가 뚫리면 그걸로 족하지 꼭 주역이나 논어를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손자의 병법이다. 이목구비가 뚫리면 읽어보지 않고도 다 되는 것이지 책을 꼭 보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도 보지 않고서 믿어야 진짜지 성경을 보고서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진짜라고 하기 어렵다. 믿음으로 말하면 옛날 시골 할머니 믿음만큼 좋은 믿음이 없다. 성경 한 번 읽지 않은 할머니의 믿음을 어떤 목사인들 따라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경을 안 보고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지 성경을 보고서야 믿는다는 것은 보지 않고 믿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백 번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라는 손자의 말이 참 좋다. 주역을 보지 않고서 주역에 통해야 진짜지 보고 나서 통하는 것은 그것보다 못하다.
주역이란 경經이다. 길을 내자는 길 경經이다. 귀에도 길을 내고 눈에도 길을 내고 코에도 길을 내고 입에도 길을 내서 모두 통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경이란 경은 모두 길을 내자는 것이다.사람은 길을 가야 한다. 길을 가야 사람이지 길을 가지 못하면 짐승이다. 사람이 가는 길을 옛날부터 인도人道라고 했다. 인도人道는 천도天道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천도와 인도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공자의 사상이요 소크라테스의 사상이다. 주역의 내용도 같다. 주역은 우리가 이미 다 아는 것이지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새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을 다시 복습해서 내가 정말 제대로 알았는지 성찰해 보고 자기를 바로잡아 보자.